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찬양강해

하나님이기뻐하시는찬양

늘찬양 2006. 11. 10. 23:12
하나님이기뻐하시는찬양 김민식 전도사  ▒▒
1. 찬양인도기술

찬양인도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적당히 상투적으로 하려고 하면 한없이 간단한 일이지만 영혼을 향하여 설득력을 가지고 전문적으로 해내려면 너무나 다양한 능력이 종합적으로 필요한 고도의 기술이다. 적당히 하고자 하면 누군들 찬양인도를 못하겠는가? 그러나 교회마다 유능한 인도자가 없어서 전전긍긍하는 것을 보면 찬양인도는 목회적 차원에서 고민되어져야 하고 훈련되어 져야 한다. 소경들이 코끼리를 더듬어 보고 나름대로 코끼리의 모양을 주장했다는 동화처럼 찬양인도란 이것이다라고 나서서 한 마디씩 하고 싶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나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오랜 시간 한 길을 걸어온 경험과 수천 교회의 영적인 분위기를 통해 얻은 보편적인 시각이 있다는 것이다. 찬양인도는 이런 결과를 낳아야 한다.

A. 찬양을 드린 뒤에 더 하나님을 향해 목말라져야 한다.
B. 찬양을 드린 뒤에 세상의 사소함과 천국의 위대함이 분명해져야 한다.
C. 찬양을 드린 뒤에 감각과 관점이 독수리처럼 높아져야 한다.
D. 찬양을 드린 뒤에 나의 생각과 고집은 고개를 숙이고 복음과 진리가 내 안에서 왕성해져야 한다.
E. 찬양을 드린 뒤에 예수님만으로 충분하다는 고백이 살아나야 한다.

이 외에도 수 백 가지의 열매를 기술할 수 있겠지만 이상 다섯 가지의 열매만 제대로 맺어도 그 찬양은 성공한 시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실상은 어떠한가? 대부분의 교회에서 찬양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가 부족한 것을 보았다. 성도와 인도자는 물론이고 심지어 목회자조차도 찬양을 교회 성장이나 성도 결집의 한 방편으로 취급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이사야 43장 21절의 말씀을 보면 찬양은 이 백성이 존재하는 목적이다. 그러나 22절의 말씀은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며 그 분의 임재를 괴로워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찬양은 노래를 부르며 분위기를 띄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시간동안 하나님을 범사에 부르며 늘 그 분과 동행하는 것을 인하여 진실로 감격하는 것이다. 찬양을 음악적인 관점으로만 편협하게 다루면 사단에게 도움이 되는 해석을 할 수도 있다. 찬양은 인간의 감정과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으므로 그 성공과 실패를 자신의 기분으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물이 나고 온몸이 짜릿하다고 과연 성령이 충만한 찬송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찬양이란 과연 무엇인지 그 정의를 가지고 10년 이상을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아직 찬양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만일 당신이 한 교회의 찬양을 인도하는 중대한 직분을 맡았다면 이제 당신은 영적 행진의 리더가 된 것이다. 부하들이 다 들판에 누워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도 지휘관은 멀리 바라보며 안전하고 올바른 길을 찾아야 한다. 찬양인도는 그 시간을 당하여 기술적으로 해내는 일회적 기능이라기 보다는 그 인도자의 한 주간의 삶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기우는 시간이라고 보아야 한다. 당신이 일상 속에 늘 찬송하고 있지 않았다면 가마솥의 누룽지 긁는 소리가 날 것이다. 분명히 이런 경험을 해 보았을 것이다. 언어와 노래가 풍성한 중에 넘치는 것이 아니라 바싹 타버린 솥에서 박박 긁는 소리가 나는 것처럼 영성이 메마른 경험은 얼마나 당혹스러운가. 영성은 마치 물을 길어 올리는 펌프와 같아서 멈추면 잠시 후엔 물이 다 빠져버리고 그 다음엔 아무리 힘차게 눌러도 삐걱거리는 소리만 나게 되어 있다. 문제는 회중들이 그 상황을 바로 알아챈다는 것이다. 날개를 받들어주는 바람처럼 풍부해야 할 인도자의 감동이 자신의 영혼을 지탱하기에도 부족하게 보인다면 회중은 은혜를 받기는커녕 본전도 추스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도자는 이런 자기 훈련을 해야 한다.

