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찬양강해

좋은찬양인도자

늘찬양 2006. 11. 10. 23:11
좋은찬양인도자  김민식 전도사  ▒▒
1. 좋은 찬양인도자의 정의

만일 기독교에 찬양이 없었다면 그 멀고 먼 순례의 여정을 어떻게 걸어올 수 있었을까 가끔 상상해 본다. 최악의 상황에 처한 성도의 입술에서 한숨 대신에 가녀린 찬송이 흘러나올 때 그를 결박했던 사단의 밧줄은 갑자기 탄력을 잃고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던 모든 감정과 조건과 관계들은 창조적이며 긍정적인 파동을 일으키며 일렁이기 시작한다.
성경에는 참으로 그림 같은 전쟁이야기가 들어 있다. 죽고 죽이는 전투장면에서 아름다움까지 느끼는 것은 모세와 여호수아의 민감한 영적 교감이 황홀한 무대 위의 남녀 두 주인공 발레리나를 보는 듯한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모세가 손을 들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군대가 이기고 모세가 힘겨워 손을 내리면 적군이 득세하는 묘한 전투의 장면이 출애굽기 17장에 나온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인도하시는 승리는 우리가 사는 공기 중에 원리와 에너지로 항상 존재한다. 문제는 그 힘과 공식을 유효하게 만드는 믿음의 행위가 뒤따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찬양과 경배의 행동은 하나님에게 승리의 타이밍을 알리는 신호탄이며 약속된 승리를 유효하게 만드는 뇌관과도 같다.
역대하 20장에도 찬양의 위력이 여실히 나타나는 전투의 기록이 있다. 모압과 암몬과 세일산 자손이 연합한 막강한 군대가 유다로 밀고 들어올 때 왕이었던 여호사밧은 최악의 절망감과 최선의 믿음이 범벅이 된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구원을 탄원한다. 하나님은 그의 큰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야하시엘을 통하여 구원의 약속을 전하신다. 실제적인 전투력으로 보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 격으로 형편없는 여호사밧의 군대가 성가대를 앞세워 찬양하며 전장에 나아가니 이미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상황은 종료되고 말았다. 한번 역대하 20장을 한편의 신나는 비디오를 보듯이 상상력을 동원하여 읽어 보라. 그리고 당신의 절망과 희망을 스토리 속에 적용하여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방식을 경험하여 보라.
지혜로운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신속하게 공식과 패턴을 발견한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은 반복된 리듬을 간파하지 못하고 매 순간 낯설게 부딪히는 고생을 당한다. 우리 속담에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이 있듯이 역사 속에 반복되는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의 기록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공식을 발견하지 못하는 자는 걸음마다 고난이며 고생이다.
위의 두 사건에서 당신은 무엇을 발견하였는가? 모세가 손을 들 때에 이스라엘의 오합지졸에게 임했던 승리의 기운과 여호사밧의 군대가 노래하고 찬송할 때 여호와의 복병이 일어나 상황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서 무엇과 부대끼며 싸우고 견디는 한 잊어서는 안될 귀한 교훈을 전하여 준다.

