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주일설교

[스크랩] 서편제의 칸느 낙선 욥18:1-21

늘찬양 2009. 4. 25. 11:43

서편제'의 칸느 낙선 욥18:1-21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서편제'의 칸느 낙선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서편제'라고 하는 영화가 그 당시로서는 공전의 히트를 합니다.

우리나라 영화사 상 그만큼 관객을 동원하기 쉽지 않은 그런 성공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칸느 영화제에 초청받아서 작품을 출품하게 되면서 제작진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많은 우리 국민들도 기대를 했습니다만 의외로 낙선을 하게 됩니다.

근데 그 낙선을 한 이유를 후문으로 전해 듣게 된 내용이 무엇이냐?

한 마디로 보편성을 상실했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어떤 면에서 특별히 보편성을 상실했다고 지적할 수 있는가? 한 예를 들면

그 영화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사람들 중에 유봉과 송화라는 여자가 나오지 않습니까?

유봉이 송화를 양딸로 삼고 있고 동호라고 하는 등장인물이 송화하고 같은 연배의 남자로 나오고 동호라는 남자아이의 어머니와 유봉이라는 사람이 서로 연애를 하게 되고 그래서 둘이 결혼을 하게 되고 하는 이런 이야기가 있으면서 결국 어떤 내용이 나오나하면 소리꾼인 유봉이 양딸 송화가 창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계속 소리하는 것을 강요하는 중에 마지막엔 어떻게까지 하나하면 소리를 제대로 내려면 시력을 상실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소리를 하기를 원치 않는 양딸 송화가 먹는 한약에 '부자'라고 하는 한약 재료를 아주 많이 집어넣게 됩니다.

그래서 그 한약 재료 '부자'의 작용으로 이 송화가 시력을 잃게 됩니다.

시력을 잃고 보지 않음을 통하여 소리에 더 민감해지고 창을 하는데 더 유리할 것이라 해서

원치도 않는 여자아이에게 한약 재료를 써서 눈이 멀게 하는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이런 것들이 아무리 예술이 좋다하더라도 보편적일 수 없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보편적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고 해당될 수 있는 절대적인 진리, 보편성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보편적이지 못하다고 하는 이유 때문에 칸느영화제에서 낙선을 했다고 하는 후문이 있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다루고 있는 내용도 바로 이런 보편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에요.

내내 같은 조의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빌닷이 욥에 대한 언성을 높이면서 가담을 하게 되는데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오늘까지 전체적인 기조는 지금 너의 처참한 현실을 볼 때 분명히 네 죄 때문인데 네 죄를 네가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에요.

빨리 그 죄를 돌이켜서 하나님 품으로 돌아와라. 회개해라. 이 얘기고

욥은 도대체 너희들이 말하는 식의 죄라는 것을 회개한다는 것은 오히려 내가 거짓말쟁이가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말하는 이런 비참한 현실을 맞이해야만 할 그런 죄를 하나님 앞에서 질 수 없었던 이유는 내가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침 삼킬 동안도 내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안에서는 너희들이 말하는 그런 식의 회개는 오히려 용납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그동안 맺어왔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내가 부인하는 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건 용납할 수가 없는 제안이다. 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오늘 특별한 얘기, 포인트가 나온다면 바로 4절에 보편성을 들어서 욥을 비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은

 

v4하반 절에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

이게 무슨 말입니까? 땅이라고 하는 것, 땅이 버림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라면 너나할 것 없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땅에다 발을 딛고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고 있는 이 땅이라는 보편적인 존재가 너한테만 예외적으로 적용되겠느냐 너는 땅과 무관하냐?

 

그러니까 현실이 비참해지면, 현실에 고난이 주어지면 마땅히 내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회개해야 된다는 땅과 같이 보편적인, 누구에게나 해당되고 누구나 예외 없이 적용되어야 할 이 땅과 대지와 같은 원칙이 너한테만은 제외되어지게 된다는 것이냐 말이 되냐 하고는

이 바위 같은 것도 마찬가지죠. 바위처럼 견고한 원리 아니냐?

나의 현실이 비참하고 환란이 주어진다면 마땅히 나의 죄 때문이고 죄를 회개해야 된다는 바위처럼 견고한 이 원리를 왜 너는 부인하려고 하느냐? 라는 얘기고

v5-21까지 얘기는 그런 것을 부인하는 악인이 어떤 꼴을 당하느냐하는 것을 아주 분개해서 얘기하는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 문제가 뭘까요? 빌닷의 문제가 뭡니까?

