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주일설교

포기에 대한 두려움

늘찬양 2023. 8. 26. 17:53

포기에 대한 두려움

14:25-33,2023.08.27.늘찬양교회

 

 

어제 페이스북에 무엇이 더 중한디 ....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선배답지 않게 마음과 생각이 젊고 순수하다고 생각하여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던 목사님이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리셨다.

 

분명 정상이 아니다. 몇 달 후면 나이 칠십인데

개척자의 정신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니 ...

오늘은 간판을 맞추었다. 그냥 성도들 부담 안 주고

빚지지 않으려고 애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유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시며...

간간이 연로하신 목사님의 교회에 갑작스럽게 생긴 일로 빈자리가 생기면 설교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하여 어려운 교회를 찾아다니시는 모습을 보며 ...

 

목사님 존경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은 있지만, 담임목사가 없어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농촌교회, 도시 교회들이 많이 늘어날 것입니다. 그런 교회를 순회하면서

무보수로 말씀을 전하는 그런 일꾼들이 필요한데 목사님이 선두에 서서 이런 일을

하시니 참 감사합니다.”며 댓글을 달았는데...

 

느닷없는 상가교회를 임대하여 70세에 개척교회를 시작한다니...

공유교회를 하면서 모든 것이 무료였지 않았는가?

전기세도 ... 청소도 ...심지어 물. 커피까지도...

미안해 몰래 헌금함에 넣으면 귀신같이 아시고 다시 보내셨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길 삼 년여가 흘렀다. 교회 부흥(사람수)는 늘지 않은 아주 작은 교회지만

내 일생 가장 행복한 보금자리였다고 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돈을 모으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모은 돈으로 상가를 계약하고 지금 개척을 하신다고 한다.

 

오히려 나는 상가비 내는 것이 아까워서 그것을 개척교회와 공유하면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공유교회로 들어가 있다.

그런데 선교비도 받지 않아서 정말 아무것도 들어가는 것이 없다.

그래서 더 많이 선교도 하며 인생 3막을 준비할 수 있다.

 

나는 지금 묻고 싶다.

무엇이 더 중한디 ...”

교회개척이 그렇게 중요한가? 나이 70세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교회 개척 말고...

더 많은 섬김을 할 수 있는 길이 널려있는데 왜 교회 건물에 자신을 가두어 놓는지...

 

정말 교회 건물이나 교회 성장에 갇혀버린 목회자들을 바라보면 답이 없다...

지금도 답이 없다...

 

 

. 피터팬 증후군

 

포기의 반대는 집착입니다. 집착이라는 접착제로 삶이 과거에 고정되어 버린 사람들을 가리켜 '피터팬 증후군' 환자라고 부릅니다. 미국 심리학자 댄 카일러 박사가 1983'피터팬 신드롬' 이란 저서를 발표하면서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이 용어는, 책임 있는 자리로 나가기 싫어하는 '무책임', 이기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지나친 자기애', 유아기적 자기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는 '왕자 병', '마마보이' 등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포기해야만 할 것들에 집착하는 사람만큼 안쓰럽고 불쌍해 보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포기란 삶의 태도는 영적 세계에서도 무척이나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자격으로 제일 먼저 배와 그물을 버리라며 포기를 요구하셨습니다.

 

