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성서신학

[스크랩] 성서 고고학-2 (구약시대-2)

늘찬양 2007. 8. 23. 06:59
성서 고고학-2 (구약시대-2)

성서 고고학-2 (구약시대-2)
 

* 목차 (구약시대-2)

 

12. 출애굽

13. 여리고

14. 다윗과 골리앗

15. 앗시리아의 침공

16. 히스기야 터널과 실로암 비문

17. 바빌론과 다니엘

18. 페르시아와 그리스

19. 로마와 기독교

 

 

 12. 출애굽

 

a) 비돔과 람세스

 

영국의 이집트 탐사재단은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에서 흙벽돌로 만들었다는 국고성 비돔을 찾기 위해 1882년
설립되었고,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 북부에 정착했던 곡창지대인 고센 땅을 발굴하였습니다.


스위스 출신의 에두아드 나빌은 고센 땅이 삼각주 지방에서 가나안과 가까이에 있는 북서지역임을 알아냈고,
이 곳의 유적지들을 조사한 끝에 텔 엘-마수쿠타를 비돔으로 여기고 발굴을 시작했습니다.

 

나빌은 이 곳을 발굴하여 흙벽돌로 만들어진 창고의 흔적을 발견했고, 이곳에서 출토된 비문에는 고대 이집트어로
'페르-아툼 체쿠', 즉 '체쿠에 있는 태양신 아툼의 신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어 '체쿠'는 히브리어로는 '숙콧'이라고 발음될 수 있고, 숙콧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출발한
장소이기 때문에 그는 이 곳을 비돔으로 결론지었습니다.

 

출애굽기 13/20 그들이 숙콧에서 그들의 여정을 시작하여 광야의 끝에 있는 에담에 진을 쳤는데

 

창세기 47/11 요셉이 파라오가 명령한 대로 그의 아비와 형제들을 정착시켰고, 이집트 땅에서 그들에게 소유를
주었으니 가장 좋은 땅 라메세스의 땅을 주었더라.

 

비돔과 짝을 이루는 국고성 '람세스'는 원래 람세스 2세가 건설한 하이집트의 수도 '피람세스'를 말하며,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된 요셉의 가족이 머문 곳입니다.


이 곳은 람세스 2세의 고향이었으며, 기원 전 13세기에 그가 건설한 화려한 왕도였지만 지금은 폐허가 되어 1970년대
이후 그 위치가 확인되었습니다.

 

독일의 이집트 학자인 에드가 푸쉬는 1987년부터 나일 강의 지류 펠루시움 강변에 위치한 킨티르라는 곳에서
대규모 궁전 유적지를 발견하여 이 곳이 국고성 람세스임을 주장하였습니다.


나빌과 푸쉬 같은 고고학자의 노력으로 출애굽의 출발지인 국고성 비돔과 람세스가 발굴됨으로 출애굽 사건
증명에 기여를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11 그리하여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관장할 공사 감독자들을 세우고, 그들에게 짐을 지워 그들을
괴롭히니라. 그들은 파라오를 위하여 국고 성읍들로 피돔과 라암셋을 건축하더라.

 

 

 진흙 벽돌

 

b) 홍해 바다 속에서 발견된 이집트 전차 바퀴

 

WYATT(http://www.wyattmuseum.com/index.htm)라는 성서 고고학 협회에서 출애굽 당시 홍해에 수장된 이집트
전차부대의 유물을 발견하였습니다.


1978년에 홍해에서 얕은 지점을 찾아 탐사하던 중 산호초로 뒤덮힌 곳에서 전차 바퀴를 비롯한 전차부대의 유물을
발견하였습니다.

 

 

 

 

 

홍해에서 발견된 것은 8개의 살을 가진 바퀴인데, 이집트 전차의 역사와 대조한 결과 출애굽 당시와 일치하는 이집트
18번째 왕조의 바퀴임이 밝혀졌습니다.

 

출애굽기 14/6~7 그가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그와 함께 데리고 가니, 그가 선별한 육백 대의 병거들과
이집트의 모든 병거들을 거느렸으며 병거마다 대장들이 맡았더라.

 

 

 

 

 

b) 출애굽 여정

 

애굽에서 시나이 반도를 지나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는 가장 일반적인 길은 블레셋 사람의 길 (출 13:17) 입니다.
그러나 블레셋 길에는 막강한 애굽의 군사력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군사진지인 '많은 믹돌들'이 있었습니다.
이 군사 진지는 시나이 반도로부터의 침입을 막고 대상로를 보호하거나, 팔레스타인이나 아라비아 반도로의 정벌을
위한 군 주둔지입니다.


이 길을 따라 가면 불과 40일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민족의 위험과 시내산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 지름길을 포기합니다.
따라서 모세의 출애굽은 시나이 반도를 남행하는 우회로를 택하게 됩니다.


고센 땅을 출발한 이스라엘 민족은 홍해 변을 따라 남쪽의 험한 산악지역을 거쳐 내려 가게 됩니다.

1972년부터 10년 동안 이스라엘 벤구리온 대학의 오렌 교수는 이집트의 실레에서 이스라엘의 라피아까지 210km
구간을 발굴한 결과, 무려 150군데에 달하는 고대 야영지와 정착지를 확인하였습니다.