어쨌든 우리는 마지막에 하나님이 욥을 더 정당한 것으로, 상대적으로 더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심을 알고 있기 때문에 빌닷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데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나의 현실이 비참해지면 마땅히 내 죄를 찾아내서 회개하는 것이 마땅해 보이지 않습니까?

근데 이 점에서 욥이 보편적인 진리를 거부하고 있다고 하는 이 빌닷의 비난 속에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아주 중요한 문제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있느냐?

 

사실 욥의 생활을 보면 가장 보편적이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보편적인 존재가 없기 때문에 욥의 생활이 가장 보편적이었다는 것이에요.

욥은 침 삼킬 동안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향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잊지 않고 있었으면서 언제나 그 좋은 돈을 다룰 때에도 그 좋은 재산을 다룰 때에도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쓰기 위해 살았다는 것이에요.

 

자식이 너무 사랑스럽고 아름다워도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 맞춰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기 좋게 자식들을 키우려고 애쓴 게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 보시기에 이 아이들이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을까 염려하면서 자식을 키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시간, 인생의 모든 장소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시선이 오고 있다는 것처럼 보편적일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 사실처럼 보편적인 사실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가장 보편성에 입각해서 욥은 살았던 것이에요.

 

근데 너무너무 보편적인 진리에 입각해서 살았던 이 욥을 친구들이 이해를 못하게 됩니다.

이 이유가 뭘까요. 여러분?

우리가 이진법 선교회 로고를 보면 (0,1)이지 않습니까?

이게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현실이라는 것이에요. 실제로.

하나님과 묶여있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과 묶여있는데 그 묶여있는 묶음 안에서 ( )괄호라는 묶음 안에서 어떤 사람은 자기가 1이 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게 바로 죄악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묶임 자체는 가장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그들의 생명을 하나님이 쥐고 계시는 한 하나님처럼 보편적인 존재는 그들에겐 없다는 것이에요. 보편적인 진리적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근데 보편과 특수성의 오해가 여기서 나타나는 것이에요.

 

보세요.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셔서 하신 일은 자아가 없는 것처럼 오직 하나님의 자아, 아버지 하나님의 자아에만 충실했던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사셨던 것이에요.

근데 사람들이 볼 때는 너무 개인적이고 특수하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보이는 겁니다.

가장 보편적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에게 가장 충실하게 사셨는데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너무 개인적이고 특별한 입장을 취하고 사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에요.

그래서 죽여 버렸습니다. 너무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가장 보편적인 존재이신데 그 분의 말씀을 듣는다는 게 가장 보편적인 입장 아닙니까? 인간에게.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고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계시고 당신의 의견을 말씀하시는 분이시니까 그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가장 보편적인 진리에 입각한 삶의 자세 아닙니까?

근데 그 예수님의 모습이 가장 특별하게 보이고 별나게 보이고 꼴사납게 보였다는 것이에요.

한 마디로 티 꼬운 거예요. 혼자만 특별하게 사느냐? 이렇게 보이는 것이에요.

특별한 것, 특수성을 추구하신 게 아니에요.

 

어떤 거냐하면 이런 것과 마찬가지에요. 여러분.

에스키모 선교사님들의 보고서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해요. 제가 직접 보진 못했어요.

에스키모 원주민들의 풍습 중에는 집에 손님이 찾아오시면 그 손님에 대한 최고의 예우로써

여러 명의 아내 중에 가장 예쁜 아내를 손님방에 넣어 같이 동침을 하게 한답니다.

참 별난 풍습도 다 있지요.

근데 선교사님에게 존경의 표시로 가장 예쁜 아내를 선교사님 방으로 들여보낸 거예요.

선교사님이 기절을 하지요. 그래서 선교사님이 그 아내를 돌려보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해가 밝자마자 선교사님을 잡아다가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선교사님이 온갖 이야기를 다해서 모면했다는 것입니다.

 

이 죽이려고 한 이유가 뭡니까?

에스키모라고 하는 한정된 사회 속에서 그 추장이 자기 아내를 선물한다는 것은 가장 보편적이라고 자기들은 생각한 것이에요.

그러나 너무너무 특수한 예인 것이지요.

남의 아내를 건들지 말아야한다는 것이 보편적 아닙니까?

선교사님이 그 여자를 범할 수 없었던 것이에요.

오히려 선교사님이 더 보편적 진리에 입각한 행동을 하고 있는데 에스키모 사회 안에서는 그 선교사님이 특별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죽이려한 것이에요.

