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찬양 2006. 11. 15. 09:14

 지도자의 실력과 겸손
  - 송인규  -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 지도자가 필수적임은 ‘지도력’(leadership, administration)의 은사가 언급된 것(롬 12:8; 고전 12:28)이나, 공동체 구성원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앞장 서는 사람들이 있었음(행 20:28; 살전 5:12; 딤전 5:17; 히 13:7)을 보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마땅히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실력’이란 일반적인 의미의 단어로서 지도자의 역할이나 기능을 다할 수 있는 기본적인 능력(ability)이나 기량을 뜻한다.

이렇듯 지도자 - 그가 신앙 공동체에서 어떤 종류의 지도자이든 - 는 자신의 지도력 발휘에서 불가피하게 실력 구비를 요구받는다. 그러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는 실력뿐 아니라 겸손이라는 덕목도 목마르게 기대하게 된다. 문제는 두 가지 항목을 함께 보유하고 있는 지도자들이 의외로 적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네 가지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다.
A. 실력도 없고 겸손하지도 않은 지도자들.
B. 실력은 없지만 겸손한 지도자들.
C. 실력은 훌륭하지만 겸손하지 않은 지도자들.
D. 실력도 뛰어나고 그지없이 겸손한 지도자들.

A와 B의 유형은 논외 대상으로 여기고 취급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범주는 C의 유형에 속한 지도자들이다. 이들을 보면 실력은 뛰어나고 훌륭한 반면에, 인격적 훈련이 덜 되어 있어서 겸손과 상당히 먼 거리에 있음이 드러난다. 어떻게 하면 이들을 D의 유형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먼저 이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겸손’이 무엇인지 제대로 밝히는 일이다. 필자가 겸손이라고 할 때 그것을 ‘어떤 인격적 대상 앞에서 자신의 가치(worth, 신분, 조건, 상태, 업적, 특질 등)를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걸맞은 언행이나 내적 자세를 취할 줄 아는 기독교적 덕목’으로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자기 비하(self-abasement), 예의상 거짓 겸손(겉으로 겸손한 척하지만 속으로 아닌 것), 수단적 겸손(더 큰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겸손을 추구하는 일) 등은 처음부터 배제된다.

그런데 과연 실력을 갖췄으면서도 진정한 의미에서 겸손할 수 있을까? 실력을 갖췄다는 것은 분명 자신이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는 말인데, 어떻게 그렇지 않은 것처럼 - 자신에게 그런 장점이 없는 것처럼 말하든지, 아니면 그런 장점이 전혀 장점이 아닌 것처럼 여기는 척 하든지 - 자신을 낮춘다는 말인가? 이렇게 하는 것은 결국 거짓 겸손이 아니겠는가?

또 이런 거짓 겸손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장점을 인정하고 내세우면, 이것도 겸손의 경계를 넘어 교만의 땅으로 이주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실력이 있는 지도자들에게 겸손을 운운한다는 것은 그저 ‘폼만 잡다가 끝나는’ 형식적 유희로 여겨지게 된다.

실력을 갖춘 지도자들이 직면한 이런 딜레마(교만과 거짓 겸손)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목양, 가르침, 다스림의 은사(이것들이 실력을 갖추도록 해 주는 구성 요소인데)가 뛰어난 K 목사가 있다고 하자. 그는 교회 개척 15년 만에 교세 측면에서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건강한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킨 목회자로 알려져 있다.

최근 들어 ‘교회 성장’하면 K 목사의 새로운 모델에 궁금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과연 K 목사는 진정으로 겸손할 수 있을까? 그런데 K 목사가 지금과 같이 실력이 뛰어난 목회자로 자리를 잡으려면,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사항을 충족시켜야 한다.

⑴생명의 유지: 무엇보다 생명이 보전돼 있을 때에만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다.
⑵은사의 보유: 목회 활동에서 능력을 발휘하려면 그에 필요한 은사(목양, 가르침, 다스림)가 갖춰져 있어야 한다.
⑶조건의 합치: 능력 발휘나 업적 수립이 가능하려면, 내적 조건들(건강, 정신력, 컨디션, 창의력, 추진력 등)과 외적 여건들(좋은 동역자들의 영입, 최적 조건의 예배당 확보, 지역 내 다른 교회들의 실정, 교우들의 이동 등)이 마련돼 있어야 한다.

만약 상기 항목들 중에 어느 하나라도 빠진다면, K 목사의 실력 발휘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⑴이 결여돼 있다고 하자. 죽은 자는 아무런 활동도 할 수가 없다. ⑵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K 목사가 생명이 유지돼 있다고 해도 능력 발휘에 필요한 은사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면 그의 목회 활동은 건실한 열매를 맺지 못했을 것이다. ⑶은 어떤가? 마찬가지다. ⑴과 ⑵가 있어도 그것들이 실현될 수 있도록 내·외적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았다면(예를 들어 K 목사의 건강이 악화되었든지, 좋은 평신도 지도자들이 참여하지 않았다든지, 그 지역에 대형 교회들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든지) K 목사의 실력은 결코 입증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사항들의 충족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우선 ⑴과 관련해 생명의 유지를 보라.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 4:14~15).

또 ⑵는 어떤가?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7)
심지어 ⑶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단 4:35).

바로 이런 점에서 K 목사는 교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 거짓 겸손을 꾸밀 필요도 없고, 다른 한편으로 자기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뤘다는 식으로 교만할 필요도 없다. 그는 진정으로 겸손할 수 있는 것이다. 실력이 뛰어나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겸손한 지도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한국 교회는 이런 목회자들을 목말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