A. 인도할 노래를 완벽히 소화하라. 음정이나 박자를 놓치는 사람은 자격미달이다.
B. 예수님의 비유법을 연구하여 생활 속의 이야기들을 건져 올려라.
C. 평소의 성품과 태도에서 존경과 리더십을 확보하라.
D. 누군가를 모방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의 아류로 안주하지는 말라.
E. 순발력 있는 메시지로 찬양과 복음의 깊은 의미를 회중들의 마음 깊은 곳에 심으라.
F. 적당한 유머와 진지함을 균형 있게 사용하라.
G. 찬양 인도를 어떤 관점에서 인도해야 할지 입장을 이해하라. 다음에 목사님이 설교하러 나오신다면 멋진 스파이크가 되도록 적절히 토스하는 심정으로 인도하라.
H. 돕는 자들과 영육 간에 친밀감이 형성되지 않으면 그 미묘한 어긋남이 흐름을 방해한다.
I. 회중의 영성과 기분을 읽어서 먼저 그들에게 다가가 천천히 하나님의 존전으로 안내하라.
J. 멘트나 태도가 권위적이거나 상투적이지 않도록 늘 신선한 감동을 깨워라.
K. 감정적인 분위기로 과도하게 몰아가지 말라. 찬양은 지정의가 균형을 이루어야 온전해 질 수 있다.
L. 선곡의 지혜는 너무나 중요하다. 회중의 연령이나 취향을 고려하여 하고 싶은 곡과 해야 할 곡을 적절히 배합하라.
M. 성막의 구조를 참고하라. 성전뜰과 성소를 지나야 지성소가 나온다. 친교성 찬양에서 고백성 찬양으로 그리고 나아가 경배성 찬양으로 가열시켜라.
N. 절대로 인도자가 우상이 되면 안된다. 회중 앞에서 영향력이나 통제력을 즐기지 말라.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지 말라.
O. 한 가지 악기는 할 수 있어야 음정이나 리듬을 통제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선 키타가 가장 좋다. 꼭 정해진 순서대로 하지 말라. 성령님의 간섭하심에 민감하라.
P. 구약적인 가사에 치중하다 보면 예수님이 소홀히 여김을 받으실 수 있다. 조심하라
2. 우리의 찬양문화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주어진 은사를 마음껏 뿜어내며 싱싱한 승리의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도피적 신앙이 아니라 도전적인 신앙을 안고 오래 된 고정관념과 한계를 깨고자 발돋움하는 노력은 참으로 영적이고 아름다운 것이다. 이제 세상에서나 교회 안에서나 조직에 안주하는 무난함의 성향은 사라지고 각자가 자신의 존재의 특성을 발견하여 탁월한 존재로 일어서려 하는 바람이 일고 있다. 그냥 세상이 변했다는 한 마디로 적당히 넘기려 하지 말라. 남들은 디지털 시대의 필연적인 트랜드(경향)라고 말하겠지만 나는 하나님이 때가 차매 터뜨리신 개인적 승리의 시대라고 부르고 싶다. 지금 당신의 마음을 울렁이게 하는 찬양의 비전을 소중히 간직하라. 비전은 눈을 뜨고 꾸는 꿈이다. 비전은 열정을 깨우고 열정은 당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 순수한 열정을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내려 놓아라. 조율이 되어 있지 않은 키타 줄은 끊어지는 것이 낫듯이 죄를 따르는 열정이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 찬양의 열정은 참으로 변질되기 쉬운 변덕스러움이 있다. 지혜롭게 자신을 관찰하지 않으면 어느 샌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주변을 빙빙 돌며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경배하듯이 음악과 느낌을 경배할 수도 있다. 나는 분명히 찬양인줄 알았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열납할 만한 가치가 없다면 이 얼마나 비참한 실수인가.