남태평양의 섬들에서는 이런 재미있는 방법으로 원숭이를 잡는다고 합니다. 나무에 줄로 묶어 놓은 여러 개의 야자 열매에 작은 구멍을 내고 땅콩을 잔뜩 넣어 두고 멀리 숨어서 잠시 기다리면 원숭이들이 땅콩 냄새를 맡고 하나둘 몰려옵니다. 주위를 살피다가 야자 열매 구멍에 손을 쑥 집어넣고는 땅콩을 한 줌 콱 쥡니다. 그때 사람이 줄을 들고 나타나서는 원숭이를 잡는 것인데, 원숭이들은 꽥꽥 소리를 지르고 펄쩍펄쩍 뛰기만 할 뿐 도망을 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야자 열매에서 손이 빠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땅콩을 놓아 버리면 손을 뺄 수 있는데, 땅콩을 포기해야 자기가 산다는 것을 이 원숭이들은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포기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원숭이들은 한 줌의 땅콩과 그들의 자유와 생명을 맞바꾸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포기'라는 단어를 싫어합니다. 우리 문화에서 '포기'라는 말은 '패배' 혹은 '좌절'이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포기해야 할 때 우울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러나 '포기'라는 단어에 대한 이런 부정적 생각들은 '포기'라는 삶의 태도에 대한 극히 단편적인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원숭이잡이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처럼, 포기야말로 우리의 삶이 성숙과 성장, 자유와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1:15)고 하였습니다. 욕심이 어디서부터 올까요. 집착입니다. 불행의 원인은 잘못된 집착에서 나옵니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지난 것이든 앞으로 일어날 그 무엇이든, 또 보이는 물질이든 보이지 않는 정신이든 그 무엇에게 붙잡혀 있다는 것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마약에 집착하면 몸이 순식간에 망그러집니다. 쾌락에 집착하면 가정이 파괴됩니다. 명예와 권력에 집착하면 사회가 혼돈에 빠집니다. 돈에 집착하면 사리 분별을 잘 못 합니다.

잘못된 집착은 금물입니다. 삶은 끊임없이 변화되는 것이지 고정된 사진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 세 번의 포기

 

제 인생에 있어 세 번의 커다란 포기 있었습니다.

 

신학교 입학

첫 번째는 신학교 입학으로 인한 직장과 전공 포기였습니다. 명지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직장 취업보다 중학교 과학 교사 자리가 먼저 나와서 교사로 출근하여 일하던 중 침신대 신학대학원 합격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저는 이번 기회를 놓치면 신학을 할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릴 수가 있다는 절박감을 가지고 무작정 진학을 하였습니다. 교사를 포기하고 신학교 입학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시련과 역경과 환란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정말 광야 3년의 훈련을 톡톡히 치렀습니다.

 

교회의 포기

여러 실패와 어려움의 좌절을 이겨내고 드디어 평택에 개척을 시작하였습니다. 개척 5년 만에 교회가 급성장하여 땅을 사서 지하 1층 지상 3층 총 260여 평의 교회를 건축하고 입당하는 축복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주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IMF의 이자 절벽 앞에 무너졌습니다. 그렇게 강제적으로 포기를 당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죽는 줄 알았습니다. 살 소망까지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위기 때 찬송가강해의 사명을 붙들고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5년의 과정을 거쳐 총 30년을 걸려 찬송가 강해를 다 마무리하는 기적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자격증의 포기

찬송가 강해를 마감하면서 인생 2막의 꿈을 펼치기 위한 대장정을 시작했습니다. 58세의 나이에 소방안전학과를 진학하여 소방. 위험물. 산업안전에 대한 기사 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그리고 소방시설관리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하여 만 63세 나이에 우석대 소방방재학과를 진학하였습니다. 그리고 위험물 기능장도 취득하였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7년을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916()에 있을 2차 실기시험을 포기하기로 하였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건강의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가 합격 이후에 삶의 주인공이 내가 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완벽보다 부족함을 택해 더 깊이 주님과 사귐을 갖기 위함입니다. 포기하고 내려놓으니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 포기의 영성

 

1. 사람의 자기 포기가 하나님의 시작

자포자기가 아니라, 자기 포기입니다. 즉 자기의 생각과 계획을 그리고 생명의 주체권까지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 권리는 내가 주님을 믿고 영접하는 순간에 이미 주님께로 이양된 것입니다. 다만 내가 순종하지 못함으로서 아직 내 것처럼 여기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제 나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함은 실제의 주인에게로 권리가 옮겨지는 것입니다.

 

신앙의 출발은 소유와 누림이지만, 신앙의 마지막은 포기와 내려놓음입니다. 그러므로 초보 신앙인들은, 믿음 때문에 얻은 것이 많다고 간증하지만, 신앙이 성숙하신 분들은, 예수님 때문에 버리고 포기한 흔적이 많다고 간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치명적인 약함을 아십니다. 다 포기해도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그것을 내놓으라 하십니다. 무엇을 건드리시면 우리가 꼼짝없이 하나님께로 나올 것을 아십니다. 어떤 치부를 드러내시면 우리가 겸손하게 설 수 있는지도 아십니다. 우리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오죽 잘 아시고 그렇게 하셨을까요?

