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리더십자료

다원화 사회의 영적 지도력

늘찬양 2006. 11. 15. 10:08
다원화 사회의 영적 지도력
이원설  - 
 
Ⅰ. 90년대의 특징
90년대의 특징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석학들의 견해를 간추려 보면 다음 몇가지 범주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는 역사변화속도의 가속화 현상이다. 현대는 사회변화의 속도가 나날이 빨라만 간다. 맥헤일(John Mchale)은 그 속도를 과거의 150년 사이에 약 90배 증가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사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엄청난 변화의 가속화를 실감하고 있다. 예를 들어 경제적인 면에서 1인당 GNP가 100달러에서 6,000달러로 변모했고 농촌이 무너지고 도시화가 급진척됐으며 생활수준이 향상되어 먹고사는 일차적인 문제에서 고차원적인 정신적 욕구충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둘째는 총제적 변화 현상이다. 전근대사회(前近代社會)에서는 역사변화가 어느 한 부분에 국한되어 일어난데 비해 오늘날은 사회 모든 분야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네이스비(John Naisbit)는 오늘날을 거류시대(mega-trend)로 정의했고 이를 10가지로 분류하여 논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도덕 윤리 종교 등이 전반적으로 변화의 세례를 받고 있다. 총체적 난국이 우리가 처한 현실인 것이다.
셋째는 지구촌(地球村)적 변화이다. 30년 전 맥루한(Marshal McLuhan)이 말한 지구촌 사회는 오늘날 현실화돼있다. 확실히 우리 사회도 지구촌의 일부가 되었다. 걸프전쟁이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소련의 붕괴가 우리와 무관할 수 없다. 중국과 일본의 움직임이 우리 민족에게 직접 간접으로 작용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소식들이 우리에게 전해져서 정보로 작용하는 것도 지구촌사회가 되어있다는 단적인 증거가 된다.
넷째는 질적(質的)변화 현상이다. 사회가 양적으로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누에가 고치 속에서 나비로 변하는 것 같은 근본적 변화 곧 토플러(Alvin Toffler)가 말하는 제3의 물결이 몰아치고 있다. 우리에게 다가온 근본적 변화(Metamorphosis)는 전근대→근대→현대→초현대로 변화가 동일한 시, 공(時空)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는 불확실성 변화이다. 맥코믹(Thomas McComic)은 오늘날 변화상을 불균형 다방향 그리고 불가 예측적이라 지적했다. 불확실성 변화는 앞날이 불투명하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올해의 정치변화 방향은 경제의 방향은 교육개혁의 전망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사실 외에는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다.

Ⅱ. 다원화 사회 (多元化社會)
1. 불확실성의 근본원인
우리 학계는 아직 한국사회 변화의 특수성을 명확히 분석하지 못하고 전환기의 진통이라는 모호한 말로 표현하는데 그치고 있다. 외래문화와 전통문화가 정·반(正反)의 대립상태를 이룬 채 변증법적 합(合)을 이루지 못한 불균형 상태를 사회학에서는 이중성 사회(dual society)라고 부른다. 이말은 화란의 보크(G. H. Bocke)가 처음 사용한 말로써 서양문화(개혁세력)과 전통문화(보수세력)가 융합하지 못한 사회구조를 지칭하였다. 우리사회의 경우도 이런 이중성을 다분히 가지고 있다. 서구적 생활양식을 따르면서도 전통적 사고를 유지하면서 양자 사이의 창조적 융화를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현상이다.
그러나 더욱 엄밀히 살펴보면 이중사회라기 보다는 복합사회(multiple society)라고 말함이 더 정확한 견해인 것 같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농경시대와 같이 단순한 조직이 아니라 자본가, 기업가, 금융가, 전문경영가, 기술자, 노동자 등의 여러 계층으로 다원화되고 있다. 마르크스가 말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두 계급설을 갖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 복합성이 있다.
정치적으로 볼 때에도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에다 제4부로서 언론을 생각하던 때는 이미 지났다. 대학생들의 수가 130만이 넘어서 하나의 정치세력화되고 있으며 지식을 자산으로 하는 인텔리겐차(the Intelligentzia)들의 수가 많아져서 국민여론을 형성하는 힘이 되었다. 노동자의 수도 1,000만이 훨씬 넘어서 하나의 정치세력이 되었고 농민들의 정치행동도 주목할 만한 다원화사회가 되었다. 문화적으로도 우리사회는 복합성의 다원화를 보여주고 있다. 전통문화 서양문화 뿐 아니라 하위문화(subculture)로서는 청년문화 여성문화 등이 혼재한다. 특히 학생들의 저항문화(counterculture)는 주목할 만하다.

