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주일설교

461장 십자가를 질 수 있나 (519장)

늘찬양 2010. 7. 16. 23:00

 

 *400번째 찬송설교(찬양강해)입니다.*

 

461장 십자가를 질 수 있나 519장

                    마 20:22,2010.07.18.늘찬양교회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결단을 향한 실존적(實存的) 질문이 의문문의 형식을 취하여, 1절은 헌신을, 2절은 회개를, 3절은 믿음을, 4절은 충성을 각각 유도해내고 있다. 후렴은 그에 대한 답변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절대 신뢰와 놀랄만한 신앙고백이 담겨있다. 이 찬양은 미국 인디아나주 태생으로 디포 대학교졸업, 보스턴 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 받고, 종교철학과 교수와 신학대학장을 역임한 얼 보우맨 말랏(E.B.Marlatt;1892-1976)교수가 작시하였으며, 찬송 곡은 미국 뉴욕 주 태생의 교회 음악가로서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신학교 교수로 많은 찬송가를 만든 해리 실버네일 메이슨(H.S.Mason;1881-1964)이 1924년 작곡하였습니다.

1절 십자가를 질수 있나 주가 물어 보실 때

     죽기까지 따르오리 성도 대답하였다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인도 따라 살아 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지난 2009년 2월 14일(토) <국민일보>에 '벼랑 끝에 선 빈곤 교회가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X시의 모 교회 이야기였다. X시의 상가 지하 교회에 17년째 목회 중인 xx목사의 부인 사모는 "우리 힘으로 최대한 버텨 보려고 했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목회도 생활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서 전화통을 붙잡았다"고 <국민일보>에 연락을 취해 도움을 요청한 사연이었다.

최근에 불어 닥친 경제 한파로 교회 임차료(월 35만 원)을 5개월째 못 내고 있었고, 장년 성도 8명 중 5명이 경제 활동이 전무한 65세 이상 노인이라 목회 활동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경비조차 부족한 상황이었다. 사모는 10년 전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분식집 주방 보조와 파출부, 산모 도우미, 군고구마 장수 등을 전전하면서 생활비와 선교비를 충당해 왔고 3년 전부터 건강 악화로 일손을 놓게 되자 빚이 쌓이기 시작했고 빚은 4,000만 원으로 불어났다는 안타까운 사연이었다.

한 목사님의 경우는 또 어떤가? 현재 목사가 되어 무보수로 섬기고 있는 긴 세월 동안 아직도 그분의 아내는 식당 궂은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랜만에 만나 저녁을 먹다가 목사님이 사모님께 전화 통화를 하는데 아직도 야간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사모가 궂은일 해서 번 돈으로 헌금도 하고 차비도 하는 등 모든 비용을 충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분과 저녁을 먹고 식사 값을 우리가 계산했다. 사모님이 힘들게 번 돈으로 밥을 먹을 순 없었다. 그렇다면 이 사모님은 평생 식당 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와는 반대로 어려운 사역 환경 속에서 외부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면서 사역하시는 분들도 많다. 내가 아는 한 목사님은 매일 저녁에 우유 요구르트 상하차 하는 일을 수 년 동안 해 오고 있다. 새벽 4, 5시 정도 되면 일을 끝내고 돌아와 부족한 잠을 잔다고 한다. 그리고 주일 예배, 수요 예배 등을 다 이끌어 간다. 그 어려움이야 말로 다 할 순 없겠지만 그런 힘든 여건 속에서도 교회를 세워 나가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본다.