요즈음 참으로 많은 성도들의 마음속에 찬양사역의 꿈이 자라고 있다. 한 교회에 한 사람만 있다고 쳐도 적어도 찬양사역을 희망하는 성도는 최소한 5만 명은 넘는다는 얘기이다. 문화가 다양해지고 사람들의 자기 표현 욕구가 폭발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주어진 은사가 결합하여 회중 앞에서 찬양으로 그들의 영혼과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직분을 원하는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많이 생겼다. 이 소망에는 나이가 따로 없고 조건이 따로 없다. 연예인을 꿈꾸는 젊은이에서 농사일에 손이 굳은 집사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에서 이 소망이 살아 숨쉬고 있다. 찬양은 영혼의 본능이며 창조주를 향한 원초적인 그리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속에서 꿈만 영글어 갈 뿐 어떻게 그 꿈의 포도를 수확하여 향기로운 포도주로 만들어야 할지 방법들을 모른다는 것이 문제이다. 세상 연예계 같으면 잘 나가는 작곡가에게서 히트할만한 곡을 받고 유능한 매니저를 만나 이미 잘 닦여있는 길을 돈을 뿌리며 따라가면 하루아침에 스타가 될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지만 찬양사역은 그런 단거리 경주가 아니기에 성공과 실패의 개념도 모호하고 시작과 끝도 측정할 수 없는 애매함이 당신을 헛갈리게 할 것이다. 올림픽 육상경기를 보면 100미터 달리기의 출발점에 서 있는 선수들을 보디빌더를 연상하게 만드는 근육질들이다. 그들의 경주는 채 10초가 걸리지 않기 때문에 정신적인 성숙과는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라톤 선수들은 어떠한가? 모두 작은 체구에 빼빼 마른 몸매 그리고 볼품없는 외모뿐이다. 상상이 잘 안되면 우리의 자랑 이봉주 선수를 생각해 보라. 마라톤 선수들의 무기는 강인한 근육과 힘줄이 아니라 지치지 않는 심장과 허파이다. 몸이 더 이상 움직여 주지 않는 최악의 지점에서도 자신의 심장을 향하여 분명하게 속삭이는 희망의 언어를 내면에 품고 있지 않으면 완주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찬양 사역은 마라톤이다. 기록보다 중요한 것은 완주하는 정신이다. 찬양은 또한 구별된 선수들만의 사역이 아니다. 당신이 평범한 성도로 남는다고 해도 하나님을 향하여 심장을 울려 뿜어 올려야 할 영적 독수리의 날개 짓이다. CCM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범위도 확실하지 않고 사역자와 연예인이 혼합이 되듯한 젊은이들의 모습도 혼란스러우며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찬양사역을 말하는지 개념도 제대로 정립이 되어 있지 않은 시점에 우리는 서 있다. 이런 상태에서 찬양 사역을 결심하는 나는 무엇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이며 이 꿈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고 어떻게 당당하고 모양새 바른 모습으로 자리를 잡아야 하며 어떻게 하나님이 줄로 재어준 나의 지경을 발견하고 확보하여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날까지 나름대로 기쁨이 충만한 찬양사역을 지탱할 수 있는지 함께 생각을 해 보자.

한국 기독교 안에는 성전이라는 이미 준비된 무대가 있고 성도라는 이미 준비된 청중이 있으며 목회자들이라는 예리한 관찰자들과 후원자들이 있다. 자칭 찬양 사역자는 많은데 막상 믿고 강단을 맡길만한 사역자는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밖에 없는 찬양 사역계. 오늘도 많은 젊은 얼굴들이 기대감에 젖어 뜨거운 각오로 등장하지만 최소한 하나님이 10년은 사용하신 뒤에 여전히 ‘나는 찬양 사역자’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일꾼은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직 우리의 찬양마당이 역사가 짧고 생각보다 규모가 작아서 어떤 통계나 성장 모델이나 흐름의 줄기를 잡기에는 바탕이 미미하기는 하다. 그러나 길게는 30년으로 볼 수 있는 이 찬양의 지나온 흐름 속에 하나님이 버리지 아니하시고 오래 사용하시는 사역자들의 모습은 적지 않게 눈에 띈다.
우리는 그들의 영성과 은사 속에서 한 가지 모범을 발견할 수 있으며 나아가 오늘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정직하게 이야기함으로서 앞으로의 길을 어느 정도 예측해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편하고 익숙한 고향을 떠났다지만 그가 모르고 간 것은 종점일 뿐 그가 걸어간 매일의 여정 속에는 그 동안 인생의 실전을 통해 익히고 저장한 지혜와 경험들이 함께 동반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불 신앙적인 자기 주장이 아닐 것으로 믿는다.

