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장 사망을 이긴 주 (152장)
고전 15:55,2011.04.24.늘찬양교회
고린도전서 15장 55-57절 말씀을 바탕으로 ‘온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는 교회의 머리(1절)가 되시며 오늘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4절). 주님의 이 귀한 사랑을 온 세상 알도록 주를 전파하자(2절)는 이 찬송은 당시 아일랜드의 법관이었던 부친의 소망을 따라 법관의 길을 가야하느냐 아니면 내면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따라 사역자의 길을 가야하느냐 고민하던 토마스 켈리(T.Kelly;1769-1854)목사가 과감히 목회자의 길을 택한 후 이곡을 작시하였습니다. 찬송 곡은 미국 메사츄세스 주 세필드에서 출생하여 그 유명한 교회음악가 로웰 메이슨(Lowell Mason)에게 사사를 받았으며, 성가대 지휘자와 음악교수로 활약하며, 1844년 뉴욕으로 와서는 젊은 여성들의 교육기관과 맹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유명한 홰니 제인 크로스비 여사가 바로 오늘의 작곡가 죠지 후레드릭 루트(G.F.Root;1820-1895)에게 배움을 받았다. 루트 박사는 수백편의 성가와 많은 칸타타 및 음악교본을 만들었습니다.
1절 사망을 이긴 주 교회의 머리라
죄 사함 받은 우리도 주 함께 살리라
1절, 사망권세 이기고 교회의 머리가 되신 주
인간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돈을 가졌어도, 또 세상을 뒤 흔들만한 권력을 가졌어도, 제갈공명 같은 천재적인 머리를 가졌어도 결국 모두 다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처럼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두렵고 무서운 존재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니까 그 막강한 죽음을 향해서 외치는 담대한 소리가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놀라운 도전의 외침이 아닙니까? 죽음의 권세야! 한번 덤벼보라는 것입니다. 그 날카로운 창으로 한번 찔러보라는 것입니다. 결코 사망이 나를 이기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무서운 사망을 이기고 정복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근거와 확신에서 사도 바울은 죽음을 향해서 이렇게 담대하게 외치고 있는 것일까요? 그 비밀은 죽음의 속성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56절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이 그토록 강력하게 인간을 압제하고 지배하는 이유는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죽음에게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권능을 부여하는 것도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가 어떻게 해서 이 땅에 들어왔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명하셨건만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죄가 이 땅에 들어왔고 그로인하여 죽음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하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하고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며, 반면에 그것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뜻보다 자신의 의지와 판단을 더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즉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들보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열매에 유혹당하여 명령을 거스른 것입니다. 그 결과 삶은 죽음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인간의 운명이 된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막강한 권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그 권능의 근거는 율법에 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죄를 지은 자에게는 죽음의 형벌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죽음의 본질적인 의미이고, 인간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에 사로잡힌 죄인들에게 한 가지 희망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은혜는 공짜입니다. 은혜는 용서입니다. 율법은 죄에 대한 형벌을 말하지만, 은혜는 그 죄의 용서와 형벌의 면제를 말합니다.
은혜의 핵심은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떠나 죽음의 지배 아래 놓인 인간을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구원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가 받아야 할 죽음의 형벌을 면제해 주기로 하신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형벌의 면제가 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해야 할 죽음을 대신 당하도록 내어주신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The Passion of the Christ’라는 영화를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얼마나 많은 매 맞음과 곤욕과 창피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처참하게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더욱이 십자가에 예수님의 손에 못을 박을 때 치솟는 피의 모습은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 없음 정도의 참혹한 광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처참하게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가 바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시고 우리 대신 그 형벌을 당하셔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사 53:5).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죽어야 했습니다. 그 죽음의 권능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사로잡은 죽음은 대단한 승리의 잔치를 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창조주를 죽음에게 빼앗긴 모든 피조물들은 넋을 잃고 슬퍼하며 고통스러운 밤을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언제까지 그렇게 죽음의 권세 아래 붙잡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때려눕히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부활입니다.