출애굽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 중에는 저장능력이 40톤에 달하는 곡식창고와 유물, 육중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들이 모래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c) 에담 광야

 

'에담'의 뜻은 '방어벽' 이고, '수르'의 뜻은 '성벽'이다. 같은 지역을 표현하고 있는 이집트어와 히브리어이다. 이 지명의 유래는 이집트 본토로 유입하는 유목민들이나 이방인들을 제지하기 위하여 현재의 수에즈 운하지역을 중심으로 길게 방어벽(믹돌)을 쌓아 두었던 데에서 유래한다. 현재 '엘림 광야'로 부르고 있는 이 지역의 지형적인 특색은 거의 풀이 자라지 않는 벌판이 펼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숙콧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진쳤고 에담에서 발행하여 바알스본 앞 비하히롯으로 돌아가서 믹돌 앞에 진쳤고 하히롯 앞에서 발행하여 바다 가운데로 지나 광야에 이르고 에담 광야로 삼 일길쯤 들어가서 마라에 진쳤고 (민 33:6~8)

블레셋 사람을 크게 도륙하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 틈에 거하니라 (삿 5:8)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관할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삿 5:11)

 

d) 마라

 

'쓰다'는 뜻. 홍해변에 위치한 까닭에 물이 염수 (소금물)였을 것이다. 오윤무사를 마라로 간주 하기도 하지만, 이 지점 보다 80Km 남쪽의 '아인 이브라' 지역을 마라로 추정하는 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그것은 홍해 (갈대바다)를 건넌 후 3일 길 (민 33:8)을 걸어서 도달하였다는 점과 엘림과 근접한 지점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이다. 게벨 함맘 파라운 (바로의 온천산)이 멀리 보이는 홍해 변의 풀이 많이 자라 있는 지역이다. 라스 말라암 (Ras malaab : 운동장 같은 곳이라는 뜻) 이라 부르는 지점 2 Km 남쪽 지점에 해당된다. 이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한 법도와 율례를 정하셨다.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출 15:23)


히하롯 앞에서 발행하여 바다 가운데로 지나 광야에 이르고 에담 광야로 삼 일 길쯤 들어가서 마라에 진쳤고 마라에서 발행하여 엘림에 이르니 엘림에는 샘물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으므로 거기 진쳤고 (민 33:8~9)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출 15:24~25)

 

e) 엘림

 

'아인 이브라' 남쪽 11Km 지점의 '와디 그란델'. 아흐마드 함디 터널에서 117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성경에는 물샘 열 둘과 종려 70그루가 있었다고 묘사되고 있다. 이곳에는 적절한 물을 공급해주는 담수샘이 있고, 골짜기를 따라 이어진 멋있는 협곡과 종려나무들이 그늘을 이루고 있는 곳도 있다.  비가 온 뒤에 움푹 패인 땅에는 물이 가득한 것들을 목격할 수 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출 15:27)

 

f) 신광야

 

황량한 벌판이 끝나면서 이제는 작은 모래 산들이 점점 높아 보이기 시작한다. 석회암 절벽 사이사이에 산들이 형성 되어있다. 지형이 달라지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에담 광야에서 신광야로 들어가는 특징이다. 성경은 '엘림과 시내산 사이' (출 16:1) 로 이 지역을 언급하고 있다.


'신광야'라는 지명은 당시 이 지역에서 숭배되었던 달신 SIN에서 비롯된 지명으로 건조한 불모 해변 평야인 엘 뚜르 항구의 북쪽 엘 까아 (el qaa), 구리와 망간의 제련지역인 와디 마가라 (wadi maghara)에서 약 150 Km 지점으로 이집트의 신왕국 때에는 항구 마가라항이 있었고 지금 이 지역에는 작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마을의 잔재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을 처음 목격하게 된다. 음식과 물의 부족으로 고생하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었다. 또한 만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후 두번째로 법도와 율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신다. 또한 만나를 항아리에 넣어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도록 하신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 도다 (출 16:3)

 

g) 르비딤

 

 

현재의 '와디 베이란' 또는 '와디 레파이드'로 시나이 반도 최대의 오아시스 종려 숲이 있다. 홍해에서 60Km, 시내산에서 54Km 떨어진 이 '바란 오아시스'는 '시나이의 진주'로 불리운다.

 

창세기 21장 12절의 하갈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장소, 이드로가 양을 치던 장소이며, 아말렉족과 싸움을 벌인 곳이다.
이곳에는 현재 모세 기념 예배당과 여자 수도원 하나가 보존되어 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출 17:1)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출 17:8)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9출 19:2)


알루스에서 발행하여 르비딤에 진쳤는데 거기는 백성의 마실 물이 없었더라 르비딤에서 발행하여 시내 광야에 진쳤고 (민 33:14~15)

 

h) 시내광야

 

시내광야는 시내산 동쪽에 있는 에르 라하 (er Raha) 평원 지역으로 해발고도 800m 로서 현재 성 캐더린 수도원이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의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산봉우리가 바로 시내산의 한 줄기이다. 시내광야 주변의 지형은 시나이 반도에서 가장 높은 지대이다. 모세산 이라고도 불리는 시내산 (2,285m), 캐더린산(2,642m), 세발산, 세일산 등으로 해발 2000 m 가 넘는 산들이 즐비하지만 어느 산이건 하나 같이 흙이 한줌없는 돌산들뿐이다.

 

이들 산악과 평야는 화강암, 편마암, 섬록암이 그 지층을 형성하고 있다. 모세의 출애굽 사건과 연관된 성산 (The Holy Mountain)인 호렙산 정상에는 기원 4세기 경에 세워졌던 조그만 교회 자리에 1934년에 다시 세운 성 삼위일체 교회가
있다.

