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할 것인가?
눅 2:15-20절.109.115.123장&
이번 주간에 성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주님의 성탄을 맞이하는 사람의 태도나 감정, 그들의 처지와 입장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나타나게 됩니다. 어린이들이 맞이하는 성탄절은 얼마나 즐겁고 기쁠까요? 그러나 고독한 사람들이 맞이하는 성탄절은 어떠할까요?
여러해 동안 병원에서 입원하여 있으면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전선의 철조망을 바라보면서 북녘하늘을 바라보며 경계근무를 하면서 맞이하는 성탄, 북녘 땅 고향을 기억하며 헤어진 가족을 그리워하면서 맞이하는 실향민들의 크리스마스........ 이들의 느낌은 서로 다를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탄생하였을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으나 목자들은 아무 것도 예물을 드린 것이 없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그들이 예물을 드렸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그들 나름대로 사회적인 신분이나 위치로 보아 언제든지 선물을 준비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들에서 주인의 양을 지키다가 천사들이 전하여준 소식을 듣고 찾아 온,
목자들에게 예물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하여 현재 나의 입장에서 나의 개인과 가정이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생각하여 보고자 합니다. 동방박사들의 앞길을 인도하던 별이 그들로,
예수님에게 찾아가 무엇인가를 행하게 한 것처럼, 또 목자들이 천사의 말을 듣고 어떤 행동을 취하였는가를 살펴보면서 은혜 받기를 소원합니다.
1,베들레헴을 향한 신앙의 결단이 있었습니다. "베들레헴까지 가서...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15절, "빨리가서...."16절, 이 말은 들에서 양을 지키다가 생각 밖의 장엄한 광경을 목격한 목동들의 최초의 고백입니다. 전에 듣거나 본 일도 없는 천사들의 대 합창을 듣고 난 후, 저들은 즉시로 발걸음을 옮겨 베들레헴으로 빨리 달려갔습니다.
기쁨의 소식, 예수가 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 기쁨의 좋은 소식이 있는 현장으로 달려간 것입니다. 왜 그리하였는가? 이처럼 놀라운 사건, 천사가 경배하고 찬송하는 위대한 구세주가 나신 것을 안 이상 주저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서 가서 현장을 확인하고 경배를 드리고자 한 것입니다. 목자들은 좋은 일을 실천함에 있어서 내일로 미루고, 내년으로 미루고, 먼 훗날로 미루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즉시로 실천하였습니다. 즉시로 결단하고 행동하고 실천에 옮긴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사단은 우리 중 어떤 사람에게 찾아 와서 이렇게 달콤한 말로 속삭입니다. "천천히 해라, 차차 해라, 다음에 해라," "회개는 차차 해라, 예수도 천천히 쉬어 가면서 믿어라, 봉사도 그만큼 했으면 되었으니 다음에 해라,"
본문의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가도 뛰어 갔습니다. 그들은 지체하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증거는 이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맞이하는 성탄절은 이러한 결단을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곤고 하고, 힘이 들며, 추위와 더불어 싸울 때에라도 주의 말씀에 순종하고 즉시 찾아 향하는 여러분들의 베들레헴은 어디인가요?
2,이루어진 일을 본 "신앙의 확신"입니다. 예수께서 나신 날 밤에 베들레헴에 찾아간 사람들은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신문이나 라디오, 텔레비전이 없었던 시절인지라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천사들이 나타나서 "베들레헴에 오늘 날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너희가 강보에 쌓여 구유에 놓인 아기를 볼 것이라."고 알려주었을 때 사람들은 웃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거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웃기는 소리 다하네." 하고 조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즉시로 행동으로 옮겨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하여 간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루어진 일을 보기 위하여 간 것입니다. 이미 천사의 계시대로 이루어진 그 일을 보려고 간 것입니다.
목자들은 강보에 쌓여 구유에 놓인 아기를 보기 전에 벌써 말씀대로 성취되고 이루어져 있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만큼 저들은 순수하였습니다. 큰 믿음은 큰 결과를 가져옵니다. 절대적인 신앙은 절대적인 결과를 가져오고,
상대적인 신앙은 상대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크게 믿으면 크게되고, 작게 믿으면 작게 됩니다. 목자들은 크게 믿었습니다. 메사야의 탄생을 의심 없이 믿은 것입니다. 때문에 경배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말씀 속에,
이루어진 결과를 보러 가는 기쁨이 있는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루어진 기쁜 일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3,사실을 말한 "신앙의 증인"입니다. 베들레헴으로 달려가 보니 천사의 말은 이미 그대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저들은 숨을 몰아 쉬면서 아기에게 경배하며 요셉과 마리아에게 자기들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말한 대로 "오늘 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는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탄의 첫 목격자요 증인인 셈입니다. 그들이 증언한 것은 이 아이가 인류를 위하여 탄생한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훌륭한 증인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증인이라는 헬라 말뜻에는 "순교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은 순교할 각오를 가지고, 즉 사실을 밝히고 증언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한이 있어도 바로 증언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목숨이 두렵고 외부의 압력이 두려워 증언의 내용이 뒤바뀐 다든지 표절이 되면 나는 살는지 몰라도 이 허위 증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게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하다가 순교 당했습니다.
