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주일설교

[스크랩] 찻잔속의 태풍, 태풍속의 찻잔 -- 욥35:1-16

늘찬양 2009. 4. 25.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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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090213

제목: 찻잔속의 태풍, 태풍속의 찻잔

본문: 욥35:1-16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찻잔속의 태풍, 태풍속의 찻잔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찻잔속의 태풍이라는 말은 제 자신도 설교 중에 여러 번 사용한 말이고 또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근래에 가장 확연한 하나의 예를 든다면 얼마 전에 오바마대통령이 대통령으로 당선이 됐습니다. 미국에서.

그때 대통령선거전을 치를 때 상대편 공화당후보로 나온 존 맥케인후보가 있었어요.

그래 오바마대통령에 비해서 계속 여론이 열세에 있는 그런 형국을 극복하려고 끌어들인 하나의 이벤트적 사건이 여성부통령후보, 페일린이라는 알래스카 주의 주지사를 지내고 있었던 페일린이라고 하는 여자를 부통령후보로 끌어들입니다.

맨 처음에는 페일린이 주는 그런 신선한 이미지와 또 미모와 함께 꽤 큰 영향력을 미칠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알래스카 주 내에서 페일린이 주지사로서 행한 어떤 그런 잘못된 일들이 들춰져내면서 트루퍼게이트라 그랬습니까? 하여간 그런 일들이 페일린의 뒤에 꼬리표로 붙으면서 페일린의 돌풍과 센세이션은 그만 잠재워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이제 찻잔속의 태풍이라고 합니다.

굉장히 큰 태풍과 같은 영향력과 효과를 기대했는데 그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끝나버리고 마는 아무런 영향력이 외부세계로 미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때 바로 찻잔속의 태풍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풍속의 찻잔이라는 말은 쓰는지, 안 쓰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제가 만든 말이에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찻잔이라고 하는 말은 차를 마시는 분위기, 평안과 그것이 비록 잠시일지라도 안정과 휴식, 이런 분위기를 연상하게 합니다.

반면에 태풍이라고 하는 것은 파괴, 그리고 혼란, 그리고 불안, 그리고 모든 이제까지 수고로 쌓아올렸던 공든 탑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그런 느낌이 드는 단어 아닙니까?

태풍.

그런데 이 두 단어의 결합이 두 가지일 수 있다는 것이에요.

우리가 일상적으로는 찻잔속의 태풍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마는 태풍속의 찻잔이라는 말도 영적인 어떤 차원을 염두에 두고 사는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얼마든지 타당한 말일 수가 있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자주 써야 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태풍속의 찻잔이라는 말도.

 

그래서 이 찻잔속의 태풍이라는 말을 좀더 심리학적측면으로 갖고 들어와 봅니다.

우리의 심리적 차원의 이야기로 갖고 들어와 보면 어떤 것을 태풍속의 찻잔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자, 돈 문제가 크게 발생했습니다.

이제 나는 죽었구나. 내 인생은 이제 종쳤다. 끝나버렸다.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게 찻잔 속에서 일어나는 태풍에 불과하다는 것이에요.

실제로 내 인생과 내 인생의 여정, 그리고 나 자신의 가치, 이런 것에 지금 현재의 실패나 지금 현재의 낙망스러운 상황이 전혀 별게 아닌데 왜 특별히 신앙인에게 있어서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계가 계속 펼쳐지고 있는 상황에서 나 자신의 사업이 안 됐고 내가 돈을 못 벌었고 내 자식이 취직을 못하고 아직 결혼을 못하고 있고 하는 이런 일들이 그렇게 큰 태풍이 아니라는 겁니다.

실제로. 영향력이 없어요. 아무것도. 왜?

하늘아버지가 붙들고 계시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주님께서 풍랑만난 배위에서 잠을 주무시는 이유가 뭡니까?

풍랑이 일어났어요. 그러나 주님은 아십니다. 이 풍랑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시는, 아버지께서 장악하고 계시고 통치하고 계시는 가운에 일어난 태풍, 이건 찻잔속의 태풍이라는 걸 아셨기 때문에 마음을 찻잔에서 빼내서 찻잔 밖의 세계에 두셨으니까 아, 찻잔 속에서 태풍이 일어나고 있는데 마음을 찻잔 속에서 빼냈으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편히 주무실 수가 있는 것이죠.

 

반면에 일이 좀 잘 됩니다. 돈이 잘 벌립니다.

자식들도 좋은 대학 들어가고 직장 들어가고 좋은 배우자, 이 좋다고 하는 게 전부 세상적인 기준으로 좋아요. 다 좋아요.

찻잔을 기울일 수 있는 그런 분위기인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평안합니다. 내 마음이 고요합니다. 내 마음에 자신감이 넘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정말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적사건들이 폭풍처럼 몰려오고 있는 것이에요.