2. 다원화 사회의 세가지 유동
첫째는 횡적유동(橫的流動)이다. 도로와 통신이 발달함에 따라 전국이 하나의 생활권이 되었다. 사람이 움직이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더욱이 3.8선과 6.25는 우리민족의 대이동을 초래함으로써 사람들이 한 지역에만 한정되어 살지 않고 여러 곳으로 이동하면서 산다. 이런 사실은 지역감정을 해소할 것 같지만 그 반대현상이 더 짙어지고 있다. 도시 안에서도 같은 지역 출신들이 만나고 다른지역 출신들과는 마음의 담을 쌓는다.
둘째는 종적유동(縱的流動)이다. 사회가 다원화 될수록 또 횡적유동이 가속화 할수록 각 계층 사이의 유동이 심화된다. 하위계층 사람들이 위로 상승 유동을 하는가 하면 상류층 사람이 자기의 사회적 지위를 잃고 하락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른바 양반계급은 이조 500년 동안 과거에 등과한 약 14,000명의 자손들이 형성했었다. 양반은 학문(learning), 관료(officialdom), 토지(land)를 모두 독점했던 특이한 계층이었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차지했을 당시 총인구 1,200만 가운데 약 40만이 이 계층에 속했다. 그러나 해방 후 토지개혁과 근대화 과정에서 이 지배계급은 몰락했다.
교육, 군(軍), 사업 등이 계층유동을 촉진하는 사다리 역할을 해왔다. 건국 뒤 지금까지 6명의 대통령 가운데 3명이 농촌의 평민으로 태어나서 군문을 통하여 계층상승을 한 사례이다. 대기업을 창업한 기업가들 학계원로들 가운데에도 상인(商人)의 자식들이 많다.
셋째는 정신적유동(精神的流動)이다. 횡적유동 및 종적유동이 심해질수록 사람의 정신세계에도 유동이 격화된다. 이전의 가치위계(價値位階)가 흔들리고 가치관 혼란이 온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강오륜의 가치위계 조차 무너졌다. 하지만 퓨리턴윤리 등이 그것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배금사상 향락주의 등이 팽만해지는데 그 문제가 있다.

Ⅲ. 지도자의 역할
사회변화가 심해질수록 역사가 그 변화의 방향을 찾지 못하고 불확실성의 먹구름이 짙어질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지도력이다.
지도자의 중요성은 고대로부터 널리 인식되어 왔다. 플라톤은 사람을 ①배(腹)와 같이 육체적 욕구를 따라 사는 사람 ②가슴(胸)과 같이 용기만 가지고 사는 사람 ③머리(頭)와 같이 생각을 하고 행동하는 지도자의 세 종류로 구분했다. 컬럼비아대학 총장을 지낸 버틀러(William Butler)는 사람을 ①주변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심도 없는 사람 ②주변의 변화를 보면서 남들만 비난하는 사람 ③주변사정을 보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행동화하는 지도자의 셋으로 분류했다.
배(腹)를 탄 사람들을 세분류로 구분할 수 있다. ①선실에서 먹고 마시고 노는 사람 ②갑판에 서서 사방의 경치를 구경하는 사람 ③방향을 정하고 그곳을 향하여 노를 젓는 사공이 있다.
그러면 지도자의 뜻이 명확해진다. 지도자는 ①머리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 ②무엇이 필요한 것인지를 보고 행동화하는 사람 ③사공과 같이 자기의 조직을 그 방향을 향해 노를 저어가는 사람이다. 도(道)의 변는 원래 배의 상형문자이다. 도(道)자는 배(丹)에 머리(首)를 가지고 타는 사람이며 도(導)자의 저변 "寸"자는 배의 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배의 사공과 같다.
70년대에는 민중론(民衆論)이 성행하여 지도자의 무용론까지 논의된 바 있다. 그러나 민중에도 민중의 지도자가 있어야만 한 단체가 움직일 수 있다.

