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주일설교

동역을 통한 변화(1)

늘찬양 2013. 7. 6. 19:52

동역을 통한 변화 (1) 바나바와 바울의 동역

행 9: 26-31,2013.07.07.늘찬양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 주간 살아오면서 그 누군가를 감동시킨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감동케 한 일은 얼마나 되십니까? 누군가가 여러분으로 인해 감동을 받고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면 여러분은 정말 후회하지 않을 뿌듯한 인생을 살아오신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만약 지나온 한 주간, 반년, 한 달, 1년 등을 돌아볼 때 나로 인해 감동한 사람이 없다면 그 삶은 재고해 보아야할 것입니다. 감동은 커녕 상대방에게 짜증만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실망하게 하고, 괴롭게 하는 삶을 살았다면 그런 인생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새롭게 변화 받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행복한 사람들로 변화되는 놀라운 축복의 시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Ⅰ. 감동을 찾는 사람들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은 감동케 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물질이 넉넉하고 보이는 것이 다채로워서 세상이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 감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많을 때 사회가 아름답고 풍요로워집니다. 그러나 사람을 감동시키기가 어려운 것은 감동이 인위적인 향수처럼 풍기는 게 아니라 자연적인 향기처럼 우러나와야 하기 때문에 힘이 든 것입니다. 저는 지난 6월 2일 캄보디아 선교여행을 갔을 때 저를 씨엡립에서 씨스폰 대학까지 안내해주신 오경희 선교사님이 계신데 그 분이 이번 6월 19일에 현지 관광버스와 충돌 하여 선교사 가족 6명중 4명이 죽고 2명이 어린이가 살아났는데 이 두 어린이를 몸소 병간하며 수발하더니만 한국으로 아이들이 후송되어서도 또다시 한국으로 들어와서 병간을 하는 그 열정과 헌신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렇듯 저와 여러분으로 인하여 누군가가 감동을 받고 행복해한다면 그처럼 기분 좋은 일 이 어디 있겠습니까? 목회의 기쁨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 속에서 감동을 주는 교우들을 만날 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 기쁨, 그 즐거움을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참 묘해서 냉수 한 그릇으로 감동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금 덩어리로도 감동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정말 감동은 아무나 끼칠 수도 없고 아무나 경험할 수도 없는 하늘의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시대는 점점 감동은 없고 자극만 있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편리하고 화려하고 넉넉하지만 감동을 맛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좀 불편하고 수수하고 가난했던 옛 시절에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대를 가르쳐 감동이 없는 시대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7절에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고 한탄하십니다. 아무 감동이 없이 사는 사람들, 아무 생각이 없이 그냥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감동이 없는 것은 저주입니다. 특히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을 읽어도 말씀이 마음에 와 닿지 않으면 무언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이 자체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괴로운 일입니다. 감동은 은총이고 축복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감동이 있고 말씀에 마음의 깨달음이 있고, 말씀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나고, 가슴이 벅차다면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박노해 시인은 “매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이 나날이 새롭다는 것을 깨닫고 감동하고, 울타리에 피어난 개나리꽃에 스며든 새 봄에 감동하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따뜻한 밥상을 대하며 감동하고, 잊었던 파랑새 소리를 들으며 감동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은 창조력을 잃어버린 사람이요,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은 더 이상 영적 성장이 멈춰버린 사람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감동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감동시켜 달라!“ 외쳐보지만 정작 감동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창조력을 잃어버리고 영적 성장이 멈춰버린 시대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감동을 찾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감동을 세상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 감동을 전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나바입니다.