 

시내산은 가데스에서 11일 길(신 1:2)이며, 신약에서는 사도행전 7장 30절, 38절, 갈라디아서 4장 24~25절 등 4번 언급되고 있다. 모세 일행은 출애굽 1년 3월 15일에 이곳에 도달한다. 이곳의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강림하시고, 이스라엘은 성산 앞에 장막을 치고 거주한다. 이 평원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기간 체류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출 19:1~2)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레 7:38)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제 이 년 이월 일일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민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그가 시내 광야에서 그들을 계수하였더라 (민 1:19)

 

 

 

시내 산 (Mt. Sinai)

시내 산이라 불리는 바위산 구역은 길이가 3.3Km, 폭 1.7Km로 전체 면적에 달합니다.
이 지역은 해발 2,000m 이상의 산봉우리만 25개에 달하는 고산지대입니다.
해발 2,285m의 시내 산은 화산 폭발 결과 흘러 나온 용암이 굳어진 화강암으로 형성된 봉우리입니다.

 

 

시내 산 정상

시내 산 정상은 2,285m 높이의 붉은 색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입니다.
 산 정상에는 1934년 건설된 길이 25m, 폭 11m 규모의 성삼위일체 교회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i) 바란광야

 

성 캐더린 수도원에서 동쪽으로 펼쳐지는 와디 마라(Wadi Mara) 계곡을 따라 나가면 아인 후드라 (Ain Hudra)라고 불리는 바란 광야에 이른다. 바란광야의 뜻은 '굴이 많은 땅'이라는 것으로서 이 지역은 노년기의 산악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온갖 색깔을 띠고 있는 산들이 연이어 있으며 산의 골격이 다 돌출된 모습들은 파충류의 모습을 연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평균 해발 600~750m 정도의 석회암 산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크고 두려운 광야' (신 1:19)로 일컬어진 이유를 알 수 있다.

 

성경에서는 '미디안과 애굽 사이에 있던 땅' (신 1:1) 으로 언급되고 있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나 살았던 지역 (창 21:21)이며,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과정 중 정탐꾼을 처음 보냈던 (가데스 : 민 13:3,26)  곳이며, 38년 이상의 긴 시간을 보냈던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사무엘이 죽은 뒤에 다윗이 사울을 피해 숨어들었던 지역 (삼상 25:1)이기도 하다. 민수기 33장 2절, 하박국 3장 3절의 바란 산은 아카바만 서쪽 해안에 있는 바란 광야의 한 산으로 여겨진다.

 

이곳을 통과하여 시나이 반도 동쪽 해안인 아카바 만을 향해 계속 내려가서, 아카바 만의 누에바에서 해안을 따라 북으로 75 Km 를 가면 이스라엘과의 국경인 타바에 도착하게 된다.

 

j) 에발 산 중턱의 여호수아 제단

 

1980년부터 세겜을 중심으로 므나세 지역의 철저한 고고학적 조사를 실시하고 있던 제르람은 해발 940m의 에발산
중턱에서 한 돌 무더기를 주시하였다. 돌이 많은 산지에서 포도밭이나 올리브 밭을 가꾸기 위해 치운 돌을 모아
놓은 돌무더기들은 그리 이상할 것이 없지만 그 중에서 유난히 에발 산의 것이 이 고고학자의 눈에 띈 이유는  바로
근처에 흩어진 구약시대의 토기 조각들 때문이었다. 성서 고고학의 달력이라 일컬어지는 토기 조각들은 그 지역이
곧 어느 시대에 번창했던 주거지였는지를 알려 주기 때문에 주변과 구분되지 않는 흙 언덕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유적지 조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에발산의 여호수아 제단

세겜의 에발산 발굴을 통해서 B.C. 13~12세기에 건설된 제단 터를 발견하였다.
한 변의 길이가 8~9m 정도인 직사각형의 제단은 벽의 두께가 1.4m나 되며, 제단의 한 가운데
바닥에는 여러 개의 돌로 만들어진 직경 2m 정도의 원형 화로가 놓여 있었다.

 

 

에발 산의 여호수아 제단 복원도

구약 시대의 다른 제단들과 마찬가지로 동쪽에서부터 제단 위로 올라가는 경사로가 있었다.
제단 위에서 짐승을 불어 사르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사장들이 올라 가는 이 경사로는
길이가 7m, 폭이 1m 정도였다.
제단 주위로는 거룩한 장소임을 구분하는 돌로 쌓은 울타리가 있고, 한쪽에는 출입구까지 만들어졌다.

 

1982년부터 2년 간에 걸친 발굴 결과, 이 돌무더기 아래에서 철기1시대(B.C. 1200~1000)에 건설된 제단 구조물이
발견되었다. 한 변의 길이가 8~9m 정도인 직사각형의 제단은 벽의 두께가 1.4m나 되는 단단한 구조였다. 이 제단의
한 가운데 바닥에는 여러 개의 돌로 만들어진 직경 2m 정도의 원형 화로가 놓여 있었다. 구약 시대의 다른 제단들과
마찬가지로 동쪽에서부터 제단 위로 올라 가는 경사로가 있었다. 제단 위에서 짐승을 불사르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사장들이 올라가는 이 경사로는 길이가 7m, 폭이 1m 정도였다. 제단 주위로는 거룩한 장소임을 구분하는 돌로
쌓은 울타리가 있었고, 한쪽에는 출입구까지 만들어졌다.

 

내부에 채워진 흙과 불에 탄 재 사이에는 여호수아 시대의 토기 조각들과 동물들의 뼈가 많이 출토되었다. 짐승 뼈를
분석한 결과 대부분 섭씨 400~600도의 불에 데워졌고, 소, 양, 염소, 사슴 등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중 사슴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레위기에 등장하는 희생 제물이었다.