이 책은 좋은 찬양인도자를 세우기 위하여 만들어 진 책이다. 한국에 교회가 대략 5만 개가 있다면 당연히 좋은 찬양인도자도 5만 명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마다 유능한 찬양인도자를 구하는 목사님의 애타는 음성이 들리는 것을 보면 우리 모두가 다급한 마음으로 함께 이 문제를 고민해야 할 것으로 믿는다. 숨쉬기에도 제대로 숨쉬는 법이 있고 걷기에도 제대로 걷는 방법이 있듯이 입을 벌려 나오는 대로 노래한다고 다 찬양이 아니다.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하여 이 백성을 지으셨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대로 찬양하고 끝까지 찬양하는 것은 성도가 할 일의 처음이요 나중이다. 찬양이 제대로 되지 않는 성도는 마치 사격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군인처럼 존재의 의미를 충분히 만끽하지 못할 것이다.
날이 갈수록 힘들어 지는 목회의 여건 속에 점점 지쳐 가시는 목사님의 두 팔을 들어 드리기 위하여 찬송은 힘차게 살아나야 한다. 우리에게 승리를 예비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에게 행동개시를 의미하는 신호탄을 쏘아 올리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에게 마음을 모아 함성을 올려 드리기 위하여 찬양이 피어나야 한다.
사단의 전신은 창세 전에 하늘의 찬양을 주관하던 찬양의 천사장이었다. 그의 전공은 찬양이며 그 찬란한 능력으로 인하여 별들의 추앙을 받다가 결국 하나님에게 맞먹으려고 까지 했던 위험한 자이다. 그는 음악을 통하여 하나님을 높이는 것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이 시대의 영혼들을 교란하기 위하여 어느 분야보다 음악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음을 우리도 잘 아는 바이다. 음악은 순식간에 한 영혼의 빛깔을 우울하게 만들 수도 있으며 광기로 가득하게 만들 수도 있으며 죽음을 달콤하게 느끼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음악의 힘을 가장 잘 아는 사단이 교회 안에 찬양이 살아나는 것을 조용히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는 찬양의 힘을 약화시키려 하고 만일 그 작전이 잘 되지 않으면 찬양의 목적이 되시는 하나님을 선명하게 바라보지 못하도록 문화적인 교란을 통하여 우리의 찬양을 빗나가는 화살로 만들려고 획책할 것이다. 사단은 성도의 화살을 꺽지 못하면 그 화살의 과녁을 가려버리는 작전으로 간다.
성도들의 수줍음이나 전통의 압박이나 목회자의 특이한 취향이나 찬양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들을 확대하여 한 교회에서 찬양을 억누르면 사단의 활동은 용이해 지고 성도들은 감격과 열정이 사라진 신앙생활을 지친 발걸음으로 휘청거리며 따라가게 된다. 성경을 펼치면 어느 장에나 함성과 노래와 웃음과 때로는 신음과 고통의 고백이 담겨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쓰시는 찬양의 중요한 재료이다.

찬양인도자는 노래를 인도하는 전문가이기 전에 성도들의 위축된 영적 감정을 해방하여 마음껏 울게 하고 웃게 하며 나아가 안으로 잦아드는 신앙고백을 목소리와 표정과 행동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격려하는 역할이다. 여호사밧의 군대 앞에는 비무장의 성가대가 앞장서고 있었음을 기억하라. 전쟁터를 향하는 그들의 노래에는 전투적인 비장한 가사가 들어있지 않았다. 여호와를 향한 감사와 그 분의 성품에 대한 긍정적 고백이 전부였다. 찬양은 압도적이거나 비장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정확하게 부르면 공간과 시간 속에 저장된 하나님의 능력이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수없이 많은 교회를 현장에서 만난 찬양사역자로서 나는 너무나 다양한 교회의 표정을 보았다. 대중가요의 한 구절 처럼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교회도 만났고 마치 콩크리트 옹벽처럼 대포를 쏘아도 끄떡이 없을 것만 같은 무표정한 방어적 회중들도 만났다. 처음에는 그들의 반응을 따라 나의 영적인 신바람도 좌우되기도 했지만 이젠 제법 노련해진 탓인지 그 무감각 뒤에 숨겨진 더 간절한 목마름을 읽는 눈도 열리게 되었다. 성도의 본능은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다. 이 목마름이 믿는 자의 아픔이며 믿는 자의 희열이다.
좋은 찬양사역자는 바로 이 영적 감성에 있어서 누구보다 더 열려 있어야 하고 무디어지지 않도록 날마다 자신을 깨우고 가꾸는 인내의 노력이 있어야한다. 공감이 전제되지 않는 찬양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처음에는 찬양인도자가 회중을 인도하지만 결국은 회중이 찬양인도자를 경영하는 차원까지 올라가야 한다. 찬양이 절정에 이르면 누가 인도자이며 누가 따르는 자인지 그 구분이 없어진다. 한 무리가 수평적인 걸음을 걸을 때는 앞서 가는 자와 뒤에 가는 자의 구분이 가능하지만 모든 영혼이 한결같이 하나님을 향하여 수직 상승하는 순간이 오면 앞과 뒤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좋은 찬양인도자는 자신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을 창조하기 위하여 부단하게 노력하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은 시들은 영혼으로 비참하게 살아가는 백성들을 바라보시며 연민의 눈물을 흘리시기도 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찬양인도자는 회중의 열림과 닫힘에 모두 공감하며 그들의 정서 안에 들어가 모세처럼 결박을 풀고 끌러내는 사랑의 수고를 감내한다. 어쩌면 찬양은 각자의 몫이라고 볼 수 있다. 찬양인도자는 각자가 자신의 소리로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껏 소리를 지를 수 있을 때까지만 역할이 허락된 도우미에 불과하다.

