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음악치료학

142장 시온에 오시는 주

늘찬양 2011. 4. 16. 00:14

                  142장 시온에 오시는 주

                      마 21:9,2011.04,17.늘찬양교회

 

‘시온에 오시는 주 호산나 찬양하며 내 주를 맞이하리 우리 주님 오시는 날 호산나 찬송하리’가 3번씩이나 반복되어 나오는 반복 강조법을 써가며 ‘두 손들고, 종려가지 손에들고, 모든 백성 노래하며’, ‘내 주를 소리 높여 경배하자’는 종려주일 찬양으로 한국인이 작시․작곡한 찬양입니다. 작사자는 홍안의(1936~ )이며 작곡자는 부산 출생, 부산 대동고, 영남신학대학교 종교음악과(작곡전공)졸업, 한국작곡가회 이사, 한국교회음악연구회 회원, 한국찬송가연구소 작곡분과위원, 한국음악지도협회 부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종덕(1958~ )교수입니다.

 

1절 시온에 오시는 주 호산나 찬송하며

     두 손 들고 기쁨으로 내 주를 맞이하리

     겸손히 나귀타고 우리 주님 오시는 날

     내 주를 소리 높여 호산나 찬송하리

 

1절, 두 손 들고 호산나 찬송하며 나귀타고 오신 주님 맞이하였듯이 겸손히 주를 맞이하리.

1절에서 눈여겨 볼 대목은 겸손히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나귀 새끼를 타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류의 구원자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실 때 기왕이면 승리와 개선의 상징인 군마를 타고 수천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위풍당당하게 입성하시지 왜 나귀 그것도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첫 번째 이유는 바로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자신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마 21:5) 하나님과 죄인 된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 겸손의 왕으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겸손한 왕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의 권세와 권위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러한 주님께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겸손하신 성품으로 낮아짐의 방법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들의 눈높이에 맞춰 주신 것입니다(요 10:17-18, 빌 2장).

당시 나귀는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타고 다니는 동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깊은 친근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분이로구나! 우리 편이구나!” 생각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예수님을 환영했을 것입니다.

한때 중국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서민적인 행동이 중국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입던 낡은 점퍼를 입고 다니고, 학생들이 보낸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하고, 공장에 시찰을 가면 여공들과 공장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그래서 선전(深川)이라는 곳에서는 환경미화원들이 원자바오 총리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오는 예수님에게서 그 이상의 친근미를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두 번째 이유는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에 대하여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약 오백년 전인 B.C 520-518년경에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되었습니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마 21:4-5, 슥 9:9)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스스로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친히 준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3절 말씀에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3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예수님은 맞은편 마을로 가면 나귀새끼가 있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예수님은 자신이 탈 나귀를 예루살렘에 도착하시기 오래 전에 이미

친히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나귀는 거칠고, 고집이 세고, 제멋대로인 동물입니다. 사실 나귀 보다는 말과 낙타가 더 멋있고 값이 나갑니다. 그럼에도 나귀를 타신 것은 하나님께서 나귀같이 별 볼일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셔서 이 땅에서 값지고 귀한 존재로 세워주신다는 영적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자녀로 불러 주셨고 귀한 존재로 여겨 주셨습니다. 주님의 일꾼으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본받아 누가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며 거들먹대기보다는 섬김과 순종과 나눔의 모습으로 이 땅에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다 겸손의 나귀 새끼를 타시기 바랍니다.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 명하신 자리까지 온유함으로 나가시는 은혜가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접하고 인정해주느냐에 따라 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 를 더 소중히 여기고 가치 있게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겸손하게 “시온에 오시는 주, 겸손히 나귀타고 예루살렘 성에 오신 우리 주님을 생각하며 두 손 들고 기쁨으로 소리 높여 호산나 찬양하며”(찬송가 1절) 영광 돌리는 종려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2절 시온에 오시는 주 호산나 찬송하며

