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주일설교

빈 집의 비유

늘찬양 2023. 8. 12. 11:37

빈 집의 비유

12:43-45,2023.08.13.늘찬양교회

 

 

빈집은 항상 위험하고 흉물스럽습니다. 지금 농촌의 빈집과 도시의 빈 건물들이 방치되어 있어서 범죄의 장소로 또는 청소년들의 탈선의 장소로 오용되고 있다는 보도를 오래전부터 들었습니다. 앞으로 도시의 집중화 현상과 탈시골화로 인하여 빈집은 늘어만 갈 것입니다. 하루 빨리 빈집의 위험성을 알고 대응하지 않으면 큰 사회문제로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반면 도시의 집중화 현상으로 인해 현재 서울 강남 압구정도 30평 아파트 한 채 값이 237월기준 37억이라고 합니다. 강남과 비강남의 아파트 격차 또한 15억 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37억이란 돈이 어느 정도일까?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안정된 직장에서 한달 수입 3백만원을 받는 가장이, 매달 1백만원씩 꼬박꼬박 저축할 경우, 일년에 모을 수 있는 돈은 125십 여만원. 십년을 모아봐야 15천만원이 안됩니다. 다시말해, 매달 1백만원씩 저축을 해도 백년 가까이 모아야 12억이 되는데 37억은 언감생심 불가능의 수준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매달 백만원을 저축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우리 주위에 얼마나 될까요? 나아가 48백만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매달 백만원을 저축할 수 있는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한마디로, 정상적으로 부를 축적하여 서울 강남에 30평대 아파트를 살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요사이는 아파트를 구입해도 문제입니다. 철근을 빼먹은 소위 '순살 아파트'가 등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순살 아파트는 태풍이 오거나 지진이 나면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어렵게 장만한 아파트가 무너질 때 그 허탈감은 엄청날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외형중심의 대형화를 외치며 교회건축을 외친 결과 세계 기독교상 유래없는 교회성장과 더불어 대형교회들이 서울과 지방도시에 즐비하게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코로나19이후 또는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대형교회들이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 대형교회의 몰락

 

성경은 말합니다. 한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아가 살 곳을 찾아 봅니다. 살 곳을 찾지 못하고 옛날에 살던 그 사람에게로 찾아옵니다. 마침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까지 잘 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이 귀신이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욱 심하게 되었다. 이 악한 세대가 이렇게 되리라.”(12:43-45)

 

"이렇게 되리라" 미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모독하고 예수님을 거역한 사람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의 미래를 보여주는 실상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미래가 종국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그림처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멸망이라는 종말적 관점에서 빈집의 비유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젊은층들이 탈도시화로 인한 인구감소로 인하여 이미 시골 농촌교회들이 문을 닫고 있습니다. 나이 많은 어르신 몇 명으로는 교회살림을 꾸려갈 수가 없어서 목회자들이 시골교회를 떠나다 보니 빈교회 건물만 덩그러니 흉측한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도시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교회를 떠난 많은 교인들이 코로나 엔데믹시대를 맞아서 교회로 돌아온 숫자가 많지 않습니다. 그렇게 돌아온 교인들도 과거 형식주의 신앙, 맘모니즘 신앙, 합리주의, 물질주의, 개인주의에 머문다면 더 큰 교회 멸망이 기다릴 것입니다.

 

그 위험성을 빈집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비유는 당시 유대인들의 영적 상태를 날카롭게 지적한 것입니다. 우상숭배로 인하여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단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겉치레의 종교개혁으로만 끝나고 말았습니다. 물론 학사 에스라와 느헤미야 같은 사람이 영적 각성 운동을 펼쳐서 우상숭배로부터는 빠져 나왔지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율법학자를 중심으로 한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율법주의로 인해 유대인들은 그 이전보다 더 악하고 더러운 일곱 귀신에 들린 사람처럼 영적으로 참혹한 빈사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우상 숭배를 정죄할 뿐만 아니라 당시에 있어 헬라와 로마에서 성행하던 우상 섬기는 예식을 자기들은 하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시말해 자신들은 귀신 놀음도 우상숭배도 하지 않기 때문에 귀신으로 부터도 자유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스스로의 소극적인 의() 다시말해 살인하지도 않았고, 간음도 하지 않았으며, 도둑질도,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서 선 부자청년이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10:20)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이것이 빈집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000교회 목사입니다.”, “나는 000교회 장로, 집사입니다.”하면서 교회를 자신의 부족함을 치부하고 가리는 의의 옷으로 치부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 교회에서 장로, 집사로서 갖가지 봉사를 하고 예배를 참석하며 신앙생활 하는 것으로 참 좋은 신자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헌금 얼마하고 예배참석 열심히 하면 대대 자자손손 복을 받는다는 엉터리 설교와 죽도록 순종을 요구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그런 잘못된 것을 때려 부수고 새롭게 변화되지 않는 한 한국교회는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건물이 교회에 충성하는 헌신이 곧바로 하나님 앞에서 상급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착각의 신앙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보다 더 겉치레의 형식적인 교인들이 모여서 교회를 회칠한 무덤으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 한 마리 귀신이 일곱 마리 귀신을 데려와 주리를 틀듯이 더 많은 죽음의 영들로 가득찬 교회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 표적을 구하려는 사람들