그런 반면 지난 6월 20일 오후 5시 30분 서초역 인근 새성전 건축부지에서 교계 인사들과 8천여 명의 성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랑의 교회(담임 오정현 목사)는 건축기공헌신예배를 드렸다. 오정현 목사는 설교에서 “건축 기공이 허락될 때까지 많은 몸살을 치렀지만 릴레이 금식기도, 건축헌금 작정, 땅 밟기기도 등 성도들의 눈물겨운 헌신이 있었기에 드디어 역사적인 기공예배를 맞게 됐다”면서 “새롭게 지어지는 교회를 통해 예수님을 믿지 않은 이들이 더 많이 돌아오고, 미래를 선도할 역량 있는 다음 세대들이 배출되도록 힘쓰겠다.”고 밝혔다. 한편 두레교회 김진홍 목사(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는 축사에서 “한국교회는 역사가 짧고 말씀중심의 교회여서 약한 부분이 있다. 문화가 약하다.”고 지적하고 “건축도 문화를 대표하는 측면이다. 바라기는 새성전 건축을 시작으로 앞으로 문화가 있는 교회, 역사를 창조하는 교회로 발돋움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이어 “불교 경주의 불국사, 합천 해인사 같은 문화 유적지가 있다. 가톨릭에는 명동성당 경기도에 곤지암에 천억을 드려서 기념 성당을 짓고 있다.”고 말하고 “(그러나)개신교를 대표할 수 있는 상징적이고 역사적인 건물을 만들지 못했다. 사랑의 교인들이 개교회를 짓는 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건축문화를 가진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한 때 국내 대형 마트들의 SSM(기업형 슈퍼마켓)을 통한 골목상권 장악 논란으로 논란이 많았다. 대형 마트가 입점하는 순간 인근 지역 상권은 마트로 흡수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소상인들의 생계 터전은 잠식당하였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미국 교회에서 이어 한국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각종 편의 시설과 교회 교육 프로그램 등으로 교인들이 요구하는 것을 채워줌으로써 주변 교회들의 교인들을 흡수한다. 이를 통해 대형 교회는 초대형 교회로 성장하고 지역을 기반으로 한 작은 교회는 문을 닫는 것이다.

새들백교회는 다운증후군 부모를 위한 목회, 성폭력 피해를 입은 아이들을 위한 목회, 동성애자를 위한 목회 등 매주 300여 개의 목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새들백교회 릭 워렌 목사는 한 포럼에서 “작은 교회가 이런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개개인의 필요를 세심하게 채워줄 수 있는 곳은 대형교회”라고 말했다.

4천5백여 개의 소그룹을 운영하고 있는 새들백교회를 소개한 그는 “앞으로는 지교회 설립을 통해 대형 교회들이 규모를 더 키워갈 것”이라며 “개개인의 필요를 채워주는 소그룹을 통해 대형 교회가 계속 발전해갈 것”이라고 다가올 미래를 예측했다.

이 같은 변화는 국내 교인들이 교회를 선택하는 기준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교회 선택에 있어서 교단과 전통을 중요시했던 교인들이 최근에는 편의성과 교회 이미지를 중시하고 있는 것이다.

연동교회 이성희 목사는 “교회를 바꾸는 원인 가운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제 교단이나 교파가 선택의 기준이 아니다”“예전에는 이것이 중요한 요인이었지만 이제는 교회의 영적 품질과 편의성, 주차장, 거리 등의 요인에 의해 선택한다”고 분석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과연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보실 때 죽기까지 따르오리 대답하며 따라갈 이 누가 있나?”(찬송가 1절) 묻고 싶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주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갔는데 한국교회는 계속해서 대형교회를 추구하며 가진 자의 권리와 특권을 주장하고 있으니 이 어찌 가슴 치며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2절 너는 기억하고 있나 구원 받은 강도를

     그가 회개하였을 때 낙원 허락 받았다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인도 따라 살아 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갈보리 산은 나무가 자라지 않고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바위투성이의 민둥산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욕하고 삿대질하고 고함치는 사람, 통곡하고 우는 사람의 소리가 요란스러웠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이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고 좌편과 우편에 두 강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강도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비난하면서 “당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렇다면 당신과 우리를 구원하라!”(눅 23:39)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는 강도가 “이놈아!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너와 나는 죄를 짓고 거기에 마땅한 형벌을 받는 것이지만 이분에게 해당되는 것은 선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40-41절)고 말하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42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그 고통 중에 이 사람을 보시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절)고 말했습니다.