 

마찬가지가 신앙 안에서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욥도 마찬가지지만 오늘의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우리가 이런 보편과 특수의 뒤집혀진 상황을 얼마든지 찾아 볼 수가 있어요.

예를 들어 교회에 셀 목회다, 아니면 경배와 찬양이다, 제자 훈련이다 하는 것들이 있어요.

 

그러면 목회라고 하는 것은 항상 보편성과 특수성이 동시에 존재해야 됩니다.

보편성이란 뭐냐?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따라서만 목회를 해야 된다는 보편성이 있어요. 어떤 목사님이든지 이 보편성을 넘어가면 안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가라하면 가고 서라하면 섰던 것처럼 목회라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에요.

심방 하나 전화 하나 하는 것도 하나님의 명령을 묻고 기다리고 해야 된다는 것이에요.

이 보편성이 목회의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원리 중에.

 

근데 그렇게 묻고 하는 가운데 목회 현장이 다르고, 오는 교인의 층이 다르고 특수성이 있다는 것이에요.

그 시점이 다르고, 대한민국의 지금의 시점이 있기 때문에 또 지금 시점에 맞는 특수한 목회 형태를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수 있다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제자 훈련으로 나타나고 셀 목회로 나타나고 요즘 유행하는 알파로 전도훈련이다 이런 식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근데 이 신앙세계 안에서 오해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에요.

뭐냐? 제자훈련이면 제자훈련 자체가 보편적인 원리가 돼버립니다.

이건 특수한 거예요. 제자훈련이란 걸 처음 만들어낸 그분에게 허락한 특수한 원립니다.

근데 이 특수한 원리가 보편적인 원리가 돼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시골 교회 목사님이 이 시골 목회현장에서 이 시골 현장에 맞는 목회가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물어봐야 한다는 보편적인 원리를 떠나서 다른 교회에서 성공했다고 해서 그 성공한 케이스가 보편성을 띠어버리고 말게 됩니다.

마치 에스키모에서 자기 아내를 손님을 대접한다고 손님방에 집어넣는 원리가 보편적이 돼버리는 것처럼.

 

결국 이게 뭔지 아십니까. 여러분? 이게 우상숭배에요.

왜 그러느냐? 우리의 목적과 시선이 욥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겠다는 목적이 아니라 현세의 경계 안쪽에서 성공하고 싶다는, 현세의 경계 안에 있는 잣대에 의해서, 측정 기준에 따라서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을 때 성공한 케이스가 곧 보편성을 띠게 됩니다.

그게 결국은 우상숭배인 거예요.

현세 안쪽에서 성공이라는 우상을 숭배하고 있을 때 사람이 많이 모이는, 소위 그 획일적인 성공이라는 잣대에 맞아 떨어질 때 특수성이 보편성을 띠고 말아버리는 겁니다.

전도돼 버리는 거예요.

 

제가 인터넷 목회를 한다.

그러니까 다른 목사님들이 다 왜 목회를 안 하느냐고 그래요.

제가 교회목회를 안 한다고 하는 건 문제가 안 되는 거예요.

제가 인터넷으로 전도를 하는 이 일이 하나님께 묻는 보편성에 입각한 것이냐가 문제인 것이지 인터넷으로 전도를 한다는 특수성 자체가 문제가 될 것도 없고 이것이 성공한다고 해서 이것을 따라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건 태 승철 목사에게 허락한 특수성인 것이에요.

저는 옆의 교회에서 제자훈련으로 성공했다고 해서 그걸 따라갈 필요가 없는 거예요.

 

지금 내게도 하나님이 계시니까 가장 보편적으로 내게도 예를 들어 제자훈련, 셀 목회, 존도 폭발을 하거나 하는 교회의 목사님에게 하나님이 응답을 주셔서 그것을 하고 계시는 것처럼, 나에게 주신 프로그램을 마치 남에게도 마땅히 적용될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을 왜 퍼 뜨리려고 애를 쓰느냐 말입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겁니다. 하면 끝나는 거 아녜요? 왜 자꾸 퍼뜨리려고 해요?

그곳도 또 하나의 성공을 원하는 거예요.

모든 목회자들이 이 프로그램을 따라주기를 바라는 그런 성공을 원하는 마음이 속에 있는 것이에요.

소위 성공한 목회자들이 다른 목회자들을 사랑한다면 '당신도 당신에게 맞는 목회 스타일과 방법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물으세요.' 하는 게 보편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께 묻다가 '화상채팅'이라는 응답을 주시고 그 응답에 근거해서 인터넷 전도를 하고 있는데 ' 저 이상한 사람이다' 이겁니다.