 

모세는 요단 강 건너편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나안에 들어간 후 세겜에 있는 에발산에 있는 제단을 만들 것을
명령했고, 이에 따라 여호수아는 '철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돌들'로 제단을 쌓았다.(신명기 27:4~8)  그 후 12지파를
절반으로 나누어 한 부류는 그리심 산 쪽으로, 다른 한 부류는 에발 산을 향하게 한 다음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차례로
낭독하였다. (여호수아 8:30~35)

 

이 제단이 여호수아 시대의 것이라는 증거는 발견된 토기류의 70%가 '목이음 항아리'였다는 점이다. 물이 부족한
산악 지대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멀리 떨어진 샘으로부터 한꺼번에 많은 양의 물을 길어 오기 위해 대용량의 항아리가
필요했다. 몸통과 아구리를 분리해 만든 다음 목 부분을 이어 놓은 이 큰 항아리는 정착시대(B.C. 1200~1000)의
특징적인 토기로 분류된다. 또한 람세스 2~3세 시대(B.C. 1279~1153)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집트 양식의 스캐럽
도장도 발견되었다.

 

 

 

 

 

13. 여리고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 장군의 인도로 팔레스틴 지역으로 들어온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땅에 있는 성중에 최초로 공격한 성이 여리고 성입니다. 다른 성은 열심히 전쟁을 해서 빼앗았는데, 여리고 성은 기적으로 빼앗았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여호수아 6장 15-17절을 보시면 "제 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고생도 안하고 성에 들어가 완전히 점령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안 믿는 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기적을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 고고학자들과 대영 박물관 탐사팀 등등이 19세기부터 열심히 여리고성의 고고학적 발견을 시도했습니다. 그 결과 이와 같은 사실이 발굴되었습니다. 고고학자 가스텡과 여러 학자들은 여리고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방법으로 정복되었다는 증거들을 찾아냈습니다. 발굴된 성내에는 많은 식량들이 남아있었습니다. 또한 대영박물관의 탐사팀에 의해 여리고성은 여호수아시대에 강도 6.0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여 파괴되었음을 보여주는 지질구조가 발굴되었습니다.
 

 

 

 

위 사진은 고고학자들이 실제로 여리고성의 유적을 파고 들어가서, 성경에 기록되었던 여호수아 시대의 실질적인 성벽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위 왼쪽 사진은 여리고성을 발굴한 모습입니다.

 

위 오른쪽 그림은 여리고성 폐허에서 발굴된 식량단지들입니다. 고대의 전쟁은 오랫동안 성을 에워싸고 전쟁을 하기 때문에 식량이 바닥나게 됩니다. 그때 되야 항복을 하고 전쟁이 끝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리고성은 식량이 그대로 남아있는 채로 정복된 것입니다. 또한 대영 박물관의 탐사 팀에 의해서 여리고성은 여호수아 시대에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여 파괴되었음을 보여주는 지질구조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여리고 성의 성경적 함락이 매우 신빙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른 쪽 그림은 고대 여리고 성벽을 고고학적으로 복원한 모형입니다.

 

여리고 지역에는 여호수아 이전의 시대에도 사람들이 살았고, 그 이후에도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으며 여리고라는 도시가 굉장히 오래된 도시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예수님 시절에는 그 유명한 삭개오가 여리고로 오시는 예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려고 뽕나무에 올라갔다가 구원을 받게된 사건이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4. 다윗과 골리앗

 

지금부터는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에 관한 고고학적 발견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구약성경 사무엘상 17장 48-51절의 기록에 의하면 엘라계곡에서 이스라엘 민족과 블레셋 민족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블레셋 사람 중에 골리앗이라 불리는 거인때문에 이스라엘 용사중 많은 사람들이 벌써 엎어져 죽은 상황에, 다윗이라는 소년이 자기 형들이 전쟁터에 나가 있어서 형들에게 음식을 갖다 주러 갔다가 그 거인이 여호와 하나님을 저주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경멸하는 꼴을 보고 어린 다윗이 의분을 느껴 나가 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때에 다윗이...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 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집에서 빼어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 머리를 베니 ..." 어린 소년이 물매를 들고 나가서 한 방에 정통으로 맞추어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입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혼비백산 도망하고 이스라엘은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위 왼쪽 그림은 다윗과 골리앗이 격전을 벌였던 엘라 골짜기의 오늘날의 모습입니다. 위 오른 쪽 그림은 고대 블레셋 민족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블레셋 군인의 모습입니다. 철모를 쓰고 전쟁에 나가는 용사들의 모습, 이것은 영화 '삼손과 데릴라', '다윗과 골리앗' 등에도 보시면 나옵니다.

 
아주 재미있는 발견이 이루어 졌습니다. 1993년 5월에 고고학자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고고학적 발견을 하다가 이마에 돌이 박혀있는 거인의 해골을 발견했습니다. 이마 좌우거리를 측정하여 거인의 키를 계산해 본 결과 그 키가 2미터 90센티나 되는 거대한 체격의 거인이었음이 밝혀졌고, 연대측정 결과 약 BC 1000년경의 다윗시대에 죽은 것으로 측정되었습니다. 발견장소가 팔레스타인 지역이고 체격이 거대하였고 이마에 돌이 박혀 있고 연대가 다윗 시대임을 종합해 볼 때, 이 해골의 주인은 다윗에게 죽임을 당한 골리앗의 유골임이 확실하다고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왼쪽 그림은 팔레스틴에서 발견된 거인의 해골입니다. 이마를 한번 보십시오. 물매돌이 아직도 정통으로 이마 한복판에 확고히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외국신문의 영어표현이 절묘하게 잘 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물매에서 날아간 돌이 아직도 거인의 이마에 박혀 있다." 이와 같이 영어로 쓰여 있습니다. 

