드루실라
드루실라
행 24:24-27,2011.04.10.늘찬양교회
구약의 가장 악독한 여인을 꼽는다면 당연히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을 손꼽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에서 가장 악독한 여인을 꼽는다면 누구일까요? 그녀는 바로 총독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입니다 그런데, 이 두 여인을 살펴보면 우연찮게도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을 배역한 악독한 여인이라는 것이요, 둘째는, 남편을 도와주고 사랑해야 할 아내가 오히려 남편을 이용하여 악을 도모하는 일에 앞장서므로 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렸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들의 남편이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라는 사실입니다. 넷째로, 이세벨은 엘리야 선지자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를 죽이려 하였으며, 드루실라는 사도 바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를 죽이도록 감옥에 보내었습니다. 다섯째로, 이들의 마지막 죽음이 비참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세벨은 창에서 떨어져 죽으므로 굶주린 개들이 와서 그 시체를 다 먹어 치웠으며, 드루실라는 베스비우스 화산이 폭발하여 용암 속에 매몰되어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Ⅰ. 드루실라는 어떤 여인인가?
여기서 우리는 좀더 구체적으로「드루실라」는 어떤 여인이었는가?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드루실라(Drusille)는 드루시시의 애칭으로 ?이슬에 젖은?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그녀는 교회를 최초로 핍박했던 유대와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막내딸로서 다른 자매들 보다 훨씬 아름다웠습니다. 그녀는 A.D 44년 6C말 되던 해에 부친에 의해 동부 소아시아에 위치한 코마게에(Commagene)태자 에비파네스라는 사람과 약혼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비파네스가 유대교의 입교를 거부하므로 결혼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그의 아내 아그립파 Ⅱ세가 수리아의 작은 국가인 에메사(Emesa)의 왕 아지스(Azizus)와 결혼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결혼 후 1년, 그녀가 16세 되던 해에 노예 태생인 벨릭스의 유혹에 빠져 다시 재혼을 하였으며, 그 후 로마 식민지 총독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이때, 벨릭스는 드루실라의 아름다운 미모에 빠져 아토모스(Atoms)라고 불리는 구브로 마술사의 도움을 얻어 남편 아지스를 떠나 자기와 결혼해 줄 것을 수차에 걸쳐 설득한 결과 결혼에 성공한 것입니다. 결국, 드루실라는 벨릭스를 세 번째 남편으로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정리하면, 드루실라는 유대 왕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막내딸로써 굉장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으나, 에피파네스와 결혼에 성공하지 못하고 아지스 왕과 결혼하였으나 억지로 한 결혼이기에 결국 벨릭스의 유혹을 받아 그의 아내가 된 것입니다.
이렇듯 ‘드루실라’는 미모의 여인으로 높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 번씩이나 남자를 바꾸면서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불안한 요소를 가지고 자신에 대한 불만을 타인에게 무력적으로 보복하는 과정을 통하여 내면에 담겨져 있는 자신의 열등감을 잘못 전이 시켜가는 여인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행복한 결혼의 요소가 결코 외부에 의한 것보다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자발적인 아름다움에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Ⅱ. 드루실라와 사도 바울과의 만남
로마의 총독 벨릭스가 가이사랴에 있을 때(행 23:22-23) 사도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 40여명의 음모를 바울의 생질(甥姪)이 알아차리고 바울에게 “유대인들이 매복하여 당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위기상황을 알렸습니다.
이에 바울은 한 백부장에게 청하여 “나의 생질을 천부장에게 면대케 하라 저가 중요한 말을 할 것이다.”고 보고함에 천부장과 생질과의 면담이 성사되었고 천부장은 생질의 증언을 통하여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유대인 40여명이 바울을 죽이려고 길에서 매복하고 있나이다.”(행 23:21)는 사실을 알고 치안의 책임을 맡은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바울을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 벨릭스에게 안전하게 보내어 정식재판을 받게 하고자 한적한 시간인 밤 9시경에 보병 2백 명과 마병 칠십 명과 창군(槍軍) 이백 명을 호위케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음을 알리는 편지를 써서 총독 벨릭스에게 보내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과 총독 벨릭스 와의 만남이 성사되게 되었으며 바울은 그를 송사한 유대인들이 오기까지 닷새 동안 안전하게 가이사랴에 은신할 수 있었습니다. 닷새 후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더둘로라는 한 변사(辯士)를 데리고 와 총독 벨릭스에게 바울을 고소하였습니다. 고소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染病)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魁首)라 저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의 송사 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행 24:5-8)
이에 대하여 바울은 행 24:10-21까지에 기록된 말씀처럼 변론을 하게 됩니다.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가지 열이틀밖에 못되었고, 나는 성전에서 아무와 변론하거나, 회당과 성중에서 무리를 소동케 한 적이 없습니다. 나 역시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하나님과 사람과 내 양심에 대하여 조금도 거리낌 없이 전하기를 힘쓸 뿐, 어떤 결례나 소동을 일으킨 적이 전혀 없습니다.?
