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주일설교

[스크랩] 거룩한 추방 - 욥 25:1-30

늘찬양 2009. 4. 25.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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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추방 욥25:1-30

 

오늘 욥의 상황에 대해서 욥과 친구들 간에 일어나고 있는 이 변론, 빌닷의 세 번째 변론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빌닷의 변론의 내용을 함께 생각하면서 거룩한 추방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추방이라고 하는 단어, 무서운 단어입니다.

관계가 직접적으로 나하고 없으니까 나하고 관계가 없으니까 그냥 별다를 의미가 없게 느껴집니다마는 추방이라는 것이 나의 일이 될 경우에 상당히 무서운 겁니다.

저는 실제로 추방을 당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추방당한 자의 심정으로 돌아가 본 적은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밴쿠버에서 첫 번째 목회지에 청빙 받아서 목회할 때 제가 못마땅한 어떤 분이 신문에 광고를 전면광고를 냈습니다. 교민신문 여러 신문에 전면광고를 냈는데 그 광고가 주로 저에 관한 이야기에요.

그냥 진실 되게 말씀드려서 다 거의 다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 중의 하나가 뭐냐면 제가 프린스턴 visiting scholar로 1년 가 있는 동안에 보험을 사기를 쳐서 미국 이민국에 붙잡혀가지고 미국에서 추방을 당해서 캐나다로 들어오게 됐다. 그런 내용의 이야기가 그 광고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추방을 당한 것도 아니고 그냥 제 차타고 제가 국경을 넘어 왔습니다마는 추방당했다고 하는 그런 소설 같은 이야기가 제 자신에 대해서 신문에 광고로 난 것을 읽으면서 추방이라고 하는 것이 참 섬뜩한 일이긴 하겠구나.

 

왜 그러냐 한 번 생각해 보면요 추방이 뭡니까? 어떤 일정한 지역에나 어느 특정한 조직 그리고 나라 그래서 그 안에 계속 머무르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되어서 그 사람을 쫓아내는 일 아닙니까. 몰아내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추방이에요.

그러니까 그 사회에서 감옥에 가두는 거나. 감옥도 사실은 사회생활로부터의 격리요 사회생활로부터의 추방 아닙니까? 근데 나라 바깥으로 쫓겨났다.

아 이건 참 넌 여기 들어오지 마! 너 같은 사람이 여기 있으면 큰일 나겠구나. 이런 인식이 , 이렇게 판정 규정되어서 쫓겨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는 것, 이건 중세 때 교황청에서 내리던 파문과 같은 비슷한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참 어렵다고 생각이 들어요.

근데 추방도 여러 가지에요. 여러분. 악법을 추방하자 그리고 부정부패를 추방하자 이런 것은 또 좋은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마는 사람에 대해서 추방 이건 좋지 않아요.

 

근데 성경에도 이런 이야기들이 자주 나오지 않습니까? 특별히 귀신을 몰아낸다. 몰아내는 게 추방 아닙니까? 주님께서 사람 속에 들어가 있는 귀신을 몰아냅니다. 그 사람이라고 하는 특정 공간으로부터, 사람의 인격이라는 공간에서 머물고 있던 귀신을 쫓아냅니다. 추방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귀신추방의 역사가 계속 나타나는 것이지요. 지금도 나타나고 있어요.

그리고 또 귀신이라는 것은 이히히~ 하고 도깨비 같은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벌써 하와가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고 선악과를 따먹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죄를 범한 인간, 원죄가 유전되어져가고 있는 인간 속에는 이미 그 인격 안에 귀신이 보호색깔을 띠고 스며들어가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내 생각이라고 말하고 내 계획이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이라는 게 없다는 겁니다.

사탄에게 먹혀있는 것이에요. 꼭 뭐 이상하게 눈에 띠는 발광을 해야 귀신들린 게 아니고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이 영적으로 보자면 귀신이 들린 겁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 복음이 전해 졌을 때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여서 하나님과 교통이 이루어진다고 하면 귀신이 쫓겨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어쨌든 이렇게 귀신을 쫓아내는 건 좋은데 문제는 거룩한 추방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추방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하나님을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내 삶의 영역으로부터 하나님을 추방하는 그런 일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빌닷이 변론한 내용은 도대체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판정을 내려주신 대로 욥보다 정당하지 못했다고 하시는 그 하나님의 판정을 받아들일 때 무엇이 정당하지 못한지 잘 모르겠어요. 얼른 보면.

 

내용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시고 높은 곳에 계신다. 근데 그 높은 곳에서 그 높은 곳에 있는 그 하늘나라를 화평으로 다스리신다. 잘못된 거 없지요.

