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신속하게 공식과 패턴을 발견한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은 반복된 리듬을 간파하지 못하고 매 순간 낯설게 부딪히는 고생을 당한다. 우리 속담에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이 있듯이 역사 속에 반복되는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의 기록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공식을 발견하지 못하는 자는 걸음마다 고난이며 고생이다. 위의 두 사건에서 당신은 무엇을 발견하였는가? 모세가 손을 들 때에 이스라엘의 오합지졸에게 임했던 승리의 기운과 여호사밧의 군대가 노래하고 찬송할 때 여호와의 복병이 일어나 상황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서 무엇과 부대끼며 싸우고 견디는 한 잊어서는 안될 귀한 교훈을 전하여 준다.
이 책은 좋은 찬양인도자를 세우기 위하여 만들어 진 책이다. 한국에 교회가 대략 5만 개가 있다면 당연히 좋은 찬양인도자도 5만 명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마다 유능한 찬양인도자를 구하는 목사님의 애타는 음성이 들리는 것을 보면 우리 모두가 다급한 마음으로 함께 이 문제를 고민해야 할 것으로 믿는다. 숨쉬기에도 제대로 숨쉬는 법이 있고 걷기에도 제대로 걷는 방법이 있듯이 입을 벌려 나오는 대로 노래한다고 다 찬양이 아니다.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하여 이 백성을 지으셨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대로 찬양하고 끝까지 찬양하는 것은 성도가 할 일의 처음이요 나중이다. 찬양이 제대로 되지 않는 성도는 마치 사격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군인처럼 존재의 의미를 충분히 만끽하지 못할 것이다. 날이 갈수록 힘들어 지는 목회의 여건 속에 점점 지쳐 가시는 목사님의 두 팔을 들어 드리기 위하여 찬송은 힘차게 살아나야 한다. 우리에게 승리를 예비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에게 행동개시를 의미하는 신호탄을 쏘아 올리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에게 마음을 모아 함성을 올려 드리기 위하여 찬양이 피어나야 한다. 사단의 전신은 창세 전에 하늘의 찬양을 주관하던 찬양의 천사장이었다. 그의 전공은 찬양이며 그 찬란한 능력으로 인하여 별들의 추앙을 받다가 결국 하나님에게 맞먹으려고 까지 했던 위험한 자이다. 그는 음악을 통하여 하나님을 높이는 것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이 시대의 영혼들을 교란하기 위하여 어느 분야보다 음악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음을 우리도 잘 아는 바이다. 음악은 순식간에 한 영혼의 빛깔을 우울하게 만들 수도 있으며 광기로 가득하게 만들 수도 있으며 죽음을 달콤하게 느끼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음악의 힘을 가장 잘 아는 사단이 교회 안에 찬양이 살아나는 것을 조용히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는 찬양의 힘을 약화시키려 하고 만일 그 작전이 잘 되지 않으면 찬양의 목적이 되시는 하나님을 선명하게 바라보지 못하도록 문화적인 교란을 통하여 우리의 찬양을 빗나가는 화살로 만들려고 획책할 것이다. 사단은 성도의 화살을 꺽지 못하면 그 화살의 과녁을 가려버리는 작전으로 간다. 성도들의 수줍음이나 전통의 압박이나 목회자의 특이한 취향이나 찬양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들을 확대하여 한 교회에서 찬양을 억누르면 사단의 활동은 용이해 지고 성도들은 감격과 열정이 사라진 신앙생활을 지친 발걸음으로 휘청거리며 따라가게 된다. 성경을 펼치면 어느 장에나 함성과 노래와 웃음과 때로는 신음과 고통의 고백이 담겨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쓰시는 찬양의 중요한 재료이다.
