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목회자료

[스크랩] 빈 들에서 드리는 추수감사절 / 채희동

늘찬양 2009. 4. 21. 20:25

빈 들에서 드리는 추수감사절 / 채희동 목사

 

예수는 언제나 외롭고 쓸쓸히 빈 들에서 오셔

 

농부 하나님과 농부 사제

 

우리 교회 주일학교 교사인 김선실 선생의 아버지, 김칠성 성도는 평생을 흙과 더불어 살아온 농사꾼이다. 그는 몸이 불편한 아내 이순임 집사와 떨어져 있으면서도 그의 농토가 있는 산 밑에 자그만 움막을 짓고 그곳에서 먹고살면서 농사를 짓는다.

언젠가 심방을 갔을 때 그는 "사람은 흙을 떠나서 살수가 없지유.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고, 또 흙에서 난 것을 먹고살라 하셨고,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사람이 흙을 떠나서는 한순간도 살수가 없지유. 그란디 요즘 사람들은 흙을 떠나서 살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살아가니께 그게 문제구먼유" 하신다.

너른 들녘에 나아가 삽을 들고 땅을 파고 씨를 뿌리고 곡식을 돌보는 농부 김성칠 성도의 모습을 보면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이 세상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 떠올랐다. 하나님은 누구이신가고 묻으면 '하나님은 농부이시다'고 고백하고 싶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시기 위해 지금도 농부처럼 일하신다. 하나님은 사계절 하루도 쉬지 않고 이 세상에 생명들이 움트고 자라고 꽃 피며 열매 맺도록 비를 뿌리시고 햇빛을 내리시며, 바람을 보내시고 흙에는 많은 영양분을 내주신다. 그래서 한 톨의 쌀은 농부의 땀만으로 자란 것이 아니라, 흙의 기운과 하나님의 일하심이 한데 어우러져 자라고 익어 거두어들이게 된 것이다.

우리가 매일 맞이하는 밥 한 사발이 농부의 땀 한 사발, 자연의 기운 한 사발, 하나님의 창조의 영 한 사발의 모여 우리의 밥상에 올려지는 것처럼, 이 세상도 농부의 생명 돌봄과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없으면 이 세상이 있을 수도 없고 지금 이렇게 남아있을 수 없듯이, 이 세상에 공장이 없고, 자동차가 없고, 군인이 없고, 대통령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농부가 없다면 살 수 있을까. 생명을 보듬은 흙이 없다면 살 수 있을까.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살 수가 없을 것이다.

농부는 자기의 몸으로 땀 흘려 생명을 돌보고 살리며 우리에게 먹을 것을 준다. 돈이 없어도 살 수 있고 옷이 없어도 살 수 있고, 집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농부들이 씨 뿌리고 거두어드린 밥이 없으면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농사꾼 김성칠 성도를 보면서 이 세상에 생명을 돌보고 살리며 먹이는 농부야말로 생명이신 하나님의 참된 사제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몸으로 실천하는 사제, 그가 바로 이 땅의 농부들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농부에게서 배우고, 농부의 일하심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본다.

 

우리의 들녘은 빈 들, 빈 농촌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세상이 아니다. 농부를 우습게 보는 세상이요, 농사를 천하게 보는 세상이다. 마지막 세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농부를 멸시하고 천대하는 세상이다. 농토를 투기의 대상으로 보고, 곡식을 돈으로 보며, 농사를 사업으로 보는 세상. 농사꾼이 없어도 얼마든지 잘 수 있다고 하는 세상. 그래서 농사꾼을 농토에서 내몰고, 농토를 없애 공장을 세우고 아파트를 짓는 세상. 농촌은 더는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세상. 이 세상이 마지막 세상이다.

이제 모두가 떠나갔다. 곡식 익어 풍요로울 때에는 참새떼도 마을을 돌며 시끌벅적했는데, 이제는 참새마저도 오지 않는다. 청년들도 아이들도 떠나가고 빈 몸뿐인 할머니, 할아버지들만 남아 마른 몸을 일으켜 힘겨운 삶을 이어갈 뿐이다. 지금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빈들이다. 내가 서 있는 이 농촌에는 가을의 풍요로움은 짧고 겨울의 배고픔은 길다. 어제 추수를 했는데도 오늘 우리의 곳간은 텅 비어 있다. 10년의 양식을 1년에 먹어 치우는 사람들의 곳간에는 언제나 차고 넘치는데 우리의 곳간은 늘 빈약하다.

빚 때문에 농약을 마시고 돌아가신 민혜 아버지의 한 많은 삶의 이야기는 그만 두고라도, 우리는 지금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빈들이다. 이 추수감사절기에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감사의 조건들을 나열하며 한 해 동안 수 십 배, 수 백 배의 결실을 맺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만, 우리는 이 감사절기에 감사드릴 것이 없다. 결실의 계절, 풍요의 계절에 우리의 들녘은 빈 들이고, 우리의 곳간도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이 차고 넘치는 풍요의 계절에 우리는 참 가난하다. 1년 헌금을 주체 못해 교회를 허물고 다시 짓는 교회들 속에서 우리 교회는 참 가난하다. 하늘의 축복으로부터 멀어진 것은 아닐까? 우리는 언제까지 일용할 양식만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하는가.

 

예수, 빈 들로 오시는 이

 

얼마 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내에 공장에 취직한 만형이에게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으며 사는 것이 어떠냐고 권면한 적이 있다.

만형이는 "목사님, 농촌에 희망이 있습니까? 농사짓는 제 아버지도 빚 못 갚아 허덕이시는데요. 저는 돈 많이 벌어 제 집안을 일으켜 세울 겁니다."