 

 

 

 

 

15. 앗시리아의 침공

 

오른 쪽 그림은 니네베와 그 부근에서 발견된 앗시리아의 부조인데요, 앗시리아의 강력한 왕인 사르만에셀이 사자를 사냥하는 장면입니다. 이 나라가 주변 약소국가들을 침략하고 세력을 키워가다가 결국은 기원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게 되었습니다. 남유다보다 북 이스라엘이 더 타락했기 때문에 더 일찍 멸망했습니다.

 

왼쪽 그림은 앗시리아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성을 에워싸고 전쟁을 하는 장면입니다. 자세히 보시면 돌로 구성된 큰 성 위로 활과 칼로 공격하면서 들어가는 장면과,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장면이 보입니다. 앗시리아 군인의 손에 무엇이 들려 있습니다. 사람의 목을 자른 모습입니다. 아래쪽에 물고기가 보이는 곳은 강(江)입니다. 이 강은 앗시리아의 강입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앗시리아의 침공시에 남 유다는 힘이 약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약 136년을 더 견뎌내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많은 고고학자들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비난을 하였습니다.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에 앗시리아가 얼마가 강력한 나라인데, 힘도 없는 히스기야 왕이 이기긴 뭘 이기겠냐며 믿지 않은 것이지요.

 

그런데 앗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에서 발굴된 실린더처럼 생긴 앗시리아의 비석에서 성경의 기록과 똑같은 내용이 발견되었습니다. 즉, 앗시리아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침공하러 갔다가 실패했다는 기록이 발견된 것입니다. 오른 쪽 그림이 산헤립의 원통형 비문입니다. 전쟁에서 패한 산헤립왕은 속이 상해서 고국 앗시리아로 돌아갔는데 쿠테타가 일어나서 자신의 아들들에 의해서 신전에서 암살 당해 죽었습니다. 그후 에살핫돈이라는 아들이 산헤립의 대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 열왕기하 20장 20절에 보면 산헤립의 침공 때 히스기야왕이 땅을 파고 수로를 만들어서 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것이 고고학적으로 그대로 발굴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곳이 예루살렘의 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왼쪽 그림은 히스기야 왕 시절에 급히 판 수로입니다. 완전히 암석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성안과 바깥에서 각각 400m씩 파 들어가 가지고 800m의 수로를 팠습니다. 성 바깥의 기혼샘이라는 샘으로 부터 성안의 실로암 못으로 물이 흘러 들어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혼샘 윗 부분은 막아 버렸지요. 이것을 급히 만들었는데, 다행히 산헤립의 침공 전에 완성을 하여, 성안에 물이 있으니까 끝까지 버텨 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을 에워싼 앗시리아 군은 대치상태에 있다가 여호와의 신이 그들을 쳐서 패배하여 도망을 치게 되었다고 열왕기하 19장 3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기혼샘에서 수로를 파서 물이 성안으로 들어오게 한 것이 바로 이 실로암이라는 인공 못입니다(오른쪽 그림). 예수께서 맹인의 눈에 흙을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해서 눈을 뜬 기적의 못이 바로 이곳이지요. 지금도 눈병있는 사람들은 이 물 떠간다고 난리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남 유다도 타락을 해 버리는 바람에, 앗시리아의 뒤를 이은 (역시 갈대아 사람들이 세운 나라이지만) (신)바벨로니아라는 나라에게 여러 차례 침략을 당했고, 이 때 다니엘 등도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다가 바벨로니아 최고의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기원전 586년 유다는 결국 멸망되었고, 예루살렘은 초토화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법궤는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소문에 예레미야가 감추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디아나 존스 영화 제1탄 '레이더스(Raiders of the lost Ark)'에 보면 이 사라진 법궤를 찾아 모험을 벌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6. 히스기야 터널과 실로암 비문

 

 

1. 히스기야 터널
예루살렘의 유일한 수원지인 기혼샘으로부터 실로암 못까지 5백25m에 달하는 지하 터널은 앗시리아의
포위에 대비한 최대 방위사업이었다.터널의 기울기가 0.06%로 양쪽의 고도 차이가 32㎝밖에 되지
않는 정밀한 토목공학의 진수를 보여준다.

2. 기혼샘
에덴에서부터 흐르는 네 강 중의 하나가 기혼인데 아마도 예루살렘의 우주적 중심성과 관계 있는 것 같다`솟구쳐 나온다'라는 뜻을 가진 기혼샘에는 오늘날에도 차고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중세에 건설된
계단 밑으로 흐르는 샘물은 이곳에서부터 히스기야 터널을 거쳐 실로암 못으로 흐른다.

3. 실로암 비문
여섯줄로 모두 2백글자 중에서 1백77자만 보존된 이 비문은 양쪽에서 파 들어간 인부들이 중간에서
만나 지하터널의 역사적 개통을 자축하는 극적인 장면이 묘사돼 있다.
"3규빗(1.3m)쯤 남았을 때 반대편에서 상대방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터널이 뚫렸을 때 동료를 얼싸안고 도끼를 서로 부딪쳤다.
물은 샘으로부터 1천2백 규빗(5백25m)을 흘러나왔다."(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소장)

 

기원전 701년 봄 앗시리아의 산헤립왕은 맹렬한 기세로 유다를 공격했다.이미 라기스를 함락,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고 있었다.이런 다급한 상황을 성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히스기야가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치러 온 것을 보고 그 방백들과 용사들로 더불어 의논하고 성 밖에 모든 물 근원을 막고자 하매”(역대하 32장2~3절) 왕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곧 유다의 공병대가 바위굴을 파기 시작했다.