 

, 예수 안 믿을까 봐. , 지옥 갈까 봐. , 교만하여 하나님과 사람을 무시할까 봐. , 기도 없이 내 힘으로 살까 봐. , 종교인으로 머물까 봐 하나님은 우리의 항복을 끌어내려 하십니다. 그 방법이 최고의 방법이기에 어쩔 수 없는 극약처방으로 몰고 가십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때는 포기로 인하여 죽을 것 같았는데 지나고 나면 있었던 것들이 감사와 축복이 되기도 합니다.

 

2. 포기가 응답이다

포기는 응답이며 회복의 은혜입니다. 포기는 응답과 치료를 가속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수없이 많은 축복과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지만, 더불어 예수님 때문에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 그렇게 갈등하고 힘들어합니까? , 그렇게 속상해합니까? 포기하지 못하고 집착에 연연하기 때문입니다. 집착의 욕심보다 포기의 은혜를 쫓아야 합니다.

 

함께 소방공부를 하는 소방서장출신 동창이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관리사 시험 포기하셨나! 도서관에 안오네요~~~” 그래서 포기했어요!”라고 답을 보냈습니다. 포기하였기 때문에 오늘도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과 함께 장어구이와 장어탕을 먹고 꽃구경까지 할 수 있었으며 저녁마다 아내와 함께 공원 산책길을 걸으며 대화할 수 있는 행복의 시간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자연을 통하여 들여오는 풀벌레 소리, 바람 소리, 개구리의 합창 등을 통하여도 주님의 임재와 사랑의 손길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축복이 신앙의 꽃이라면, 포기는 신앙의 열매입니다. 사람 대부분은 열매보다, 눈에 화려하게 보이는 축복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생명은 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열매 속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 없는 포기의 쓴 열매들을 통하여 생명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되고 진짜 '명품신앙인'으로 성화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길은 포기하면 열린다.

하나님의 길은 포기하면 열립니다. 하나님의 치유는 포기하면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포기하고 항복할 때 비로소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포기하라고 하심은 우리를 망하게 하심이 아니라 흥하게 하심이며 우리의 것을 빼앗기 위함이 아니라 더 주기 위함이며, 우리를 어렵게 하심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부자이면서도 물질을 포기했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부자이지만, 가난해도 물질의 종으로 산다면, 그 가난은 옳은 가난이 아닙니다.

 

포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포기는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은혜로는 가능합니다. 더 좋은 것이 생기면, 덜 좋은 것은 포기하듯이 주님이 더 좋으면 덜 좋은 세상 것은, 무엇이라도 저절로 포기하게 됩니다. 더 큰 은혜, 더 깊은 은혜 받으면, 포기 안 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포기하려 노력하지 마시고 포기되는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포기의 현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죽어야 살고 포기해야 얻는다.’는 단순한 진리를 마음에 품고, 포기와의 전쟁을 위하여 성소로 나아가 엎드립시다. 우리에게 아무리 크고 많은 문제가 있더라도 그것은 주님 앞에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문제는 내 자신입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못하는, 그래도 엎드리지 못하는, 그래도 매달리지 못하는 그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은, 우리가 엎드리는 시간이며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타이밍은, 내가 포기하는 순간임을 놓치고 살면 안 됩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주님을 따르는 신자들에게는 여러 가지 용기가 필요하게 됩니다. 죄를 끊는 용기, 버리는 용기, 주를 위해 바치는 용기,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는 용기 등입니다. 그 중에도 주님을 위해 버리는 용기, 포기의 용기가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신앙의 훈련은 하나의 버리는 훈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큰 복을 내려 주시기 전에 포기하고 버리는 훈련을 먼저 시킵니다. 이 버리는 훈련에 합격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큰 그릇이 될 수 없고 큰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 것을 버릴 수 있을 때 하늘의 진정한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쾌락을 버릴 수 있는 자에게 영원한 복락의 기쁨을 맛보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29~30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도 그저 쉽게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닙니다. 정든 고향의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갖가지 훈련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훈련은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라는 포기의 훈련입니다. 아브라함은 최종 포기의 훈련에까지 순종함으로써 믿음의 조상이 되어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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