나는 할 말을 잊었고, 정말 농촌은 희망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목사로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무기력하고 무능한 목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정말 무엇을 말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이 빈 들 농촌을 어찌 살릴 것인가. 가을걷이가 끝나 아무 것도 없는 빈 들 같은 이 농촌, 황량한 빈 들, 싸늘한 바람만이 가득한 빈 들을 어찌 살릴 것인가.

이때부터 내 목회의 화두는 '빈 들 살림'이 되었다. 나를 살리고, 이 빈 들 같은 농촌을 살릴 분은 누구인가. 그 분은 그리스도이시오, 우리의 주님이시다. 누가복음 9장 10절 이하(새번역)를 보면 우리 주님은 풍요롭고 먹을 것이 차고 넘치며 배부른 사람들에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빈 들로 오시는 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예수께서 벳새다라는 성읍으로 가시자 무리들이 예수를 따랐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맞이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해 주시고 또 병 고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만 날이 저물었습니다. 날이 저물자 열두 제자들은 예수께 와서 다음과 같이 아뢰었습니다. '무리를 흩어 보내서 주위의 마을과 농가로 찾아가서 잠자리도 구하고 먹을 것도 구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제자들은 곧이어 말합니다. '주님,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들입니다.'"

제자들의 생각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황량한 빈 들이니 저들을 먹이고 쉬게 하기 위해서는 무리를 흩어서 마을과 농가로 내려 보내자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신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주란 말인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는 황량한 들녘, 겨울 들녘처럼 빈 쭉정이만 바람에 날리는 이 빈 들에서 무엇으로 어떻게 저 많은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주란 말인가.

그러나 17절로 내려가 읽어보면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일이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빈 들에서 모두들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구나. 주님의 살림은 '빈 들 살림'이었구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빈 들에서 주님은 그들을 살리신 것이다. 차고 넘치는 밥상에서 살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빈 들 살림, 가난한 사람들이 가진 것 없어도 서로 나누며 서로를 살리는 살림이다. 이것은 배부른 부자가 할 수 없고, 배부른 교회가 할 수 없으며, 배부른 성직자가 할 수 없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생명살림이다.

우리가 믿었고 증언했던 예수님은 언제나 빈 들로 오셨다. 넉넉하게 차려진 밥상에 오시지 않았고, 화려한 교회와 배부른 성직자들에게 오시지 않았다. 그분은 언제나 모두가 떠나가고 아무 것도 없는 버려진 빈 들, 누구 하나 찾아 주시 않는 외롭고 쓸쓸한 빈 들로 오셨다. 그 분은 빈 들 예수가 되셔서 빈 들에서 우리를 살리신 것이다.

 

빈 들에서 드리는 감사절

 

올 추수감사절은 교회 건물 안에서 드리지 않을 생각이다. 모두가 떠나가고 비록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빈 들이지만, 빈 들로 오시는 그 분을 맞이하고 그 분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노래할 것이다. 우리의 곡간은 비어 있고, 우리 손에 남아 있는 것은 빚 때문이며, 자식들은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나가지만, 오늘 우리의 들녘에는 가을햇살이 내리고 다시 새로운 봄이 오면 씨를 뿌리고 새 희망을 뿌릴 수 있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것이다.

우리가 돈을 벌고, 집을 넓히고 높은 자리에 앉아 감사드리는 것처럼, 우리의 감사는 소유의 감사가 아니라 우리가 땀 흘려 일하고 거두어들인 곡식을 세상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음에 감사드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열어주신 길이며, 세상적으로 풍요롭게 누리지 못해도 빈들로 오신 주님을 믿는 우리가 마땅히 걸어 가야할 길임을 고백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감사절기에 우리의 손과 발로 생명을 돌보고 살리는 거룩한 농부의 일을 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릴 것이다. 우리는 농부 하나님을 믿으며 농부로 살아 갈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것처럼, 오늘도 들녘에 나아가 하나님을 위해, 세상을 위해 일할 수 있음에 감사 드리는 것이다.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빈 들에서 드리는 감사절 예배는 빈 들로 오시는 주님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얻게 될 것이다.

 

 

채희동(목사. 1964~2004)

채희동 목사는 감리교신학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생태학적 신학과 민중신학을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한 죽재 서남동의 신학을 연구했다. 죽재신학을 통해 생태적 삶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현대 교회의 교권과 교리에 갇힌 예수가 아니라 사람과 자연과 하나님을 ‘한 생명’으로 이끄시는 예수를 만날 수 있었다. 예수는 단순히 믿음의 대상만이 아니라 밥 먹고 똥 싸고 일하는 모든 생활 속에서 이웃과 더불어 예수를 살아야 하는 ‘삶의 예수’, ‘생활 예수’ 임을 고백하며 살았다. 고향인 충남 아산에서 자립적인 삶에 대해 고민하면서 적정마을에 있는 벧엘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가끔씩 어린이의 마음을 담은 동시와 동요를 쓰기도 하며, 우리가락 찬송가 노랫말을 짓기도 했다. 생태적 교회, 생태적 삶을 위해 생명 영성 잡지 <하나님 사람 자연이 숨쉬는 샘>을 편집 발행기도 했다. 쓴 책으로는『민중 성령 생명-죽재 서남동의 생애와 사상』, 『신명으로 부르는 우리가락 찬송』(공저), 『교회가 주는 물은 맑습니까?』, 『꽃망울이 터지니 하늘이 열리네』가 있다.  채 목사는 2004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나이 40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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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하나의 뫼
글쓴이 : 한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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