Ⅱ. 섬김을 통한 감동

성도가 성도다워 보이고 교회에서 가장 아름다울 때는 섬김의 자리에 있을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을 볼 때, 신앙생활에 생동감이 넘치고 눈에 빛이 날 때가 가장 아름다운데 그때는 바로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는 모습일 때였습니다. 남들보다 삼십분에서 한 시간 이상 일찍 나와야 성가대도 할 수 있고 교사도 할 수 있고 주차안내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청소를 하려면 하루의 반나절을 다 보내야 하고 주일 점심 준비를 하려면 2~3일 전에 장을 보고 김치를 담가 놓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주일날 꾸준히 예배자리만 지키기도 벅차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나도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한 모퉁이를 감당하였다”는 감격과 자부심으로 말없이 봉사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결코 감동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과 헌신이 뒤따라야 합니다.

사도행전 4장 36-37절에 보면 바나바가 과연 어떤 스타일의 지도자였는지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는 자기 밭을 팔아서 만든 그 값을 가지고 와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어 교회가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데 큰 힘이 되도록 도왔습니다. 이렇듯 바나바는 교회에 참으로 귀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의 이름의 뜻을 잠간 살펴보면 본명은 ‘요셉' 이었으며, ‘바’는 아들이라는 말이고 ‘나바’는 격려라는 말로 “격려의 아들” 즉 격려를 잘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부모가 이아들을 요셉과 같이 남을 세워주고 격려하며 살라고 지어준 이름 같습니다. 학자들은 바나바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때 성령을 받고 일찍이 크리스천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교회생활을 시작하는데 그때 사도들이 그의 모습을 보고 붙여준 별명이 '권위자'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권위자란 '에헴~'하고 권위를 잡고 다녔다는 얘기가 결코 아닙니다. 이 권위자는 '권면하고 위로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즉 사도들이 요셉이라는 이 사람을 볼 때 초대교회 안에서 드물게 '다른 사람들을 권고하고 위로하는 역할'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바나바처럼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불어 넣어주고 새 힘을 주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Ⅲ. 화해를 통한 동역

바나바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문제는 사도행전 9장에서 또 한 가지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이때는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하여 바울이 된 직후 였습니다. 사울이 바울로 변화고 나니 그의 입장과 헌신의 열정은 180도 바뀌었습니다.

바울은 그동안 자신이 행하였던 모든 잘못과 악행을 회개하고 크리스천들과 한 마음이 되어 복음 증거의 사역을 감당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9장 26절에 있는 대로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울로서는 답답하기가 그지없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먼저 믿은 크리스천들을 만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자세히 듣고 배우고 싶은 것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반응이 어떠 했습니까?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을 도무지 믿어주지 않는 것은 물론 오히려 그의 방문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사울의 회심을 초대교회가 어떻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사도행전 9장 1-2절에 보면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옥에 가둔 사람이요. 스데반 집사를 죽인 핵심 인물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울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영접하기는커녕 피하기만 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사울을 만나기를 꺼려하며 피하는 이유는 “아마 이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인들을 잡아가기 위한 또 하나의 작전일거야! 분명히 교회 안에 들어와서 그리스도인들의 명단을 확보한 다음 일거에 잡아넣으려는 속셈일거야. 그러니 절대 속아서는 안돼!" 하며 사울을 피했을 것입니다. 이때가 바울이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사울은 유대교인들에겐 '배신자'로 낙인찍혔고 크리스천들은 자기를 믿어 주질 않고 있었습니다. 어디 가서 하소연 할 때도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때의 바울의 심정을 상상해 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때의 바울의 심정은 '고독'이었습니다. 너무나 '답답했을 것'입니다. 난 그런 사람 아니라고 속을 뒤집어 보여줄 수도 없었습니다. 바로 이때 오늘의 주인공 '바나바'가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9장 27절에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입장이 곤란하고 답답한 바울을 위하여 바나바가 한 일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신원보증'을 서 준 것입니다. 바나바는 바울의 능력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큰 역사를 이루실 것을 내다보았기 때문입니다.