 

적이 예루살렘을 포위하면 성 밖의 수원지인 기혼샘을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곳에서부터 지하 터널을 파서 성 안의 실로암 못으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대규모 터널공사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양쪽에서 뚫는 것으로 시작했다.두 사람이 한꺼번에 작업하기도 힘든 폭 60㎝ 정도의 좁은 공간에서 횃불의 그을음과 사방으로 튀는 돌가루를 뒤집어 쓴 채 청동제 도끼로 바위를 쪼는 굴착작업은 예루살렘을 향해 치닫고 있는 앗시리아 군대의 진격속도와 겨루는 또다른 전쟁이었다.

1838년 미국의 성서지리학자 로빈슨은 기혼샘에서부터 좁은 터널을 따라 실로암까지 탐사한 최초의 인물이었다.2천5백년의 세월동안 퇴적된 바닥의 진흙층 때문에 그는 거의 기다시피하여 긴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그로부터 약 30년 후 영국의 워렌도 `히스기야 터널'을 처음부터 끝까지 탐사하는 데 성공했다.더욱이 그는 기혼샘 근처에서 수직으로 11m나 위로 올라가는 통로를 발견하고는 다윗의 부하인 요압이 몰래 성 안으로 들어갔다는 `수구'(사무엘하 5장8절)로 해석하기도 했다.하지만 히스기야 터널의 마지막 비밀은 1880년에 비로소 밝혀졌다.

그해 여름 어느날 예루살렘 실로암 마을의 팔레스타인 아이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실로암 못에서 물놀이를 하면서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그 중 한 아이가 물이 흘러 나오는 지하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6m 정도 들어갔을 때 그 아이는 터널 입구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벽의 글씨를 볼 수 있었다.소문은 금방 퍼져 나갔고 당시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던 영국의 콘더(C.R.Conder)와 세이스(A.H.Sayce),독일의 구테(H.Guthe) 등 고고학자들은 모두 경쟁적으로 이 비문 해독에 매달렸다.탁본조차 구하기 힘들었던 `메사 석비'와 비교해 볼 때 언제든지 현장에서 비문을 확인할 수 있었고,고대 히브리어 비문이 예루살렘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모두 여섯 줄로 2백자가 기록된 실로암 비문은 마치 오늘날의 신문기사처럼 지하 터널 개통 당시의 분위기를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3 규빗(1.3m)쯤 남았을 때 반대편에서 상대방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터널이 뚫렸을 때 동료를 얼싸안고 도끼를 서로 부딪쳤다.물은 샘으로부터 1천2백 규빗(5백25m)을 흘러나왔다'.히스기야 터널은 고대 이스라엘 토목공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난공사였다.길이 5백25m인 지하 터널의 기울기는 0.06%,즉 양쪽의 고저 차이가 고작 32㎝였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기혼샘에서부터 실로암 못까지는 직선거리로 3백15m이다.그런데 왜 적이 쳐들어 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당시 유다인들은 구불구불하게 5백25m나 되는 긴 터널을 팠을까.지금까지 많은 고고학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그중에 가장 타당한 설명이 바로 터널의 지상 부분에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유다 왕들의 무덤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하지만 1978년부터 다윗성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을 시도할 때 지질학자인 단 길(Dan Gill)은 정밀 조사 끝에 이 터널지역이 원래 4만년 전부터 형성된 바위 틈새로 이어져 있었음을 밝혀냈다.즉 히스기야의 공병대원들은 단순히 물이 흐르는 기존의 바위 틈새를 따라 팠기 때문에 구불거리는 수로를 따라간 것이다.그래서 당연히 양쪽이 도중에 만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을 포위하던 앗시리아의 산헤립은 쿠데타 소문을 듣고 급히 본국으로 군대를 철수하기 시작했고,이사야의 예언(이사야 37장7절)대로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어떤 학자들은 6개월동안 비가 오지 않는 건기에만 성을 포위하던 당시 전술에 비추어볼 때 히스기야 터널 때문에 예루살렘이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아무튼 성서고고학사에 있어서 히스기야 터널과 실로암 비문의 발견은 성서학 고고학 비문학 앗시리아학 지질학 수리학 토목공학 등의 전문적인 지식들이 총동원된 학제간 연구의 좋은 본보기로 기록된다.

한편 실로암 비문이 발견된 지 10년이 지난 1890년,예루살렘에 거주하던 한 그리스인이 어느날 밤 아무도 몰래 혼자 연장을 갖고 히스기야 터널로 들어가 이 비문을 떼어냈다.이 과정에서 비문의 작은 조각들이 바닥의 물 속으로 사라졌다.이 도굴꾼은 예루살렘의 한 골동품 상점에 비문 조각들을 팔아 넘겼고,소문을 접한 오스만 터키 당국은 이 유물을 압수했다.스위스 출신으로 당시 예루살렘에서 탐사와 발굴활동을 하던 콘라드 시크(Conrad Schick)는 곧바로 이 비문의 모형을 완성했지만,비문 자체는 이스탄불의 제국박물관으로 운송됐다.지난 1996년 다윗에 의한 `예루살렘 정도 3천주년'을 맞아 실로암 비문의 이스라엘 반환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커지기 시작했다.기원전 701년 기록된 구약 시대의 고대 히브리어 기록 중 가장 긴 문장인 실로암 비문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김성 교수(협성대 성서고고학)

 

 

17. 바빌론과 다니엘

왼쪽 사진은 다니엘의 무덤이며, 지금 이란(페르시아)의 수사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바빌론에 끌려 간 다니엘은 '다니엘서'를 기록하는데, 그의 예언대로 바빌론의 멸망 다음에는 메디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 등의 나라가 나타났습니다. 다니엘서의 예언이 너무나 정확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다니엘서'가 그 사건들이 다 이루어진 후에 기록된 책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즉, 후대에 기록하고 이름만 '다니엘서'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서에 대해서 성경의 신빙성이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