오버하기는 쉽지만 적당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좋은 찬양인도자는 먼저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는 자이지만 실제로는 목회자와 교우들에게 지속적으로 기대감과 편안함을 주는 모델이 되어야 한다. 사람과 하나님에게 동시에 칭찬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의 경고는 어쩌면 찬양인도자에게 가장 절실하게 적용되는 지도 모른다. 찬양이라는 이름 하에 또 하나의 연예적 부류들이 일어서는 지금, 좋은 찬양인도자가 된다는 것은 기능 이전에 개념에서 먼저 치열한 전쟁을 치루어야 할 것이다. 앞에 있는 무리가 크던지 작던지 찬양인도자는 그 의미에서 모세적이며 여호사밧적이다. 21세기 목회는 결국 찬양의 전쟁으로 귀결될 것이다. 천지창조와 구원드라마의 출발점이 찬양이었기에 이 세상은 찬양 있는 자와 찬양 없는 자의 양대 세력으로 나뉘어 묵시적인 대결을 벌이게 될 것이다. 이미 이 세상에는 그런 현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세속적인 문화는 처방이 없는 바이러스처럼 퍼지고 있다. 그러나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성경적인 찬양을 가진 다윗 같은 존재들은 결국 그리스도의 기를 높이 들고 포연이 가득한 전장에서 아침햇살을 받으며 일어날 것이다. 구원 얻을 이름으로 예수님만을 주신 하나님이 승리 얻을 방법으로 찬양 외에는 주신 일이 없다고 나는 믿는다.

바울은 우리에게 찬송을 하라가 아니라 찬송이 되라고 권면 한다. 존재의 목적인 찬송인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능적 찬송이 아니라 존재적인 찬송에서 먼저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어드려야 한다. 찬양을 인도하는 당신의 관념에 내가 찬송이 된다는 위대한 부르심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결코 성도들을 그런 차원으로 인도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찬양에 관하여 신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경고하고 싶은 말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런 줄기로 계속 들어가다가 보면 엄청난 개념적 충돌을 일으키게 되므로 성령님이 허락하시는 오차 범위 안에서 보편적이며 실제적인 이야기로 들어가야 하겠다.
2. 찬양인도자의 가치

만일 무디에게 쉥키가 없었다면 그 엄청난 전도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었을까? 모세의 손이 들릴 때 이스라엘 군대에 승리의 바람이 몰아친 것처럼, 여호사밧의 군대의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 여호와의 복병이 공격을 개시한 것처럼 한 복음가수의 노래는 말씀의 포신을 닦는 기름칠이 되었고 공격지점의 머리 위에 터지는 조명탄이 되었다. 나는 한국의 모든 목회자에게 당신의 쉥키를 만들라고 권하고 싶다. 일생을 함께 걸어갈 말씀의 파트너로써 영이 통하는 신실한 찬양리더를 갖는다는 것처럼 마음 든든하고 신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이크에 들어간 설교 목소리가 모래알처럼 바스라져 내리고 준비된 원고는 마치 해독할 수 없는 암호처럼 캄캄하게 보이며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얼굴들을 바라보며 간신히 이야기를 이어가지만 교회 뒤에 붙어 있는 시계는 마치 납덩이가 달린 듯이 움직이지 않는 경험을 설교자라면 다 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마치 끓고 있는 베데스다 연못에 던져진 앉은뱅이처럼 영혼이 벌떡 일어나 날개 밑에 바람을 실은 독수리가 창공을 유유히 날 듯이 감정과 이성을 마음대로 조절하며 황홀한 메시지를 전한 경험도 있을 것이다. 설교의 앞에 양면에 날 선 찬양이 공간 속으로 휙 하고 지나가면 모든 것은 달라진다. 경지에 간 검객이 전광석화처럼 칼을 휘두른 뒤에 나무가 여전히 그대로 인 것 같지만 손가락으로 툭 밀면 이미 절단이 나 있는 것처럼 찬양이 앞서 간 자리에는 사단의 권세가 무력해지게 된다.
영적인 싸움은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고 싸우는 것이다. 마치 홍해를 가르사 당신의 백성들을 건너게 하시고 애굽의 군대를 수장시킨 이야기가 광야를 먼저 건너가 가나안의 거민들의 간담을 녹게 하여 싸울 의욕을 사라지게 만든 것처럼 우리의 찬송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일시에 선포하여 어둠의 권세를 결박하고 당면한 싸움을 당연한 승리로 이끄는 위대한 팡파레이다.