지금 한국의 찬양문화가 바르게 가는 것인지, 교회에 과연 유익이 되는 것인지, 세월이 흐른 뒤에 칭찬 받을 만한 흔적으로 기억이 될지는 누구도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다만 어느 때보다 문화적인 기반이 풍부해 지고 젊은 다윗들의 은사가 자유롭고 힘차게 분출하는 시대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거침이 없는 자기 표현과 존재의 바닥까지 드러낼 수 있는 당당한 젊음의 에너지가 행여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데에 방해가 되거나 자기의 열정을 성령의 이끄심으로 오해할 소지가 없는지는 각자의 고민으로 항상 살아 있어야 한다.
오랜 기독교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위하여’라는 미명 아래 저질러진 많은 사건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고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고통으로 남은 사건들은 얼마든지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최선의 사건들이 베풀어지고 동시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최악의 사건들이 저질러지는 것이 우리가 보는 현실이다. 찬양이라는 이름이 주는 환상에 젖어서 그 깃발 아래에선 무엇이든지 합리화되고 은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찬양은 문화적인 전쟁이다. 무엇에 경배하며 무엇을 섬기면서 사는가는 종교적인 문제이기 전에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의 원초적인 갈망의 문제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영혼과 육체의 구조가 설계되었다. 그 본질적인 목적은 종교를 떠나서도 희석되지 않고 일상을 살아가는 그 인격의 매 순간을 사로잡는다. 조용히 묵상해 보면 우리는 항상 무엇을 경배하는가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자칫하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을 찬양하고 나아가 찬양하는 나를 찬양하는 우매함이 저질러진다. 그 잘못된 사이클이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노출되기는 참으로 힘들다. 스스로 정당화 한 것에 대하여는 어떤 지적과 책망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기에 인간의 원초적인 한계가 있다. 오직 인본적인 진선미로만 가득한 곳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악취가 날 수 있다. 예수님이 없이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에서 가장 마귀적인 것이 나온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내 믿음을 믿는 어리석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기도의 공로에 기대를 거는 어리석음은 아무리 오랜 세월 교회를 다닌 사람이라도 성령의 조명 아래 진실한 고민으로 점검하지 않으면 쉽게 그 정체를 알아챌 수 없다.