 

예를 하나 들면 이래요.

북왕국 이스라엘이 여로보암2세 때 경제적으로 최전성기를 이룹니다.

그리고 30년 만에 지구상에서 아예 흔적조차 없어지게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30년 만에.

경제적 부흥을 최고조로 절정으로 이룬 뒤 30년 만에 싹 없어져버리고 맙니다.

태풍속의 찻잔이었어요. 안정되었습니다. 잘된다고 합니다.

거짓선지자들이 나와서 예레미야가 말한 것처럼 평안하다. 평안하다. 무슨 일이 있겠느냐고 얘기를 합니다.

아무 일도 없다고 얘기를 합니다.

너희는 다 건강하고 너희는 의롭고 너희는 잘될 것이다, 얘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태풍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꿈에 본 것도 그거 아닙니까?

모두가 다 평안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모스 선지자 꿈에 보니까 북방에서 끓는 가마솥이 기울어져가지고 이쪽으로 흘러들어오고 있는 것이에요. 그 뜨거운 것들이.

그걸 본 것이에요.

 

모두가 평안한 줄 알고 있는 거예요. 우리 집안이 잘 되는 줄 알고 있었어요. 하나님의 태풍이 몰려온 것이에요.

한국교회가 부흥합니다. 돈이 넘쳐납니다. 몇 백억 짜리 건물 짓고 하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교회가 한 두 교회가 아닙니다.

편안하다, 편안하다, 합니다.

그러나 태풍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이건 교회가 아니에요.

 

오늘 본문에 또 엘리후의 말이 계속됩니다.

엘리후가 등장을 하면서 욥의 신앙의 윤곽이 더 뚜렷해지고 있어요, 지금.

엘리후의 말을 통해서 욥이 어떤 신앙을 갖고 있었는가, 라는 것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고 그런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에요.

엘리후는 지금 말한 게 지식과 이론의 차원에서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 이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갖고 있는 지식과 이론이 참 정당하고 맞아요.

그런데 욥을 자꾸 오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론과 그 지식대로 현실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삶에 이 사람이 취약했다는 것이에요. 나이도 어리고.

현실 속에서 신앙을 구현하는 점에 있어서 욥만큼 튼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꾸 욥을 오해합니다.

그리고 과격한 감정적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러나, 이럼으로써 엘리후의 신앙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반면에 또 한편 이론과 지식을 그대로 갖다 들이댐을 통해서 어떤 효과를 내느냐?

욥의 신앙이 갖고 있는 한계도 마찬가지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에요.

욥을 오해하는 것은 엘리후 자신이 자기가 알고 있는 이론과 지식에 따라서 삶을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오해일 수 있다면 그러나 지식과 이론을 그대로 들이댐을 통해서 거꾸로 욥의 상태가 지금 어떤 상태인가를 청진기로 들여다보듯이 볼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에요.

오늘 본문이 바로 이 후자의 경우, 욥의 신앙의 한계가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를 다시 한번 우리에게 확인시켜주는 그런 본문의 내용들이 소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 오늘 본문의 내용의 핵심적인 얘기는 5절 같은 경우 보면 여러분, 하늘을 우러러보라, 그대보다 높이 뜬 구름을 바라보라. 궁창 높은 걸 바라보라. 이건 뭘 뜻합니까?

앞에서 나왔던 빌닷의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서 평화를 두신다.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그래서 이 땅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마치 없는 것처럼 그래서 좋은 마음씨 좋은 시어머니처럼 멀리 있고 그냥 좋은 돈이나 좋은 물건이나 음식이나 보내주시면 된다. 그런 하나님으로 생각했던 그런 차원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뭘 말하는 거냐?

지금 보시면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이게 바로 영향력의 한계에요.

그대가 의롭게 산들 하나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느냐?

하나님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9절에 보면 사람은 학대가 많음으로 부르짖으며 군주들의 힘에 눌려 소리치나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며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자가 없도다.

11절까지 계속 읽어보시면 땅의 짐승들보다 우리를 더 가르치시고 하늘의 새들보다 더욱 지혜롭게 하시는 이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이도 없다.

 

이게 무슨 말이냐?

군주가 압제해서 당장 고달프니까 하나님을 찾는다.

다시 말하면 내 고난과 내 감정에 겨워서 하나님을 찾는 자는 있는데 객관적으로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내가 찬양할 수 있게 하는 자, 이게 그 말입니다. 밤이라고 하는 말이 상징적인 말이에요.

밤과 같이 깜깜한 고난 가운데 있을 때라도 내게 찬양을 하게끔 허락하시는 자, 나를 짐승보다 더 지혜롭게 하시고 새들보다 더욱 더 많이 가르치시는 그 하나님.

