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찬양강해

75장 주여 우리 무리를 (47장)

늘찬양 2014. 7. 28. 23:38

75장 주여 우리 무리를 (47)


성경 본문: 67:1,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찬송 묵상: 무리를 불쌍히 여기사 복 내려 주신 하나님

 

찬송 요약

 

1, 무리를 불쌍하게 여기사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을 뵙게 하소서

2, 주의 구원을 널리 알게 하시니 천하만국 백성들 주께 찬송합니다.

3, 주가 다스리시고 심판 심판하시니 나라들 즐기며 기쁜 노래합니다.

4, 땅에 나는 모든 것들이 주의 크신 은혜니 백성들 주께 찬송합니다.

5, 하나님이 복을 내려주시니 땅의 모든 만물들이 주를 경배합니다.

 

찬송가 해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알렉산더 피득(A.A.Pieters;1872-1958)목사가 1898년 작사하였다. 남부 러시아의 유대인 상인 아들로 독일어,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그리고 영어를 구사하였다. 일본 나가싸기에서 미국선교사를 만나 찬송가 연구와 성경번역에 힘쓰게 되었고 23세에 한국에 도착하여 피득으로 개명하면서 한국복음화에 힘쓰는 선교사가 되었다. 곡은 로웰 메이슨 등과 함께 음악공부를 하고 50여권의 음악서적을 출간하였으며, 1854년 그의 형과 합작하여 '브래드버리 피아노회사'를 창립하기도 한 윌리암 밧첼더 브래드베리(W.B.Bradbury;1816-1868)가 작곡하였다.

 

찬양 플로로그

 

1절 주여 우리 무리를 불쌍하게 여기사

크신 복을 주시고 주의 얼굴 뵈소서

 

1, 무리를 불쌍하게 여기사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을 뵙게 하소서

 

누가복음 712절에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함께 나오거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이 여인의 슬픔이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 슬픈 사건임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도 죽은 자를 멘 관은 나인 성에서 나오고 있고,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제자들은 나인 성을 향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세상에는 절망과 좌절의 슬픔과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생명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차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 밖에 없는 과부의 아들이 죽어나올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13) 이 같은 인사는 인간적인 동정심에서, 의례적인 인사치레로, 뜻 없이 내뱉은 헛소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가축하합니다. 행복하세요!” 또는 참 안됐습니다. 용기를 내십시오.하는 말을 습관적으로 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길가다 좋은 소리 한번 해 주고, 차려주는 사자 밥이라도 공짜로 얻어먹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정말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안타까움 마음에서 아가페 적인 사랑을 가지고 도와주고자 건네신 말씀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나인성 과부가 혈루증 여인이나 억울한 사정을 탄원한 과부의 모습처럼 주님 앞에 나아와 자기의 죽은 아들을 살려 달라고 통사정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예수님께서 나서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시면서 여인이여 울지 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점을 보면서 주님께서 독생자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사 죄 많은 우리를, 그것도 한 번도 주님을 본적이 없는, 우리들을 살리시고자 십자가에서 대속의 주로 피 흘려 돌아가신 주님의 사랑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이해가 갑니다. 이것이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사 크신 복을 내려 주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구체적으로 크신 복은 예수님께서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14) 명령하심에 죽었던 청년이 살아나서 어머니 품에 안기는 생명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갈릴리 부근, 나인성 밖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고 슬퍼하며 애통함 속에 힘없이 상여를 뒤따르는 과부의 모습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아닙니까? 비록 가족 중에 죽음을 당한 일은 없지만 그보다 더한 가족의 갈등과 아픔과 상처 그리고 사회적인 고통과 아픔 속에 힘들고 무거운 세상 짐을 지고 마지못해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과부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죽은 아들을 살려주신 주님께서 주의 얼굴을 구하며 주께 나가는 저와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사 치유와 회복의 역사로 축복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찬송 예화: 조지 워싱턴 커버

 

9남매가 건강하게 자라서 객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집을 떠나 있는 자식들의 편지는 그저 가뭄에 콩 나듯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마음은 집에 있는 아이들보다 떠나 있는 자식들 곁에 늘 가까이 가있는 듯하셨. 간혹 어머님은 "오늘은 허리가 유난히 아프구나" 하곤 하셨는데 그 날은 십중팔구 우리 형제들 중 누군가의 태어난 날이었습니다. 자고로 모성애는 실로 변질할 수 없는 본능에 가까운 것인 듯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3,700여 년 전의 사람인 이사야의 말은 참으로 적절한 것 같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배에서 태어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49:15) 이 말에 무슨 반론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그 무슨 사랑이 모성애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선지자는 계속 말을 잇고 있습니다.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사랑하고 돌보심은 모성애 그것보다 더한 것입니다. 우리네 어머님이 혹 우리를 잊어도 하나님은 늘 기억하고 계십니다. "아무래도 하나님이 나를 버렸는가봐요"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계신가요" 등등 이런 얘기들은 진실로 뭘 모르고 하는 얘기들입니다.

 

<참고: 인터넷 목회자 정보클럽>

 

관련 찬송

 

거룩하신 하나님 77

고요히 머리 숙여 62

다 감사드리세 66

오 만세 반석이신 74

온 천하 만물 우러러 69

 

나의 고백 및 적용

비움

 

 

채움

 

 

나눔

 

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가 깊은 좌절과 절망과 슬픔과 고통 속에 있을지라도 또한 죄 가운데 있을지라도 무리를 불쌍히 여기사 위로하시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셨듯이 우리들을 건져주시고 고쳐주소서 주의 얼굴을 구하며 나가오니 긍휼과 크신 축복을 베풀어 주옵소서!

 

말씀 관주

 

1

무리를 불쌍히 여기사 *54:7-8,7:13,18:13,9:15-16,2:4-7

2

구원을 널리 알림 *38:20,19:10,딤전 2:4,7:10

천하 만민 주 찬양 *57:9,66:8,3:9,15:11,5:19-20

3

다스리고 심판하시는 주 *5:30,살후 1:5-9,딤후 4:1,5:9

4

주의 은혜로 식물 성장 *11:14,104:13-15,10:1,6:30

5

복 주시는 주 *22:17,17:25,1:3-6,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