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예배에 대하여 먼저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살펴보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 개혁주의적 예배의 본질과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바탕으로 열린예배에 대한 진단을 하고 열린예배에 대한 비판을 할려고 한다. 문서를 통한 연구방법으로
기존 교회에서 사용해 온 예배순서와 이들 열린에배에 대한 예배의 순서들을 살펴보고 진단 한뒤에 대안을 제시하는 쪽으로 연구하려고 한다.
2. 예배순서의 제안
Ⅳ. 결론
21세기를 향한 진정한 준비는 에배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가장 한국적인 예배 한국적인 문화요소가 포함된 예배가 필요하다. 무조건적으로 구미에서 성공하였거나 유행하면 분별없이 도입하여 유행시키는 이러한 운동은 결코 개혁주의적 예배관에서는 수용될 수 없는 것이다. 미국식 구도자 예배는 한국교회에 접목되기에는 문제가 많이 있다. 미국교회는 다양한 형식의 예배를 경험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구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예배는 장로교 예배였기 때문에 이들은 한국교회에서는 문제의 소지가 강하다는 것이다. 물론 한구교회가 예배를 갱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준비된 예배의 형식을 지금처럼 공예배시에 무분별하게 도입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으로 보아도 틀린 것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자는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열린예배는 신중하게 연구 되고 분석 되어져야 할 대상이지 결코 도입해야할 대상이 아님을 밝혀둔다.
I. 예배의 본질과 의미
A. 어원적 의미
성경에서 사용되는 예배라는 용어들은 시기와 형편에 따라 표현의 차이는 있으나 그 내용은 거의 일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먼저 구약에서는 예배에 관한 대표적인 용어를 들을 들수가 있다. 그 첫째가 '아바드'(ABADE)라고 하는 히브리어다. 이
단어의 뜻은 "하다" "만들다" "숭배하다", "(하나님)께 복종하다" 인데, 본래 노예나 고용된 종들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 말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되면서 부터 제물을 드리는 봉사와 레위인들의 회막에서의 봉사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사19:21, 렘
44:3). 두번째 용어는 '샤하아'(SAHA-A)라는 단어인데, "굴복하는 것", "자신을 엎드리는 것", "경배하다"라는 뜻으로서
숭배, 순종, 봉사의 종교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 개념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마음과 몸을 가지고 최대한으로 존경을 표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사용된 이상과 같은 어휘속에 나타나는 뜻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자주성을 버리고 그의 뜻을 따르며 섬겨야 할 존재라는 사실과 경배와 복종의 생활이 예배자들의 주요한 삶의 근본" 이되었음을 알 수 있다.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서에서는 예배라는 표현이 세 가지 용어로 나타나는데 그 첫째가 '프로스퀴네오 이다. 이 단어의 문자적인 뜻은 "누구의 손에 입 맞추는 것", "존경의 표시로 다른 사람 앞에 자신을 엎드린다" 이다. 유대교에서는 이 단어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나 혹은 거짓 신들에 대한 숭배와 관련되어 사용하기도 했으나 신약성서에서는 신성한 대상에만 관련하여 사용하였다. 둘째, '라트레이아 이다. 이 단어는 "보상을 위한 봉사", "신들을 섬김"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라트레이아 가 사용된 5가지 실례중에서 3가지는 희생제사 사역을 언급하고 있는데, 즉 롬 9:4, 히 9:1,6이 그러하다. 로마서 12:1에서는 내적인 생활과 외적인 행위의 산 제사를 말하고 있다. 즉, 인간의 이성과도 일치하며 또한 그안에서 하나님의 이성도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말한다. 세번째 단어는 '레이투르기아 로서, "섬김" 혹은 "봉사"의 뜻인데 예배식 (Liturgy)이란 말이 여기서 유래했다. 이 말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행한 바 특별한 봉사를 나타낼 때에 사용되었는데 그 제사장적 기능들은 모두가 예배적인 것들이다 (눅 1:23, 히 9:21). 이 말은 그리스도의 직분 (히 8:6)과 교회의 예배 (행 13:2)를 표시하는데 사도 바울은 더 나아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모은 헌금과 (고후 9:12) 빌립보 교회가 자기를 위해 준 선물에 대해서도 적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빌 2:30). 바울에게 있어서 참된 레이투르기아는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믿음의 생활 (갈 5:22) 이다.
마지막으로 영어에 있어서 'Worship'이다. Worship은 본래 앵글로 색슨어의 'weorthscipe'에서 유래 했는데, 가치(worth)라는 말과 신분 (ship)이라는 말의 뜻을 가진 합성어로서 "존경과 존귀를 받을 가치가 있는 자"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을 좀 더 구체화 시키면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to ascribe to Him supreme worth)이란 뜻이 된다. 이러한 표현은 성서의 여러 곳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예를들면 시편 기자가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시29:2)" 라고 표현한 경우와 계시록에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계 5:12)" 라는 표현등이 모두 이 뜻을 가지고 있다.