그의 군대를 어찌 계수 할 수 있으랴. 그 하늘나라의 천군천사를 우리가 알 수 없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위엄과 하나님의 통치권. 그 통치권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없다는 거예요.

군대를 셀 수 없다는 것은 그 분이 군대의 통수권자가 되어서 휘하에 거느라고 있는 당신의 명령을 따라 움직일 수 있는 군대의 수가 얼마인지 알 수 없다. 그 정도로 강력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비추는 광명을 받지 않는 자가 누구냐.

그 분은 거룩하시고 존엄하시고 위엄이 있으신 주권자로서 높은 하늘에 계시면서 하늘을 화평으로 다스리시고 그 분으로부터 오는 햇빛을 우리가 이 땅에서 받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겠는가.

 

다시 말하면 그렇게 높은 곳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선다. 이게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느냐.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이게 무슨 말이냐면 달이라도 하나님 앞에선 깨끗하다 할 수 없고 별이라도 맑다 할 수 없다 하나님 그렇게 깨끗하고 거룩하신 분이다.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이 벌레 같은 사람이랴. 뭐가 틀렸습니까? 여러분 틀린 게 없어요.

근데 참으로 무서운 불신앙을 이 안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단서를 우리가 인제 역 추론해 가는데 빌닷의 신앙의 상태까지 추론해 들어갑니다. 이 겉으로 들어나 말을 통해서. 단서는 이 사람이 한 말밖에 없으니까.

v2을 주목해 봅니다.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평화를 유지하신다. 평화를 베푸신다. 화목함을 이루신다. 라는 뜻이에요.

이 말을 우리가 롬3:23절 이하의 말씀과 비교를 해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자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하고 구더기 같고 발레 같다고 하는 것이 일치합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에 이루지 못하더니 하는 말도 일치합니다. 근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입었다.

다시 말해서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벌레같이 더러운 인간이 관계가 형성이 되었다는 것을 주목합니다. 로마서는.

그리고 또 그런 관계를 위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삼으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통치권이 이루는 평화와 화목은 하늘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아니하면서 그 더러운 벌레와 구더기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화목을 취하십니다.

 

또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기록하면서 이런 말이 있어요.

지극히 높으신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이것도 빌닷이 한 말과 같습니다.

높은 곳에 계신 주권자 그 하나님께서. 근데 눅2:14에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평화가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묘사를 합니다.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 있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영광이 있다는 것은 낮은 땅 위에 있는 사람들이, 벌레 같은 자들이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됐다는 것이에요.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조명이 비춰졌다는 뜻입니다.

영화로운 광채가 조명으로 비춰지면서 그동안 안보이던 하나님이 이 땅위에 있던 구더기 같이 더러운 인생들의 눈앞에 보여 졌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 땅에 화평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 하나님을 보니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배불러집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지위가 높은 자도 낮은 자도 노인도 어린아이도 젊은 자도 모두가 하나님으로 배불러지자 가난한 사람이 부자를 원망하지 않고 부자가 가난한 자를 착취하려 하지 않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 교만하지 않고 낮은 사람이 비굴해지지 않고 모두가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하자 되자 다 평화스럽게 됐다는 것이에요.

 

平和라는 말 자체가 和자가 벼 禾자에 입 口 자에요. 平자가 같을 平자니까 입으로 들어가는 쌀의 양이 똑같아야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안 그러면 싸움이 일어나요.

내가 많이 먹고 네가 적게 먹어라 이런데서 싸움이 일어나는 것 아닙니까?

근데 모두 하나님으로 모두가 배부르게 되니까 똑같이 하나님을 먹게 되니까 사람과 사람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력이 이 땅에 이루어짐을 얘기 하고 있어요.

 

그리고 한군데 더 보면 이사야41:14에 보면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유명한 말씀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아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지렁이 같은 야곱을 이 땅에 내려오셔서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빌닷이 말한 대로 거룩합니다. 빌닷이 말한 대로 인간은 지렁이 같습니다. 더럽습니다.

그러나 빌닷은 하나님의 통치권으로 인한 평화가 하늘에서 국한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모든 성경은 그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벌레 같고 지렁이 같고 더러운 구더기 같은 인생들을 향해 찾아오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어요,

 

결국 뭘 말하는 겁니까? 빌닷의 신앙이 어떻다는 거예요.

삶의 구체적인 일상적인 현실 속에서 일상적인 삶의 영역 속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셔 들이기를 빌닷은 속 깊은 마음속에서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아시겠어요?

이러한 25장에 빌닷의 언변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불신앙이 어떤 형태의 불신앙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존재냐? 거룩하신 분이니까 나와 격리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햇볕이 비추듯이 그냥 은혜의 빛만 비춰주시면 됩니다.