 

 

다니엘서에는 헬라어(그리이스어) 단어가 세 개 들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다니엘서가 바빌론 시대에 쓰여진 것이 아니고 알렉산더가 지배하던 '헬라' 즉, 그리이스 시대에 쓰여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보면 그리이스와 바벨로니아는 느부갓네살 시대 이전부터 이미 광범위한 무역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말(言)도 서로 오고 갔다는 것이 밝혀져 있고, 세 개의 단어가 무엇인가 조사해 보았더니, 그 단어들은 모두 그리이스의 악기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최소한 한 개의 악기는 다니엘 시대 이전부터 바벨로니아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었던 악기였습니다.
예전부터 써 오던 악기이므로 그리이스 말 그대로 바벨로니아에서 쓰인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다니엘서에 수메르 단어가 8개나 들어 있습니다. '수메르'라는 나라가 언제 부터입니까? 아브라함보다 이전 아닙니까? 다니엘서가 기원전 500년경이라면 아브라함은 기원전 2000년전이므로 1500년도 더 된 단어가 8개나 남아 있다는 말이지요. 느부갓네살 통치 시대 이후에는 수메르 언어가 전혀 쓰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다니엘서에 수메르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적어도 느부갓네살 시대, 혹은 그 이전에 다니엘서가 쓰여졌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다니엘서의 저작시기가 느부갓네살의 통치 시기로부터 먼 훗날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 수메르 단어로 확정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어조차 바빌론 포로 이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니엘서에 히브리어가 많이 나온다는 사실 자체도 포로로 잡혀가고 얼마 되지 않아서 기록된 것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의 내용에 있어서 허무맹랑한 사실이 너무 많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는데요, 한 예를 들면 다니엘서에는 느부갓네살 왕이 외국의 포로중의 일부를 잘 먹이고 갈대아 학문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있는데,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느부갓네살 왕이 너무나 악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포로를 잘 먹이고 가르쳤다는 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바벨로니아의 정책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고대 바벨로니아 지역을 발굴하다가 특별한 건물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건물의 비석에 그 건물의 용도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비석에는 포로로 잡혀 온 왕족과 귀족에게 갈대아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된 건물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잘 먹이고 가르쳤다는 성경의 기록이 실제로 증명된 것입니다.

 

  그리고 금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는다고 다니엘의 세 친구를 용광로 불 속에 집어넣었다는 기록이 다니엘서에 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불 속에 던져 넣으려던 바벨로니아 군인들은 방화복을 입고 했었는데도 오히려 불에 타 죽을 정도로 불길이 강했으나, 세 사람은 머리카락 하나 그을리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고고학적 조사 결과 거대한 용광로가 발굴되었는데, 그 용광로의 용도에 대해 쓰여진 비석에 보면 바벨로니아의 신에게 절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들을 화형 시키는데 사용되는 용광로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 그대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불타는 용광로 속의 세 명의 히브리인의 이야기는 적어도 사실에 근거하였음이 밝혀진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또 많은 비난을 받았던 부분은, 다니엘이 왕의 칙령을 따르지 않아서 사자 굴에 떨어졌는데, 사자들이 고양이나 강아지처럼 가만히 있다가, 다니엘을 고발했던 사람을 잡아넣었더니, 뼈까지 뜯어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과 관계깊은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었습니다. 고대 바빌론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결과 거대한 웅덩이가 발견되었는데, 이 웅덩이는 왕의 칙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사나운 짐승의 먹이로 떠밀어 넣는데 사용된 웅덩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잡아먹힌 사람들 이름까지 다 기록되어 있었는데, 다니엘이라는 이름은 없었습니다. 다니엘서에 기록된 이 사건은 적어도 사실에 근거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는 갑자기 느부갓네살왕이 미쳐서 이슬을 묻혀가면서 풀을 먹고 돌아다니다가 다시 제정신을 차려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이 정신을 차려 돌아온 뒤에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해 두었던 것 같습니다. 바벨로니아의 고고학적 발견 가운데 느부갓네살 왕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명각이 발견되었는데, 그 명각에는 이상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니엘서에 기록되어 있는 왕이 미친 시기와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성경의 기록이 실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느부갓네살왕의 명각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느브갓네살 왕의 이러한 파격적인 행위는 의심을 받아 왔습니다.
왕의 비행은 좀처럼 기록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느브갓네살의 정신이상(精神異常)을 암시하는 바빌론 당시의 점토문서가 근년인 1975년 그레이슨(A. K. Grayson)교수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대영제국 박물관에 소장된 이 문서(NO. BM 34113)는 불행하게도 많이 훼손되어 단편(斷片)에 불과하지만 내용은 왕의 비정상적인 질병을 알리는 흥미진진(興味津津)한 것이었습니다.