나는 너무너무 보편적인 원리에 입각해서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신 대로 움직이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저보고 특수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아니지요. 특수함이 있습니다마는 보편성에 근거된 특수함이라는 것이에요.

이 보편성이 근거되지 않을 때의 위험한 이유는 특수성이 강조될 때 내 주관성 속에 있는 죄가 튀어나오게 돼요. 죄가.

 

그러니까 목회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 삶을 살 때도 마찬 가지에요.

누가 자식을 성공적으로 키웠다, 그 현세의 경계 안에서 성공이라는 게 예를 들어 좋은 학교 보냈다 그러면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그 특수성의 케이스를 보편적으로 적용해가는 겁니다.

어느 학원이 좋다고 하면 우르르 몰려가요.

그 학원을 가야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를 하나님께 묻는 법이 없어요.

옆집아이가 그 학원가서 잘됐다고 하면 우리 집 아이도 가야되는 줄 알고, 옆집 아줌마가 밍크코트 사면 나도 사야 되는 줄 알고 있는 것이에요.

내가 밍크코트를 사는 것이 좋은지 안 좋은지를 하나님께 물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에요.

보편성을 쫓아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에요. 보편성을.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법칙. 그거 왜 따라가요?

하나님이 내 옆에 계시는데 그런 식의 법칙을 따라갈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왜 따라가요? 나도 이 세상의 성공을 우상시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게 성공이지. 근데 그 성공이 원하는 성공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 얘기하면 '아 그건 다 아는 얘기고.' 이래버리고 만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가장 보편적인 게 뭡니까? 하나님이시고 십자가에요.

십자가가 보편적인 이유는 왕부터 머슴까지 대통령부터 수위아저씨까지 동회 서기님까지 모두가 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창녀도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나면 새 사람 되는 건 마찬가지고 여념 집 숙녀도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고 새 사람 되어야 하는 건 마찬가지고, 한 번도 범죄라고는 해보지 않은 정말 착하게 산 사람도 십자가에 죽어서 새사람 돼야 하는 건 마찬가지고, 극악무도한 범죄 20범도 십자가에 죽어서 새사람 돼야 하는 건 마찬가지란 겁니다.

 

이게 바로 기독교 진리라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과해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이게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보편적인 진리인데 이렇게 살아가면 다 너무 특별하게 살고 있다고 보는 것이에요.

십자가만 전한다고 하니까 '다 알고 있는 소리를 왜 자꾸 혼자서 떠들고 있느냐' 자꾸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에요. 제가 별나게 보이는 거예요. 아닌데.

사실은 보편성에 근거되고 있는 것인데.

왜 보편성과 특수성이 전도돼 버립니까?

보편적인 것을 특별하게 보는 이유가 뭡니까?

특별한 것을 보편화시키기 때문이고 그 이유는 현세의 경계 안에서 소위 성공이다, 형통이다 하는 우상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빌닷의 문제가 현세의 경계 안에서 현실이 풍족해지고 현실이 형통하는 삶이라야 그게 잘된 거 아니냐. 하는 현세적 우상숭배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욥을 전혀 수용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는 것이에요.

그러나 욥은 그의 비난과는 다르게 너무나, 너무나 보편적인 절대적 진리위에 입각해서 살고 있었는데 욥이 사실은 특별한 사람으로 보일만큼 주변의 환경이 모두가 다 보편적 진리를 떠나있었다는 것입니다.

 

가장 절대적이고 보편적 진리는 하나님의 존재하심이요, 그 하나님이 지금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이 사실이고 그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 그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는 이 세상에 대한 나의 모든 생각이, 모든 계획이 다 죽어야 한다는 것이 오직 유일한 보편적 진리라는 것을.

특별한 게 아니에요. 가장 보편적인 것인데 이 세상 우상숭배에 사로잡힌 자들의 눈에는 특별하게 보이고 티꼽게 보이고 아니꼽게 보이고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보편성과 특수성이 뒤집혀진 이유는 우리 마음에 현세의 경계 안쪽에서 원하는 우상숭배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가장 보편적인 진리요, 예외 없이 적용되어야 될 진리요, 가장 우선적으로 적용돼야 할 진리인 것을 오늘도 잊지 않고 살게 됨을 통하여 보편적인 진리위에 입각한 기쁨의 동산을 이루고 살 수 있는 복된 하루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http://www.lifestyle01.com/index.asp

http://cafe.daum.net/01lifestyle

출처 : 이진법 선교회 말씀들
글쓴이 : sun-ligh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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