구약에서 사용된 이상과 같은 어휘속에 나타나는 뜻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자주성을 버리고 그의 뜻을 따르며 섬겨야 할 존재라는 사실과 경배와 복종의 생활이 예배자들의 주요한 삶의 근본" 이되었음을 알 수 있다.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서에서는 예배라는 표현이 세 가지 용어로 나타나는데 그 첫째가 '프로스퀴네오 이다. 이 단어의 문자적인 뜻은 "누구의 손에 입 맞추는 것", "존경의 표시로 다른 사람 앞에 자신을 엎드린다" 이다. 유대교에서는 이 단어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나 혹은 거짓 신들에 대한 숭배와 관련되어 사용하기도 했으나 신약성서에서는 신성한 대상에만 관련하여 사용하였다. 둘째, '라트레이아 이다. 이 단어는 "보상을 위한 봉사", "신들을 섬김"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라트레이아 가 사용된 5가지 실례중에서 3가지는 희생제사 사역을 언급하고 있는데, 즉 롬 9:4, 히 9:1,6이 그러하다. 로마서 12:1에서는 내적인 생활과 외적인 행위의 산 제사를 말하고 있다. 즉, 인간의 이성과도 일치하며 또한 그안에서 하나님의 이성도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말한다. 세번째 단어는 '레이투르기아 로서, "섬김" 혹은 "봉사"의 뜻인데 예배식 (Liturgy)이란 말이 여기서 유래했다. 이 말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행한 바 특별한 봉사를 나타낼 때에 사용되었는데 그 제사장적 기능들은 모두가 예배적인 것들이다 (눅 1:23, 히 9:21). 이 말은 그리스도의 직분 (히 8:6)과 교회의 예배 (행 13:2)를 표시하는데 사도 바울은 더 나아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모은 헌금과 (고후 9:12) 빌립보 교회가 자기를 위해 준 선물에 대해서도 적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빌 2:30). 바울에게 있어서 참된 레이투르기아는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믿음의 생활 (갈 5:22) 이다.
마지막으로 영어에 있어서 'Worship'이다. Worship은 본래 앵글로 색슨어의 'weorthscipe'에서 유래 했는데, 가치(worth)라는 말과 신분 (ship)이라는 말의 뜻을 가진 합성어로서 "존경과 존귀를 받을 가치가 있는 자"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을 좀 더 구체화 시키면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to ascribe to Him supreme worth)이란 뜻이 된다. 이러한 표현은 성서의 여러 곳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예를들면 시편 기자가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시29:2)" 라고 표현한 경우와 계시록에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계 5:12)" 라는 표현등이 모두 이 뜻을 가지고 있다.
B. 신학적 의미
예배자는 예배 가운데서 생각되어져야 할 신학적인 초점들에 대하여 전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신학이 없는 예배는 감상적이고 유약하며 예배가 없는 신학은 냉랭하고 그 자체가 생명력이 없다. 그래서 건전한 신학은 예배의 교정자로서, 참 예배는 신학의 원동력으로서 이바지 하게 된다. 실제로 예배는 하나님과 의식적으로 사귀는 경험이고, 신학은 그 경험의 뜻을 설명하려고 하는 노력이다.
1. 계시와 응답인 예배
기독교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인 믿음 안에서의 응답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 하셨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가지는 인격적인 경험에서, 나와 너의 관계로 인간을 직면 하시는데, 예배는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에게 제공되고 믿음을 통해서 인간의 사랑이 하나님께 응답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이다.
이와같은 예배는 우리 인간들의 목적에서 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서 부터 시작된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이다.
2.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
예배의 대상은 인간이 아니며 어떤 사물도 아니다. 예배는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은 항상 예배에 있어서 알파(alpha)이며 오메가(omega)가 되신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을 중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와 더불어 교제할 사람을 창조함으로써 예배에 솔선하셨으며 존재의 근거로서 생명의 원천이며 보존자가 되신다. 그는 최고의 통치자로서 사람과 만나고 또한 사람을 심판하시고 요구하신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사람이 응답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하심과 사랑을 새롭게 들어내셔서 사람으로 그것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예배하기를 요구하시기 때문인 것이다.
3. 그리스도 중심적인 예배
예배는 기독론에 기초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위에서 하나님을 참으로 영화롭게 하셨다는 사실은 완전한 예배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에서 완성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예배 의식 (Christion cult)은 예수께서 성육신에서 승천까지 이르는 그 동안에 이룩하신 완전한 예배 행위인 그의 직무 (ministry)에 근거를 들 수 있다. 이처럼 십자가와 승천에서 절정을 이루신 예배의 완전한 행위는 예수께서 위대한 대제사장으로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심으로 (히 8;2) 성취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 예배의 기독론적인 근거를 확인하려고 할 때, 예배의식은 다만 예수께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고전 11:25)"고 명령하신 말씀에 근거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희생제물이 되신 것은 하늘의 예배를 반영하는 것이며 기독교 예배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영원한 하늘의 제사를 드리신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진정한 기독교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4. 신령과 진정한 에배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고 하신 말씀에 따르면 신약의 예배는 의식과 형식의 예배가 아닌 영적인 예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배가 영적이라고 해서 예배의 형식이나 의식이 필요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배적 형식위에서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예배자들이 그리스도의 자기 봉헌 (Self - oblation of Christ)과 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시키셨고 오순절 이후부터 재림까지는 성령을 통하여 완성하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드리는 예배속에서 성령의 내적 증거를 통하여 예배자의 마음에 파고든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 얻는 감동과 변화는 모두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범죄 행위를 확신케 하고 (요 16:8) 그리스도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분명히 하고 (요 16:14-15) 하나님의 은혜의 활동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신다. 또한 사람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안에서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갈 2:20).
5. 코이노니아의 예배
기독교 예배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적 행위 (essentially a corporative activity)이다. 즉, 예배는 기독교인 개인의 개별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전체의 공동체적 행위인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교회를 '에클레시아 라고 부른 것은 히브리어인 '카할'에서 번역 되었는데, 이 낱말의 뜻은 백성들이 함께 모이는 회합 또는 어떤 목적을 위하여 소집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애굽에서 구원받은 백성의 공동체가 야웨의 공동체였고,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도 구속받은 사람들의 사귐 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배해야 하는 것이다.
예배자는 예배 가운데서 생각되어져야 할 신학적인 초점들에 대하여 전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신학이 없는 예배는 감상적이고 유약하며 예배가 없는 신학은 냉랭하고 그 자체가 생명력이 없다. 그래서 건전한 신학은 예배의 교정자로서, 참 예배는 신학의 원동력으로서 이바지 하게 된다. 실제로 예배는 하나님과 의식적으로 사귀는 경험이고, 신학은 그 경험의 뜻을 설명하려고 하는 노력이다.