십자가의 복음과 부활의 능력은 죄와 죽음이 즉 사망의 권세가 더 이상 인간을 얽어매놀 수 없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가지고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이 되었습니다. 죄에서 해방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더 이상 죽음의 권세 아래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죽음이 왔는데, 죄가 떠났으니까 죽음도 떠나야지요.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담대하게 외친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그러나 이런 죄 사함의 은총과 부활의 권능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할 때, 우리 역시 그의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의 죄악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난 후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2절 주 부활하셨네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모두 알도록 다 전파하여라
2절, 부활의 기쁜 소식을 온 세상 다 전파하여라
예수님의 한없는 은총과 은혜를 경험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 순전한 나드 한 병의 향유가 담겨져 있는 옥합을 들고 ‘시몬’의 집을 찾아가서 예수님의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깨끗이 닦았습니다(눅 7:36-40).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기로 작정하고 계속해서 주님의 뒤를 따라 나섰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뒤따르던 막달라 마리아는 가슴 아픈 사건까지 목격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마저 도망간 슬픔의 길「비아도르사」에서 예수님이 군병들과 유대인들에게 조롱을 받으며 채찍과 침 뱉음을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고통을 바라보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장면을 보면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아니 하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요 19:30)하시고 “아버지여!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며 숨을 거두는 장면까지 다 보고 들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돌무덤에 묻힌 후에도 그 자리를 한 동안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 해가 막 떠오를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리고 살로메 세 여인이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향유를 가지고 무덤에 올라갔습니다. 그날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리라 예언하셨던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인들은 그런 주님의 약속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냥 슬퍼서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가보니까 무덤의 돌은 굴려져 있었고 무덤문은 열려있었습니다. 그리고 무덤을 지키는 군사들을 보니까 무서워하여 떨고 있었는데 죽은 사람과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급히 무덤 안으로 들어가 봤더니 그 무덤 안에 예수님의 시신은 간데없고 흰옷을 입은 청년 한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천사지요. 여인들은 그 천사를 보고 놀랐습니다. 그러자 그 때 그 천사가 여인들을 보고 이런 말을 합니다.
마가복음 16장 6절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예수님이 살아 나셨다는 겁니다. 여기 이 빈 무덤이 그것을 증거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더욱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향하여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15절)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부활의 예수님이신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구체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주님께서 자기에게 전하라고 분부하신 부활의 메시지를 가지고 가서 두려움과 의심과 불안에 싸여 있던 제자들에게 힘 있게 전하고자 동산을 뛰어 내려가서는 요한복음 20장 18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렀습니다.” 또 마가복음 16장 10절에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이렇게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는 첫 번째 증인이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전하였어야 할 부활의 메시지를 막달라 마리아가 전한 것이었습니다. 영광스런 부활의 아침 막달라 마리아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 되었고 가장 축복받은 여인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길거리에는 부활의 현수막이 그리고 곳곳에서 많은 성도들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게 부활절 카드와 계란을 나누어 주면서 “예수님께서 죽지 아니하시고 죽은 지 삼일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여러분도 부활의 권세에 참여할 수가 있습니다.”고 외치며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절 저 모든 천사여 거문고 타면서
사망을 이긴 주님을 늘 찬송하여라
3절, 천사도 거문고 타면서 사망을 이긴 주 찬송하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탄생하실 때에 아기 예수 탄생의 소식을 제일 먼저 전한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들이 ‘허다한 천군과 천사’라고 묘사함으로써 많은 수의 천군 천사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였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천군이 천사와 함께 찬양한 내용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고 찬양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우리가 즐겨 부르는 21세기 찬송가 118장, 125장, 126장 1절의 가사에 보면 천사들의 찬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광나라 천사들아 땅 끝까지 날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구주 나심 전하라
경배하세 경배하세 나신 왕께 절하세“ (찬송가 118장)
“천사들의 노래가 하늘에서 들리니 산과 들이 기뻐서 메아리쳐 울린다.
영 - 광을 높이계신 주께, 영 - 광을 높이계신 주께 (찬송가 125장)
“천사 찬송하기를 거룩하신 구주께 영광 돌려보내세 구주오늘 나셨네
크고 작은 나라들 기뻐 화답하여라 영광 받을 왕의 왕 베들레헴에 나신 주
영광 받을 왕의 왕 베들레헴에 나신 주“ (찬송가 126장)
성경과 찬송을 통하여 천사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찬양의 내용은 “하나님께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메시지로 천사들의 합창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평강으로 사람들 가운데 넘치게 하신다”는 복음의 핵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의 영광 없이 땅의 평화를 생각할 수 없고, 땅의 평화 없이는 하늘의 영광도 가리게 되기 때문에 하늘의 영광과 땅의 평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천사들의 찬양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 때만이 아니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 해가 막 떠오를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리고 살로메 세 여인이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향유를 가지고 무덤에 올라갔습니다. 그날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리라 예언하셨던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인들은 그런 주님의 약속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냥 슬퍼서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가보니까 무덤의 돌은 굴려져 있었고 무덤문은 열려있었습니다. 그리고 무덤을 지키는 군사들을 보니까 무서워하여 떨고 있었는데 죽은 사람과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급히 무덤 안으로 들어가 봤더니 그 무덤 안에 예수님의 시신은 간데없고 흰옷을 입은 청년 한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천사지요. 여인들은 그 천사를 보고 놀랐습니다. 그러자 그 때 그 천사가 여인들을 보고 이런 말을 합니다.
