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우리의 찬양문화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주어진 은사를 마음껏 뿜어내며 싱싱한 승리의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도피적 신앙이 아니라 도전적인 신앙을 안고 오래 된 고정관념과 한계를 깨고자 발돋움하는 노력은 참으로 영적이고 아름다운 것이다. 이제 세상에서나 교회 안에서나 조직에 안주하는 무난함의 성향은 사라지고 각자가 자신의 존재의 특성을 발견하여 탁월한 존재로 일어서려 하는 바람이 일고 있다. 그냥 세상이 변했다는 한 마디로 적당히 넘기려 하지 말라. 남들은 디지털 시대의 필연적인 트랜드(경향)라고 말하겠지만 나는 하나님이 때가 차매 터뜨리신 개인적 승리의 시대라고 부르고 싶다. 지금 당신의 마음을 울렁이게 하는 찬양의 비전을 소중히 간직하라. 비전은 눈을 뜨고 꾸는 꿈이다. 비전은 열정을 깨우고 열정은 당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 순수한 열정을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내려 놓아라. 조율이 되어 있지 않은 키타 줄은 끊어지는 것이 낫듯이 죄를 따르는 열정이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 찬양의 열정은 참으로 변질되기 쉬운 변덕스러움이 있다. 지혜롭게 자신을 관찰하지 않으면 어느 샌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주변을 빙빙 돌며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경배하듯이 음악과 느낌을 경배할 수도 있다. 나는 분명히 찬양인줄 알았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열납할 만한 가치가 없다면 이 얼마나 비참한 실수인가.
요즈음 참으로 많은 성도들의 마음속에 찬양사역의 꿈이 자라고 있다. 한 교회에 한 사람만 있다고 쳐도 적어도 찬양사역을 희망하는 성도는 최소한 5만 명은 넘는다는 얘기이다. 문화가 다양해지고 사람들의 자기 표현 욕구가 폭발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주어진 은사가 결합하여 회중 앞에서 찬양으로 그들의 영혼과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직분을 원하는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많이 생겼다. 이 소망에는 나이가 따로 없고 조건이 따로 없다. 연예인을 꿈꾸는 젊은이에서 농사일에 손이 굳은 집사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에서 이 소망이 살아 숨쉬고 있다. 찬양은 영혼의 본능이며 창조주를 향한 원초적인 그리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속에서 꿈만 영글어 갈 뿐 어떻게 그 꿈의 포도를 수확하여 향기로운 포도주로 만들어야 할지 방법들을 모른다는 것이 문제이다. 세상 연예계 같으면 잘 나가는 작곡가에게서 히트할만한 곡을 받고 유능한 매니저를 만나 이미 잘 닦여있는 길을 돈을 뿌리며 따라가면 하루아침에 스타가 될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지만 찬양사역은 그런 단거리 경주가 아니기에 성공과 실패의 개념도 모호하고 시작과 끝도 측정할 수 없는 애매함이 당신을 헛갈리게 할 것이다. 올림픽 육상경기를 보면 100미터 달리기의 출발점에 서 있는 선수들을 보디빌더를 연상하게 만드는 근육질들이다. 그들의 경주는 채 10초가 걸리지 않기 때문에 정신적인 성숙과는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라톤 선수들은 어떠한가? 모두 작은 체구에 빼빼 마른 몸매 그리고 볼품없는 외모뿐이다. 상상이 잘 안되면 우리의 자랑 이봉주 선수를 생각해 보라. 마라톤 선수들의 무기는 강인한 근육과 힘줄이 아니라 지치지 않는 심장과 허파이다. 몸이 더 이상 움직여 주지 않는 최악의 지점에서도 자신의 심장을 향하여 분명하게 속삭이는 희망의 언어를 내면에 품고 있지 않으면 완주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찬양 사역은 마라톤이다. 기록보다 중요한 것은 완주하는 정신이다. 찬양은 또한 구별된 선수들만의 사역이 아니다. 당신이 평범한 성도로 남는다고 해도 하나님을 향하여 심장을 울려 뿜어 올려야 할 영적 독수리의 날개 짓이다. CCM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범위도 확실하지 않고 사역자와 연예인이 혼합이 되듯한 젊은이들의 모습도 혼란스러우며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찬양사역을 말하는지 개념도 제대로 정립이 되어 있지 않은 시점에 우리는 서 있다. 이런 상태에서 찬양 사역을 결심하는 나는 무엇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이며 이 꿈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고 어떻게 당당하고 모양새 바른 모습으로 자리를 잡아야 하며 어떻게 하나님이 줄로 재어준 나의 지경을 발견하고 확보하여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날까지 나름대로 기쁨이 충만한 찬양사역을 지탱할 수 있는지 함께 생각을 해 보자.