결국 거룩한 추방이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러면 추방이라는 게 한 나라 안에서 머물도록 내버려두기가 위험해서 쫓아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빌닷 같은 경우에 왜 위험합니까?

위험하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명분을 붙여서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영역에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결국 화평을 이루고 샬롬을 이루어주시는데 그 하나님의 화평을 이루심의 통치권이 하늘에 머물러 버리고 마는 것이에요.

그 높은 곳에 화평을 이루신다. 라고 말하는 겁니다.

 

성경은 높은 곳에서 화평을 이루신다고 말한 적이 없어요.

화평이라는 것은 불화가 전제될 때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 있는 나라에 무슨 불화가 있을 거라는 겁니까?

예수님과 불화하겠습니까? 천사들과 불화하겠습니까?

불화한 천사들은 아예 지옥으로 떨어져서 사탄이 돼버렸으니까 하나님이 다스리는 높은 곳에는 불화가 없어요. 불화가 없다면 화평이라고 말할 것도 없어요.

평화가 필요하고 화평이 필요하고 샬롬이 필요한 곳은 이 땅과의 관계에서 나온 이야기지요.

 

근데 왜 빌닷은 지금 그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이 화평을 이루셨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왜. 추방시킨 것이에요.

아무리 거룩한 아름다운 단어를 동원해서 묘사하고 있어도 그 내막은 그 삶에서 하나님을 추방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처럼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을 따라가지 않은 것이에요. 왜? 하나님이 위험하기에 추방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그럼 하나님이 왜 위험하십니까? 하나님은 정말 위험하셔요.

제가 언젠가도 말씀드렸어요. 여러분.

모세가 14일이면 갈 수 있는 가나안 땅을 동쪽으로 이동하면 되는데 남쪽으로 시작하면서부터 광야에서 40년을 머물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거예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 봐요. 복된 삶을 사는데 2주면 이룰 수 있는 것은 40년을 끄시는 분이 하나님 이십니다.

 

얼마나 위험하십니까? 이런 하나님 몰아내야 돼요. 우리 삶에서. 왜 그 하나님을 믿으세요? 그러니까 믿는 게 아니 것이에요.

그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40년을, 2주면 갈 거리를 40년을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쫓아가기 위해서는 밸을 다 내버려야 돼요. 밸을.

내 생각을 없애지 않는 한 내 판단을 없애지 않는 한 도저히 쫓아갈 수 없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분이 하나님이셔요.

절대로 내 생각과 내 소원대로 되게끔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모세가 유명한 지도자가 되려면 우리가 생각하는 식의 뛰어난 지도자로서 인정받으려면 2주 만에 갈 거리를 10일 만에 돌파한다든지 일주일 만에 돌파해서 유명한 자도자요 뛰어난 지도자지 2주면 될 거리를 40년을 돌았는데 그게 왜 뛰어난 지도잡니까? 인류역사상 제일 후진 지도지지요.

 

근데 타임지가 선정한 2000년 인류역사 속에서 제일 뛰어난 지도자라는 거예요. 3500년 전 사람이. 말이 됩니까? 왜 그가 뛰어난 지도자예요? 함부로 말하면 큰일 나요. 위험한 사람입니다. 내 인생을 망칠 사람입니다.

2주면 가나안 땅을 맛볼 수 있는 것을 40년 걸리게 했으니까 그 속에서 40년 동안 죽은 사람이 몇입니까? 다 몰살당하잖아요. 20세 이상은 광야에서 가나안 땅 맛도 못보고. 위험한 사람이지요.

 

하나님처럼 위험한 분이 없어요.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습니다.

문제는 불상이라든지 무슨 나무에 절할 때처럼 그 대상이 우리가 숭배하는 대상이 생각이 없으면 좋으련만 하나님이 위험천만한 것은 하나님이 생각이 있으신 분이라는 것이에요.

그것도 생각이 하늘나라에서 다스리시는 일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그러면 상관없잖아요.

그리고 이 땅의 삶은 내 생각대로 해주시면 되잖아요.

멀리서 햇볕을 비추듯이 광명을 비춰주시듯이 그냥 내가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잘될 수 있도록 능력만 불어넣어주시면 되잖아요.

근데 그분이 꼭 시시콜콜한 일에까지 하루하루 24시간 1초도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눈에서 떼지 않으시고 간섭을 해 들어가신다는 말입니다. 욥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왜 나 같은 자를 붙들고 계십니까. 왜 침 삼킬 동안도 나를 잊지 않고 나를 지키고 계십니까. 이러고 계신 거예요. 당신 생각을 가지시고. 이런 하나님 어떻게 믿어요?

하나님 생각대로 기도하고 간구하고 살아가는 우리 신앙의 시간이 몇 시간 됩니까?

다 거룩한 추방이 일어나는 것이에요.

