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음악과상담

[스크랩] 재혼에 대한 성경적 입장

늘찬양 2007. 8. 2. 07:29
재혼에 대한 성경적 입장



요즘 재혼주선 회사들이 우리 사회의 신종 사업으로 성업 중에 있다. 이혼만큼 재혼도 늘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 대신 쓰라린 상처만 남긴 결혼과 이혼을 경험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잃어버린 불행의 세월과 지난 상처에 대해 보상받고자 하는 욕구를 갖고 있다. 그리스도인도 별반 다르지 않다. 목사가 재혼 주례를 부탁받는 경우가 늘고 있다. 목사가 신입교인 가운데 일정한 기간이 지나 임직을 하려고 자세히 살펴보면 이혼하고 재혼한 과거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한 예를 들어보자.
부유한 가정 출신인 ㄱ 교회 집사 미숙은 교인의 소개로 인수와 중매 결혼하였다. 고학하며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 사원으로 일하는 인수와 미숙은 가정적 배경, 취미, 돈을 사용하는 방식, 그리고 가족관계 이 모든 것에서 너무나 달랐고 둘은 이런 문제로 결혼 2년 동안 끊임없이 다투었다. 급기야 인수는 직장을 핑계로 가정을 소홀히 하게 되고 때로는 두 사람 사이에 폭언과 폭력이 오갔다. 교회 집사인 미숙은 수 차례 목사를 찾아가 호소하였고, 결국 감당하기 힘들어 이혼하였다. 인수와 헤어진 미숙 집사는 1년 뒤에 준호와 결혼하여 ㄴ 교회로 옮겨 신앙생활하고 있다. ㄴ 교회는 미숙을 서리집사로 임명하려고 하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경은 사별하고 혼자가 된 경우는 전 배우자에게 ‘매인 것’(bound)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재혼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고전7:39). 음행의 연고로 이혼한 경우에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마태복음 19장 9절에 기초하여 무죄한 측은 음행한 배우자를 “마치 죽은 자와 같이 생각하여” 그에게서 자유롭게 되어 재혼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24장 5항, 마19:9). 우리한국 장로교단의 헌법도 이 전통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배우자가 고의적으로 유기함으로 이혼하게 된 성도의 재혼 여부에 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우리 장로교 헌법은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건전한 개혁주의 교회들 가운데서도 가능하다고 가르치는 교단도 있고 침묵하는 교단도 있다. 그만큼 쉽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조심스레 살펴보자.
고린도전서 7장 15절에서 바울은 “믿지 않는 자가 갈리고자 하면 갈리도록 하라”고 하면서 믿는 자는 이런 일에 구속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화평 가운데 부르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구속(拘束)받는다’는 말은 7장 39절의 배우자에게 ‘매여 있다’(bound)라는 말보다 심한 ‘노예가 된다’라는 뜻의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러기에 ‘구속받지 않는다’는 말은 ‘노예 상태에서 풀려났다’는 의미이고 이 표현은 매임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7장 15절의 믿지 않는 자의 유기로 성도가 이혼했을 때, 그 성도는 이전의 결혼 관계에서 풀려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일 후에 재혼하는 것을 금하는 명령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7장 27절과 28절의 “…네가 아내에게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가는 것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라고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을 통해 볼 때 위와 같은 경우 혼자 되었을 때, 바울은 할 수 있으면 혼자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하지만, 다시 결혼하는 것이 결코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재혼은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허용하지 않는 이유로 이혼한 경우에는 어떠한가? 결혼 파괴의 결정적 원인 제공자는 결코 재혼할 수 없는가? 이런 경우,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성도는 전 배우자와 화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혼자 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음행의 연고 외에 배우자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결혼하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19:9)고 말씀하셨고, 그리고 제 삼자가 버림받은 자와 결혼하면 역시 그 삼자도 간음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5:32). 그러기에 바울은 만약 성도가 이혼할 경우 전의 배우자와 화합하든지 아니면 혼자 살 것을 권고했다(고전7:10-11).