1. 계시와 응답인 예배
기독교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인 믿음 안에서의 응답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 하셨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가지는 인격적인 경험에서, 나와 너의 관계로 인간을 직면 하시는데, 예배는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에게 제공되고 믿음을 통해서 인간의 사랑이 하나님께 응답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이다.
이와같은 예배는 우리 인간들의 목적에서 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서 부터 시작된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이다.
2.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
예배의 대상은 인간이 아니며 어떤 사물도 아니다. 예배는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은 항상 예배에 있어서 알파(alpha)이며 오메가(omega)가 되신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을 중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와 더불어 교제할 사람을 창조함으로써 예배에 솔선하셨으며 존재의 근거로서 생명의 원천이며 보존자가 되신다. 그는 최고의 통치자로서 사람과 만나고 또한 사람을 심판하시고 요구하신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사람이 응답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하심과 사랑을 새롭게 들어내셔서 사람으로 그것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예배하기를 요구하시기 때문인 것이다.
3. 그리스도 중심적인 예배
예배는 기독론에 기초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위에서 하나님을 참으로 영화롭게 하셨다는 사실은 완전한 예배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에서 완성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예배 의식 (Christion cult)은 예수께서 성육신에서 승천까지 이르는 그 동안에 이룩하신 완전한 예배 행위인 그의 직무 (ministry)에 근거를 들 수 있다. 이처럼 십자가와 승천에서 절정을 이루신 예배의 완전한 행위는 예수께서 위대한 대제사장으로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가심으로 (히 8;2) 성취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 예배의 기독론적인 근거를 확인하려고 할 때, 예배의식은 다만 예수께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고전 11:25)"고 명령하신 말씀에 근거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희생제물이 되신 것은 하늘의 예배를 반영하는 것이며 기독교 예배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영원한 하늘의 제사를 드리신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진정한 기독교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4. 신령과 진정한 에배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고 하신 말씀에 따르면 신약의 예배는 의식과 형식의 예배가 아닌 영적인 예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배가 영적이라고 해서 예배의 형식이나 의식이 필요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배적 형식위에서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예배자들이 그리스도의 자기 봉헌 (Self - oblation of Christ)과 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시키셨고 오순절 이후부터 재림까지는 성령을 통하여 완성하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드리는 예배속에서 성령의 내적 증거를 통하여 예배자의 마음에 파고든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 얻는 감동과 변화는 모두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범죄 행위를 확신케 하고 (요 16:8) 그리스도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분명히 하고 (요 16:14-15) 하나님의 은혜의 활동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신다. 또한 사람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안에서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갈 2:20).
5. 코이노니아의 예배
기독교 예배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적 행위 (essentially a corporative activity)이다. 즉, 예배는 기독교인 개인의 개별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전체의 공동체적 행위인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교회를 '에클레시아 라고 부른 것은 히브리어인 '카할'에서 번역 되었는데, 이 낱말의 뜻은 백성들이 함께 모이는 회합 또는 어떤 목적을 위하여 소집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애굽에서 구원받은 백성의 공동체가 야웨의 공동체였고,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도 구속받은 사람들의 사귐 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배해야 하는 것이다.
C. 열린예배에 대한 이해
1.열린예배에 대한 일반적 고찰
열린 예배(Open Worship)는 흔히 구도자 에배라고도 하는데 그 기원은 미국의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의 담임인 빌 하이빌스(Bill Hybels)목사에 의해 처음으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73년에 그는 사우스 파크(South Park) 교회에서 청소년을 위한 수요성경공부를 인도하다가 이들 청소년을 위한 특별한 행사를 기획하던중에 믿지 않는 학생들을 위한 매주일의 특별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전통적인 예배를 통하여서는 흡수되지 않던 청소년들이 이러한 특별예배에서 많이 회심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자 이를 일반적인 목회와 예배에 접목하기 시작 하였다. 그러한 게기가 된 것은 미그 트리니티 대학의 길버트 빌레지키안 교수의 강의와 1975년에 발간된 로버트슐러 목사의 책 "당신의 교회 가능성이 있다"에서 지역교회가 믿지않는 사람들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새로운 교회를 해야한다는 도전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교회가 위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였다.
그러면 이들이 말하는 여린예배의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그들은 열린예배의 성경적 근거로 이사야 66장 19절을 예로 들고 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남는 자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그 남은 자들이 이방인들에게 가서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시편 96편 3, 10절의 말씀과 시편 57편9절의 말씀을 참고하면 시편 기자도 많은 나라들 가운데서 하나님께 예배받을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신명기 26장 10, 11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어떻게 예배할 것을 가르쳐주는 말씀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 할 지니라"고 하신 말씀등에서 근거를 찾는다. 즉 너희중에 우거하는 객은 가나안 족속을 말하며 이는 이방인을 가리킨다. 그들과 함께 즐거워하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로 이때부터 구도자 예배 즉 열린예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들어와서 기뻐할 수 있는 그러한 장을 만들라는 것이다. 로마서 15장 9-11절, 시편 86편 9절과 67편5, 7절도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을 잠재적인 예배자로 보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고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물론 사도행전 10장 34, 35절에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의 모습을 보면서 고백한 내용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통해서도 그를 경건하게 경외하는 자들을 부르신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진정 예배의 기회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어야 되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들어와서 예배할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가 열어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열린에배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적 상황에서는 연구와 검토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뒷장에서 비판하도록 하고 여기서는 열린예배의 일반적인 견해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러므로 이들이 주장하는 바는 열린예배란 믿지않는 사람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그들이 좀더 쉽게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수 있도록 배려하는 형식과 접근 방법을 택한 예배스타일을 말한다. 그래서 미즈지역에서는 구도자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는(Seeker Sensitive)예배로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열린예배란 구도자예배를 말하는 것이며 열린예배를 드리려면 구도자 예배를 드려야한다. 그런데 실제 한국교회에서는 이의 명확한 이해와 구분이 결여 되어 혼용되고 있는데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최근 여린 교육, 열린 음악회 등의 용어가 사용되면서 '열린' 이라는 개념이 좀더 참여를 강조하는 듯이 보이기 때뭉에 열린예배를 말하면서 단순히 기존 예배 스타일에 예배하는 자의 참여를 높이고 이를 위해 딱딱한 형식을 줄이는 측면에서 새롭게 디자인 되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 바로 여기에 열린예배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이다.
