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찬양강해

233장 자비로 그 몸 찢기시고

늘찬양 2014. 4. 14. 23:15

233장 자비로 그 몸 찢기시고

 

성경 본문: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라.”

 

찬송 묵상: 몸 찢기시고 피 흘려주신 주

 

찬송 요약

1, 자비로 그 몸 찢기시고 피 흘려 우리의 죄 사해 주신 주2, 회개하며 흐르는 눈물 보시고 은혜로 내 영 먹이소서

 

찬송가 해설

 

옥스포드 브래즈노즈 대학을 수료하고 1807년 영국성공회에서 신부안수를 받고 호드넷(Hodnet)에서 시무하다 1823년 인도 캘커타의 주교로 임명받은 성공회 신부이자 찬송작가인 레지날드 히버(R.Heber;1783-1826)목사가 1826년 작사하였다. 곡은 영국 브리스톨(Bristol) 출생으로 미국으로 이민하여 콜롬비아대학,제너럴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854년 감독파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요한 세비찬 베치 호지스(J.S,B.Hodges;1830~1915)목사가 1868년 작곡하였다.

 

찬양 플로로그

 

1절 자비로 그 몸 찢기시고 그의 피 흘려주신 주

생명의 말씀 주심으로 우리 죄 사해주셨네

 

1, 자비로 그 몸 찢기시고 피 흘려 우리의 죄 사해 주신 주

 

예수님은 십자가형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 형틀에 의하여 죽는 죽음만큼 무서운 사형제도가 없다고 합니다. ‘키케로라는 철인은 말하기를 십자가 형틀은 가장 잔인하고 소름이 끼치는 사형이기 때문에 전율로 몸을 떨지 않고는 바라볼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십자가 형틀은 페르샤인들의 사형방법이었습니다. 이 방법을 사용한 이유는 땅을 신성시하는 페르샤인들이 땅위에서 죄인을 죽이는 것은 땅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죄인을 십자가에 매달고 독수리나 까마귀의 밥이 되도록 해서 죽게 했습니다. 십자가형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게 처형하는 방법으로 이 사형 제도는 칼티고 사람들에게 전수되고 로마 사람들이 칼티고 사람들에게 배워서 시행되어졌습니다. 하지만 십자가형이 너무도 처참했기 때문에 로마에서는 반역자나 노예를 처형할 때만 사용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십자가형을 당하여만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죄가 없음을 발견하고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음을(27:15)을 알고 그 법을 사용하여 예수를 풀어주고자 했으나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무리들을 선동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바람에 빌라도는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24)하며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26) 그리하여 죄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속량하기 위하여 대속물로 십자가에 못 박혀야만 했습니다.

 

가끔 텔레비전 뉴스에서 떳떳치 못한 죄로 붙잡혀 끌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기자가 카메라를 들이대면 하나같이 머리를 숙이거나 손으로 얼굴을 감싸거나 겉옷을 추켜올려 얼굴을 감춥니다. 요사이는 모자를 눌러쓰고 나옵니다. 이렇게 얼굴을 가리는 것은 낯을 들기가 떳떳치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파렴치한 죄인이든, 떳떳치 못한 죄인이든 죄를 범하면 얼굴을 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끌려가면서도 얼굴을 감싸거나 겉옷을 뒤집어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유는 떳떳하고 당당한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죄가 없습니다. 그 어떤 잘못도 없습니다. 실정법을

위반한 일도 없고, 도덕률을 깬 일도 없고, 파렴치한 일을 저지른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

님은 십자가에 죽어야 했습니다. 그 이유를 이사야 534-5절에서 "우리 죄" 때문이라고 7번씩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 또한 6절을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29절에서도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했습니다. 그 어린양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확인해야 될 것은 "우리"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곧 ""입니다. 즉 나 위해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찬송가 1절에서도 나를 위해 자비로운 주님께서 그 몸을 찢기시고 피 흘려주심으로 우리 죄를 사해주셨네!”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복음성가 ! 날 사랑하나라는 가사는 예수님께서 날 위해고난 받으시고 죽으셨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날 위해 죽으셨네 왜 날 사랑하나 /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손과 발 날 위해 찢기셨네 왜 날 사랑하나 / 고난을 당하여 구원했네 왜 날 사랑하나

내 대신 고통을 당하셨네 왜 날 사랑하나 / 죄 용서 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 왜 주님 갈보리 가야 했나 왜 날 사랑하나"

 

그렇습니다. 이 찬송이 고백하는 것처럼 나 위해 십자가 지셨고, 나 위해 죽으셨습니다.

사실을 믿고 고백해야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찬송 예화: -우나무도의 젊은 작가 중에서-

스페인의 문인이었던 우나무도는 자신의 작품 젊은 작가속에서 "사랑 받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없는 것은 더 슬픈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사랑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사랑할 사람이 없다면, 아무리 둘러보고 찾아보고 소리쳐 보아도 사랑할 사람이 없다면, 그리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시기하고 질투할 사람만 늘어서 있다면 우리는 너무나 불행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셀 퀴에스트가 읊은 시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주여, 사랑은 두 가지 뿐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만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작아집니다. 그것은 사랑의 크나큰 손실입니다. 사랑이란 자기를 초월하여 다른 사람에게로 향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자기만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은 시들고 썩고 말라버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 없는 예수 잘못이 없는 예수, 억울한 예수, 멸시받고 천대받은 예수, 그러나 침묵하고 견디신 까닭은 사랑을 실천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참고 : 인터넷목회자 정보클럽>

 

관련 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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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앞에 성찬 받기 위하여 227

오 나의 주님 친히 뵈오니 228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230

유월절 때가 이르러 232

 

오늘의 기도

 

날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고백하며 감사하며 살게 하소서. 왜 주님께서 죽으셨는가, 왜 고통을 받으셨는가를 늘 생각하며 살게 하소서 그리고 그 크신 사랑을 늘 찬양하며 감격과 기쁨 속에서 살게 하소서

 

나의 고백 및 적용

 

비움

 

채움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