Ⅳ. 지도자와 삯꾼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 높은 학식과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 가운데도 지도력이 없는 거짓 삯꾼들이 너무나 많다. 정치를 불신하는 오늘의 사회풍조가 이런데에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척도(尺度)를 가지고 참 지도자와 거짓 지도자를 분간할 수 있을까?
높은 자리에 앉아서 그 지위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취하는 탐관오리(貪官汚吏)가 얼마나 많았던가 또한 자기의 야심을 채우기 위해 한 민족을 파멸의 길로 오도(誤導)한 히틀러 뭇솔리니 같은 거짓 지도자들도 얼마나 많은가?
그러면 참 지도자와 거짓 지도자를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
중국의 당나라로부터 지도자자의 자질을 신·언·서·판(身言書判)의 4영역에서 논해왔다. 지도자가 되려면 먼저 용모가 준수하고 건강하고 정력이 넘쳐야 한다. 말을 잘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박식해야 한다. 판단력이 월등해야 한다. 그러면 이 모든 영역의 특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한 가지만 지적한다면 무엇일까? 또는 한 지도자가 반드시 가져야할 특성(trait)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곧 그것이 결여될 때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고 판정되어야 할 특질은 무엇일까?
리더십의 연구에 몰두했던 19세기 영국의 카알라일(Thomas Carlyle)은 지도자가 가져야 할 중요한 특성을 용기(courage)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용기란 두려움을 모르고 만용(蠻勇)을 말하지 않는다. 자기에게 해가 올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바른 일을 위해서는 그것을 감수하는 곧 이(利)보다는 의(義)를 취하는 참된 의기를 말한다.
스페인의 철학자 가셑(Ortega Y Gaset)은 지도자의 가장 큰 자질을 극기심(克己心)이라고 말했다. 대중인(mass man)은 항상 남들이 자기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고 그것이 만족되지 않으면 불평한다. 그러나 지도자는 자기가 가지고 싶은 것이나 하고 싶은 일도 필요에 따라서는 억제할 수 있는 자제력이 필요하다. 그런 힘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그가 아무리 많은 지식과 능력을 가졌을지 라도 지도자로서 자격이 없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리즈맨(David Riesman)은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을 내부지향성(innerdirectedness)에 두고 있다. 평범한 사람은 외부지향성을 갖고 항상 타인들이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사는가를 보면서 자신을 보는 안목을 갖지 않는다. 남들을 부러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욕하면서도 자신의 잘못과 허물을 보지 않는다. 이에 비해 참 지도자는 항상 자기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면서 자신의 가는 길이 지도자로서 올바른 길인가를 살핀다 그러면 이런 여러 가지 특질을 한 사람이 어떻게 모두 갖출 수 있을까?

Ⅴ. 성경적 지도자상
요한복음 10장 11-15절에서 주님은 “삯꾼”과 “목자”를 구분하셨다.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지도자는 목자상을 갖추어야 한다. 평상시에는 삯꾼과 목자를 구분할 수 없다. 하지만 위험이 닥치면 삯꾼은 양을 버리고 도망간다. 이(利)를 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리한 경우에는 모든 책임을 버리고 달아나는 것이 삯꾼이다.
이에 비해 목자의 특성은 “선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곧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희생정신이다. 자기를 희생하려는 정신이 없는 사람은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 희생정신이 있으면 카알라일이 말하는 용기, 가셑이 말하는 극기심, 리즈맨이 말하는 내부지향성을 모두 갖출 수 있다.