'신원보증'은 혈육 간에도 잘 안 해주는 일입니다. 하지만 바나바는 남들이 꺼려하고 싫어하는 일이지만 기쁨으로 자원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에게 "사도들이여, 사울이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 것을 내가 보증합니다.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 후 그리스도으로 변화 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는 변했고, 다메섹에서는 이미 복음을 열심히 증거 했습니다" 며 사울을 변호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결과가 일어났습니까? 28절에 보니까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라고 말씀합니다. 바나바의 보증을 통해서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떳떳하고 담대하게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남을 인정하고, 세워주고, 화해하며, 도와주는 감동의 사람, 섬김의 사람, 바나바가 오늘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주위에 바나바 같은 사람이 없음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가능성도 피워보지 못한 채 사라지는지 모릅니다. 조금 부족해도 부족하다 책하지 않고 조금 뒤쳐져도 쳐진다고 닦달하지 않고, 조롱하지 않는 사람, 그가 바로 바나바요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 속에 바나바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서 지금 교회를 나오지 못하고 쉬고 있는 성도들을 교회로 인도하여 함께 교회를 부흥시키며 주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좋은 사역자로 거듭나게 하는 화해의 사람, 감동의 사람들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Ⅳ. 세워주는 동역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예수의 제자들과 사도들이 찾아가서 사울을 지도자로 변화시켜 하나님의 사역에 헌신하게 한 것이 아니라 '바나바'라는 집사 한 사람, 즉 신뢰와 섬김의 사람, 권위와 사랑을 가지고 얽혀진 빗장을 푸는 사람, 자신이 이 사람에 대하여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 분명한 신원 보증을 선 바나바가 있었기에 드디어 이방의 빛이요 사도로서 큰일을 감당하는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 29절을 보면 비로소 바울이 제자들과 함께 하게 되고 뿐만 아니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다”고 되어있습니다. 이제 바울이 본격적으로 큰일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배후에는 그를 믿어주고 그의 삶 속에 잠재되어 있던 위대한 가능성과 하나님의 큰 일군으로서의 바울을 믿어준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이 바나바로 인하여 바울은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을 때 이제는 교회의 도움을 받게 됐습니다.

당시의 교회가 끝까지 바울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질 않았다면 전하여질 복음이 어찌 되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나바의 섬김으로 바울 사역이 열어지자 본문 31절에 기록 되어 있듯이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특별히 사도행전 11장 19절부터 26절에 보면 스데반의 죽음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 성도들이 곳곳으로 흩어질 때 더불어 성도들은 흩어진 그곳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므로 안디옥 교회가 새롭게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을 돌보고 전도를 지속하기 위해서 지도자로 바나바를 보내기로 예루살렘 교회가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의 담임목사로 초빙되어 졌습니다. 날로 안디옥 교회는 성장에 성장을 더해갔습니다. 그때 바나바는 아주 특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나바가 자신이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해 주었던 사울을 찾으러 다소로 내려갔습니다. 회심한 후 크리스천들과 함께 동역하며 복음의 증인으로 열심히 뛰려는 사울이 의기소침한 채 다소에 머물고 있는 사울을 찾아가 나와 함께 안디옥 교회를 위하여 일 해보자고 권고합니다. 요즘말로 ‘팀사역’을 요청한 것입니다. 사울은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도 소원이었던 하나님의 복음사역을 이렇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자신을 보증하고 세워준 바나바와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을 감격해하며 두 사람은 뜨거운 포옹과 함께 사역을 위한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을 것입니다.

그 결과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교회도 부흥했고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나바는 바울과 함께 선교 여행을 계획하고 실행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렇듯 바나바는 사울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도록 그 안에 잠재되어 있던 위대한 가능성을 인정해 주고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과 화해하도록 도와주었으며, 배후에서 끊임없이 사울을 위해 기도해주었습니다. 사울이 이렇게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동역자로 함께 사역을 하면서 그의 이름은 바울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가진 언어의 능력과 열정과 헌신을 사용하여 헬라파 유대인들과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는 사도로 기독교사에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Ⅴ. 동역자를 세우는 바나바의 모습 정리

1. 단순하게 상대를 인정해 주는 것부터 시작하라.