당신이 진정한 찬양사역을 원한다면 하나님만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어라. 이건 쉬운 말이 아니다. 어쩌면 당신은 이 말의 의미조차 이해하기 힘들지 모른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많은 명령과 규례들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찬양의 소재가 아니라 찬양의 목적이시다. 찬양의 참된 목적은 퍼포먼스라기 보다는 포지셔닝이다. 내 영혼 안에 하나님이 정확하게 자리매김 되지 않으면 그 이후의 모든 행위와 소리는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번잡함과 소음이다. 요즈음 CCM 공연에 참가해 본 사람은 모두들 일말의 염려를 안고 돌아왔을 것이다. 공연자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고 해도 공연을 바라보는 청소년들은 사역자들의 의도대로 마음의 방향을 잡아주지 않는다. 티켓을 사고 멀리서 작정을 하고 왔으니 본전을 뽑겠다는 마음으로 분위기에 집착하게 된다. 혈기와 감각이 왕성한 청소년들에게 진정하고 주님을 생각하라는 말은 축구장의 붉은 악마 응원단에게 조용히 하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들의 공연장에서 원하는 것은 평화와 안식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아드레날린성 흥분을 원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당장 짜릿함을 갈망하는 순간 지향성 갈증이 현대인을 지배하고 있다. 바로 이 부분이 이 세상의 한 가운데로 찬양을 흐르게 해야하는 사역자들의 고민이다. 그러나 이 점을 정말 고민하고 있는 기획자와 사역자들은 얼마나 되는지. 일이 이렇게 될 경우 사람에겐 거룩한 음악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보좌에는 전혀 상달되지 않는 인간적인 소리에 불과하다.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인 끼(육적 존재의식)를 발산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당신의 부르는 노래의 소재로 전락시킨다면 그 노래는 과연 누구를 높이기 위한 노래인가? 우리는 창세 전에 루시엘이 갔던 몰락의 길을 따라 가서는 안 된다. 나중에 루시퍼가 된 루시엘은 찬양을 담당한 천사장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높이며 노래했을 것이다. 그러나 천사도 타락하게 만드는 환호와 인기는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교만한 고개를 쳐들게 만들었다. 그 결과 천국에서 쫓겨난 루시퍼와 3분의 1의 천사들은 이 땅의 어둠의 권세가 되고 만다. 사단은 음악의 힘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음악은 그의 전공분야이며 최대의 무기이기이다. 십자가상에서 일단 무장해제는 되었지만 그들은 아직 우리보다 지혜롭고 영악하다. 잘 생각하라.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과 하나님을 소재로 노래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내 마음에 와 닿는 음악적인 감각을 추구하는 것의 차이는 분명히 알고 넘어가자. 그리고 한번 이해했다고 안심하지 말고 우리의 생각보다 더 간교한 마귀의 이간질에 영성과 호흡을 도둑맞지 않도록 깨어 조심하자. 군대에는 이런 말이 있다.
“전투에서 실패란 지휘관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경계에서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을 수 없다.”
이 다음에 주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하고 준비한 답안에 대한 질문은 하나도 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다르고 하나님의 관점은 우리와 다르다. 첫 단추를 잘못 꿰면 다른 모든 단추가 제 구멍에 들어갈 수 없다.

3. 찬양이란 무엇인가?

찬양은 모든 믿는 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좀 더 강하게 표현하자면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풍성하게 하시는 기름 부으심이다. 강대상과 성가대 석은 무대가 되고 회중석은 관객석이 되는 식의 개념은 하나님에게 없으시다. 예배 안에서는 하나님만이 받으시는 분이 되시고 우리는 모두 그 분을 향한 영적인 연주자가 된다. 힘겨운 인생을 살다가 상처와 아픔을 당하고 그 해결과 위로를 사람이나 쾌락을 통해 더 이상 받을 수가 없을 때 대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주님 앞으로 손들고 나오게 된다. 마치 집을 떠난 탕자가 돼지 틈바구니에 앉아 버티다가 굶어 죽을 지경이 되어야 본향을 생각하듯이 우리는 좀체로 머리를 하늘로 돌리지 않는 고집스러운 존재들이다.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하지 않는다는 속담처럼 일말의 자존심만 남아 있어도 주님의 품에 기대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이 부르시기로 택한 백성은 어쩔 수가 없다. 초신자는 교회에 처음 나온 어색함과 미숙함 때문에 주눅들어 잠잠히 있는 법을 배우게 되고 그 마음과 입을 열지 않는 세 살 버릇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가도 변하지 않는다. 한국 교회의 전통적인 성향도 입을 다물게 하는 데에 막강하게 일조를 했다. 성도는 가만히 앉아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꼴을 먹고 그 힘으로 한 주간을 무사히 지내고 다음 주에 안녕히 만나자는 식으로 무언의 강요를 해 온 것도 사실이다. 언제까지 성도는 강단에서 벌어지는 일을 수동적으로 바라만 보며 잠잠하여야 하는가. 지난 100년을 그렇게 길들여 놓고 세상이 변했으니 갑자기 입을 벌려 찬양하라니, 지정의가 총동원된 열린 찬양이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그러나 분명 세상은 변하고 있다. 이 변화의 바람은 분명히 하나님의 허락 하에 불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인 현상을 보더라도 가장 주된 변화는 조직사회의 붕괴이다. 한 마디로 개인을 안전하게 숨겨줄 아늑한 품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게으르고 미숙한 존재라도 일단 어떤 조직 안에 자리를 잡으면 현상유지만으로도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지금 세상은 또 하나의 거대한 애굽이다. 유행의 폭풍과 미디어의 폭력이 개인을 압도하며 찍 소리 못하고 숨죽이며 살도록 강요하고 있다. 분명히 이론적으로는 개인이 왕이 되는 시대인데 실상은 하나님이 주신 영적 탄력과 싱싱한 개성은 다 도둑맞고 사람마다 숫자와 바코드로 분류되어 꼼짝못하는 노예로 결박되고 있다. 성도들이여! 세상과 함께 흐느적거리지 말라. 그리스도의 안목으로 문화를 응시하라. 그 속에 맥맥히 흐르는 사단의 계교를 파악하라. 진리가 아니라면 절대로 아닌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큰 위협이 되는 것은 핍박이 아니라 유혹이다. 저절로 기생의 집으로 걸어가던 김유신의 애마처럼 나른한 습관과 타협은 당신을 데리고 은혜가 없는 땅으로 가고 있다. 졸다가 깨어난 김유신은 그 애마의 목을 베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시는 분이다. 이 놀라운 대탈출 사건은 출애굽 한 번으로 끝날 수 없다. 하나님은 지금 모든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민족과 문화를 우렁찬 목소리로 익숙한 자리에서 불러내신다. 쉬움과 편함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성장하지 못한다. 찬양의 기초를 다시 쌓으라. 신곡을 입수해서 멋들어지게 부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울림통이 쓰레기로 가득 차 있으면 소리의 본질에서 둔탁한 울림이 나온다.