이런 가르침에서 본다면, 미숙 집사가 준호와 재혼한 것은 문제가 있다. 미숙의 이혼이 성경적으로 정당화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미숙 집사에게 엄청난 고통이 있었을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미숙은 엄청난 고통가운데 살면서 이렇게 인수를 증오하면서 결혼을 유지하는 것은 이혼하는 것보다 양쪽에 더 피해를 입히는 것이기에 이혼하는 것이 오히려 작은 악(lesser evil)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이 이혼이 성경적으로 정당한 것은 될 수 없다.
미숙은 이혼함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결혼의 항구성을 깨뜨렸다. 비록 결혼 파괴의 주 원인이 인수에게 있다 하더라도 미숙도 하나님 앞에서의 맺은 결혼언약을 깨뜨린 책임은 피할 수 없다. 이 경우 미숙 집사가 인수와 법적으로 이혼하여 나누어졌지만(separated) 하나님 앞에서 맺은 결혼 관계는 해체(dissolute)되었다고 보기 힘들다. 아직 인수가 혼자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미숙 집사가 1년만에 다시 준호와 재혼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미숙은 인수와 화합을 모색하든지 그것이 불가능했다면 혼자 사는 방법을 택했어야 했다. 준호도 미숙과 결혼한 것은 마태복음 5장 32절에서 예수께서 가르치신 내용에 비추어 볼 때 문제가 있는 것이고, 이는 부주의함의 결과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인수가 이미 다른 사람과 재혼을 했다고 하면 내용은 달라진다. 인수가 삼자와 결혼했을 경우, 인수는 그 사람과 한 몸을 이루어 결혼 관계가 맺어진 것이다. 이런 경우 미숙은 인수에게서 더 이상 묶여 있을 필요가 없다. 둘 사이의 결혼관계는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 미숙이 준호와 결혼하는 것은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인수가 여전히 혼자로 남아있는 상태에서는 미숙은 자기가 피해자라고 할 지라도 공동의 책임이 있음을 알고, 근신하고, 또 화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럴 수 없을 경우에는 혼자 사는 길을 택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재혼의 대부분은 이 유형이 많다. 성도는 재혼에 있어서도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진지한 노력을 해야 한다.
재혼하여 교회에 나오는 부부를 교회가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ㄴ 교회와 목사는 미숙, 준호 부부가 등록하고자 한다면 이 부부의 결혼에는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두 사람이 부부가 된 것을 교회가 인정해야만 한다. 교회와 목사는 미숙 집사에게 재혼이 성경적으로 문제가 있기에 다시 전 남편에게로 돌아가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면 미숙으로 하여금 또 다른 악을 범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 그러기에 목사는 이런 가정을 용납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임직을 하려고 할 때에는, 목사는 교회의 화평, 질서, 거룩을 함께 도모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깊이 고려해야 한다. 만약 미숙과 준호가 이전의 교회에서 이 일에 관한 적절한 치리를 받지 아니하였다면 목사와 당회는 이들이 이들의 과거에 대한 상처에서 자유함과 해방, 그리고 치유와 재활(rehabilitation)을 위해서 동시에 B교회 공동체의 거룩을 위해서 이 가정에게 은밀하게 권징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목사는 이 일을 매우 사려 깊게 처리해야 하나, 교회의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해, 무조건 사랑으로 덮어두고 임직을 해서는 안 된다. 목사는 이 부부로 하여금 성경의 원리와 교회의 본질을 이해하도록 사랑으로 권면하고 인도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 목사와 당회가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중요한 직무이다.
이혼한 자는 할 수 있으면 혼자 사는 것이 좋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인지라 늘 성경이 제시하는 이상을 따라 살 수 없는 것이 솔직한 현실이다. 정서적으로, 경제적으로, 직업의 성격에 있어서, 혼자 사는 것이 힘들 경우, 누구든 재혼을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재혼하기 전에, 결혼은 결코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한다. 재혼하는 자들은 새로운 결혼을 통해서 위로와 행복을 얻겠다는 보상심리와 의식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님이 두 사람을 짝지어 주셨기에 나눌 수 없다는 창조의 규범을 이전보다 더 깊이 마음에 새기면서 서로에게 헌신하고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일에 더욱 노력해 나가야 할 것이다.

기독신문 2000.11.22
신원하 박사whshin@kts.ac.kr<고려신학대학원 교수·기독교윤리학>








출처 : 인터넷로고스선교회
글쓴이 : lemalogo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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