바나바가 바울을 추천한 것은 바울이 그만큼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의견과 바나바가 현재가 아닌 미래를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대립되지만 이러한 논쟁은 모두 난센스에 불과합니다. 정확한 이유는 바나바의 태도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27절 말씀과 같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시기심으로 바라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장점을 크게 이야기하고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단점을 크게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드리고 인정할 때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의 예수 체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렸으며, 더불어 그의 언어학적인 면, 열정, 적극적인 성격 등의 장점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출발은 상대방을 인정해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보증이 되는 사람이 되라.

26절 말씀에서 바울이 어려움 당할 때, 바나바가 앞장서서 그의 보증이 되었습니다. 다리가 되고 디딤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바나바는 사람들에게 신용보증과 같은 헌신적이고 모범적인 성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삶도 남과 동역할 때, 또는 내가 동역자를 세울 때 나의 말을 신뢰하고 보증할 수 있을 정도로 매사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성도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3. 세운 사람을 통해 사역을 넓히라.

28~29절 말씀과 같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말씀을 전했을 때 가장 당황했던 사람들이 옛날 사울과 함께 믿는 자를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당시 교회는 헬라파 유대인에게는 약했습니다. 그런데 헬라 말에 유창하고 지성으로 무장된 바울이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그 결과 사역이 더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 한사람을 세움을 통해 헬라인에게 전도하고 예루살렘에서 든든한 사역을 하였습니다. 동역자와 함께 일하게 될 때 라이벌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내 인생이 넓어지는 비결이 됩니다. 바나바의 사역은 동역자와 함께 하는 사역이었습니다. 동역자를 세우면 자신이 커지는 것입니다.

4. 아낌없는 헌신과 섬김의 사람

그는 하나님의 비전을 향해서 성장하고 있던 교회를 위해서 자기에게 있던 것을 아무 조건 없이 내어놓았습니다. 그의 아낌없는 헌신과 섬김은 교회에 커다란 격려와 용기와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형편과 환경과 조건을 넘어선 섬김과 헌신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5. 남의 성공에도 진심으로 기뻐하고 좋아하는 따뜻한 사람.

하나님 나라라는 큰 그림을 보면서 자신을 기꺼이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 바나바. 자기가 세웠던 바울이 위대한 지도자로 부상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대 저편 뒤로 겸손히 숨었습니다. 바나바 그는 언제나 아름다운 감동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바나바는 어디에 있을까요? 지금은 바나바와 같이 감동을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누구나 감동을 주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남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동을 주는 사람으로 살아갈 때, 교회는 평안히 세움을 입을 것이며,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가 더해갈 것입니다. 나아가 주를 믿는 자의 수가 더 많아질 것입니다. 나에게도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더 필요한 것은 내가 바로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감동이 있는 교회는 거기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과연 바나바와 같은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봅시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훗날 바울로 등장하는 사울의 목회를 있게 한 것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의 보증과 세워줌의 따뜻함이 없었다면 그는 홀로 버려진 사람, 실의에 빠진 채 절망감에 빠져 버린 사람으로 살아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의 대 부흥의 역사도 그렇게 빨리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속에 한 때는 사울과 같은 잘못된 길을 걸어갔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간의 환경을 통하여 시련을 통하여 고난을 통하여 그가 언제 마음에 예수님을 믿고 또는 변화되고 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먹고 기회를 엿보며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오늘도 먼저 찾아가서 내미는 따뜻한 손길의 사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 따듯한 손길 하나 때문에 그들이 힘을 내고 새로운 사람으로 힘 있는 은혜의 사람으로 변화될 뿐 아니라 교회도 놀라웁게 부흥하고 성장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감동의 역사, 동역의 역사를 일으키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여러분 속에서 꼭 나타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