다시 말하면 내 감정에 겨워서 부르짖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감정 밖에 나라는 세계 밖에 계시면서 얼마든지 고난 속에 있는 나에게조차 하나님이 계시는 그 세계의 평강을 내게 허락하셔서 찬양하게 하실 수도 있는 그런 하나님.

객관적인 하나님, 나라는 찻잔 밖에 계신 그 하나님을 찾는 자가 누가 있느냐? 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맞잖아요, 여러분. 이 얘기가.

 

지금 욥이 하나님께 들으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재물을 허락하셨지만 재물로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아주아주 건실하고 훌륭한 10자녀를 주셨지만 그 자녀로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여겼어요. 욥은 31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러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다 환란이 오고 고난이 옵니다.

그 고난의 환경 속에 꽉 붙잡혀있는 거예요. 지금 마음이.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당연하지요.

그러나 엘리후가, 이론과 지식에 충실한 이 사람이 논리적 차원에서 얘기합니다.

논리의 차원.

논리라는 건 여러분, 차가운 거예요.

현실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따뜻한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게 논리입니다.

논리가 차갑고 싸늘하고 재미없어요. 정서적인 데가 없는 것이에요.

그러나 논리의 강점은 인간의 사사로운 감정에 매이지 않고 분명하게 칼처럼 들이대면서 잘라낼 것을 잘라내고 진단할 것을 진단해내는 그런 강점이 바로 논리에 있습니다.

논리라는 게 차갑고 매섭고 정말 비인격적으로 보일 때도 있고 하지만 이런 기능이 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뭐 외과의사가 자기 아들, 수술 못해요. 자기 딸도 수술 못하고. 손이 떨려가지고.

그런데 남의 딸, 남의 아들은 쫙쫙 잘 째지 않습니까? 이런 게 있어야 되요. 이런 게.

제가 사업을 안 해본 게 다행이에요. 어떤 면에서는.

사업을 해봤더라면 사업한 사람의 감정에 이입이 돼버려요. 같은 처지가 돼버려요.

그러면 하나님말씀을 말씀대로 들이대지를 못합니다.

내 감정자체가 이미 하나님말씀을 왜곡해버려요.

아이, 참 힘든데. 그 힘든데서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하려면, 하나님을 쫓아가려면, 아, 안 되는데.

목사가 세상경험이 많아야 된다고 하는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려요.

세상경험이 많으면 하나님말씀이 왜곡될 가능성이 큽니다.

말씀은 말씀대로 전해야 되요. 왜?

말씀을 듣는 자에게 일어나는 역사는 하나님 몫이니까.

그런데 지레 앞서서 목사가 아예 걱정을 해줘버려요.

그리고 위로를 해야 되겠다. 이래 버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어쨌든 욥이 지금 이 당하고 있는 고난에 마음이 잠겨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께서 풍랑을 만나셨을 때 제자들과 다른 것은 제자들은 풍랑의 현실에 마음이 잠겨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풍랑이 일어나는 찻잔 밖으로 나가버리신 거예요. 마음이.

하나님의 손위로 올라가버린 겁니다.

그래서 엘리후가 말을 하는 거예요.

전부 압제받고 학대받고 어려울 때 자기감정에 겨워 부르짖지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그런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와 찬양과 노래를 허락하실 수 있는 분이다. 왜?

당신 자신이 있는 세계는 평강의 세계니까. 우리 마음이 그쪽으로 갈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평강을 줄 수 있다.

논리와 이론을 지식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구약시대 때 이렇게 살아본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엘리후 자신이 이렇게 살았을까요?

아니에요.

주님의 십자가사건이전에 누가 마음이 지금의 현실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있었겠습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찻잔을 빠져나올 수 있는 거지.

거기서 못 빠져나오고 있는 상황.

그런데 이론은 있는 거예요. 이론은.

마음이 하나님께 갈 수만 있다면 당연히 밤처럼 새까만 고난이 주어질지라도 노래하게 하실 수 있다.

그러나 욥, 너는 지금 너의 고난의 현실 속에 잠겨있으면서, 잠겨있으면서 객관적인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그에게로 마음을 돌리지 못한 채, 너의 고난 안에 잠겨있으면서 고난을 주신 하나님이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라고 하나님 쪽을 반성하고 있지 않냐? 나 자신을 반성하지 않고. 말합니다.

오해도 있습니다마는 엘리후의 말이 맞는 것은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 괴로움, 단지 나라는 마음의 찻잔 안에서 일어나는 태풍이라는 겁니다.

 

하늘아버지가 다스리고 계시는 여러분의 삶 전반에 걸쳐서는 얼마든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붙들고 평강과 샬롬의 세계로 이끌어갈 수 있다는 것이에요.