     종려가지 손에 들고 내 주를 맞이하리

     만왕의 왕이 되신 우리 주님 오시는 날

     내 주를 소리 높여 호산나 찬송하리

 

2절, 종려가지 손에 들고 만왕의 왕 맞이하였듯이 호산나 찬송하며 주를 맞이하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호산나!”(마 21:9, 요 12:13)하며 환영하였습니다. 그래서 2절에서는 종려주일의 의미와 종려나무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고난주간을 시작하는 전 주간을 종려주일이라고 하는데 종려주일의 유래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며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 21:9)는 말씀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종려주일(Palm Sunday)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이번에는 종려나무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야자수라고도 이름하고 종려나무라고도 하는 이 Palm Tree는 애굽이나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에서 주로 자라는 나무인데 옛적부터 셈족은 이 종려나무를 아주 귀히 여겼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종려나무 같고 백향목 같이 번창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시 92:12).

이렇듯 의인을 종려나무에 비교한 이유는 종려나무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어서입니다.

우선 종려나무는 시원한 정취를 우리 마음속에 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가까운 제주도만 가도 길가에 멋진 야자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있는데 그런 야자나무를 보면 왠지 마음이 푸근해지고 아름다운 남극의 정취를 느끼게 됩니다. 시원하고 품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팔레스타인 지역은 날씨가 뜨겁고 무척 건조합니다. 그늘이 그립습니다. 그런데 이 사막과 같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종려나무가 야자나무를 대신하여 오아시스를 이루며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얼마나 종려나무를 좋아하겠습니까? 더욱이 종려나무는 아주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바람이 불 때 많이 넘어가는 것 같지만 곧 제 자리에 돌아옵니다. 반면 다른 나무들은 바람이 불 때 뿌리가 약해서 무너지고 쓰러지는데, 이 종려나무는 뿌리가 깊고 든든하기 때문에 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의인이 종려나무와 같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나무가 넘어졌다가도 쓰러지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을 잘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은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나는 칠천팔기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또 종려나무는 대추야자라고 하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 야자나무의 열매는 대추야자라고 하여 식용에 아주 유익하고 수출도 하며 그 잎으로는 자리와 바구니들을 만들며 대추씨는 갈아서 짐승의 먹이를 했습니다. 이 야자나무는 아라비아 사막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무인 것입니다. 사람이 물도 마셔야 되고, 소금도 있어야 되고, 당분도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단 것이 없는데 이 대추야자는 아주 달되 꿀같이 답니다. 그래서 역대하 31장 5절의 말씀에 나오는 꿀이라 하는 것은 이 대추야자를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그 껍질을 벗기고 잘 가공을 해서 모으면 그것이 꿀처럼 먹을 수 있는 단 과일이 되는데 그 과일이 풍성하게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이 열매는 하나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 한 덩어리가 열려서 그것이 사람들에게 참으로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의인이란? 믿음의 사람은 보기만 좋은 것이 아니고, 연단 속에서 넘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세월이 가면 갈수록 좋은 열매를 맺고, 단 열매를 맺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익하고 좋은 야자나무! 이 종려나무를 가리켜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환영하였다 하여 종려주일이라 하는 것입니다. 원래 옛적부터 이 종려나무는 영적인 의미를 주는 나무였습니다. 시편 92편 12절에 보면 종려나무는 번영과 아름다움의 상징이었으며, 또 오래전부터 이 나무는 거룩한 나무로 다루어졌으며, 초막절에는 절기동안 날마다 회당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특히 마카비 시대(BC 166-63)까지 유대를 다스린 하스모니아 왕조라고 부르는 마카비 시대에는 종려나무를 승리의 상징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정리하면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노래하며 예수님을 환영한 것은 예수님의 의인되심과 생명의 주로 승리의 주인공이 되실 주님을 환영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일생동안 환영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을 고치며 섬김과 희생의 도를 선포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지만, 사람들은 자기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대로 받지 아니하고 대적하면서 예수님을 끊임없이 핍박했습니다. 예수님은 출생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어린 유아기를 애굽에서 피난생활하며 보냈습니다. 그리고 나사렛에 돌아와서 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갈릴리 지방을 다니시면서 말씀을 증거할 때에 사람들은 저를 귀신들렸다고 말했습니다. 시기와 질투로 저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한 번도 박수를 받거나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지를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이들이 예수님을 찬양하고 다녔습니다. 영광을 받으실 분인데도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환영할 분인데도 그를 영접치 아니하고 자기 땅에 오매 저를 영접치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이제 마지막 가는 길에서 십자가를 지실 준비를 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무거운 마음으로 가실 때 사람들이 그를 환영하고 영접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은 살아계신 주님! 인간적 짐을 지고 구속사를 위해서 가신 예수님에게 최후의 격려와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뒤늦은 모습이지만 이제라도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도 “시온에 오시는 주, 호산나!”(1-3절) 찬양하며 만왕의 왕으로 승리의 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을 영접하고 찬송하면서 사순절 기간을 멋지게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절 시온에 오시는 주 호산나 찬송하며