예수는 역사에서 살아져간 하나의 위인이었다 라고 하면, 출세하고 잘 먹고 잘살 수 있었을 텐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위에서 죽었고 우리를 의롭다하기 위하여 무덤에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을 증거 하다가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불에 타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자에게 찢겨 죽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매달려 죽기도 했습니다. 메사야의 탄생에 관하여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성경을
잘 알고 있기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헤롯의 눈치보고, 아첨하느라고 메시야의 탄생을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목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들은 대로 본대로 증거 하였습니다.
오늘날 인류의 영원한 메시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증거하기 위한 개인이나 단체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나 여러 선교 단체가 바로 그러합니다. 대한성서 공회 와 기드온 협회 회원들도 이 증인의 일을 잘 수행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종류의 증언자인가? 피하여 도망가는 비열하고 나약하며 자기를 속이는 증인인가? 아니면 용기 있는 정직한 참된 증인입니까? 우리는 이 일에 대하여 증언 자가되기 위하여 가든지 아니면 보내든지 해야 합니다.
4,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신앙의 완성입니다. 목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고 찬송하는 것은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일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모두 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본문에는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1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박사들이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동방의 박사들은 마리아와,
요셉에게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예수를 낳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리워 져야 하였습니다. 예수만이 높아지고 경배를 받아야 한 것입니다. 우리도 목자들처럼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영광을 가로채면 죽습니다. 행12:20절 이하에 보시면 당시 유대의 분봉왕 헤롯이 백성들 앞에서 찬란한 왕복을 입고 일장 연설을 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가 입을 열어 연설을 시작하자 아첨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는 신의 소리이지 사람의 소리가 아니다"고 소리지르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자신이 신이 된 것처럼 우쭐대다가 벌레가 먹어 죽고 말았습니다.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져야 합니다.
5,생활 속에 들어가는 "신앙의 실천"입니다. 20절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며 찬송하며 돌아가니라."고 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도 와서 경배하고 돌아갔고, 목자들도 돌아갔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로 갔다는 것인가? 일터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들 본연의 일터, 본래의 자세로 돌아갔습니다. 흥분하고 들떠 있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생활 속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비한 체험을 가지고 은혜를 받고 난 후 들뜨고 흥분하여 그 자리에 움막을 치고, 기도원을 세우고,
안수하고, 병을 고치고 신유 은사가 있느니 없느니 하면서 거기 머물며 법석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변화산에서 모세 엘리야와 함께 변화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그리고 거기에서 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산 아래로 내려 오셨습니다. 거기에 머물러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 자기 생활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자기 가정을 돌아보고, 자기 직업에 성실하고,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사명에 성실한 사람,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의 할 일 때문에 아기 예수 나신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오래 머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양 떼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목자들은 비록 천한 직업의 소유자이지만,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들은 천사들의 음성을 듣고서 마음이 뜨겁게 움직인 정열과 감정의 사람인가 하면 즉시 결단하는 의지의 소유자들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상황이 어떻게 변하든지 어떠한 체험을 하던지, 결코 흥분하거나 당황하여서는 안됩니다.
가슴은 뜨겁지만, 머리는 냉철한 이성으로 움직일 것입니다. 거기에 과감한 결단력이 요구됩니다. 사람들에겐 주어진 자기들의 일 터에서 힘써서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일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것입니다.
학생은 학원에서, 교사는 강단에서, 군인은 전선에서, 그리고 경찰은 경찰대로 자기의 위치를 찾아야합니다. 학생들은 화염병이나 쇠파이프를 버려야하지만, 교사는 진실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경찰은 최루탄, 사과탄을 버려야 하지만,
군인들은 전선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노동자들은 집단 난동을 버려야 합니다. 거기에 대처하는 기업가는 그들과의 대화를 버려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고도의 대화의 기술이 부족합니다. 노조의 결성과 그들의 존재를 두려워하는 것은,
대화를 이끌어 갈 만한 철학과 그럴만한 위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피하여 도망하여야 할 곳이 아닙니다. 메시야의 탄생을 기뻐하며 찬송하며 돌아가야 할 장소입니다. 예수는 온 인류의 메시야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믿고,
전하며, 또한 삶의 현장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께 드릴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이 기쁨의 소식을 온 누리에 전파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눅 2:15-20절.109.115.123장&
이번 주간에 성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주님의 성탄을 맞이하는 사람의 태도나 감정, 그들의 처지와 입장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나타나게 됩니다. 어린이들이 맞이하는 성탄절은 얼마나 즐겁고 기쁠까요? 그러나 고독한 사람들이 맞이하는 성탄절은 어떠할까요?