열린 예배(Open Worship)는 흔히 구도자 에배라고도 하는데 그 기원은 미국의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의 담임인 빌 하이빌스(Bill Hybels)목사에 의해 처음으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73년에 그는 사우스 파크(South Park) 교회에서 청소년을 위한 수요성경공부를 인도하다가 이들 청소년을 위한 특별한 행사를 기획하던중에 믿지 않는 학생들을 위한 매주일의 특별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전통적인 예배를 통하여서는 흡수되지 않던 청소년들이 이러한 특별예배에서 많이 회심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자 이를 일반적인 목회와 예배에 접목하기 시작 하였다. 그러한 게기가 된 것은 미그 트리니티 대학의 길버트 빌레지키안 교수의 강의와 1975년에 발간된 로버트슐러 목사의 책 "당신의 교회 가능성이 있다"에서 지역교회가 믿지않는 사람들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새로운 교회를 해야한다는 도전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교회가 위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였다.
그러면 이들이 말하는 여린예배의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그들은 열린예배의 성경적 근거로 이사야 66장 19절을 예로 들고 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남는 자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그 남은 자들이 이방인들에게 가서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시편 96편 3, 10절의 말씀과 시편 57편9절의 말씀을 참고하면 시편 기자도 많은 나라들 가운데서 하나님께 예배받을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신명기 26장 10, 11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어떻게 예배할 것을 가르쳐주는 말씀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 할 지니라"고 하신 말씀등에서 근거를 찾는다. 즉 너희중에 우거하는 객은 가나안 족속을 말하며 이는 이방인을 가리킨다. 그들과 함께 즐거워하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로 이때부터 구도자 예배 즉 열린예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들어와서 기뻐할 수 있는 그러한 장을 만들라는 것이다. 로마서 15장 9-11절, 시편 86편 9절과 67편5, 7절도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을 잠재적인 예배자로 보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고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물론 사도행전 10장 34, 35절에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의 모습을 보면서 고백한 내용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통해서도 그를 경건하게 경외하는 자들을 부르신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진정 예배의 기회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어야 되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들어와서 예배할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가 열어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열린에배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적 상황에서는 연구와 검토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뒷장에서 비판하도록 하고 여기서는 열린예배의 일반적인 견해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러므로 이들이 주장하는 바는 열린예배란 믿지않는 사람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그들이 좀더 쉽게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수 있도록 배려하는 형식과 접근 방법을 택한 예배스타일을 말한다. 그래서 미즈지역에서는 구도자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는(Seeker Sensitive)예배로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열린예배란 구도자예배를 말하는 것이며 열린예배를 드리려면 구도자 예배를 드려야한다. 그런데 실제 한국교회에서는 이의 명확한 이해와 구분이 결여 되어 혼용되고 있는데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최근 여린 교육, 열린 음악회 등의 용어가 사용되면서 '열린' 이라는 개념이 좀더 참여를 강조하는 듯이 보이기 때뭉에 열린예배를 말하면서 단순히 기존 예배 스타일에 예배하는 자의 참여를 높이고 이를 위해 딱딱한 형식을 줄이는 측면에서 새롭게 디자인 되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 바로 여기에 열린예배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이다.
2.열린예배에 대한 몇가지 특징들
구도자(믿으려는 잠재적인 의식이 있는 사람들)를 지향하고 사역하는 교회들이 구도자예배를 디자인하면서 염두에 두는 요소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구도자 예배가 갖고 있는 몇 가지 특징이다. 먼저는 사회학적 조사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그들의 필요를 파악하고 예배의 많은 기능들을 첨가했다는 것이다. 음악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나 드라마(Skit)나 비디오를 사용하는 것, 또 초창기에는 헌금시간을 두지 않았다는 것도 이런 연구를 통한 자료에 근거해서 취한 전략이라고 한다. 다음은 예배를 기획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예배를 기획한다는 말은 어색하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예배를 기획한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예배는 목사님이 설교를 준비하고 찬송가를 고르고, 성가대가 찬양을 준비하면 다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열린예배를 실시하는 교회에서는 예배가 정확하고도 세밀하게 기획되고 있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리고 음악과 미디어의 결합, 비디오와 멀티기능의 연합등이 계속적으로 첨가되어지고 있다.
구도자(믿으려는 잠재적인 의식이 있는 사람들)를 지향하고 사역하는 교회들이 구도자예배를 디자인하면서 염두에 두는 요소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구도자 예배가 갖고 있는 몇 가지 특징이다. 먼저는 사회학적 조사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그들의 필요를 파악하고 예배의 많은 기능들을 첨가했다는 것이다. 음악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나 드라마(Skit)나 비디오를 사용하는 것, 또 초창기에는 헌금시간을 두지 않았다는 것도 이런 연구를 통한 자료에 근거해서 취한 전략이라고 한다. 다음은 예배를 기획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예배를 기획한다는 말은 어색하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예배를 기획한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예배는 목사님이 설교를 준비하고 찬송가를 고르고, 성가대가 찬양을 준비하면 다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열린예배를 실시하는 교회에서는 예배가 정확하고도 세밀하게 기획되고 있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리고 음악과 미디어의 결합, 비디오와 멀티기능의 연합등이 계속적으로 첨가되어지고 있다.