*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2. 느브갓네살은 생각했다.
3. 그의 생애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5. 그리고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에윌-마르둑(Evil-Merodach, 느브갓네살의 장자로 그 뒤를 이어 왕이 됨,
왕하 25:27-30)에게 나쁜 권면(bad counsel)을 했다.
6. 그런데 그는 전혀 다른 명령을 내렸다.
7. 그는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주의하지 않았다.
11. 그는 자녀들에게 사랑을 보이지 않았다.
12. 가족과 친척은 존재하지 않았다.
14. 그의 주의는 에사길(Easagil; 바빌론 주신의 신전)과 바빌론의 복지를 증진시키는데 기울여지지 않았다.
16. 그는 신 중의 신에게 빌었고, 그는 탄원하면서 손을 들었다.
17. 그는 위(대한) 신, 마르둑을 향하여 슬피 울었다.
18. 그의 기도는 계속되고, 향하여,


이러한 본문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왕은 조정의 대신들로 하여금 그의 아들 에윌-마르둑에게 주의를 집중하게 만들었다. 느브갓네 살은 인생의 가치를 상실하고, 엉뚱한 지시를 내리고, 대신들의 조언을 거절하며, 자녀들에게는 사랑을 보이지 않고, 가족들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특히 국가의 수반으로서 국가 종교와 그 주신의 신전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왕의 태도에 어리둥절해진 대신들이 아들인 에윌-마르둑에게 상황을 알리면서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직무를 수행하라는 권고를 하게 됐다고 보인다. 이것이 그 당시에는 바람직한 권고였으나 나중에 느브갓네 살이 복권(復權)했기 때문에 그저 "나쁜 권면"으로 처리했을 것이다."

세계를 호령하던 느브갓네살 왕이 하루 아침에 광인이 되어 7년간이나 떠돌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아무리 부와 권세를 거뭐 쥐어도 당장 내일 일도 알 수 없고, 정신병 하나 제대로 치유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7년간 혹독한 시련을 겪었던 느브갓네살 왕은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18. 페르시아와 그리스

대제국 바벨로니아도 결국 파사(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다리오) 장군에 의해 멸망당하고, 다리우스는 키루스 (고레스)왕에 이어 페르시아의 황제가 되고 페르시아의 왕궁인 페르세폴리스를 건립하였습니다. 그림은 페르세폴리스에 조공을 바치러 온 수많은 사신들의 벽화입니다. 60여개의 나라들이 페르시아에 조공을 바치러 나아 왔습니다. 페르시아는 지금의 이란이지요. 그 엄청난 통치하에 남들도 잘 대해주고 했으면 좋았을텐데, 크세르세스 황제때 바다 건너 그리이스까지 다 정복하려 하다가, 스파르타, 아테네 같은 도시국가들에 불과한 그리이스에게 전쟁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마라톤이란 것도 시작되었고요. 그리이스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고 크세르세스는 국내에서 폭정이나 하면서 시시하게 지냈는데, 성경 에스더서에 나오는 아하수에로 왕이 바로 크세르세스 왕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페르시아의 대단한 왕이었던 다리우스와, 그 앞에 조공을 바치려고 나아오는 그리이스 사신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페르시아에서 하도 조공을 많이 바치라고 하니까, 에라 모르겠다 하며 조공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페르시아군이 쳐들어가 전쟁을 일으켰지만 페르시아는 그리이스에 패하고 말았습니다.

 

왼쪽 그림은 다리우스 왕의 도장입니다. 이것을 두루룩 돌리면서 찍으면, 이렇게 나옵니다. 실린더형으로 되어 있지요. 이 전성기를 누리다가 결국은 그리이스가 힘이 더 강해져서 알렉산더 대왕 때, 철천지 원수로 여겨온 페르시아를 완전히 진멸합니다. 알렉산더는 본래 점령을 하면 융화정책을 썼는데, 역사적 이유 때문에 페르시아만은 용서하지 못하고 완전 초토화시켰습니다. 그 웅장하던 페르세폴리스는 모래바람에 묻혀버리고 그후 수천년 동안 잊혀졌다가 근래에 다시 발굴되게 되었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아테네 도시의 파르테논 신전입니다. 이 신전은 아테네 도시의 수호신 아테네 여신의 신전입니다. 아테네는 평생 처녀로 살았기 때문에 처녀신 아테네로 불리었습니다. 그리스말로 처녀는 파르테노스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도 '아테네 파르테노스'가 된 것입니다.

 

  

19. 로마와 기독교

 

그러나 그 위대했던 알렉산더왕과 그 나라들도 모두 망하고 결국은 멀리 있던 나라인 로마가 중동을 점령하고, 전 세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줄리어스 시이저의 암살 사건을 성공적으로 해결한 옥타비아누스가 최초의 가이사로 오른 것입니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에 명하여 호적하라 할 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으로 가게 한 그 가이사가 바로 이 사람입니다.

 

그 시절에 중동과 서구에 가장 안정된 평화가 왔기 때문에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라고 불리고, 왼쪽 그림은 그당시에 건립된 로마의 도로입니다. 오른쪽 길가의 양과 비교해 보면 도로의 넓이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로마가 가는 곳에는 반드시 길부터 닦았습니다. 이렇게 로마가 전세계를 지배하던 당시에 예수님이 태어나셨습니다. 여기까지 모든 역사의 흐름이 다니엘서의 예언대로 다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보았던 금신상에 대한 다니엘의 예언이 다 맞아 떨어진 것이지요. 참으로 성경은 놀라운 책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그 당시에 로마 총독으로 있던 빌라도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들도 남아 있습니다. 빌라도의 보고서에도 예수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고요, 오른쪽 그림은 빌라도의 비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별로 학식도 없었고 숨고 도망다니던 사람들이었으나,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후 너무나도 담대하고 똑똑한 사람들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래서 전세계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고, 그 시대에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 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이 콜로세움에서 사자의 밥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이렇게 시체만 들어있던 지하묘지 카타콤에서 집회를 하고 하다가, 결국은 황제의 가정에까지 복음이 다 전해진 것입니다. 특히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경우는 그 어머니가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콘스탄티누스가 황제가 되기 위해서 기독교의 세력이 필요하게 되어, 급격히 양성화시킨 것입니다. 그 결과 경건하지 못한 형식적인 기독교인이 많이 생기면서 초대 기독교정신은 희석되고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 인터넷로고스선교회
글쓴이 : e-nock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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