일평생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방탕했던 두 강도 중 오른 편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가 예수님을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구주로 인정하고 자기를 기억해 달라, 살려 달라는 간절한 요청을 한 것입니다. 살아생전 좋은 일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예수님이 만왕의 왕, 만주의 주, 구주인 것을 고백하고 주의 나라가 임할 때에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간청할 때, 주님은 당장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이렇듯 선택이란 중요한 것입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라고 변명하면 버림당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은행장이 죽어 가는데 한 목사님이 그 집에 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두 강도 이야기를 하면서 “두 강도가 흉악한 죄를 짓고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한 강도는 예수님을 비난했고 다른 강도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고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청했을 때 구원받았습니다. 그는 아무 공로도 세운 적이 없습니다. 흉악한 죄가 있는 그대로 못난 그대로 예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으로 인정하고 구원을 요청하니 구원받았습니다. 선생님도 죄를 회개하고 구원받으십시오!”라고 말하자 은행장이 와락 화를 내면서 “내가 무슨 강도요? 나는 강도질한 일이 없소”라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은행장으로 오래 지방에 계셨는데 은행에는 본점이 있지요? 선생님이 지점의 지점장으로서 예금을 모아 가지고서 본점에 올리지 않고 선생님 마음대로 돈을 써 버렸다면 본점이 그 지점장을 볼 때 뭐라고 보겠습니까?”

“그야 도둑놈이지” “맞습니다. 우리의 본점은 하늘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본점이시고, 우리는 지점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섬기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허랑방탕하게 지내고 나면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뭐라고 보겠습니까?”

“그야 도둑놈이지” “그러니까 우리가 다 도둑놈입니다. 우리는 다 예수를 믿지 않고는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통곡을 하고 울면서 “주님! 내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마음에 평화를 얻고 하나님 나라로 갔습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주님은 절대로 우리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빈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 두 손 들고 주님께 “나는 죄인입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하고 나오면 주님은 무시하지 않고 멸시하지 않고 용서하고 받아 주시고 죄를 씻겨주시고 의롭다고 칭하시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값없이 받은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찬송가 가사처럼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님 인도 따라 살아 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절 걱정 근심 어둔 그늘 너를 둘러엎을 때

     주께 네 영 맡기겠나 최후 승리 믿으며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인도 따라 살아 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지난 2005년부터 최근까지 이은주, 유니, 정다빈, 안재환, 최진실, 장자연, 최진영, 박용하 등 연예인들의 자살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하루에 평균 40명이 자살합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성공과 성취라는 자기 욕심과 욕망을 이루지 못하게 되면 자신을 실패한 인생자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주의와 물질주의가 사람들을 올가미에 가두어 놓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에게 버림받았다는 죄책감까지 갖게 만들다 보니 기독교인들의 자살율도 점차 증가추세에 있습니다. 교회는 내일의 기대가 사라진 이들에게 진정한 믿음. 소망. 사랑을 불어넣어주어야 합니다. 생명의 존귀함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역할이고 믿음의 사람들이 해야 할 사명입니다.

구약에 스바냐서라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멸망할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때 스바냐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습3:16)고 했습니다. 나라의 운명과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며 두려워하며 또 어깨를 늘어뜨린 백성에게 “기죽지 말고 힘을 내라.”고 외친 것입니다. “소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외친 스바냐 선지자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안아 주신다. 하나님이 보호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는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사랑하는 자녀들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보호하심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염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환경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누구와 함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우리 곁을 떠나신 적이 없으십니다. 어려울 때, 힘이 들 때, 우리 눈에서 눈물이 흐를 때, 바로 그때 더욱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에 ‘샬르리’라는 사람이 왕의 미움을 받아 외딴 감옥에 갇혔습니다. 오랜 수감생활로 인해 그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잊혀 갔습니다. 언제 석방될지 기약조차 없었습니다. 드디어 가족들조차 그를 단념했습니다. 그는 혼자라는 사실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로 괴로워했습니다. 희망이라곤 없었습니다. 오죽 외로움에 떨었으면 그는 감옥의 벽에 손톱으로 이런 글을 새겼습니다.

“나는 혼자다 아무도 없다” 절망의 늪에 깊이 빠져 죽을 날만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감옥 바닥에 깔려 있는 돌 틈에서 새싹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새싹을 정성들여 키웠습니다. 마침내 무럭무럭 자라 꽃을 피웠습니다. 감옥이 환하게 밝아왔습니다. 꽃 한 송이가 절망스런 감옥을 소망의 환경으로 바꾼 것입니다. 먼저 그의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이제 감옥의 벽에다 이렇게 썼습니다. “이 곳 감옥에도 하나님은 계신다.” 간수가 이 꽃을 보고 윗사람에게 보고하고 나중에는 나폴레옹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왕은 말했습니다.

