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겠다는 생각보다는 주위의 권면과 눈총 때문에, 또는 자신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 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봅니다. 그렇다 보니, 자신의 이상에 맞아야 하고, 자신의 체면과 가정의 권위를 세워줄 말한 사람을 찾습니다. 그중에서도 대학 졸업 이상의 사람이어야 하고, 돈 많은 사람, 키 크고 예쁜 사람들을 찾다 보니 많은 사람이 노총각과 노처녀로 늙어가고 있습니다.
참고로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최근 4년 사이(2018년~2022년) 재혼한 부부 1000명(500쌍)을 표본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22일 발표한 ‘2022 재혼통계 보고서’에 따르면 재혼 남성 표준모델은 △45.7세 △연 소득 8950만 원 △4년제 대졸 △신장 174.7cm △일반 사무직이었으며, 재혼 여성 표준모델은 △41.6세 △연 소득 5000만 원 △4년제 대졸 △신장 162.6cm △일반 사무직으로 집계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승부수의 주인공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은 무슨 재주를 가졌던지 다섯 번씩이나 결혼하였으며, 여섯 번째는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은 채 한 남자와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이 무척 부럽고 대단한 미인처럼 생각될 수도 있지만, 한 번이라도 이혼을 경험한 적이 있는 여자라면 이 여인의 아픔과 고통이 얼마나 크고 엄청난 것인지 금방 이해가 갈 것입니다. 아마 이 여인의 마음속에는 모든 남자가 다 원수로 보일 것이고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조차 귀찮고 싫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녀가 뿌려놓은 죄악의 대가입니다.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분명한 자신의 잘못입니다.
원래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은 한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B.C 722년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멸망한 후 사마리아 살고 있던 많은 여성이 아시리아에 포로로 끌려갔으며, 또 그들에게 짓밟힘을 당하였으며, 남은 여인들조차도 상처를 당하지 않으려고 다른 나라 사람들과 서둘러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사마리아 사람들 속에 혼혈아가 많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쪽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취급하며 상종치도 아니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수가성의 여인도 다섯 번씩이나 결혼하지 않았던가 생각됩니다. 어떻든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 간에는 엄청난 간격과 미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갈릴리로 갈 때도 직선 도로인 사마리아 길을 통하지 않고 요단강을 건너 먼 거리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Ⅰ.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
예수님께서 어느 날 갈릴리로 가시고자 여장을 준비한 후 제자들과 함께 유대 땅을 출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가실 때 직선 도로인 사마리아 길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예수님! 이 길로 가시면 안 됩니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요단강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습니다. 그러잖아도 지금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로부터 세리들의 친구요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라는 비난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이번에 또 사마리아로 들어간다면 저들이 더 큰 비방과 모략을 할 것입니다. 예수님! 저희 사정을 봐서라도 한 번쯤 돌아가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하고 건의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제자들의 부탁을 거절하시고 사마리아로 가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 앞에는 그 어떤 것도 걸림돌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며, 또 다른 이유는 그곳에 가서 어떤 중요한 일을 해야 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 중요한 사건이 오늘 우리가 연구하며 은혜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구세주이십니다. (할렐루야!) 하지만, 사마리아 길로 들어가는 길은 험하고 뜨거운 사막지대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행은 그 뜨겁고 힘든 사막 길을 너무 오래 걷다 보니 무척 피곤하였고 목도 말랐습니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수가라는 성에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에게 땅을 나누어 줄 때 같이 준 야곱의 우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는 두레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제자들은 예수님을 우물가에 모셔 놓고 먹을 것과 두레박을 구하고자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이때였습니다. 마을로부터 한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수심과 근심과 염려로 가득한 얼굴을 한 채 물 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힘없이 우물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오지 않는 대낮에(정오 12시) 사람의 눈을 피하여 우물을 길어 먹던 여인은 우물가에 한 남자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서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더욱 놀란 것은 그 남자가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말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더 더군다나 유대인 남자가 말입니다.