 

본문을 시작하는 38절에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한마디가 기가막힙니다. 저들의 외형적인 문제로 형식적이고 합리주의 물질주의적인 문제로 교회가 빈집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모르고 기적, 표적을 보이면사람들이 다시 몰려들 것으로 착각하며 한국교회가 놀랍게도 엉뚱하게도 표적과 기적을 구하는 은사집회, 성령집회를 꾀하려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39절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악하다"는 말은 교활하기 짝이 없는 바로 악한 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기적과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출석하는 사람들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문제는 자신의 주변과 삶 그리고 가정은 변화시키지 않고 교회 일에만 충성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파생한 문제가 더 큽니다. 충성도 습관입니다. 귀신이 들어가도 단단하게 들어가 있는 한국교회입니다. 변화되지 않으면 무너집니다.

 

요나의 표적의 핵심은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성장의 욕심, 교회건물의 욕심, 직분과 명예에 대한 욕심, 물질의 욕심, 인맥 등 그 어떤 것도 교회안에서 세력을 키우면 안됩니다. 저는 이런 설교를 할때마다 은성수도원의 엄두섭 목사님의 설교 자아박탈이 생각납니다.

 

기적과 표적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다리고 사모하고 경외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사랑의 표현으로 이적과 기사와 표적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를 믿으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적은 일어납니다. 그러나 호기심이나 채우고자 복을 받고자 기도하고 예수님을 찾아온다면 예수님은 침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마음 중심의 주인으로 모시고 자신의 삶 속에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결국 사단의 세력에 의해 지배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의 몸이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여(고전6:19), 무슨 일에든지 육체의 소욕대로 행하기보다 성령을 좇아 행하여야 합니다.

 

로버트 멍어(Robert Boyd Munger)라는 사람이 쓴 책 가운데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My heart Christ's home)이란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아무리 깨끗하게 하려고 몸부림쳐도 날마다 때가 묻고 먼지가 쌓이고 더러워지는 것을 어느날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 요청했습니다. 예수님 오셔서 아예 내 집을 다스려 주시옵소서. 내 집의 주인이 되어 주시옵소서. 서재를 주님 앞에 내어 드립니다. 주방을 주님 앞에 내어 드립니다. 침실을 주님 앞에 내어 드립니다. 벽장 구석 구석 모든 공간을 예수님께 다 내어 드립니다.

 

예수님과 함께 서재로 갑니다. 서재는 집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조종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인의 삶과는 무관한 책들이 많습니다. 보지 말아야 될 영화도 있습니다. 서재가 너무나 어지럽고 지저분하여 예수님께서 그것을 다 정리하고 성경과 말씀으로 서재를 채우기 시작합니다. 그의 생각은 맑아지기 시작했고 마음은 깨끗해 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방으로 옵니다. 주방은 식욕과 욕망의 방으로 집에서 가장 큰 공간입니다. 식탁에 차려진 메뉴는 돈과 증권과 명예와 지식과 인기와 학력과 자기를 높이고 자랑하고 싶었던 메뉴로 꽉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드실 수 없었습니다. 얘야, 이것을 치우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으로 내가 이곳을 채워주마. 주님께서 식탁을 새롭게 채워 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주님을 기뻐하는 묵상으로 그 식탁을 가득히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침실과 벽장 등 구석구석을 예수님의 가치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이 기뻐하는 것으로 가득히 채워졌을 때에 "My heart Christ's home" 내 마음은 예수님의 집으로 변화되기 시작한다.는 내용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주인되어 사십니까? 여러분 세상의 어떤 것들로 채우지는 않았습니까? 내 마음이 예수님으로 채워져있다면 그 영혼은 행복한 영혼입니다.

