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 붕괴의 기적-(기적강해 5)
◉ 바벨탑 붕괴의 기적 ◉
창 11:1-9,2014,03.02.늘찬양교회
Ⅰ. 바벨탑의 발굴
바벨탑을 처음 발굴한 사람은 독일의 ‘콜데바’입니다. 그는 1913년 바빌론을 발굴하던 중 도시의 중앙에 있는 거대한 탑 유적의 토대에서 기원전 229년에 새겨진 점토판을 발견했는데 점토판에 따르면 탑은 7층이었고 그 위에 사당이 설치돼 있었다고 합니다. 아울러 바벨탑을 세우는데 모두 8천5백만 개의 벽돌을 사용했으며, 건물의 규모는 가로와 세로, 그리고 높이가 약 90m에 달했다는 점이 밝혀졌습니다.
이렇듯 바벨탑이 거대한 규모를 갖게 된 것은 바빌론이 다른 도시들을 압도할 정도로 정치․경제의 중심지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바빌론의 외곽 둘레의 길이는 16km에 이르렀고, 폭 27m에 달하는 도시의 내벽을 따라 경계 탑들이 서 있었으며, 도시 한편으로는 유프라테스 강이 흘러 천연의 방어선을 이루었습니다. 도시 안에는 화려한 궁전이 수없이 지어졌고, 한때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던 공중정원도 성안에 있었습니다. 바벨탑은 기원전 479년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철저히 파괴됐으며 알렉산더 대왕이 바빌론을 점령했을 때 폐허가 된 바벨탑을 재건하려 했지만, 너무나 거창한 사업이었기 때문에 중도에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1만여 명의 인원이 2개월 간 투입된 후의 일이었습니다.
Ⅱ.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
노아의 대홍수 사건이후 ‘ 셈, 함, 야벳’은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곳에서 자녀를 낳았고 그 자녀들은 또 자녀를 낳아서 오늘의 인류를 만들었습니다. 창세기 10장 32절을 보십시오.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 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 인류는 노아의 세 자녀를 중심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11장에서는 피부와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열국이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으로 인류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11장 1절부터 10절까지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그룹에 대해 말합니다. 이들이 바벨탑을 쌓은 주인공들입니다. 두 번째는 11절부터 32절까지로 ?셈의 후예?들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룹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셈의 후예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던 ‘함과 야벳 족속’으로 인류가 나뉘었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그룹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아니하며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도 싫어합니다. 그들은 생각이 허망하여져서 하나님의 형상을 썩는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세상은 잘못된 신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그룹들 가운데 함의 자녀인 구스의 계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계보 안에는 ‘니므롯’이라는 영웅이 있었는데 ‘니므롯’은 ‘시날 땅’에 살면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주변에 바벨의 문화가 꽃 피우도록 한 장본인입니다. 더 나아가 바벨탑을 건설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한 사람입니다(창 10:9-10).
1. 언어가 하나였던 세대
창세기 11장 1절을 읽겠습니다.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노아 홍수 이전에는 언어가 하나였습니다. 단어와 문법이 하나였습니다. 아마 그들은 셈족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썼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홍수이전의 지명이나 인명이 모두 히브리어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성 중에 하나가 언어입니다. 언어는 하나의 사상과 생각을 만듭니다. 사상이 없는 언어는 없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아직도 이 인간의 언어와 동물의 짖는 소리의 차이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겨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끊임없이 동쪽으로 이동했습니다. 그 중에 가인의 후예들이 동쪽으로 가다가 만난 곳이 시날 땅입니다. 오랜 여행 끝에 처음으로 사람이 살만한 곳을 만난 것입니다. 그들은 시날 땅에 머무르기로 하고 그곳에서 그들의 이상사회를 세우려는 야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인간은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여기고 살기 시작했던 곳이 바로 시날 땅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빌론 문화가 만들어 졌습니다.
2. 벽돌과 바빌론 문화
창세기 11장 3절을 보십시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바벨론 문화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벽돌을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토기문화에서 벽돌을 만들어 낸 것은 천지가 개벽할 만큼 놀라운 사건입니다. 요즘 우리 시대의 위대한 발견은 바로 컴퓨터의 제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싫든 좋든 컴퓨터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컴퓨터 즉 인터넷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컴퓨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광범위하게 인간의 삶과 사고구조를 바꾸어놓고 있습니다.