여러해 동안 병원에서 입원하여 있으면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전선의 철조망을 바라보면서 북녘하늘을 바라보며 경계근무를 하면서 맞이하는 성탄, 북녘 땅 고향을 기억하며 헤어진 가족을 그리워하면서 맞이하는 실향민들의 크리스마스........ 이들의 느낌은 서로 다를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탄생하였을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으나 목자들은 아무 것도 예물을 드린 것이 없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그들이 예물을 드렸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그들 나름대로 사회적인 신분이나 위치로 보아 언제든지 선물을 준비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들에서 주인의 양을 지키다가 천사들이 전하여준 소식을 듣고 찾아 온,
목자들에게 예물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하여 현재 나의 입장에서 나의 개인과 가정이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생각하여 보고자 합니다. 동방박사들의 앞길을 인도하던 별이 그들로,
예수님에게 찾아가 무엇인가를 행하게 한 것처럼, 또 목자들이 천사의 말을 듣고 어떤 행동을 취하였는가를 살펴보면서 은혜 받기를 소원합니다.
1,베들레헴을 향한 신앙의 결단이 있었습니다. "베들레헴까지 가서...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15절, "빨리가서...."16절, 이 말은 들에서 양을 지키다가 생각 밖의 장엄한 광경을 목격한 목동들의 최초의 고백입니다. 전에 듣거나 본 일도 없는 천사들의 대 합창을 듣고 난 후, 저들은 즉시로 발걸음을 옮겨 베들레헴으로 빨리 달려갔습니다.
기쁨의 소식, 예수가 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 기쁨의 좋은 소식이 있는 현장으로 달려간 것입니다. 왜 그리하였는가? 이처럼 놀라운 사건, 천사가 경배하고 찬송하는 위대한 구세주가 나신 것을 안 이상 주저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서 가서 현장을 확인하고 경배를 드리고자 한 것입니다. 목자들은 좋은 일을 실천함에 있어서 내일로 미루고, 내년으로 미루고, 먼 훗날로 미루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즉시로 실천하였습니다. 즉시로 결단하고 행동하고 실천에 옮긴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사단은 우리 중 어떤 사람에게 찾아 와서 이렇게 달콤한 말로 속삭입니다. "천천히 해라, 차차 해라, 다음에 해라," "회개는 차차 해라, 예수도 천천히 쉬어 가면서 믿어라, 봉사도 그만큼 했으면 되었으니 다음에 해라,"
본문의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가도 뛰어 갔습니다. 그들은 지체하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증거는 이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맞이하는 성탄절은 이러한 결단을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곤고 하고, 힘이 들며, 추위와 더불어 싸울 때에라도 주의 말씀에 순종하고 즉시 찾아 향하는 여러분들의 베들레헴은 어디인가요?
2,이루어진 일을 본 "신앙의 확신"입니다. 예수께서 나신 날 밤에 베들레헴에 찾아간 사람들은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신문이나 라디오, 텔레비전이 없었던 시절인지라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천사들이 나타나서 "베들레헴에 오늘 날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너희가 강보에 쌓여 구유에 놓인 아기를 볼 것이라."고 알려주었을 때 사람들은 웃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거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웃기는 소리 다하네." 하고 조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즉시로 행동으로 옮겨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하여 간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루어진 일을 보기 위하여 간 것입니다. 이미 천사의 계시대로 이루어진 그 일을 보려고 간 것입니다.
목자들은 강보에 쌓여 구유에 놓인 아기를 보기 전에 벌써 말씀대로 성취되고 이루어져 있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만큼 저들은 순수하였습니다. 큰 믿음은 큰 결과를 가져옵니다. 절대적인 신앙은 절대적인 결과를 가져오고,
상대적인 신앙은 상대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크게 믿으면 크게되고, 작게 믿으면 작게 됩니다. 목자들은 크게 믿었습니다. 메사야의 탄생을 의심 없이 믿은 것입니다. 때문에 경배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말씀 속에,
이루어진 결과를 보러 가는 기쁨이 있는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루어진 기쁜 일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3,사실을 말한 "신앙의 증인"입니다. 베들레헴으로 달려가 보니 천사의 말은 이미 그대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저들은 숨을 몰아 쉬면서 아기에게 경배하며 요셉과 마리아에게 자기들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말한 대로 "오늘 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는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탄의 첫 목격자요 증인인 셈입니다. 그들이 증언한 것은 이 아이가 인류를 위하여 탄생한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훌륭한 증인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증인이라는 헬라 말뜻에는 "순교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은 순교할 각오를 가지고, 즉 사실을 밝히고 증언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한이 있어도 바로 증언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목숨이 두렵고 외부의 압력이 두려워 증언의 내용이 뒤바뀐 다든지 표절이 되면 나는 살는지 몰라도 이 허위 증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게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하다가 순교 당했습니다.