마가복음 16장 6절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예수님이 살아 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사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찬양하였습니다.
찬송가 3절 가사에 “저 모든 천사들이 거문고 타면서 사망을 이긴 주님을 늘찬송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는데 천사들이 거문고를 타면서 부활의 주님을 멋지게 찬양하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천사들은 “예수님께서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살아나셨다. 보라 그를 두었던곳이니라.”며 영광의 찬양을 하였습니다.
천사들이 전한 부활의 소식은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온 세상에 퍼져 나갔고 지금도 많은 교회에서 천사들처럼 부활절 칸타타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힘써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요 20:9)며 부활의 주님을 늘찬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4절 하늘에 오른 주 영원히 계시사
온 교회 성도 위하여 늘 기도하시네 아멘
4절, 하늘에 오른 주 온 교회와 성도위하여 늘 기도하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 달리셨을 때 어떤 느낌을 가지셨는지 궁금하게 여겨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다행히도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께서 그의 십자가상에서 실제로 어떤 생각을 품으셨고 또 어떻게 느끼셨는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신기하기 한량없을 만큼 이 묵시는 구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22편에 기록된 것은 다윗의 입으로 전해진 순수한 예언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동안에 느끼신 것을 기가 막히게 공개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상 시편 22편은 예수님의 최후의 유서로서 시작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향해 외치는 지경에서도 예수님은 이르기를, “이스라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나이다.”(시 22:3)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시 22:6-18) 그 뒤에 침묵이 있고 “다 이루었다”(요 19:30)는 찬양의 선포가 뒤따랐습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찌어다.”(시 22:22-23)
만일 여러분이 시편 22편을 공부하신다면 여러분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당시의 그 자신의 육신에 관해서 말씀하고 계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실제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실 당시에도 찬양이 수반되었음을 또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마지막 피날레 찬양이 요한복음 19장 30절에 나오는 “다 이루었다!”는 찬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끊어질 다리를 이어 놓는 화목제물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 사명을 다 감당하며 그런 기쁨의 찬양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 땅에 과연 어느 누가 자신의 숨을 거두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가장 완벽한 승리의 찬양을 하나님께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시편 22편에서는 임종 후에 회중들이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다윗은 시 22편 22절에서 “내가 주를 회중에서 찬송하리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그분이 우리의 구속을 위해서 값을 지불해 주셨고, 또 성도들의 심령 속에서 영으로 말미암아 지금 하늘과 땅을 연합해 주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모든 “형제들”이 여호와를 함께 찬양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은 잠시 침묵이었지만 침묵 그 자체도 놀라운 찬양이 될 수 있었습니다. 골고다 십자가의 찬양이 그렇게 힘 있고 활기찬 이유도 같은 이유입니다. 분명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찬양하도록 만들어 주는 충분한 동기가 되고도 남습니다!
“이스라엘의 찬송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 22:3)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22:22)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아버지에게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과 같이 지내셨습니다. 그의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최후의 명령을 주신 뒤에,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눅 24:50-53)는 말씀을 통해 부활 승천 후에도 계속해서 주님의 영광을 찬양하기를 주님은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애 그리고 부활 승천까지 찬양의 연속이었습니다.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을 행하실 때에도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요 8:16) 떼어 제자들에게 주었듯이 예수님께서는 동일한 마음으로서 그의 손을 드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백성들을 축복까지 해주셨습니다. 이 때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은 주의 제자들과 그의 백성들을 위해 손을 들어 찬양으로 축복하셨습니다. ··· 그 순간 공개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늘 문이 열리고 천사들의 찬양을 받으며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는 찬양하셨고, 제자들도 찬양하였고 또 그 감격 그 기쁨을 기억하며 매일 계속해서 성전에서 예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기쁘고 즐겁고 영광된 날입니까? 부활의 주님과 승천의 주님을 계속해서 찬양할 때 이런 놀라운 감격과 기쁨의 기적의 현장들이 우리 안에도 넘치도록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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