1.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알고”
그리스도께서 목자적 지도자에게 요구하시는 첫째 조건은 “양을 아는”일이다. 사회가 복합화 다양화 다원화 될수록 “양을 아는”일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신학을 공부한 목사로서 사회변동, 경제변동, 정치문화, 교육정책, 여권운동, 세대갈등, 범죄문제, 국제환경, 가치변화 등을 어떻게 모두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자신이 목회하는 양들을 알려면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출신성분, 가정환경, 심리상태 등을 파악하려는 꾸준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심방을 통하여 여러가지를 파악할 수 있다. 교인 수가 수천명이 되는 대형교회에는 부목사와 전도사를 두고 구역조직을 잘하고 있는 줄 안다. 그러나 교회의 총책임을 진 목자는 구역장이나 장로들의 심방보고만으로는 미흡할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벧후1:6) 더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지식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잠24:5)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토플러(Alvin Toffler)의 "힘의 전이(轉移, Power Shift)"가 말하듯이 이제는 지식의 힘이 무기나 돈을 능가하는 지식사회(knowledge society)에 우리는 살고 있다. 프라이스(D. Price)는 “인류가 가진 지식의 총화는 15년마다 배가가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복잡화 다원화하는 사회에서 특히 영적 지도자로서 책무를 다하려면 다방면의 지식을 지속적으로 습득하는 평생교육의 노력이 요청된다.
필자는 실업인들로 구성된 어느 조직의 부회장직을 15년동안 맡아오고 있다. 목요일마다 조찬모임에서 다방면의 연사들을 초청하여 한시간은 강연을 듣고 식사를 한 뒤 약 40분동안 질의 시간을 갖는데 그 모임은 지금까지 730회를 거듭했다. 실업인들도 사업을 제대로 하려면 금융, 무역, 생산, 판매뿐 아니라 정치, 사회변동, 심리학, 종교, 국제정세 등을 광범위하게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필자는 목회자들이 만물박사가 되어여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고 또 강단에서 정치 경제 과학 등의 학설을 목회자가 말할 때 별로 은혜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 말씀은 로고스(logos)이다. 불변의 영원한 진리이다. 그러나 그 진리를 변화하는 상황에서 적용(to apply)하려면 적절한 해석이 시의(時宜)에 맞게 주어져야 한다. 주위 환경과 관련성(relation)이 전혀 없는 설교는 힘을 잃는다. 말씀을 시의에 맞게 관련성을 가지고 설명하려면 상당히 광범위한 지식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교역자들은 실업인들보다도 더욱 진지한 평생교육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면서도 부족한 면은 이른바 세미나 또는 특강 등의 기회를 교회에서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 최근 창조과학회원들이 과학과 성경의 원리를 접목시키는 강연을 여러 교회에서 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또 경제학자의 기독교 경제학 특강, 정치학자의 기독교 정치학, 역사학자의 기독교 역사관 등의 강의가 각 교회에서 확산되는 현상도 바람직하다. 이런 여러 가지 노력이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영적교제와 병행할 때 “내가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심도가 깊어지고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일체감을 향유하게 될 것이다.

2. “나는 양을 위해 목숨을”
다원화사회의 도래를 기독교 지도자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영원한 진리의 로고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상이 복잡해지고 다원화사회가 될 지라도 사람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필요로하는 죄인이며 복음의 필요성은 상대적으로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목자의 탈을 쓴 삯꾼이 아닌가를 내부지향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를 영적 탈을 쓴 비즈니스라고 말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전도를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다른 교회에서 믿는 사람들을 끌어들여서라도 교세를 확장하고 교회건물을 더 웅장하게 짓는데 주력하고 있지 않는지 돌이켜 보아야 한다.
자신의 욕망을 극기(克己)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위해 주기를 바라는 대중심리는 그대로 가지고 있지 않는지 지도자를 세력을 가진 사람(power holder)이나 지배자로 잘못 인식하고 있지는 않는지 나 자신을 살피기보다는 타인들만을 보면서 시기나 불평을 하는 타인지향형 인간은 아닌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에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참 목자의 희생정신 곧 내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각오가 되어 있는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최근 남북교류의 활성화와 통일의 전망을 보면서 북한선교를 여러 가지로 계획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의 한 신도가 평양을 방문한 한 재미 목사에게 “우리는 양떼를 버리고 떠난 목사님들을 우리의 목사로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는 우리를 경종케 한다.
지금 우리사회는 압축폭발적 변화의 세례를 사회전체가 체험하고 있다. 역사변동의 가속화, 총체적 변화, 지구촌적 변화, 질적변화를 동시에 겪으면서 불확실성의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앞날의 변화방향을 가리켜야 할 지도자들마저도 미래의 비전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이데올로기 시대가 지나가고 사회가 앞날의 지표를 잃을수록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복된 소식을 전할 절호의 기회가 제공되고 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하는 말씀은 우리 나라가 가야할 길의 지표를 명시하고 있다. "그의 뜻이 이땅에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교회 지도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신장을 위해 희생적으로 헌신할 수 있느냐에 오늘의 리더십 위기를 극복할 관건이 달렸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