그 마음이 빠져나오세요. 주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태풍과 같은 그 여러분의 현실 속에서 빠져나오고 보면 아, 내가 그렇게 고민했고 내가 그렇게 걱정했던 지금의 이 현실, 나는 꼭 죽을 줄 알았어요. 태풍이 몰려와서 집이 날아가 버리고 내가 이제까지 쌓아오는 게 다 무너지는 줄 알고 내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를 꼭 붙잡고 태풍 속에서 견디다 보니까 어느덧 그 태풍이 일어난 찻잔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밖에서 보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그 찻잔속의 태풍을 견디지 못해가지고 자살해버리고 마는 겁니다.

 

그리고 또 찻잔속의 평안이에요. 찻잔속의 평안. 찻잔속의 평안이고 진짜 찻잔 밖에서는 태풍이 불어오는 겁니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큰일 나겠어요.

그런데 거짓선지자들이 뭐라고 얘기하느냐?

평안하다, 평안하다, 얘기한다는 것이에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여러분.

긍정의 힘, 나는 요즘 이 시대에 거짓선지자의 대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아니, 죄악의 덩어리가 인간이에요. 죄악의 덩어리가.

잠시도 십자가사건을 마음에서 잊어버리면 이 속에서 지하 감옥에 숨겨져 있던 죄악의 괴물이 우리를 확 점령해버립니다.

그런데 뭘 긍정하라는 겁니까?

이 세상에 긍정할 게 뭐가 있습니까?

이 세상을 긍정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분뿐이세요.

내가 부정해서 버려버린 이 세상, 나 자신까지도 내가 부정하고 하나님께로 가면 하나님이 긍정해주시는 것이지.

어떻게 우리가 우리를 긍정합니까?

어디서 그런 못된 버르장머리를 배웠을까요? 영적으로.

 

제가 여러분들, 아침에 좀 과격한 말을 계속 써요.

이 욥기가 너무 우리의 신앙의 면모를 정말 면면이 파헤치고 있기 때문에.

어제 아침에는 변신과 병신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어요.

병신이라고 하는 말이 과격해보입니까, 여러분? 그럴까요?

우리의 영적현실, 우리의 영적인 위상을 지금 생각해보면 밖에서 지금 태풍이 몰아오고 있는 거예요. 태풍이.

우리 교회들의 현실을 보면.

자본주의에 먹혀버린 교회의 현실, 풍요와 다산의 바알숭배로 가득차버린 교회현실, 이 현실 속에서 재정 많이 들어오고 당회 튼실하고 제직회 튼실하면 교회가 괜찮은 건 줄 알고 교인이 몰려오면 되는 건 줄 알고 있어요.

이게 지금 찻잔속의 안정입니다. 태풍이 몰려올 수 있다는 것이에요.

내가 병신인 걸 모르고서야 어떻게 빠져나오겠습니까?

다 긍정하재요. 자꾸.

내가 영적으로 병신이라는 걸 알아야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죽을 거 아닙니까?

긍정하래요. 그런데. 원하고 소원하는 거 구하라는 겁니다.

기절할 일이죠.

 

너무너무 존경했던 목사님께서. 제가 신학생부터.

교회가 크고 굉장해지고 몇 백개의 이벤트가 맨 날 돌아간대요.

그러다 보니까 그분이 마음이 변하셨는지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원을 무조건 구하자는 거예요. 그러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정신 나간 소리를 하게 되셨는지 모르겠어요.

사람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셔도 적당히 주셔야지, 이 세상 걸 너무 많이 주시면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먹혀버리고 마는 거라고 봐요. 먹혀버리고 마는.

우리의 평안, 찻잔속의 평안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태풍, 찻잔속의 태풍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십자가 붙드시면 긍정할 요소가 하나도 없어요.

내 생각도, 내 판단도, 누구에 의한 어떤 판단도, 긍정할 만한 요소가 하나도 없어요.

깡그리. 깡그리 부정하세요.

주님의 십자가는 깡그리 죽어버리는 겁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완전히 죽을 때 찻잔 바깥으로 하나님 계신 곳으로 나가서 태풍을 몰아치시는 하나님의 태풍이 끝날 수도 있고 또 진정한 하늘의 평강을 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찻잔 속에서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고 있는 우리의 잘못된 신앙. 하나님이 태풍으로 몰아치실 때 얼른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내게 주어져있는 모든 좋은 것들, 세상의 좋은 것들, 마음에서 다 버리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려야 태풍이 멈춰질 것이에요.

또 지금 당하고 있는 환란이 주어진다. 다 뺏어 가신다.

이때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역시 바깥으로 나와야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http://www.lifestyle01.com/index.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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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진법 선교회 말씀들
글쓴이 : sun-ligh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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