“감옥에서 조차 꽃을 키우는 사람은 절대로 악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나와 이 나라에 필요한 사람이다”며 그를 석방시켰습니다.

캄캄한 감옥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곳이라 할지라도 소망의 꽃은 피어납니다. 오늘이 힘들다고 어렵다고 내일이 불투명하다고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에 시달리고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곳일지라도 언제든지 함께 하여 주십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사람들이나 환경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 될 때 그때는 더욱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여 주시는 때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3절 찬송가의 가사처럼 “걱정근심 어둔 그늘 나를 둘러 덮어도 최후 승리 믿으며” 주님께 여러분의 영혼과 삶을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는 시 146편 5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오늘까지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내일도 우리의 삶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을 믿고 절대로 기죽지 마시고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소망의 내일을 미래의 축복을 소유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절 이런 일 다 할 수 있나 주가 물어 보실 때

      용감한 자 바울처럼 선뜻 대답하리라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인도 따라 살아 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신앙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12) 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마 16:24,25; 막 8:34, 35; 눅 9:23, 24) 하셨습니다. 이것이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신앙을 지키다 평양 감옥에서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이 외친 일사각오의 신앙이기도 합니다. 평양 산정현교회를 시무하던 주기철 목사님은 일본 순사들의 철저한 감시와 잔혹한 고문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를 버리고 내가 사느냐? 예수를 따라 죽느냐? 예수를 버리고 사는 것은 정말 죽는 것이요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은 정말 사는 것이다.” 하며 ‘일사각오’ 의 결연한 의지가 담긴 설교를 하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런 순교자의 피를 이어받은 교회인데 어느 듯 세상이 주는 풍요로 기름진 교회가 되었습니다. 물론 수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깨어있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위하여 살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비쳐지는 한국교회는 더 이상 부족하거나 가난하거나 곤고하고 가련해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 권력을 가진 자들과 세상의 부요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차고 넘쳐납니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가난하고 핍박받는 약자가 아니라 권력과 물질의 힘으로 십자가의 사랑과 복음을 대신하려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한국교회를 어떻게 평가하실까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탄식하신 주님의 말씀을 봅시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자칭 부요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자랑하지만 예수께서 보시는 평가는 정반대입니다. 남한의 부요한 교회보다는 차라리 환란과 궁핍 가운데 있는 북한 지하교회를 향해 “네가 실상은 부요한 자니라.” 말씀하십니다.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상황이 그렇다면 성도 개인들은 어떨까요? 세상의 즐거움과 인기를 잃으면 죽는 줄 알고 세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세상과 친구하면서 말로는 나도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부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잠시 잠간 받는 고난은 회피하고 외면하고 잠간의 즐거움과 편안함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둘째로 밀쳐 두면서 자기 편리할 때는 예수가 나의 구주라고 말합니다. 참 편리한 신앙고백입니다.

주일 아침에 친구 생일 파티에 갈까? 예배드리러 갈까? 둘 사이에 선택하라면 고민하고 주저할 필요도 없이 파티장으로 가는 사람이 목숨이 걸린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과연 그리스도를 택할까요?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먼저 택하고, 파티장에서 만날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를 그렇게도 중요시 하는데 주일 아침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볍게 여깁니다. 세상에서 누리고 즐기는 육체적 즐거움 그것 하나도 깨끗하게 정리하지 못하면서 자칭 그리스도인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평안할 때 세상과의 싸움에서 그리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낼 능력이 없는 너무 허약한 교인들이 거친 환란을 어찌 견디고 이겨낼지 염려가 됩니다. 고난이 없는 신앙, 고난을 회피하는 신앙을 형통한 삶이라고 오해하지 맙시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 환란과 궁핍의 환경에서 네가 나를 부인하지 않고 나를 모른다 하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너를 모른다 하지 아니하리라.”(마 10:32, 33)는 주님의 말씀이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오늘 여러분이 만나고 있는 고난과 역경이 어떤 종류이든 그것이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당하는 고난과 궁핍이라면 옛날의 용감한(찬송가 4절)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처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단 3:18)의 신앙을 가지고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간청하며 나갔던 것처럼 “주인도 따라 살아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선뜻 대답하며”(4절 가사) 두려워말고 담대하게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나갑시다. 그리하여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 25:23)는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