벨릭스는 사도바울에게서 어떠한 잘못도 찾을 수 없는 고로 자신에게 재판을 위임한 천부장 ‘루시아’를 불러 그의 증언을 청취한 후에 바울을 처결하기로 하고 감옥에 임시 구류시켜 두었습니다. 수일 후에 벨릭스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그의 아내와 더욱더 자세히 듣고자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의 믿는 도리에 대하여 듣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바울과 벨릭스 그리고 그의 아내 드루실라와의 만남이 성사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두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義)」와 「절제(節制」에 대하여 그리고 장차 있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열정적으로 강론(講論)하였습니다. 이때 벨릭스와 드루실라의 반응은 25절에 있는 대로 복음을 듣고 심히 “두려워하였습니다.” 저들은 과거의 음탕하고 잘못된 일로 인하여 마음에 큰 찔림을 받게 되었고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된 것입니다. 벨릭스와 드루실라는 정말 하나님 앞에 회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최고의 스승이라고 일컬어지는 랍비 가말리엘 밑에서 말씀을 배워 율법에 정통해 있는 대학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도시를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였고, 바울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친히 기록한 13권의 책은 모두 신약성경이 되었습니다. 대학자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한 훌륭한 설교자로부터, 성경의 저자이기에 성경의 저자로 부터 직접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매우 큰 영광이고, 좋은 기회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 앞에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마음으로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26절).
벨릭스가 이렇게 바울을 자주 불러 이야기를 들은 것은 바로 드루실라의 청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분명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바울로부터 하나님의 의와 절제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들었기 때문에 더 더욱 불안하였습니다. 마치 성도들이 교회에 안 나오면 뭔가 큰 어려움을 당할 것 같고 해서 불안감에 1달에 한번 교회에 눈도장 찍으러 나오는 것처럼 드루실라도 바울의 전하는 메시지가 마음에 들어서 바울을 자꾸 청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이 꼭 심판을 받을 것 같은 두려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렇게 바울을 감옥에서 끌어내어 말씀을 들으면 바울을 돕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바울을 석방해달라고 보석금이라도 낼 것 같은 기회를 얻고자 불러내어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수차례에 걸쳐 복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그의 일행에게서 어떤 물질도 얻을 수 없게 되자... 이들은 바울은 2년 동안이나 감옥에 수감시켜놓았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에게서 마음이 떠난 사람들과 돈 욕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아무리 복음을 많이 들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릴 뿐 전혀 변화될 조짐이 없습니다.
빌리그레함 전도대원중 단. 피아트(Dan Piatt)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피아트는 큰 사업가와 이야기를 할 때에,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업가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말할 테니 들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업가는 “잘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듣고 싶습니다. 기대가 됩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 지금 백 만 불짜리 사업 계약을 하기 위하여 두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계약한 한 뒤에, 오늘 밤, 당신에게 전화할 터이니 그때 꼭 생명의 길, 구원의 길에 대하여 말해 주십시오.” 피아트는 집에 와 사업가의 전화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한 밤중까지 기다렸지만 전화가 오지 않았습니다. 새날이 밝았습니다.
피아트는 조간신문에서 그 부자가 지난밤 9시30분경에 병원에서 죽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는 자세한 내용을 알려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의 임종을 지켜본 가족들이 말하기를 “그 분은 죽기 전에 내가 왜 그걸 못했을까? 내가 왜 그걸 못했을까?” 하는 말을 되풀이 하다가 숨이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의 기회가 언제나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언제 울려 퍼질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서야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하였습니다.