한국 기독교 안에는 성전이라는 이미 준비된 무대가 있고 성도라는 이미 준비된 청중이 있으며 목회자들이라는 예리한 관찰자들과 후원자들이 있다. 자칭 찬양 사역자는 많은데 막상 믿고 강단을 맡길만한 사역자는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밖에 없는 찬양 사역계. 오늘도 많은 젊은 얼굴들이 기대감에 젖어 뜨거운 각오로 등장하지만 최소한 하나님이 10년은 사용하신 뒤에 여전히 ‘나는 찬양 사역자’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일꾼은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직 우리의 찬양마당이 역사가 짧고 생각보다 규모가 작아서 어떤 통계나 성장 모델이나 흐름의 줄기를 잡기에는 바탕이 미미하기는 하다. 그러나 길게는 30년으로 볼 수 있는 이 찬양의 지나온 흐름 속에 하나님이 버리지 아니하시고 오래 사용하시는 사역자들의 모습은 적지 않게 눈에 띈다. 우리는 그들의 영성과 은사 속에서 한 가지 모범을 발견할 수 있으며 나아가 오늘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정직하게 이야기함으로서 앞으로의 길을 어느 정도 예측해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편하고 익숙한 고향을 떠났다지만 그가 모르고 간 것은 종점일 뿐 그가 걸어간 매일의 여정 속에는 그 동안 인생의 실전을 통해 익히고 저장한 지혜와 경험들이 함께 동반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불 신앙적인 자기 주장이 아닐 것으로 믿는다.
지금 한국의 찬양문화가 바르게 가는 것인지, 교회에 과연 유익이 되는 것인지, 세월이 흐른 뒤에 칭찬 받을 만한 흔적으로 기억이 될지는 누구도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다만 어느 때보다 문화적인 기반이 풍부해 지고 젊은 다윗들의 은사가 자유롭고 힘차게 분출하는 시대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거침이 없는 자기 표현과 존재의 바닥까지 드러낼 수 있는 당당한 젊음의 에너지가 행여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데에 방해가 되거나 자기의 열정을 성령의 이끄심으로 오해할 소지가 없는지는 각자의 고민으로 항상 살아 있어야 한다. 오랜 기독교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위하여’라는 미명 아래 저질러진 많은 사건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고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고통으로 남은 사건들은 얼마든지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최선의 사건들이 베풀어지고 동시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최악의 사건들이 저질러지는 것이 우리가 보는 현실이다. 찬양이라는 이름이 주는 환상에 젖어서 그 깃발 아래에선 무엇이든지 합리화되고 은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찬양은 문화적인 전쟁이다. 무엇에 경배하며 무엇을 섬기면서 사는가는 종교적인 문제이기 전에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의 원초적인 갈망의 문제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영혼과 육체의 구조가 설계되었다. 그 본질적인 목적은 종교를 떠나서도 희석되지 않고 일상을 살아가는 그 인격의 매 순간을 사로잡는다. 조용히 묵상해 보면 우리는 항상 무엇을 경배하는가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자칫하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을 찬양하고 나아가 찬양하는 나를 찬양하는 우매함이 저질러진다. 그 잘못된 사이클이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노출되기는 참으로 힘들다. 스스로 정당화 한 것에 대하여는 어떤 지적과 책망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기에 인간의 원초적인 한계가 있다. 오직 인본적인 진선미로만 가득한 곳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악취가 날 수 있다. 예수님이 없이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에서 가장 마귀적인 것이 나온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내 믿음을 믿는 어리석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기도의 공로에 기대를 거는 어리석음은 아무리 오랜 세월 교회를 다닌 사람이라도 성령의 조명 아래 진실한 고민으로 점검하지 않으면 쉽게 그 정체를 알아챌 수 없다.