D. 열린예배에 대한 비판
열린예배란 타당한 것인가? 사실 미국교회의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란 명칭을 한국적인
이름으로 개종시킨 것 자체가 무리가 있었다. 우선 영어의 '서비스(service)' 단어가 일반적인 예배를 가르키는 '워십(worship)"
보다는 가벼운 개념이다. 그기에다 '구도자(Seekers)'란 단어를 그대로 차용하는 것이 상당히 어색해 보이기 때분이다. 그래서 아마도
'열린예배'란 명칭을 사용하는 것 같은데 이것도 문제가 있다. 사실 불신자나 초신자들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신학적인 문제를
동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4장 23-24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예배에는 "신령과 진정이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불신자라 하더라도 그들은 나름대로의 신(神)개념이 있기 때문에(시 14:1, 행 17:22, 23) 그러한 개념을 열린예배를 통해 올바로
이끌어서 복음의 실제에 접근하도록 하자는 것이 바로 열린예배의 취지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1.개혁주의적 예배관
주지하다시피 16세기의 종교 개혁이 그 출발에 있어서 신학의 개혁을 목적으로 했으나 예배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 개혁의 필연성은 의미를 상실한 미사에서 부터였다고 볼 수 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일차적인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음을 인정할 때, 자연적으로 예배란 교회 기능의 최우선적인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목적이 변질되거나 퇴색될 때,언제나 교회는 문제를 갖게 되었다.
루터 (Luther)는 종교 개혁자들 중에서 변화를 시도하는 것을 가장 주저한 사람이었다. 자기 자신은 자주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도 실제로 그의 추종자들이나 또는 그 자신이 변화를 시도하려고 하면 공공연히 논박을 하였다. 그러나 차츰 루터는 새로운 예배 형식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그 자신 스스로가 예배의식을 만들어 1523년에 미사전례 (Fomula Missae)를 발간했으나, 결과는 라틴어를 포함하여 기타 여러가지 과거의 예배요소들을 그대로 갖고 있는 로마미사의 축소판에 불과했다. 그후 1526년에 그의 추종자들을 제지하기 위해서 독일미사(Deutsche Messe)를 발간하였다. 이 예식서에서 보여 준 그의 예배 내용은 성경 봉독과 그 말씀에 의한 설교를 분명하게 제시한 것과 성만찬에 있어 신약적 형태와 진행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표출되어 있었다.
쯔빙글리 (Zwingli)는 예배의 개혁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교황권이나 공로사상, 고백성사, 면죄, 사제직등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 급진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그는 예배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희생의 재현이나 성상의 사용을 극구 반대하는 입장으로서 그의 극단적인 개혁은 예배 가운데 오르간을 비롯한 제반 악기의 사용이라든지 시편 교독을 대신하는 회중들의 찬송들을 모두 삭제한 것에서 나타난다. 반면에 그는 예배 가운데 있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써 성경 봉독과 기도와 죄의 고백, 그리고 설교만을 강조한 예배형식을 내세웠다. 그는 성만찬을 기독교 예배 형식에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생각지 않았으며 자주 성만찬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보고, 1년에 네번만 성만찬이 있는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종교 개혁시 예배에 관한 일 중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일들이 일어난 곳은 스트라스부르그 (Strasburg)였다. 이곳은 본래 루터파의 영향력이 컸으나 이곳 개혁자들은 상당히 독립적이었다. 마틴 부처 (Martin Bucer)는 1530년 감독이 되면서 그 영향력이 과거보다 훨씬 더 커져 쯔빙글리파의 견해를 도입함으로 후일의 예배의식이 루터와 쯔빙글리의 생각을 혼합한 형식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예배 가운데 나타난 특성으로는 먼저 "미사"라는 어휘 대신 "주님의 만찬" 또는 "성찬"이라는 이름을 개발한 것이고 사제라는 표현 대신 목사라는 칭호를 예전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 등이다. 그리고 성만찬 제단의 위치도 지금까지 벽에 붙여 놓았던 것을 변화시켜 목사가 벽과 제단 사이에서 회중을 향해 서도록 하는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또 쯔빙글리에 의하여 없어졌던 시편과 찬송이 다시 등장했고, 성서 일과가 사라지고 목사가 마음대로 본문을 선택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성자 축일등은 완전히 폐지되었고, 성만찬을 위한 성직자의 특별한 복장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주일이면 언제나 검정 가운을 입도록 했다. 이처럼 초기 개혁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열린예배는 예배의 본질이나 순수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기 보다는 카톨릭의 미사와 같이 형식과 의식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16세기의 종교 개혁이 그 출발에 있어서 신학의 개혁을 목적으로 했으나 예배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 개혁의 필연성은 의미를 상실한 미사에서 부터였다고 볼 수 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일차적인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음을 인정할 때, 자연적으로 예배란 교회 기능의 최우선적인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목적이 변질되거나 퇴색될 때,언제나 교회는 문제를 갖게 되었다.
루터 (Luther)는 종교 개혁자들 중에서 변화를 시도하는 것을 가장 주저한 사람이었다. 자기 자신은 자주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도 실제로 그의 추종자들이나 또는 그 자신이 변화를 시도하려고 하면 공공연히 논박을 하였다. 그러나 차츰 루터는 새로운 예배 형식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그 자신 스스로가 예배의식을 만들어 1523년에 미사전례 (Fomula Missae)를 발간했으나, 결과는 라틴어를 포함하여 기타 여러가지 과거의 예배요소들을 그대로 갖고 있는 로마미사의 축소판에 불과했다. 그후 1526년에 그의 추종자들을 제지하기 위해서 독일미사(Deutsche Messe)를 발간하였다. 이 예식서에서 보여 준 그의 예배 내용은 성경 봉독과 그 말씀에 의한 설교를 분명하게 제시한 것과 성만찬에 있어 신약적 형태와 진행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표출되어 있었다.