찬양은 모든 개인을 하나님 앞으로 일대 일로 부르시는 거룩한 초청이다. 찬양을 드리는 동안에 습관과 조직 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와 색깔과 향기를 재발견한다. 그 영혼 속에 자유의 바람이 불면서 겨드랑이 속에 숨겨져 있던 독수리의 날개가 근질거리기 시작한다. 일생동안 한번도 하늘을 응시한 적이 없었던 둥지 속의 새들이 보금자리의 벼랑 끝에서 두려움에 떨다가 용기를 내어 하늘로 몸을 던지는 순간 그에게 새로운 공간과 시간이 열린다. 영적인 모험을 통해 새롭게 경험하기 전엔 있는 줄도 몰랐던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다. 그렇다! 찬양은 새 하늘과 새 땅이다. 당신의 영혼이 참새라면 활동반경은 방앗간 주변을 못 벗어난다. 그러나 독수리는 고공의 맛을 안다. 그 신선한 공기와 자유로운 비행을 즐기는 영적 독수리가 되라. 하나님은 항상 당신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신다. 사단은 그 자리에 주저앉으라고 속삭일 것이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것들로 당신의 현재를 치장해 주며 값싼 즐거움과 천박한 흥분으로 당신을 옭아맬 것이다. 유럽 사람들은 수 천년 동안 지구 반대편에 아메리카 대륙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들이 신대륙을 발견한 것은 불과 몇 백년 전의 일이다. 당신이 찬양으로 여호와를 앙망하며 위를 향하여 솟아오르면 즉시 당신이 머물렀던 공간의 초라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찬양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나를 나 되게 한다. 찬양은 분명히 음악적인 표현 양식을 주로 하고 있지만 그 행위는 일종의 종합 예술이다. 모든 감각적인 요소와 다양한 예술적 표현 양식이 총동원되어야 온전한 찬양이 가능하다. 연예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물도 배경도 아닌 자기만의 끼이다. 아무리 악조건을 타고났어도 그 못나고 일그러진 악조건을 자신 있고 순수하게 표현하면 개성이 되고 사람들은 그를 인정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끼가 있고 끼가 있는 모든 것은 자신을 표현하고 분출하고 싶어한다. 인간 세상을 움직이는 정치나 종교나 교육이나 관습은 한결같이 개인의 자유로운 날개 짓을 억눌러 왔고 나의 나 됨을 포기하고 환경이 요구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박제하는 것을 미덕이라고 불러왔다.
그런데 이제 디지털 혁명과 함께 급격히 모든 개인들이 각자의 모습을 드러내면 자기만의 무대 위로 불리움을 받고 있다. 무난함과 안전함에 안주하던 자신을 세상에 새롭게 등장시켜야 하는 것은 이미 벤처인간들만의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필수 과목이다. 인터넷은 탁월한 존재를 순식간에 전세계에 소개할 수 있고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게 만들었다. 더 이상 행운은 존재하지 않는다. 행운이란 우연히 그 때 거기 있음으로 해서 드러나거나 발견되어 지는 것인데 이제 변하는 세상은 행운을 보편화시켰고 한 개인의 색깔이 자신의 브랜드가 될 수 있도록 강화시켰다. 이 현상은 앞으로 더 할 것이다.
하나님은 과연 우리가 무난한 존재로써 익숙한 자리에 머물기를 원하실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씨앗으로 부르시면서 ‘떠나라’ 명하셨고 예수님은 베드로는 교회의 초석으로 부르시면서 ‘따르라’ 명하셨다. 찬양은 매 순간 하나님을 향하여 떠나고 따르는 순수한 동작이다. 날마다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며 긍정적이든지 부정적이든지 익숙한 감정과 존재양식을 탈출하는 것이다. 신선도가 높은 존재로써 하나님에게 나 자신을 순간마다 새롭게 발견케 하며 그 분의 예리한 칼끝에 하나님을 위해 나를 회로 떠 드리는 모진 결단이다.