당신이 진정한 찬양사역을 원한다면 하나님만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어라. 이건 쉬운 말이 아니다. 어쩌면 당신은 이 말의 의미조차 이해하기 힘들지 모른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많은 명령과 규례들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찬양의 소재가 아니라 찬양의 목적이시다. 찬양의 참된 목적은 퍼포먼스라기 보다는 포지셔닝이다. 내 영혼 안에 하나님이 정확하게 자리매김 되지 않으면 그 이후의 모든 행위와 소리는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번잡함과 소음이다. 요즈음 CCM 공연에 참가해 본 사람은 모두들 일말의 염려를 안고 돌아왔을 것이다. 공연자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고 해도 공연을 바라보는 청소년들은 사역자들의 의도대로 마음의 방향을 잡아주지 않는다. 티켓을 사고 멀리서 작정을 하고 왔으니 본전을 뽑겠다는 마음으로 분위기에 집착하게 된다. 혈기와 감각이 왕성한 청소년들에게 진정하고 주님을 생각하라는 말은 축구장의 붉은 악마 응원단에게 조용히 하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들의 공연장에서 원하는 것은 평화와 안식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아드레날린성 흥분을 원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당장 짜릿함을 갈망하는 순간 지향성 갈증이 현대인을 지배하고 있다. 바로 이 부분이 이 세상의 한 가운데로 찬양을 흐르게 해야하는 사역자들의 고민이다. 그러나 이 점을 정말 고민하고 있는 기획자와 사역자들은 얼마나 되는지. 일이 이렇게 될 경우 사람에겐 거룩한 음악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보좌에는 전혀 상달되지 않는 인간적인 소리에 불과하다.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인 끼(육적 존재의식)를 발산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당신의 부르는 노래의 소재로 전락시킨다면 그 노래는 과연 누구를 높이기 위한 노래인가? 우리는 창세 전에 루시엘이 갔던 몰락의 길을 따라 가서는 안 된다. 나중에 루시퍼가 된 루시엘은 찬양을 담당한 천사장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높이며 노래했을 것이다. 그러나 천사도 타락하게 만드는 환호와 인기는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교만한 고개를 쳐들게 만들었다. 그 결과 천국에서 쫓겨난 루시퍼와 3분의 1의 천사들은 이 땅의 어둠의 권세가 되고 만다. 사단은 음악의 힘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음악은 그의 전공분야이며 최대의 무기이기이다. 십자가상에서 일단 무장해제는 되었지만 그들은 아직 우리보다 지혜롭고 영악하다. 잘 생각하라.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과 하나님을 소재로 노래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내 마음에 와 닿는 음악적인 감각을 추구하는 것의 차이는 분명히 알고 넘어가자. 그리고 한번 이해했다고 안심하지 말고 우리의 생각보다 더 간교한 마귀의 이간질에 영성과 호흡을 도둑맞지 않도록 깨어 조심하자. 군대에는 이런 말이 있다. “전투에서 실패란 지휘관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경계에서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을 수 없다.” 이 다음에 주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하고 준비한 답안에 대한 질문은 하나도 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다르고 하나님의 관점은 우리와 다르다. 첫 단추를 잘못 꿰면 다른 모든 단추가 제 구멍에 들어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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