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찬양강해

87장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늘찬양 2014. 8. 6. 23:44


 

87장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87)


성경 본문: 45:8 “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찬송 묵상: 내 주님 입으신 귀한 옷 나 만져보았네

 

찬송 요약

 

1,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참 아름다워라 그 향기 내 맘에 기쁨 되도다.

2, 내 주님 쓰라린 고통 다 견디셨도다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3, 죄악에 빠진 나 내 주님의 귀한 옷 만짐으로 깨끗하게 되었네

4, 내 주님 하늘나라 문 열어주실 때 나 들어가 영원히 살겠네

 

찬송가 해설

 

작사작곡은 영국 요크셔 태생으로 5세 때부터 음악공부를 시작하여 15세 때 교회의 피아노 반주를 담당할 절도로 뛰어난 교회 음악가이자 미국 연합 장로교회 총회관리부장까지 지낸 헨리 바라클러프(H.Barraclough;1891~ )박사가 시 45:8 말씀에 근거하여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참 아름답고 향기가 넘쳐난다는 채프만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동받아 만들었다.

 

찬양 플로로그

 

1절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참 아름다워라

그 향기 내 맘에 사무쳐 내 기쁨 되도다

시온성보다 더 찬란한 저 천성 떠나서

이 세상오신 예수님 참 내 구세주

 

1,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참 아름다워라 그 향기 내 맘에 기쁨 되도.

 

주님이 입으신 옷은 어떤 옷일까? 찬송가 가사에는 그 옷은 참 아름답고 향기 넘쳐넘쳐 내 맘에 기쁨 되도다.”고 했는데 과연 내 주님 입으신 옷은 그랬을까요? 마가복음 1517

절에 보면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군인들은 자색 옷 즉 홍포를 입혔습니다. 본시 홍포는 로마의 군인들이 군복에 걸치는 붉은 색의 외투였습니다. 더불어 부자들이 자신들의 부와 권세를 자랑하기 위하여 홍포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장군들과 황제의 옷에 붉은 색이 많습니다. 그런데 로마 군병들이 자원해서 예수님에게 자색 옷을 입힐 리가 없습니다. 그들의 속셈은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원래 예수님께서 입으신 옷은 채찍질로 인하여 피투성이가 되었고 곳곳이 너덜너덜 찢겨져 있었습니다. 그런 옷을 강제로 벗길 때 우리 주님은 상처의 후유증으로 심한 고통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군인들은 즐겼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을 다 벗긴 후에 저들은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유대인의 왕을 상징하듯 왕복을 입혔습니다. 그런 후에 왕관으로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웠습니다. 그리고 오른 손에는 왕의 홀로 갈대를 들렸습니다. 예수님을 왕처럼 꾸민 것입니다. 공회 의원들은 예수님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고 희롱하더니, 군인들은 예수님을 왕처럼 꾸미고 희롱했습니다. 그런 조롱과 놀림의 옷이 자색 옷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입으신 홍포 즉 자색 옷이 아름다워 보일 리가 없습니다. 누가 봐도 우스꽝스런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운 옷의 모습은 군병들이 입혀준 자색 옷이 아니라 평상시 입고 다니셨던 예수님의 옷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입으신 옷은 통옷이었습니다. 그 당시 일반인들은 멋지게 제단을 해서 각종 수와 아름다운 무늬를 넣은 색상이 고운 옷들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입으셨던 옷은 고운 모양도 없는 솔기도 없는, 붙인 데가 없는 다른 것과 짜 맞춘 것이 없는 하나의 통으로 된 옷을 입고 계셨습니다.

제자 요한은 요한복음 1923절에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렇게 명기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옷은 성품을 상징합니다. 옷은 우리의 인격적 삶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일차적 기준은 외모입니다. 특히 옷이 판단 기준이 됩니다. 옷은 그 사람의 직업이나 인격이나 현재의 상태를 표현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이 혼인잔치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을 봅니다(22:12). 그러므로 통옷에는 분명한 진리의 아름다움이 숨겨있을 것입니다. 통옷의 핵심은 하나로서의 완전함입니다.

 

예수님의 옷은 짜깁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은 짜깁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며 사람입니다. 부분적으로 하나님이고, 부분적으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사람입니다. 참 하나님이며 동시에 참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전 삶은 완전한 하나님의 삶이며 동시에 완전한 사람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배고파하시고, 피곤하시고, 십자가상에서 아파하셨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하나님입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5000명을 한꺼번에 기적으로 먹이시고,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친히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람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삶은 붙인 데가 없고 솔기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전 인격은 완전한 성품의 삶입니다. 나실 때부터 승천하실 때까지 조금도 변치 않은 삶입니다. 세상과 타협 없는 하늘과 세상이 일치된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옷은 갈라지고, 나누어지고, 짜 맞춘 옷입니다. 하늘의 옷이 다르고, 지상의 옷이 다릅니다. 교회에서의 삶과 세상에서의 삶이 괴리 관계에 있습니다. 천국과 세상을 이원화하여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삶이 아닙니다. 통옷의 삶이 아닙니다. 주일의 삶과 사회에서의 삶을 이원화하여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통옷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옷과 세상의 옷은 같아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너무 자주 옷을 갈아입습니다. 주일의 옷을 거룩한데 평일의 옷은 세속적입니다.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보이는데 사회에 나가면 보이지 않습니다. 어느 샌가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조각 난 옷 때문에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의 짜깁기한 옷 때문에 세상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진정한 거룩의 삶은 교회의 삶만이 아닙니다. 세상의 삶까지입니다. 이런 마음 때문에 바라클러프 작사자는 향기라는 단어를 써서 주님의 아름다운 옷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찬송 예화: 청소부 옷을 입은 어머니

 

어린아이가 몹시 아팠다. 어머니는 아이를 병원으로 데려 갔고 의사는 곧 수술했다. 그 아이는 어린이 병동에 입원했는데 그 곳은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이가 보고 싶어서 초조해하고 안타까워했다. 우연히 어머니는 청소부의 옷과 물통과 빗자루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 옷을 입고 물통과 빗자루를 들고 병동으로 들어갔는데, 아무도 그 여인을 주의 깊게 보거나 들어오지 못하게 하지는 않았다. 거기에는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아파서 울고 있었다. 그 여인은 자기 아이도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부드럽게 노래를 불러 주었다. 얼마나 부드러웠던지 모든 아이들이 다 편안하게 잠들었다. 하나님과 동등하셨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비우고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이 세상에 들어오셨다. <참고; 채수덕 예화/ 짧은글 긴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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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가 눈에 보이는 옷의 아름다움에 취해 진실함과 순수함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하소서 낡고 보잘 것 없는 청소부의 모습 속에도 장난치는 어린이의 흙묻은 옷자락에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계신 그 큰 사랑을 좇아 나타날 수 있는 진실한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나 자신의 옷이 너무 특출하지 않고 평범하도록 도와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