Ⅱ. 예수님과의 대화
사마리아 여인은 정색하며, 떨리는 어조로 그 남자를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 4:9)고 반문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릇도 같이 사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만남도 갖지 않는다는 것을 모릅니까? 그런 불편한 관계의 사람들인데 “당신은 왜 나를 귀찮게 하느냐?”는 식의 대답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목말라 하신 것은 한 그릇의 물보다 이 여인 속에 있는 영적 목마름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을 여섯 번씩이나 가져 보았지만 그래도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낙심과 절망 가운데 사는 이 여인의 마음을 주님은 간파하셨던 것입니다.
퉁명스럽고 짜증 섞인 말을 하는 이 여인! 남들이 뜨거워서 다 쉬는 시각에 더위를 무릅쓰고 물을 길으러 나와야만 하는 이 여인을 보면서 예수님은 목마름보다 더 큰 애처로움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향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너에게 주었으리라” (요 4:10) 여기서 말하는 생수는 영혼의 샘물로 그것은 주님께서만 베풀어주시는 성령을 가르치는 것이며(요 7:39), 더 나아가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생수를 마시기만 하면 정녕코 영혼의 목마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가성 여인은 아직 성령을 받지도 못했으며, 또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여쭈어보았습니다. “선생님! 우물이 이렇게 깊은 데다 선생님께서는 물길을 두레박도 없으시면서 어디서 그 샘솟는 물을 떠서 나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요 4:13) 이렇게 질문하는 것은 당신도 다른 남자와 같이 나를 유혹하는 것입니까? 내가 그동안 어려움 당한 것은 힘도 없고, 돈도 없고, 인맥도 없어서 그렇게 당했지만, 지금은 아니올시다. 두레박은 내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 우물의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내가 가지고 있는데
당신은 을이고 내가 갑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하는 질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신앙의 힘보다 세상의 학력, 지식, 자격증 등 스펙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굳이 교회에 안 나가도 이런 스펙만 있으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는데 내가 왜 교회에 나가? 더욱이 지금 내가 가진 직장, 자격증으로 충분한데 왜 내게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야! 하며 교회 다니는 것을 귀찮해합니다. 우물가의 여인도 예수님을 귀찮게 여기는 것입니다.
Ⅲ. 생수를 구한 사마리아 여인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선물과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는 질문에 엉뚱한 핑계로 회피하는 여인을 향해 재차 “이 우물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요 4:1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생수를 구하였습니다. 지금 이 여인은 말이 안 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물은 먹으면 또 목이 마르지만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의 생수를 마시면 갈등과 번민의 세상 속에서 참 행복과 평안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여인은 계속해서 육적인 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동문서답을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도 수가성의 여인과 같이 터진 웅덩이에 물을 채우듯이, 먹어도 갈증이 계속되는 세상 것들에만 눈앞이 가려 영적인 세계를 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하여 믿음으로 영생을 선물로 주시고 생명수를 얻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가장 강한 욕구와 가장 깊은 필요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42:1에서 이렇게 고백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 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이러한 원초적인 갈망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초막절 끝날에 서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 7:37:38). 이것을 39절에서는 해석하기를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Ⅲ. 남편을 불러오라
영원한 생수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생수를 달라고 조르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갑자기 주제를 바꾸어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왜 주제를 생수에서 남편으로 바꾼 것일까요? 그것은 영혼의 생수를 얻기 위한 첫 출발점이 「나 자신을 바로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어떻든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명령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수가성의 여인은 얼떨결에, 아니면 본능적으로, 그동안도 자신의 결혼을 다섯 번씩이나 속여 가면서 결혼한 실력을 발휘하여 이번에도 쉽게 변명으로 위기를 넘어가고자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고 대답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외로 거짓으로 대답하는 그녀를 향해 오히려 칭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 4:17-18)하며 칭찬을 하셨습니다. 이때, 수가성 여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자기의 가장 상처 깊은 부분, 그래서 남에게 얼굴조차 내밀기를 싫어했던 부분을 이렇게도 속속들이 알고 계시는 예수님 앞에서 얼마나 난처하고 황당했을까요? 그러면서 한편으로 “도대체 이 이가 누구인가?” 하는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 저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오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구하시리이다.” 주님은 즉시 또 이 말씀을 받아서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26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순간, 수가성의 여인은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큰 기쁨과 평화를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비록 사마리아 여인으로 부끄럽게 살아가고 있지만 메시아가 오시면 그가 나를 모든 연약함과 부끄러움에서 건져주실 것을 믿으며 살아왔는데 삶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깜박 잊고 있었는데 내가 이렇게 메시야를 직접 만날 수 있게 되었다니 이것을 깨닫는 순간 여인의 마음속에 평화가 임하였습니다. 더불어 하늘의 기쁨과 희망의 새 빛이 몰려왔습니다.