지금은 자다가 깰 때입니다. 우는 사자 마귀가 삼킬 자를 찾고자 두루 찾아다니고 있는 위기의 때입니다. 이때에 우리가 깨어 하나님을 찾고 찾을 때 우리는 다시금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덧입을 수가 있습니다. 지금이 곧 회개와 헌신의 결단을 할 때인 것을 믿고 아직까지 주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시지 못한 분은 이 자리에서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특별히 지금은 지구온난화로 인하여 각종 재해가 전 세계를 강타하므로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고 있는 때이므로 한 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 중 누가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 앞에 설 지 모릅니다. 그때에 우리는 부끄러움 없는 자로 설 수 있도록 주님 안에 바른 믿음을 가지고 생명 안에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Ⅲ. 드루실라의 잘못과 죽음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낱말에 관심을 갖고자 합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24장 22절에 나오는?벨릭스가 이 도(道)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한 것입니다. 벨릭스는 로마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유대인들보다 더 많이 더 자세히 알고 있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그의 아내 ‘드루실라’ 로부터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스도에 대하여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드루실라’가 유대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드루실라’는 성경에 대해서도 익히 여러 부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편 되는 벨릭스에게도 가르쳐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하였기에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행 24:22)한 것입니다. 그러나 드루실라는 바울을 죽이려는 40명의 유대인과 별로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지식으로만 알뿐 행함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물질과 정욕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1:23)
그렇다면 살아있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살아있는 생명은 움직이는 것처럼 살아있는 믿음은 움직입니다. 기생 라합을 아십니까?
라합은 여리고의 기생이며 창기였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라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정탐꾼을 살려내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그녀의 믿음을 나타내었습니다. 이렇듯 믿음은 삶의 현장에서 구체화 될 때 그 믿음은 온전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드루실라는 남편의 권력을 이용하여 바울을 감옥에서 석방시켜 자유롭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힘과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믿음을 활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편의 권력을 이용하여 바울로부터 물질을 취하려고 만 애썼던 모습은 죽은 믿음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때문에 자기 자신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직도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여 물질에 지배를 당하고 쾌락에 지배를 당하고 환경에 지배당하는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세상의 허무한 것들을 움켜잡고 아까운 시간들을 낭비하지 말고 이제라도 내가 믿는 하나님을 드러내놓고 전하며 봉사하며 섬기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한 가지 여기서 관심을 갖고 싶은 것은 만일 벨릭스가 그의 아내 드루실라와 동석치 않고 벨릭스 혼자였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아마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드림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울러 바울도 석방시켜주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벨릭스의 구원의 여정에 드루실라가 방해자로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드루실라의 단점은 세 번의 결혼의 과정 속에서 얻어진 불안감과 열등감입니다. 그리고 분노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 안 믿던 남편이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교회를 다니고 부인보다 더 열심히 충성하려고 할 때 괜한 트집과 불평을 터뜨려 남편이 교회생활과 믿음 생활에 충실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를 봅니다. 이 같은 경우는 교회와 세상 간에 두발을 담그고 문화적인 신앙생활을 해오던 아내에게 남편의 커다란 회개의 대변화는 오히려 자신에게 신앙적 삶의 부담이 되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나오는 행동입니다.
우리는 어설프게 예수님을 믿어서는 확실한 구원과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과 평강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두 부부가 함께 주안에서 확실하게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생활도 힘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그리고 한 가족이 한 자리에 앉아 예배드리는 기쁨은 드려 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영적부요의 행복감입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사람의 불 회개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파동 되고 그 파동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불행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드루실라가 총독의 아내라는 위치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큰 유익을 얻음은 물론 복음의 판도도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죄를 회개치 않으므로 사도 바울을 죽게 하였고 복음의 빛이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드루실라는 이 사건 이후에도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회개할 기회가 있었건만 끝까지 회개치 않으므로 결국 그녀는 베스비우스 화산 폭발 때 용암에 묻혀 죽었고 벨릭스와 두루실라 사이에 난 아들 [아그립바]도 죽었습니다.
한 사람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모든 가족과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이 있는가? 하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의 노예가 되었고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 비근한 예가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 땅에 죄와 죽음이 들어 왔고 둘째 사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들어 왔습니다.
성경에 보면 소극적인 태도에 대하여 심각한 경고가 나옵니다. 신앙생활을 미지근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성경은 말해줍니다.
요한계시록 3장 14~16절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여러분, 신앙생활을 미지근하게 하는 것이 점점 더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라앉히는 것입니다. 도무지 감격스러운 사건이 없습니다. “왜 내 신앙생활에는 아무 감동이 없고 간증이 없는가?” 미지근하게 신앙 생활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머뭇거리는 것은 성령을 거스른 것입니다. 핍박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영원한 심판이 꼭 핍박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순종하는 자에게도 있습니다. 탕자는 깡패나 방탕자만 아닙니다. 존경받는 자 중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부담스러울 때, 그 만큼 나 자신이 육신에 매여 있다는 증거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벨릭스와 드루실라와 같은 실수와 오류를 범하지 말고 이 시간 내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므로 “이 부족한 사람을 통하여 내 가정과 이 나라가 변화되게 하소서?기도하며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