쯔빙글리 (Zwingli)는 예배의 개혁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교황권이나 공로사상, 고백성사, 면죄, 사제직등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 급진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그는 예배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희생의 재현이나 성상의 사용을 극구 반대하는 입장으로서 그의 극단적인 개혁은 예배 가운데 오르간을 비롯한 제반 악기의 사용이라든지 시편 교독을 대신하는 회중들의 찬송들을 모두 삭제한 것에서 나타난다. 반면에 그는 예배 가운데 있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써 성경 봉독과 기도와 죄의 고백, 그리고 설교만을 강조한 예배형식을 내세웠다. 그는 성만찬을 기독교 예배 형식에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생각지 않았으며 자주 성만찬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보고, 1년에 네번만 성만찬이 있는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종교 개혁시 예배에 관한 일 중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일들이 일어난 곳은 스트라스부르그 (Strasburg)였다. 이곳은 본래 루터파의 영향력이 컸으나 이곳 개혁자들은 상당히 독립적이었다. 마틴 부처 (Martin Bucer)는 1530년 감독이 되면서 그 영향력이 과거보다 훨씬 더 커져 쯔빙글리파의 견해를 도입함으로 후일의 예배의식이 루터와 쯔빙글리의 생각을 혼합한 형식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예배 가운데 나타난 특성으로는 먼저 "미사"라는 어휘 대신 "주님의 만찬" 또는 "성찬"이라는 이름을 개발한 것이고 사제라는 표현 대신 목사라는 칭호를 예전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 등이다. 그리고 성만찬 제단의 위치도 지금까지 벽에 붙여 놓았던 것을 변화시켜 목사가 벽과 제단 사이에서 회중을 향해 서도록 하는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또 쯔빙글리에 의하여 없어졌던 시편과 찬송이 다시 등장했고, 성서 일과가 사라지고 목사가 마음대로 본문을 선택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성자 축일등은 완전히 폐지되었고, 성만찬을 위한 성직자의 특별한 복장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주일이면 언제나 검정 가운을 입도록 했다. 이처럼 초기 개혁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열린예배는 예배의 본질이나 순수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기 보다는 카톨릭의 미사와 같이 형식과 의식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2. 칼빈의 예배관
칼빈은 개혁 신학에 가장 큰 공헌을 하였는데 예배식의 개정에는 루터보다 더 용감하였으나 쯔빙글리보다는 급진적이지 못했다. 그는 예배의 두 중심점을 설교와 성례전에 두고서 새로운 예배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는 간편한 예배 순서속에서 초기 교회가 가졌던 내용을 살리는 예배를 마련하기 원하였으며, 이 일을 위해 전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독자적인 예배형태를 개발하지 않고서 결국 부처가 사용했던 예전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채 예배의 의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만찬의 중요성을 철저히 인식하여 매주마다 거행할 것을 주장했다. 칼빈이 이처럼 예배의 두 초점을 설교와 성례전에 둔 것은 중세의 미사가 주는 엄청난 비성경적 요소들 때문이었다. 그래서 매우 간소하게 만들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물론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한다는 정형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린예배가 가진 최고의 단점은 예배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지 '보여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예배의 형식 파괴는 결국 중세의 미사를 통한 '보여주는 예배'와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칼빈은 개혁 신학에 가장 큰 공헌을 하였는데 예배식의 개정에는 루터보다 더 용감하였으나 쯔빙글리보다는 급진적이지 못했다. 그는 예배의 두 중심점을 설교와 성례전에 두고서 새로운 예배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는 간편한 예배 순서속에서 초기 교회가 가졌던 내용을 살리는 예배를 마련하기 원하였으며, 이 일을 위해 전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독자적인 예배형태를 개발하지 않고서 결국 부처가 사용했던 예전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채 예배의 의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만찬의 중요성을 철저히 인식하여 매주마다 거행할 것을 주장했다. 칼빈이 이처럼 예배의 두 초점을 설교와 성례전에 둔 것은 중세의 미사가 주는 엄청난 비성경적 요소들 때문이었다. 그래서 매우 간소하게 만들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물론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한다는 정형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린예배가 가진 최고의 단점은 예배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지 '보여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예배의 형식 파괴는 결국 중세의 미사를 통한 '보여주는 예배'와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열린예배에 대한 개혁주의적
비판
열린예배는 그러면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수용될 수없는가? 일에 대해 이상규교수는 몇가지의 질문을 제기하면서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한다. 첫째, 선포가 아닌 토크쇼와 같은식의 설교는 드리는 예배로서의 성경적 인 예배가 아닌 보여주는 "쇼"와 같은 예배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런 예배형식의 변화를 추구하는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최근의 숫적 성장 둔화 현상을 극복하고
신세대들에게 신앙적 관심을 고양시키기 위해서 예배변화를 모색하는 것은 권장할만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보다 참되게
섬기고 예배할 것인가에 대한 '바른 예배'에 대한 동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회중'에게 더 흥미로운 예배를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설교에 있어서도 본문(Text)에 대한 관심보다는 상황에(Context) 더 관심을 갖고 있는데 이것이 결국 말씀의 원의미를
가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예배형식에 있어서도 이런 현상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회중들은 예배를 드린다는 생각보다는 예배를 "본다"는 의식이
강하다. 결국 예배형식의 변화라는 것이 자칫 즐거움을 더하는 "우리의 방식"의 예배로 변질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리고 셋째, 형식의 변화가 내용을 변질시킬 수 있다는 위험성이다. 물론 형식 그 자체가 중요하지 않고 기존의 예배형식 그 자체가 절대적일 수는 없다. 형식(型式)은 단지 내용을 담는 그릇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다. 내용의 변질만 없다면 형식을 고정화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는 점은 형식 그 자체가 때로는 내용을 변질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해묵은 지적이지만 맥루한 매체가 메시지를 대신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그 실제적 변형의 경우를 지적한 바 있는데, 예배에세도 형식이 내용을 대신 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 변질이란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보는 예배, 그리고 보여주는 예배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우리만의 것은 아니다. 또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이미 10여년전에 저명한 교회사가인 스텐리 포드 리드(Standford Reid)는 "우리의 예배는 우리의 즐거움을 위한 것인가 안면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인가"라는글을 썼다.