루시퍼가 배반하고 떠난 자리가 아직 공석인지 아닌지 궁금하다. 다른 천사에게 승진 발령을 내리시지 않았다면 그 자리는 좋은 찬양인도자가 되고자 하는 당신의 몫이다. 하나님 외의 피조물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위대한 야망을 가진다고 누가 나무랄 것인가? 거룩하기 위하여 야망을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은 성경적이 아니다. 내면에서 올라오는 욕구의 씨를 말려 버림으로써 유혹과 시험에 대처하는 방법은 가장 비겁하다. 기독교는 번뇌를 끊음으로써 정신의 진공상태에 이르는 도가 아니다. 다양한 빛깔의 감정을 정직하게 드러내며 자신을 찬양의 열정으로 몰아간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부러운 칭찬을 들었다. 그의 많은 허물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약점을 가리우고도 인류 최고의 찬사를 하나님에게 받는 다윗의 비밀은 지칠 줄 모르는 찬양의 열정에 있다. 바울을 미친 듯이 달리게 한 힘은 하늘나라에서 받을 칭찬에 대한 거룩한 열망에서 억제할 수 없이 솟아났다. 어쩌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궁극적인 시상식의 중심을 차지하고자 하는 가장 이기적인 동기를 가졌기 때문에 가장 이타적인 삶을 기꺼이 살아갈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당신도 하나님에게 큰 칭찬을 받고 싶은가? 그렇다면 찬양이 삶의 주제가 되게 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찬양과 연결하는 끈질긴 싸움을 이제 시작하라. 미래의 찬양인도자는 단순히 노래를 인도하여 분위기를 띄우는 자에서 예배와 경배의 종합적 관점을 가지고 목회자의 오른 편 팔을 들어드리는 영성 코디네이터로서 자신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승리하는 삶을 찾아 사람들이 몰려오는 교회를 만들고 싶다. 지난 한 주간의 고단한 삶을 통해 지친 몸과 마음을 끌고 아무런 감동과 기대감도 없이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교회에 나오는 무표정한 얼굴은 하나님에게 보여드리지 말아야 한다. 마치 내가 타 먹을 수 없는 보험금을 붓고 있는 가장처럼 이 다음 어느 날 올지도 모르고 안 올지도 모르는 종말을 위하여 미심쩍은 투자를 하는 듯한 엉거주춤한 태도는 사라져야 한다. 좋은 찬양인도자는 희망과 열정을 전염시키는 영성의 보균자가 되어야 한다. 보균자만이 전염자가 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내게 없는 것은 절대로 남에게 줄 수 없다. 있는 척 하고 주는 척 한다고 그 모션이 실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자의 찬송을 기뻐하신다. 거짓이 없는 마음에서 솟아나는 샘물은 시간이 그 진위를 검증하고 그 가치를 평가한다.
찬양은 시간의 성소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공간과 더불어 시간을 펼쳐놓으셨다. 인간의 상상력으로 공간의 창조는 감이 잡히는데 시간의 창조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다. 어느 순간에 시간이 시작되었다면 그 이전은 무엇이며 종말에 시간이 종료된다면 그 이후는 무엇인가? 그러나 이런 문제로 길게 논쟁을 벌일 필요는 없다. 영원이라는 단어에 그 모든 해답이 들어있다. 영원은 끝이 없는 아주 긴 시간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영원은 하나님의 현재이며 그 분 만이 태초 이전부터 누려오시는 신적인 시간관념이다. 나는 이 개념에서 두 가지 성소가 존재한다고 묵상을 한 적이 있다. 하나는 공간의 성소이며 하나는 시간의 성소이다. 우리가 늘 바라보는 교회 건물은 공간적인 구별과 시각적인 감각으로 신령함을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공간적인 무드의 협력을 받기가 어렵다. 보통 성도로써 항상 교회에만 머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주간 세상 속에서 퍼렇게 멍이 들도록 사단에게 얻어터지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오니 나를 박대하지 말아달라는 식의 공간적 성도는 찬양의 깊은 맛과 멋을 알기 어렵다. 찬양은 시간의 성소이다. 찬양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낯을 피하지 않고 살겠다는 결심이 먼저 서야 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이 세 단어는 시간 속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대신한다. 찬양은 시간의 기둥이 되고 찬양의 인테리어가 된다. 찬양이 살아있는 영혼은 주님과 시간 속을 거니는 일에 익숙하다. 거룩하기 위하여 마치 구약 속의 도피성을 찾듯이 특정한 공간으로 달려가야 한다면 우리는 사단의 공격에 취약하게 된다. 늘 찬양하는 영혼으로 사단의 아가리를 닥치게 하고 그들의 발톱을 뽑아버릴 수 있다. 파리가 귀찮게 할 때 파리채로 때리면 잠시 물러갔다가 다시 오지만 모기향을 피워버리면 그 향이 타는 동안에는 얼씬도 할 수 없듯이 나의 존재의 심지에 불을 붙이고 찬양의 향기를 올리는 성도에겐 사단의 공격도 무의미하게 된다. 첫사랑의 열병을 앓아본 사람은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누군가를 향하여 마음이 끌리며 타오르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겐 첫사랑의 얼마나 목마르며 달콤하며 간절한 것인지를 설명해 주어도 모른다. 그 느낌은 체험을 통해서만 이해되는 것이지 절대로 말로 이해시킬 수 없는 절대적 경험이다.
좋은 찬양인도자는 성도들에게 이런 맛을 알게 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성도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하면 나중에는 강요하거나 설득하거나 인도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뛰어들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게 우리의 고민이다. 축구에서 이기려면 공을 몰고 가서 상대편의 골대에 차 넣으면 된다. 그런데 상대편이 죽기 살기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니까 치열한 싸움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중심을 드리볼 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골인시키면 되는데 사단이 그 일을 죽도록 훼방하고 있으니 성도의 생활 속에 찬양처럼 어려운 일이 없다. 그저 악보를 보고 노래를 부르는 일은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하신 효과를 일으키는 찬송은 사단의 최우선 방해 대상이다. 어둠의 권세는 우발적인 아니라 전략적으로 성도의 찬송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발적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찬양을 드릴 필요가 있다. 좋은 찬양인도자는 그 전략의 핵심에서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교회 안에 찬양을 통한 지속적 변화와 치유와 성장의 모델이 잘 보이지 않는 데에는 그 기초 개념의 이해가 빈약한 탓이 크다. 찬양이 교회 속에서 목적이 되지 못하고 모종의 감정이나 분위기를 일으키는 수단으로 전락하는 한 하나님이 준비하신 프레이즈 이팩트(찬양 효과)는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껏 누려온 찬양의 즐거움은 대단히 단편적이고 부분적이었던 것 같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한결같이 인도하시는 섭리의 핵심은 찬양으로 집중되어 있는데 이 기본적인 조율에서 현악기와 관악기가 맞지 않으니까 온 세상은 하늘과 땅의 불협화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쉽게 표현하자면 찬양이 나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찬양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이걸 누가 모르냐고 코웃음을 치지 말라. 오랜 경험에 의하면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는 사람은 별로 만나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나는 경지에 간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나도 날마다 순간마다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조심하고 반성하고 개선하며 살아갈 뿐이다. 나는 믿는다. 찬양이 풀리면 모든 것이 풀리고 찬양이 꼬이면 모든 것이 꼬인다.

