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맹인인가?
요 9:39-41,2022.11.13.늘찬양교회
그리스에 전해 내려오는 재미있는 설화가 있습니다. 어느 캄캄한 밤에 맹인(시각장애인)이 등불을 들고 길을 걸어갑니다. 자기는 맹인이라 등불이 필요 없지만, 가다가 혹시 다른 사람하고 부딪힐까 해서 등불을 켜고 길을 갑니다. 그런데, 얼마를 가다가 그만 지나오는 사람하고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이때 맹인은 자신 있게 말합니다.
"이 사람아, 눈도 없나? 이 등불이 보이지 않소?" 그러자 저쪽에 있는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이 가진 등불은 꺼진 지 오래됐소"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꺼진 등불을 갖고 있으면 뭣합니까? 등불이 꺼졌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게 맹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주님은 이렇게 자신의 등불이 꺼진 줄도 모른 채 율법을 좇아 의롭게 살아가며 많은 사람을 정죄와 낙심과 절망으로 이끌고 가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41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심판에 대한 비유이지만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고 있는 우리들이 바리새인처럼 보지 못하고 있는 영적인 부분은 없는가? 에 대하여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Ⅰ. 맹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
먼저 바리새인들의 관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탈무드를 구성하고 있는 미쉬나, 혹은 게마라는 것이 있는데 미쉬나는 구약의 해석서입니다. 그들은 오랜 역사가 흐르는 동안 사색하면서 이것이 성경의 의미라고 해석했습니다. 문제는 해석에 그치지 않고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으로 성경 전체를 재정리했습니다. 안식일 계명만 해도 39개 조항에 270여 개의 세칙으로 정리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보다 이 계명들을 더 신봉했습니다. 성경 위에 인간의 사상을 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맹인이 눈을 뜨게 된 배경을 율법의 관점으로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맹인이 눈을 떠서 보게 되었다는 은혜의 사실보다는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가?” 하는 결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누가 고쳤는지? 왜 고쳐주었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이렇듯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만든 안식일의 규칙을 위반한 사실을 밝히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맹인을 붙잡고 “네가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느냐?”(15절)고 추궁하기 시작합니다. 맹인이 이야기합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였소.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이렇게 보게 되었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맹인이 고침을 받은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 중에 한 사람이 말합니다. “예수가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주는 것으로 보아서 그는 하나님에게서 온 자가 아니다.”(16절)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죄인이라고 하면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16절)며 반문했습니다. 바리새인들 간에도 이렇게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율법을 “하라!”, “하지 말아라!”라는 것으로 구분해놓고 그것을 핑계로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했는데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겼다는 것은 노동하지 말라는 규례를 어긴 것이며, 안식일에는 아주 위급한 환자를 제외하고 치료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안식일에 고침을 받게 한 것은 분명 안식일의 규례를 범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율법의 규례를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한다며 맹인의 고침 받은 사건에 대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다른 관점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예수님의 관점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기 때문에 안식일에도 사람들이 쉼과 평안을 누리며 보지 못하는 그런 안타까움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며 창조의 원리를 따라 하나님의 은혜와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곧 구원의 참 목표요 진리의 세계였습니다. 이렇듯 주님은 더 넓게 구원의 세계와 은혜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두 번째,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의 관점입니다.
이들에게는 구원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하나님 백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기들은 무조건 선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단지 세상 사람들과 자신들이 어떻게 다른지(difference)를 보여주는 데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사상은 확고합니다. 그들은 인류의 시조인 아담부터 전 인류가 죄인이요 구원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리가 만무합니다. 구원받을 일이 없는데 무슨 구세주가 필요합니까? 단지 이스라엘 국가를 회복할 정도의 메시아가 필요했을 뿐입니다. 이런 유대인의 사상 체계를 대대로 물려받는 사람들이 속죄하러 오신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구원이란” 문제와 “예수는 누구인가?” 하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사상과 논리, 더 부연하면 자신들의 지배권과 기득권을 지키는 데만 주력했습니다. 그들은 침례 요한이 나타났을 때도 긴장했습니다. 많은 무리가 요한과 그 제자들을 추종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나타나자 더욱 긴장했습니다. 침례 요한과 그 제자들까지 다 예수님을 추종하며 따랐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배척하는 것을 전제로 논리를 펼치다 보니 맹인을 잡고 꼬투리 잡기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Ⅱ. 진짜 맹인은 누구인가?
맹인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로암 연못에 가서 눈을 씻고 밝은 눈으로 왔는데,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자리를 뜨셨는지, 이 사람이 길을 잘못 들었는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눈을 고쳐주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은 아는데,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바리새인들이 맹인을 맞이하며 묻습니다.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떤 사람이라 생각하느냐?”(17절) 맹인은 주저하거나 망설임 없이 “예, 선지자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체험적인 사람이요, 부정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러냐! 그렇다면 네 눈을 뜨게 한 예수라는 사람은 지금 어디 있느냐?” 맹인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할 수 없이 바리새인들은 맹인의 부모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었다는 당신의 아들이 맞소?” 부모가 말합니다.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사실과 날 때부터 맹인으로 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에게 물어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분명하게 말할 것입니다.”(20-21절)라고 합니다. 맹인의 부모가 이렇게 대답한 것은 유대인 사회에서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기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다시 두 번째로 맹인이었던 사람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는 그 사람 예수는 죄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맹인이었던 사람이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25절)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네게 한 일이 무엇이냐? 그가 네 눈을 어떻게 뜨게 하였느냐?”(26절) 맹인은 참으로 짜증 나는 일이었습니다.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알아들어야 하는데, 이미 말을 하였고, 자기가 다른 사람과 같이 정상인이라고 하는데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하면서 계속 추궁하고 있습니다.