예수는 역사에서 살아져간 하나의 위인이었다 라고 하면, 출세하고 잘 먹고 잘살 수 있었을 텐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위에서 죽었고 우리를 의롭다하기 위하여 무덤에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을 증거 하다가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불에 타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자에게 찢겨 죽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매달려 죽기도 했습니다. 메사야의 탄생에 관하여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성경을
잘 알고 있기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헤롯의 눈치보고, 아첨하느라고 메시야의 탄생을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목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들은 대로 본대로 증거 하였습니다.
오늘날 인류의 영원한 메시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증거하기 위한 개인이나 단체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나 여러 선교 단체가 바로 그러합니다. 대한성서 공회 와 기드온 협회 회원들도 이 증인의 일을 잘 수행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종류의 증언자인가? 피하여 도망가는 비열하고 나약하며 자기를 속이는 증인인가? 아니면 용기 있는 정직한 참된 증인입니까? 우리는 이 일에 대하여 증언 자가되기 위하여 가든지 아니면 보내든지 해야 합니다.
4,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신앙의 완성입니다. 목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고 찬송하는 것은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일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모두 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본문에는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1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박사들이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동방의 박사들은 마리아와,
요셉에게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예수를 낳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리워 져야 하였습니다. 예수만이 높아지고 경배를 받아야 한 것입니다. 우리도 목자들처럼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영광을 가로채면 죽습니다. 행12:20절 이하에 보시면 당시 유대의 분봉왕 헤롯이 백성들 앞에서 찬란한 왕복을 입고 일장 연설을 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가 입을 열어 연설을 시작하자 아첨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는 신의 소리이지 사람의 소리가 아니다"고 소리지르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자신이 신이 된 것처럼 우쭐대다가 벌레가 먹어 죽고 말았습니다.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져야 합니다.
5,생활 속에 들어가는 "신앙의 실천"입니다. 20절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며 찬송하며 돌아가니라."고 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도 와서 경배하고 돌아갔고, 목자들도 돌아갔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로 갔다는 것인가? 일터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들 본연의 일터, 본래의 자세로 돌아갔습니다. 흥분하고 들떠 있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생활 속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비한 체험을 가지고 은혜를 받고 난 후 들뜨고 흥분하여 그 자리에 움막을 치고, 기도원을 세우고,
안수하고, 병을 고치고 신유 은사가 있느니 없느니 하면서 거기 머물며 법석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변화산에서 모세 엘리야와 함께 변화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그리고 거기에서 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산 아래로 내려 오셨습니다. 거기에 머물러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 자기 생활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자기 가정을 돌아보고, 자기 직업에 성실하고,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사명에 성실한 사람,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의 할 일 때문에 아기 예수 나신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오래 머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양 떼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목자들은 비록 천한 직업의 소유자이지만,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들은 천사들의 음성을 듣고서 마음이 뜨겁게 움직인 정열과 감정의 사람인가 하면 즉시 결단하는 의지의 소유자들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상황이 어떻게 변하든지 어떠한 체험을 하던지, 결코 흥분하거나 당황하여서는 안됩니다.
가슴은 뜨겁지만, 머리는 냉철한 이성으로 움직일 것입니다. 거기에 과감한 결단력이 요구됩니다. 사람들에겐 주어진 자기들의 일 터에서 힘써서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일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것입니다.
학생은 학원에서, 교사는 강단에서, 군인은 전선에서, 그리고 경찰은 경찰대로 자기의 위치를 찾아야합니다. 학생들은 화염병이나 쇠파이프를 버려야하지만, 교사는 진실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경찰은 최루탄, 사과탄을 버려야 하지만,
군인들은 전선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노동자들은 집단 난동을 버려야 합니다. 거기에 대처하는 기업가는 그들과의 대화를 버려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고도의 대화의 기술이 부족합니다. 노조의 결성과 그들의 존재를 두려워하는 것은,
대화를 이끌어 갈 만한 철학과 그럴만한 위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피하여 도망하여야 할 곳이 아닙니다. 메시야의 탄생을 기뻐하며 찬송하며 돌아가야 할 장소입니다. 예수는 온 인류의 메시야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믿고,
전하며, 또한 삶의 현장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께 드릴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이 기쁨의 소식을 온 누리에 전파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메모 :
'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 > 주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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