컴퓨터의 발견과 같이 당시 벽돌의 발견은 대단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벽돌이 없었을 때의 사람들은 동굴 속이나 나무 위에 살거나 돌을 옮겨와서 지은 집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돌은 운반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돌집에 산다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날 땅에서 많은 흙을 만나게 되었고 그 흙을 불에 구웠더니 아주 단단하고 쓸 만한 벽돌과 물건들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 역청을 발견해서 누구든지 집을 견고하게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대혁명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점토로 벽돌뿐만 아니라 그릇도, 항아리도 만들어서 쓰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시대에 흙으로 무엇을 만든다는 사건은 당시의 문화적인 혁명이었고 그들의 사고 구조를 변화시키는 엄청난 발견이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자기들의 지혜와 기술로 인간의 위대함을 예찬했을 것입니다.
인간은 핵을 만들었습니다. 핵은 전력을 공급하고 인류의 복지와 평안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서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는 좋은 도구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전쟁을 위해 핵무기를 사용하면서 지금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핵무기의 위협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북한에게 미국이 벌벌 떠는 이유도 저들이 핵을 가지고 어떻게 어떠한 무기로 발전시켜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술문명의 한계입니다. 마치 사람들이 벽돌문화를 단순히 생활의 편리한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벽돌문화를 현대적으로 적용시켜 보면 과학문명의 발달로 핵무기를 만들고 생명과학의 발달로 ‘복제 인간’을 만든 것으로 대비시켜볼 수 있습니다. 핵무기를 비롯한 기타 많은 문명의 유산들이 인간의 복지와 행복과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결과는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핵이 인간을 위협하는 무기가 되었듯이 모든 과학기술문명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인간을 종으로 만들고 비(非) 인간화하며 행복을 앗아갑니다. 자동차가 편리하고 좋지만 자동차 때문에 생기는 공해와 교통사고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사회문제를 유발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생명과학의 발달로 복제 양 ‘둘리’에 대한 발표 이 후 이미 어느 곳엔가?복제 인간?이 만들어져 시험대상 중에 있다는 뉴스 보도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유전자 조작을 한 콩을 동물들이 먹고 구제역과 같은 무서운 질병들을 일으켜 대량 도살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바라볼 때 문명의 이기는 이기가 아니라 악기입니다. 오히려 인간을 빨리 죽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벽돌의 발견은 인간의 문명과 사회세상을 편하게 아름답게 윤택하게 만들었으나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비본질적인 것으로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것이 바벨탑의 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바벨탑을 세우게 된 동기와 과정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Ⅲ. 바벨탑을 세우는 목적
그들은 벽돌로 탑을 쌓기로 했습니다. 인간이 편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탑을 쌓은 이유에 대해 창세기 11장 4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첫째, 하늘 끝까지 가기 위하여 쌓고자 하였습니다.
“성(城)과 대(臺)를 쌓자” 그런데 “하늘에 닿도록 하자.” 그랬어요. 왜 하필이면 꼭 하늘에 닿아야 할까요? 적당히 지어도 될 텐데, 그 이유는 홍수에 대한 대비책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기억 속에는 조상들이 홍수 때문에 다 죽었다는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홍수가 어디까지 올라 왔는가하면 아라랏 산꼭대기까지 물이 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힘을 모아서 성을 짓고 탑을 쌓되 아라랏 산꼭대기보다 더 높은 성(城)과 대(臺)를 쌓으면 홍수가 나도 대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 깊은 의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발심입니다. "왜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인 사람을 홍수로 멸망시켰단 말인가? 언제고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또 다시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자...하나님이 쏟아 부었던 아라랏 산의 높이 보다 더 높이 세우면 하나님의 심판이 미치지 못하겠지...그런 후에 이제는 평안히 지내자“하며 육신 적인 안주욕(安住慾)을 따라 바벨탑을 쌓은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이름을 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이름을 내고..." 사람들은 당면한 문제 해결의 차원을 넘어서 이제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를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인가? 를 보여주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무한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뭐 하러 하나님 앞에 나가서 머리를 조아리고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며 그 따위 치사스러운 청원을 해야 하는가? 말이다. 우리에게 닥친 문제는 우리 인간 스스로가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이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여 인간의 위대함을 드러내자! 내 이름을 세상에 알리자......
고(古) 정주영 회장이 소 떼를 몰고 북한을 다녀왔습니다. 말은 남북통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그 속에는 “내 이름을 내자”는 자신의 교만함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런 교만함이 결국은 하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지옥에 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현대인들 속에 깊이깊이 잠겨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셋째,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고독함과 외로움이 있는 무서운 사회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흩어짐을 면하자..." 시날 땅에 왔을 때 그들이 발견한 구호가 있습니다. 바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입니다. 인간이 발견한 구호입니다. 이 구호는 지금도 멋지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 하라.”(창 9:1)고 말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우리 방법으로 하자 우리 힘을 모아 단합해서 세계제국을 만들어 내자. 그래서 다른 족속을 다스리게 하자. 고독과 절망이 없는 이상사회를 건설하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가 전혀 없는 사회의 건설, 그것이 그들의 목표였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을 합니다. 교만과 불신앙에 입각한 반항적 시도, 이것이 바벨탑의 정신입니다.