 

거룩하신 하나님이 벌레 같고 구더기 같은 우리에게 찾아오실 때는 우리에게 태도를 입장을 분명히 하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으로서 다가오고 통치권자로 오실 때는 함께 하려면 무조건 벌레 같고 구더기 같은 나는 죽어버려야 된다는 거예요. 부인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욥이 침 삼킬 동안도 잊지 않고 지켜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떡하든지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자기의 주장을 다 쑥 꺼내버린 사람 아닙니까? 밸을 꺼내버린 사람이에요. 밸이 없는 사람이었다고요 욥이.

 

마찬가지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이룩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룩한 곳에 머물러 계시면서 통치하시고 화평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려오십니다. 내려오시는 데 큰일 났다는 것이에요.

내 의견이 있으니까 큰일 났다는 것이고 내 생각이 있으니까 내가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하고 있으니까 큰일 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얼른 죽으라는 것이에요.

무슨 내 생각을 꺼내 놓을 것이며 내 의견을 말할 것이며 내 계획과 내가 따로 갖고 있는 소원을 말할 것이냐 이겁니다. 벌레 같고 구더기 같은 우리가.

하나님이 거룩한 분으로서 오시면 납작 엎드려 죽는 수밖에 없는 거예요. 죽는 수밖에 .

근데 죽기가 싫으니까. 다가오시는 하나님 앞에서 죽기 싫으면 방법은 하납니다. 그분을 추방해 내는 거예요. 내 삶에서.

아 나는 하나님께 날마다 기도하는데. 어떻게 기도합니까? 내가 바라는 대로 내가 구하는 대로 내가 원하고 소원하는 대로 기도하지요.

 

이미 내가 내 나름대로의 소원을 나 자신에 대해서 가졌다는 자체, 소원을 갖고 있는 그 상태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추방한 것이에요.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소원도 가질 자유가 없습니다. 고난에 대해서도 없고.

나 자신에 대해서조차도 오직 하나님만이 소원을 갖고 계셔요.

아브라함이 가나안 복지를 소원했습니까? 하나님이 소원하신 것이지.

우리가 언제 천국이라는 걸 꿈이나 꿔봤어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만들어 놓으시고 우리가 그쪽으로 가는 것을 소원하고 계시는 것이지.

우리가 우리 입으로 믿게 됐습니까? 하나님이 소원하신 것이지.

우리는 우리자신에 대해서 하루하루 일상적인 매 순간마다 나 자신에 대해 소원조차 가질 자격과 권한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벌레고 구더기에요. 빌닷의 말이 맞아요.

 

그러니까 그 거룩한 분이 오실 때 두 가지 중에 하납니다.

내가 나로서 나를 유지하고 싶으면 하나님 몰아내고 거룩한 추방을 이루시고

그 거룩하신 하나님 오신 것을 받아들이려면 십자가에서 콱 죽어버리세요. 이미 죽었어요.

죽었음을 인정하시고 이젠 더 이상 까불지 맙시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아는 게 무엇이며 별 꼴인 사람들을 보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보자면 도토리 키 재기라는 것을 아세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극악무도하고 가장 꼴사납고 가장 쪼다 같고 하여간 내가 알고 있는 욕을 다 하고 싶은 그런 사람이 있어요.

하나님 보실 때는 똑같아요. 나나 그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서.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말고 죽어버리세요. 그것도 콱 죽어버리세요.

그러면 화평이 임하십니다. 높은 곳에서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화평이 아니라 그 거룩하신 하나님과 벌레 같은 나 사이에 화평이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그것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일어난 것이에요.

여러분 오늘 거룩한 추방이 일어나서는 안돼요.

하나님을 추방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룩한 하나님이 내게 오실 때 분명히 오실 거예요.

성경이 계속 약속하니까. 내가 너를 찾아가서 너의 삶을 인도하리라. 구원하리라.

오실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조금도 내려오지 마세요. 한 순간도.

 

늘 마음으로 십자가를 보면서 돈 문제가 나를 건드리고 자식 문제가 나를 자극하고 남편이 나를 신경 쓰게 하더라도 그거 보지 말고 십자가 보면서 하나남만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그러지 않고 내가 남편과 자식과 돈 문제와 부인과 맞서다 보면 또다시 가장 불행한 거룩한 추방이 일어나게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찾으면서 하나님을 추방하는 모순된 신앙생활 이 순간 이후로 끝나면 좋겠습니다. 주님 십자가 바라보면 거룩한 추방 일어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셨사오니 오늘도 십자가 붙잡고 하나님 모셔 들이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벌레 같은 나를 껴안고 그 걸음으로 걸어가시는 삶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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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진법 선교회 말씀들
글쓴이 : sun-ligh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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