맹인은 정색하고 말합니다. “그것은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하였는데, 여러분은 곧이듣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찌하여 다시 들으려고 합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27절) 그러자 유대인들은 맹인에게 욕을 퍼붓고 말합니다. “너는 그 사람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28-29절)
맹인이었던 사람의 처지에서 보면 참으로 기막힌 노릇입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주었는데 랍비라고 하는 사람들, 서기관이란 사람들이 고쳐주시는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를 죄인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들어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의 뜻을 행하는 사람의 말은 들어주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핵심적인 말로 공격합니다.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하였다는 말은, 창세로부터 이제까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한테서 오신 분이 아니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31-32절)
이젠 완전히 역전이 되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것입니까? 맹인이었던 사람이 서기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맹인이었던 사람은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을 물리적인 힘으로 억압하고 교권을 가지고 정죄하고 출교합니다. “네가 완전히 죄 가운데서 태어났는데도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 그리고는 맹인을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34절)
교회 안에도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보지 못한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들은 신학의 논리와 오랜 교회의 풍습과 규례를 바탕으로 탄탄하게 학문과 신앙이 다져지다 보니 쩍쩍 신앙으로 교인들을 판단하고 엄포를 놓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과 같다. 교회는 성전이다. 주일은 안식일과 같다. 절대로 주일에는 사고파는 것을 해서는 안 된다.”며
율법으로 교인들을 얽매어 놓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는 구원의 복음과 십자가의 진리보다는 교회를 성장시키고 대접받고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더 크다 보니 더욱더 권위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저도 한때 모목사님의 목회자 세미나를 12년 넘게 참석하면서 “오직 예수”라는 표어 아래 잘못된 교회성장주의에 빠져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코로나 19’를 통해 채찍을 가하셨습니다. 이 채찍을 가볍고 여기고 다시금 권위주의 교회로 돌아간다면 한국교회는 미래가 없습니다. 영적 눈먼 자들이기 되기 때문입니다. 진짜 맹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라도 내 교회와 나 자신의 영적 등불이 꺼져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교회와 생명을 구원하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Ⅲ. 맹인의 고백
예수님은 이런 상황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그들의 모임에서 쫓아내었다는 말을 들고 맹인이었던 사람을 다시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35절) 여기서 “인자”란 말은 종말론적인 구원자요, 심판자로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구원의 주님을 보내신다는 것을 믿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맹인은 말합니다.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36절) 우리 주님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인자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리면서 “내가 믿나이다”(38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때 우리 주님이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39절)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이 두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영적으로 맹인이었지만, 이 사람은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영의 눈을 뜨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주님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본다, 보지 못한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영안이 멀어서 한평생 캄캄한 어두움에 보내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영안을 열어야 합니다.
사실 오늘 이 본문을 가지고 여러 각도에서, 여러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많은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맹인의 믿음의 성장과 고백에 대하여 초점을 잡으려고 합니다.
맹인은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일평생 불행을 끌어안고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난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거지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그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7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로암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두 눈을 깨끗하게 씻었습니다. 그리고 밝은 눈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기적의 치유를 맛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자연의 세계를 보고 찬양하며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맹인에게 얼마나 컸을까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자신의 눈에 바르는 것에 대해서도 침묵하더니만 실로암 연못까지 달려가는 그 믿음과 순종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지금 같이 고이자 고물가의 경제위기 속에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나머지 전부를 이자 내는데 정신이 없는 영끌 족에게 “누가 빛을 내어 아파트를 사라고 했느냐?”, “누가 외국인이 만든 할로윈 축제에 참여하라고 하였느냐?” 모두가 자신이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라며 맹인을 대하듯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저들 속에는 방 한 칸이라도 마련하여 결혼하고픈 젊은이가 있었을 것이고, 오랜 ‘코로나19’로 인한 지치고 상한 맘을 위로받고자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을 텐데 그것을 부모의 잘못이나 자신의 잘못으로 맹인을 뒤집어씌우는 바리새인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뒤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사회의 바른 치유와 회복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마음 문을 열고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눈먼 암흑의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 실로암으로 달려가는 맹인의 열정을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더욱이 눈을 떠서 보게 된 맹인을 축하해주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이렇게 내가 각종 경제위기 속에서도 직장을 얻고 대학에 합격하고 자격증을 따고 승진을 하며 결혼까지 할 수 있게 된 것은 모두가 다 주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 되어야 합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40절에 보면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이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을 듣고 "우리도 맹인인가?"하고 반문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며 이 구절에 우리를 나로 바꾸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도 맹인인가?" 그리고 아직도 자신 없음에 대해 마음이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사랑 없음을 꾸짖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영적 교만에 대해 꾸짖고 계십니다.
타인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지 않고, 타인의 기쁨에 함께 즐거워하지 않는 오히려 그들의 작은 잘못을 판단하려 들고, 정죄하는 그 형태를 질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끌족의 아픔과 고통을, 이태원 참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애통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구원의 세계와 회복과 치유의 세계가 열립니다. “믿음·소망·사랑”은 우리가 저 하늘나라 갈 데까지 나타내어야 할 사명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믿음과 열망이 식지 않도록 “네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41절)는 경각심을 가지고 “나도 맹인인가?”(40절) 되돌아보며 겸손한 믿음의 소유자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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