만일 수가성 여인이 자신의 허물과 상처를 지적할 때에 자존심이 상하여 두레박을 던지고 도망을 하였다면 “하나님의 선물과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는 선물을 받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부터 구원함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점차 달라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9절에서는 예수님을 「당신」으로 11절에서는 「주여」, 19절에서는 「선지자」, 29절에서는 「메시야」「그리스도」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변화과정을 통하여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은 영적 참 자유 즉 생수의 강물이 내면에서부터 흘러넘쳐 나는 기쁨을 얻게 된 것입니다.
Ⅳ. 복음의 증인이 된 여인
조용하게 휴식과 낮잠을 즐기던 수가성의 사람들이 한 여인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요 4:29)며 외치는 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인가? 하여 여인의 뒤를 떼를 지어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곧 야곱의 우물가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곳에서 구원의 말씀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얼마나 예수님의 말씀에 심취되었던지 이들은 예수님을 이틀씩이나 마을에 머물게 하면서까지 말씀을 더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들도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42절)고 자랑하였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이제 자랑스러운 복음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만일 사마리아 여인이 자신에 대한 상처와 유대인들이 자신들과 상종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원망과 불평만을 가지고 끝까지 예수님을 대하였다면 그녀는 끝내 “하나님의 선물과 구원의 예수, 생명수 되시는 예수님”을 영원히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수가성의 여인은 오늘도 이 땅에서 참 만족과 참 기쁨과 평강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며 고통 하는 이 세상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수가성의 여인이 다섯 번이나 결혼하고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으면서도 참 만족을 얻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가 세상 것으로 만족을 얻으려면 끝이 없다는 것과 더불어 계속해서 연약함과 부끄러움에서 벗어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학력, 지식, 자격증 등 스펙을 더 중요하게 여김보다 “하나님의 선물과 구원의 예수, 생명수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수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우리를 평강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여러분들도 수가성의 여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처럼 듣지 말고 내 생애에 일어날 구원의 기쁨과 성령 역사의 체험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믿은 것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하고 또 복음을 남에게 담대하게 증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가 생동감 있는 신앙생활을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수가성의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대화를 나눌 때 계속해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지적하는 모습에 대하여 화를 내며 두레박을 던지고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남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선물과 구원의 예수, 생명수 되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었고 자신 스스로 영혼의 생수의 기쁨과 감격에 젖어 끝나지 아니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을로 뛰어가 자신이 발견한 생수의 기쁨 메시아 예수를 증거함으로 온 마을 사람들도 영혼의 생수를 마실 수 있는 축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우리들도 각자 느낌과 환경은 다르지만 나름대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과 감격과 은혜 속에 평강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 기쁨을 배가로 증가시키기 위해 자신의 연약함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전하며 삽시다. 그러면 그 삶 속에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여러 기쁨과 감격의 선물들이 축복으로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더는 과거의 실패와 부끄러움에 갇혀 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매일 매일 행복과 사랑을 만들어 가는 믿음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 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
라"(사 5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