이글에서 그는 미국과 카나다에서 일고 있는 이른바 예배형식의 변화라는 것은, 사실은 예배라는 형식으로 우리의 여흥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형식의 변화보다는 예배자의 태도가 변화되어야 한다고 지적한 일이 있다. 특히 그는 우리시대의 예배형식의 파괴라는 것이 지나치게 대중을 의식한 것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성격이 무시되거나 경시되고 있다고 개탄란 일이 있다. 예배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깊이 관련되었다. 다시 말하면 예배행위는 하나님 이해를 기초로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염려해야 할 것은 이른바 예배형식의 파괴가 우리 하나님 이해마저도 변질시킬 수 있다는 위험성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예배를 그처럼 소중하게 여겨 미사를 개혁하고 예배의식을 쇄신하기 위해 싸웠던 것은 중세적 예배가 하나님 이해를 변질 시켰다는 자갇 때문이었다. 종교개혁은 한 마디로 예배의 개혁이었고, 그관심은 무엇이 참된 참된 예배인가 하는 관심 이었다. 이런점에서 오늘 우리에게는 참된 예배에 대한 좀 진지한 고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에 여전히 필요한 것은 형식이나 조직, 기술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교회지도자, 특히 목회자들의 건실하고도 모범적인 생활과 이를 뒷받침해주는 영적 자질이다.
III. 바람직한 예배문화와 프로그램
그리고 셋째, 형식의 변화가 내용을 변질시킬 수 있다는 위험성이다. 물론 형식 그 자체가 중요하지 않고 기존의 예배형식 그 자체가 절대적일 수는 없다. 형식(型式)은 단지 내용을 담는 그릇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다. 내용의 변질만 없다면 형식을 고정화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는 점은 형식 그 자체가 때로는 내용을 변질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해묵은 지적이지만 맥루한 매체가 메시지를 대신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그 실제적 변형의 경우를 지적한 바 있는데, 예배에세도 형식이 내용을 대신 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 변질이란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보는 예배, 그리고 보여주는 예배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우리만의 것은 아니다. 또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이미 10여년전에 저명한 교회사가인 스텐리 포드 리드(Standford Reid)는 "우리의 예배는 우리의 즐거움을 위한 것인가 안면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인가"라는글을 썼다.
이글에서 그는 미국과 카나다에서 일고 있는 이른바 예배형식의 변화라는 것은, 사실은 예배라는 형식으로 우리의 여흥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형식의 변화보다는 예배자의 태도가 변화되어야 한다고 지적한 일이 있다. 특히 그는 우리시대의 예배형식의 파괴라는 것이 지나치게 대중을 의식한 것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성격이 무시되거나 경시되고 있다고 개탄란 일이 있다. 예배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깊이 관련되었다. 다시 말하면 예배행위는 하나님 이해를 기초로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염려해야 할 것은 이른바 예배형식의 파괴가 우리 하나님 이해마저도 변질시킬 수 있다는 위험성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예배를 그처럼 소중하게 여겨 미사를 개혁하고 예배의식을 쇄신하기 위해 싸웠던 것은 중세적 예배가 하나님 이해를 변질 시켰다는 자갇 때문이었다. 종교개혁은 한 마디로 예배의 개혁이었고, 그관심은 무엇이 참된 참된 예배인가 하는 관심 이었다. 이런점에서 오늘 우리에게는 참된 예배에 대한 좀 진지한 고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에 여전히 필요한 것은 형식이나 조직, 기술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교회지도자, 특히 목회자들의 건실하고도 모범적인 생활과 이를 뒷받침해주는 영적 자질이다.
III. 바람직한 예배문화와 프로그램
1. 개혁주의적 예배문화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경배이고 예배에 있어서 그 순서는 그 표현의 수단이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 족장시대와
광야 성막 시대의 예배에는 희생 제사를 드리는 의식이 있었고,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이후의 성전예배는 이 의식을 전승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포로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희생 제사 의식을 행할 수 없게 되자 성전 예배를 대신하여 발달한 형대였다. 그리고 회당 예배에는 율법서와
예언서 낭독, 강해, 기도, 시편, 영창, 축도 등 주로 말씀 예배에 그 특징이 있었다. 기독교 예배는 이 회당 예배를 전승한 것이고 순수한
기독교적 요소는 '떡을 떼는'(행 2:42) 주의 만찬이다. 예배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서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께 마음의 문을
열고 감사와 경배를 드리려는 인간의 최상의 행동이라고 이 때, 예배는 한편의 드라마로서 계시와 응답이 이루어 져야 한다. 예배가 그리스도인의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예배하는 자들의 눈앞에 기독교 계시의 위대한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줌으로 예배하는 자들이 참회와 감사와 헌신과
찬양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예배 순서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예배의 본질을 무너뜨리지 않는 선에서 예배의 개혁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토론트의 축복이라고 하는 빈야드의 예배에서 보듯이 열린 예배도 단순히 하나의 유행에서 그치게 될 공산이 크다.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무질서의 예배는 예배자들을 혼동케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기 때문에 예배순서는 꼭 필요하다.
사람들은 믿는대로 예배한다. 예배자가 지닌 하나님에 대한 신념과 인식은 그 사람이 표현하는 예배의 내용을 결정한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을 명백히 알고 믿는 것이 예배의 바람직한 길이다. 따라서 예배는 반드시 신학의 판단 아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신학이 없는 예배는 감상적이고 유약하여 맹목에 빠지기 쉽고 예배없는 신학은 냉냉하고 그 자체에 생명력이 없으므로 예배와 신학은 함께 결합하여 강한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유도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힘있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배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살펴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제 예배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5가지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인 믿음 안에서의 응답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에게 제공되고 믿음을 통해서 인간의 사랑이 하나님께 응답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요 참다운 만남이다.