     모든 백성 노래하며 내 주를 맞이하리

     만민의 구주되신 우리 주님 오시는 날

     내 주를 경배하며 호산나 찬송하리

 

3절, 모든 백성 호산나 찬송하며 시온의 주 맞이하였듯이 호산나 경배하며 주를 맞이하리.

마지막 3절에서는 시온에 오시는 주 호산나 찬송하며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귀한 모습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합니다.

마태복음 21장 9절에 보면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질러 가로되”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수많은 군중들이 나와 예수님을 맞이하였습니다. 몇 명인지 정확하게 언급은 하지를 않았지만 역사적인 자료에 의하면 250만 명 정도 모였을 것으로 봅니다. 당시 유월절 기간에 사용된 희생양은 약 25만 마리였다고 하니 1마리에 10명을 기준으로 한다면 250만 명 정도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많은 숫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이라 불렀고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마 21:9)

이라고 칭송을 했습니다. 그들이 이토록 예수님을 환호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모세와 같은 민족의 해방자로, 정치적인 왕으로 기대하고 외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노래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광에 대한 기대에서 나왔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민족을 해방할 메시아가 될 줄로 알고 그들은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예수님께서 타실 나귀에 자신들의 겉옷을 얹고, 자기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펴고 흔들면서 “호산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외칩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은 곧 왕의 자리에 오를 것으로 기대하고 나름대로 꿈을 지니고 참여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군중 심리에 휘말려 일시적 감정으로 막연히 “호산나!”외치며 행렬에 참여한 무리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불어 거기에는 진심으로 주님을 맞이하며 찬양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많은 사람들의 외침과 찬양을 들으며 나귀를 타고 가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 외치는 무리를 향해 답례의 손을 흔들며 위풍당당하게 가셨을까요? 예수님 자신은 지금 가는 길이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기 위하여 얼마 후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위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하여야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 마음이 그렇게 편치는 않았을 것입니다. 인류의 구원이라는 대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기 위한 고난과 가시밭길을 시작하는 행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려주일, 이 날은 고난주간의 시작이요, 슬픔과 탄식의 시작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종려주일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겸손과 순종의 종으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을 가지고 엄숙하게 보내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 순간 “호산나!”외치는 무리가 아니라 고난주간의 참 의미를 몸에 새기며,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성도로서의 모습이 되도록 은혜를 간구하며 묵상과 감사로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는 종려주일과 고난주간 그리고 부활주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특별히 찬양교실과 찬송가 큐티를 통해 종려주일의 은혜와 기쁨과 영광을 찬양의 감사 제사를 올릴 수 있도록 적극적인 참여를 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즉 우리에게서 찬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이사야 43장 21절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려주일 만민의 구주로 오신 주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찬양하며, 또한 주님을 나의 왕으로 선포하며, 주의 백성으로 온전히 나를 다스려주시고 사용하옵소서! 간구하며 찬양모임에 참석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