찬양 사역자는 먼저 “찬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말과 삶으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찬양 사역의 목마름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어야 한다. 사역이라는 말은 당신을 풀타임 섬김으로 부르는 말이며 풀타임이란 말은 강단에 올라가 노래하며 외치는 순간만이 아니라 그 외적인 시간에도 선포하고 노래한대로 살고자 애쓰는 수고가 포함되어 있다. 삶이 동반되지 않는 사역은 굴곡이 있으며 긴 슬럼프의 시간이 있다. 가슴에 이글거리는 불꽃이라고 다 하나님이 주신 불꽃이 아니다. 마음을 울렁거리게 하는 감동이라고 다 하나님이 주신 감동이 아니다. 세상 앞에 드러난 재능이라고 다 하나님이 쓰시는 재능은 아니다. 모든 역사는 비범한 자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평범한 개입이 아니라 평범한 자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비범한 개입이시다. 찬양의 참된 의미는 절대로 몇 시간의 강의나 학습으로 깨달아 지는 것이 아니다. 필자의 경험을 보더라도 찬양의 참된 의미는 마치 양파껍질처럼 한이 없어서 벗기고 벗겨도 다 측량할 수 없는 신비로운 속살이 열려왔다. 찬양은 이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인생이란 이것이다라고 말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한 눈에 다 보이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찬양처럼 흥미진진한 모험이 다시없고 날마다 새로운 로맨스처럼 우리를 감동케 한다.
어쩌면 찬양은 만인에게 만 가지로 달라지는 내용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지만 베드로가 고기를 잡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변하는 과정은 수년에 걸쳐 일어났다. 지금 가장 큰 기적은 당신의 마음속에서 인간의 노래가 변하여 하늘의 노래가 되었다는 것이다. 유명한 복음가수가 되어 전화통에 불이 나게 초청사역이 밀려오느냐 아니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마음과 손을 아울러 들고 영혼과 삶이 하나님을 향하여 바로 서 있다는 그 사실 자체에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은 당신이 영원토록 부를 찬송을 이미 다 듣고 계실 것이다. 그런 믿음이 있을 때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최선의 중심을 하나님에게 올려드릴 수 있다. 성숙한 사역자는 눈앞에 보이는 무대의 화려함이나 인원수에 흔들리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잠시 흔들리더라도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중심으로 되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