Ⅳ. 바벨탑이 무너지는 기적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바벨탑과 불의한 목적을 보시고 가만히 계시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1장 5절에 있는 대로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바벨탑을 쌓는 일은 심각했습니다. 바벨탑을 쌓는 것을 그대로 놔두면 구원의 길을 막아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바벨탑을 쌓는 일을 막으셔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의 죄를 홍수로 심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물로 인류를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물로 심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인간의 죄를 막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다름 아닌 언어의 혼잡 즉 언어의 분열로 주어졌습니다.
창세기 11장 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축복 중에 가장 큰 축복은 언어와 발음입니다. 홍수로 세상이 심판을 받은 후에도 언어의 복은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언어의 복은 곧 의사소통의 복입니다.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면 서로의 생각이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1. 언어의 분열은 저주
부부가 싸우는 이유는 대화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좋은 동기를 가지고 대화를 시작하지만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다 보니 결국은 다투게 됩니다. 한 몸인 부부도 대화에 실패하면 다투고 심지어 갈라섭니다. 하물며 국가와 국가 간에는 어떠하겠습니까?
미국과 이란이 지금은 핵 문제의 해결로 약간은 그 거리가 좁혀진 것 같지만 아직도 큰 거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남북한 간에도 대화가 단절되었다고 요 며칠 전 고위급 회담이 성사되며, 또 남북이산상봉도 성사될 전망이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한 민족이면서도 단절된 것은 남과 북의 대화가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의사소통만 중단시킨 것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들 간에 사상과 활동도 단절시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바벨’은 ‘혼잡케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혼돈의 존재입니다. 역사 역시 혼돈의 연속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기까지 혼돈과 갈등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면 질서가 생기며 대화가 생기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천국은 언어와 말이 하나인 나라입니다. 천국의 말은 곧 사랑이며 방언이며 기도입니다. 이것으로 하나를 만들어 주십니다.
2. 온 지면에서 흩어버리셨다(9절).
8-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결국 인간들은 대화의 단절로 인하여 성 쌓기를 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가 자신의 길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바벨탑을 쌓는 인간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바벨탑 안에서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과학과 예술 철학 능력만을 믿습니다. 이제는 유전자 조작을 통하여 복제 인간까지 만들어 하나님의 창조영역에 까지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속에서는 돈과 기술과 쾌락만이 보입니다. 여기에서 나와야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은 바벨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바벨탑을 쌓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가야할 길은 바벨탑이 아니라 성령이 임했던 마가의 다락방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나라와 언어와 천국이 회복될 것입니다.
Ⅴ. 바벨탑의 영적 교훈
1. 하나님의 동의(同意)를 얻으라.
“인간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함을 보시고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듯이”(창 6:5) 타락한 인간은 홍수의 심판을 받은 후에도 계속하여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여기려고 하였으며 또 이번에도 바벨탑을 통하여 인간의 우수성을 알리고 인간 나름대로 피할 길을 얻고자 노력하였지만 하나님의 동의 없이는 모든 것이 허사 일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계획하고 추진함에 있어 먼저 하나님의 동의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2. 죄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알라.
노아의 홍수에서도 그렇고 바벨탑의 붕괴에서도 그렇고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에서도 그렇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선과 악에 대하여 분명하게 심판하십니다. 심판의 방법은 천사를 통해서도 하시지만 직접 악에 대해서도 심판하십니다. 죄가 저질러지는 장소는 때때로 심판의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지 못하고 더욱 악으로 악으로 모여듭니다. 그래서 그 악은 강한 범죄 집단을 만들고 그 집단은 칼과 무기와 성적타락으로 세상을 정복해가며 아성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악이 강하고 힘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3. 하나님의 통치와 지도를 기대하라.
하나님은 뛰어난 통치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들을 눈동자같이 지켜보시고, 간섭하시고,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의지와 자만과 야망 속에 자기 자신을 있게 말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를 받으려고 애써야 합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나’라는 자아가 높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 나의 삶 전역에 실현될 수 있게 하는 일이요, 나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이 높이 드러나게 하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날마다 말씀과 기도의 생활화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하고, 하나님의 지도와 인도를 바라고, 성령님께서 우리를 주의 은혜와 능력으로 강건하게 채워주사 아름답게 인도해 주실 것을 바라고 믿음으로 성령 충만을 간구하며 나가는 신앙생활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