찬양은 보편적인 부르심이다

찬양은 절대로 전문분야로 분류되면 안 된다. 찬양은 모든 인류를 향하신 보편적인 부르심이다. 찬양이 전문성을 지닌 한 예술장르가 되어 행위 하는 자와 구경하는 자로 구분되는 것은 사단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좋은 찬양인도자의 범위를 확대하면 모든 성도가 다 찬양인도자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영혼을 믿음으로 경영하며 삶의 전 소재를 모아 봉화불을 올리듯이 살아야 마땅하다. 나도 나의 전부가 이렇게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힐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찬양을 통하여 날마다 신선하게 주님을 경험하는 삶을 누리는 지금, 이렇게 주님께 풍덩 빠진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약간의 음악적인 은사와 언어재능으로 오랫동안 하나님이 잘 써 주신 복 받은 사역자가 되기는 했지만 나의 진정한 보화는 사람들 앞에서 보여지는 나의 찬양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은밀한 중에 나누어지는 내면의 침묵찬송이다. 달리도록 만들어진 자동차는 적당히 운행을 하고 가끔은 고속질주도 해야 엔진이 길이 들고 잘 나간다. 영혼도 마찬가지이다. 매일 한번은 시동을 걸고 시온의 대로를 다려볼 때 항상 하나님을 향한 순발력을 유지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서로 만나면 요즈음 바쁘냐고 묻는다. 바쁘다는 것이 잘 나가는 현대인들의 상징적인 표현이 되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풍부히 감각할 수 없을 만큼 바쁜 것은 자기 관리에 실패한 것이다.

'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 > 찬양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이기뻐하시는찬양2  (0) 2006.11.10
하나님이기뻐하시는찬양  (0) 2006.11.10
찬양인도멘트  (0) 2006.11.10
찬양의 열가지 열매  (0) 2006.11.10
찬양의 십계명  (0) 2006.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