찬양인도자는 노래를 인도하는 전문가이기 전에 성도들의 위축된 영적 감정을 해방하여 마음껏 울게 하고 웃게 하며 나아가 안으로 잦아드는 신앙고백을 목소리와 표정과 행동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격려하는 역할이다. 여호사밧의 군대 앞에는 비무장의 성가대가 앞장서고 있었음을 기억하라. 전쟁터를 향하는 그들의 노래에는 전투적인 비장한 가사가 들어있지 않았다. 여호와를 향한 감사와 그 분의 성품에 대한 긍정적 고백이 전부였다. 찬양은 압도적이거나 비장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정확하게 부르면 공간과 시간 속에 저장된 하나님의 능력이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수없이 많은 교회를 현장에서 만난 찬양사역자로서 나는 너무나 다양한 교회의 표정을 보았다. 대중가요의 한 구절 처럼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교회도 만났고 마치 콩크리트 옹벽처럼 대포를 쏘아도 끄떡이 없을 것만 같은 무표정한 방어적 회중들도 만났다. 처음에는 그들의 반응을 따라 나의 영적인 신바람도 좌우되기도 했지만 이젠 제법 노련해진 탓인지 그 무감각 뒤에 숨겨진 더 간절한 목마름을 읽는 눈도 열리게 되었다. 성도의 본능은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다. 이 목마름이 믿는 자의 아픔이며 믿는 자의 희열이다. 좋은 찬양사역자는 바로 이 영적 감성에 있어서 누구보다 더 열려 있어야 하고 무디어지지 않도록 날마다 자신을 깨우고 가꾸는 인내의 노력이 있어야한다. 공감이 전제되지 않는 찬양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처음에는 찬양인도자가 회중을 인도하지만 결국은 회중이 찬양인도자를 경영하는 차원까지 올라가야 한다. 찬양이 절정에 이르면 누가 인도자이며 누가 따르는 자인지 그 구분이 없어진다. 한 무리가 수평적인 걸음을 걸을 때는 앞서 가는 자와 뒤에 가는 자의 구분이 가능하지만 모든 영혼이 한결같이 하나님을 향하여 수직 상승하는 순간이 오면 앞과 뒤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좋은 찬양인도자는 자신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을 창조하기 위하여 부단하게 노력하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은 시들은 영혼으로 비참하게 살아가는 백성들을 바라보시며 연민의 눈물을 흘리시기도 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찬양인도자는 회중의 열림과 닫힘에 모두 공감하며 그들의 정서 안에 들어가 모세처럼 결박을 풀고 끌러내는 사랑의 수고를 감내한다. 어쩌면 찬양은 각자의 몫이라고 볼 수 있다. 찬양인도자는 각자가 자신의 소리로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껏 소리를 지를 수 있을 때까지만 역할이 허락된 도우미에 불과하다.
오버하기는 쉽지만 적당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좋은 찬양인도자는 먼저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는 자이지만 실제로는 목회자와 교우들에게 지속적으로 기대감과 편안함을 주는 모델이 되어야 한다. 사람과 하나님에게 동시에 칭찬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의 경고는 어쩌면 찬양인도자에게 가장 절실하게 적용되는 지도 모른다. 찬양이라는 이름 하에 또 하나의 연예적 부류들이 일어서는 지금, 좋은 찬양인도자가 된다는 것은 기능 이전에 개념에서 먼저 치열한 전쟁을 치루어야 할 것이다. 앞에 있는 무리가 크던지 작던지 찬양인도자는 그 의미에서 모세적이며 여호사밧적이다. 21세기 목회는 결국 찬양의 전쟁으로 귀결될 것이다. 천지창조와 구원드라마의 출발점이 찬양이었기에 이 세상은 찬양 있는 자와 찬양 없는 자의 양대 세력으로 나뉘어 묵시적인 대결을 벌이게 될 것이다. 이미 이 세상에는 그런 현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세속적인 문화는 처방이 없는 바이러스처럼 퍼지고 있다. 그러나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성경적인 찬양을 가진 다윗 같은 존재들은 결국 그리스도의 기를 높이 들고 포연이 가득한 전장에서 아침햇살을 받으며 일어날 것이다. 구원 얻을 이름으로 예수님만을 주신 하나님이 승리 얻을 방법으로 찬양 외에는 주신 일이 없다고 나는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