저는 일하는 목회자입니다. 제가 교회를 내려놓고 일터로 나가니 얼마나 마음이 편하고 좋은지 모릅니다. 교회성장에 매달려 있지 않아도 됩니다. 나를 쪼는 성도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물질에 매여 있지도 않습니다. 목사라는 타이틀 형식에도 매여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 주위에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물고기 즉 외국인 노동자들이 널려있습니다. 저들과 함께 일하면서 행동으로 말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 참 주인이 계신 집

 

아무리 시골 초가삼간 다 허물어져가는 집도 사람이 살면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자꾸 고쳐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집도 주인이 아니고 세를 주면 집이 엉망진창이 됩니다. 강원도 팬션에 하루 밤 머물렀다 떠난 사람들(성인 4명과 아이 2명인 두 가족)이 하루 만에 객실을 쓰레기 소굴로 만들어 놓고 가버렸습니다. 세를 든 사람은 자기 집이 아니기 때문에 그 집을 잘 돌보지 않습니다. 집이 무너져 가도 돈 들여서 고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벽이 뚫어져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문짝이 삐뚤어 져도 내버려 놓는 것입니다.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고 나갈 것이므로 수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들어오면 그 집을 잘 소재하고 수리하고 정리하고 아름답게 가꾸어 만듭니다. 내가 살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집에 누가 살고 있습니까? 참 주인되신 예수님이 살고 계십니까? 우리는 인생 나그네요, 손님입니다. 삶의 주인, 내 인생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을 만나야 집이 멋쟁이 집으로 사람이 살만한 집으로 행복과 웃음이 넘쳐나는 집이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재산을 소유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물질적으로 풍요한 만큼 생활에 기쁨이나 즐거움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자신의 옆집에 사는 가족들을 지켜 보게 되었습니다. 집은 허름하고 윤택하지 못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집사람들은 언제나 웃음띤 얼굴이었고,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그 집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자랑할 것도 별로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그렇게 즐겁게 살아갑니까?"

그러자 옆집 사람은 대답하였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다니요? 모르긴 해도 당신보다 자랑할 것이 더 많을 겁니다."

의아해진 부잣집 사람은 다시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재산을 소유하고 있길래 그렇습니까?"

그 가난한 집 사람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답니다.

 

첫째, 나에게는 영생(3:16)이 있습니다.

둘째, 크고 아름다운 집(14:2)이 천국에 있습니다.

세째, 다른 사람들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평화(4:7)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네째, 말로 다 할 수 없는 즐거움(벧전 1:8)이 있습니다.

다섯째,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고전 13:8)을 받았습니다.

여섯째, 현숙하고 신실한 아내(31:10)가 있습니다.

일곱째, 건강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20:12)들이 있습니다.

여덟째, 진실하고 변함없는 친구(18:24)들이 있습니다.

아홉째, 캄캄한 밤중에도 찬송(42:8)을 부를수 있습니다.

열째, 생명의 면류관(1:12)이 있습니다.

열한째, 내게 필요한 모든것을 충족하게 채워주시는 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4:19)

모시고 살아 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 주님이 들어오셔서 나의 삶에 주인이 되시고 날마다 성령으로 교제할 때 우리는 행복한 믿음의 주인공, 살아있는 믿음의 주인공으로 변화되게 될 것입니다.

 

빈집은 위험합니다. 빈집 신앙은 위험합니다. 십자가 예수가 아닌 겉치레만 남아있는 한국교회는 더 위험합니다. 지금이라도 고쳐쓸 수 있도록 수리해야 합니다. 고침에 있어 무엇이 우선되어야 할지 분명히 살펴야 합니다. 건강한 한국교회로 거듭나야 합니다. 건강한 가정, 건강한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서 고쳐 수리된 빈집에 더 큰 귀신이 주리를 틀지 않도록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일하는 목회자가 되어 한국교회를 바라볼 때 눈물만 흐릅니다. 어찌 저렇게도 하나도 변하지 않을까? 변화는커녕 과거보다 더 큰 내부적 자기성을 쌓아가는 목회자들을 바라보며 나는 주님께 기도로 간구합니다. 한국교회가 빈집이 되지 않도록 도와 주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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