둘째, 예배는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배의 대상은 인간이나 사물이 아니라 참 하나님 한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와 더불어 교제할 사람을 창조함으로써 예배에 솔선하셨으며 존재의 근거로서 생명의 원천이며 보존자가 되신다. 그는 최고의 통치자로서 사람과 만나고 또한 사람을 심판하시고 요구하신다. 그리고 예배를 통하여 사람이 응답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하심과 사랑을 새롭게 들어내셔서 사람으로 그것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이다.
세째, 예배는 무엇보다도 기독론에 근거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가장 분명하게 계시해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단번에 희생적으로 바침으로써 예배의 완전한 행위를 이룩하셨다. 기독교 예배의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 땅위에 오시어 만민을 위해 제사장적 희생을 단번에 행하심으로써 속죄의 대 사업과 화해 및 구원의 대 사업을 성취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임재하시는 주님은 영광 중에 오시어 하늘의 예배를 이루시리라는 데 있다.
네째, 예배는 성령론에 근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시키셨고 오순절 이후부터 재림까지는 성령을 통하여 완성하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드리는 예배 속에서 성령의 내적 증거를 통하여 예배자의 마음에 파고든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 얻는 감동과 변화는 모두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 지는 것이다.
다섯째, 기독교 예배는 교회론과 깊이 연결되어 표현된다.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백성"으로서 언약 공동체요,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예배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설교) 주께서 명령하신 성례전(세례와 성만찬)을 바르게 시행해야 한다.
이러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예배 순서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예배의 본질을 무너뜨리지 않는 선에서 예배의 개혁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토론트의 축복이라고 하는 빈야드의 예배에서 보듯이 열린 예배도 단순히 하나의 유행에서 그치게 될 공산이 크다.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무질서의 예배는 예배자들을 혼동케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기 때문에 예배순서는 꼭 필요하다.
사람들은 믿는대로 예배한다. 예배자가 지닌 하나님에 대한 신념과 인식은 그 사람이 표현하는 예배의 내용을 결정한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을 명백히 알고 믿는 것이 예배의 바람직한 길이다. 따라서 예배는 반드시 신학의 판단 아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신학이 없는 예배는 감상적이고 유약하여 맹목에 빠지기 쉽고 예배없는 신학은 냉냉하고 그 자체에 생명력이 없으므로 예배와 신학은 함께 결합하여 강한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유도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힘있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배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살펴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제 예배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5가지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인 믿음 안에서의 응답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에게 제공되고 믿음을 통해서 인간의 사랑이 하나님께 응답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요 참다운 만남이다.
둘째, 예배는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배의 대상은 인간이나 사물이 아니라 참 하나님 한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와 더불어 교제할 사람을 창조함으로써 예배에 솔선하셨으며 존재의 근거로서 생명의 원천이며 보존자가 되신다. 그는 최고의 통치자로서 사람과 만나고 또한 사람을 심판하시고 요구하신다. 그리고 예배를 통하여 사람이 응답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하심과 사랑을 새롭게 들어내셔서 사람으로 그것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이다.
세째, 예배는 무엇보다도 기독론에 근거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가장 분명하게 계시해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단번에 희생적으로 바침으로써 예배의 완전한 행위를 이룩하셨다. 기독교 예배의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 땅위에 오시어 만민을 위해 제사장적 희생을 단번에 행하심으로써 속죄의 대 사업과 화해 및 구원의 대 사업을 성취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임재하시는 주님은 영광 중에 오시어 하늘의 예배를 이루시리라는 데 있다.
네째, 예배는 성령론에 근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시키셨고 오순절 이후부터 재림까지는 성령을 통하여 완성하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드리는 예배 속에서 성령의 내적 증거를 통하여 예배자의 마음에 파고든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 얻는 감동과 변화는 모두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 지는 것이다.
다섯째, 기독교 예배는 교회론과 깊이 연결되어 표현된다.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백성"으로서 언약 공동체요,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예배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설교) 주께서 명령하신 성례전(세례와 성만찬)을 바르게 시행해야 한다.
2. 예배순서의 제안
우리의 예배순서 즉,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예배의 순서를 가다듬는 적당한 방편을 찾으려면 교회의 유산에 진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교회 역사를 통하여 내려온 교회의 풍습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어떤 특수한 관례가 오래된 것이라고 하여 반드시 좋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개혁자들에 의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깊은 신학적 통찰력 안에서 개혁 신앙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있는 우리들은 그들로 부터 예배
순서에 관한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열린예배가 원래 구도자 예배 즉 전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교회는 다른 방향으로 불신자들을
전도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공예배시에는 결토 이러한 열린예배형식의 도입을 자제하고 가능하면 배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교회모임은 연구해야할 대상이라고 여겨진다.
Ⅳ. 결론
21세기를 향한 진정한 준비는 에배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가장 한국적인 예배 한국적인 문화요소가 포함된 예배가 필요하다. 무조건적으로 구미에서 성공하였거나 유행하면 분별없이 도입하여 유행시키는 이러한 운동은 결코 개혁주의적 예배관에서는 수용될 수 없는 것이다. 미국식 구도자 예배는 한국교회에 접목되기에는 문제가 많이 있다. 미국교회는 다양한 형식의 예배를 경험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구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예배는 장로교 예배였기 때문에 이들은 한국교회에서는 문제의 소지가 강하다는 것이다. 물론 한구교회가 예배를 갱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준비된 예배의 형식을 지금처럼 공예배시에 무분별하게 도입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으로 보아도 틀린 것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자는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열린예배는 신중하게 연구 되고 분석 되어져야 할 대상이지 결코 도입해야할 대상이 아님을 밝혀둔다.
출처 : 내사랑 은숙이
글쓴이 : 충열 원글보기
메모 : 열린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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