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주일설교

열매를 바라보라

늘찬양 2022. 11. 13. 22:26

열매를 바라보라

5:7~10, 2022.11.13.늘찬양교회

 

 

중국 동부의 한 농부가 자신의 농장에 대나무를 심고 기다렸습니다. 1년이 지났지만,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2년이 지났을 때도 역시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3년이 지나도, 4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5년째 되었을 때 대나무 싹들이 지면을 뚫고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하루에 한 자가 넘게 자랐습니다. 불과 싹이 올라온 후 여섯 주 만에 대나무들은 무려 15이상씩 커졌습니다. 농부는 그 대나무를 자른 후 내다 팔아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중국의 모소라는 대나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모소라는 대나무가 6주 만에 15나 자란 이유를 아십니까? 이 대나무는 싹을 내기 전에 땅속에 있는 뿌리가 사방 수십 미터까지 뻗어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단 싹을 내면 뿌리에서 보내주는 엄청난 양의 자양분 덕분에 순식간에 키가 자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가정이지만 만약 농부가 그 모소라는 대나무를 심고 나서 4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리지 못했다면, 결코 부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기다렸기 때문에 땅에 심은 대나무가 15까지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을 내다 팔아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고이자 고환율 세계 경제 대위기를 맞이한 우리는 어떠한 자세,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까요? 특별히 22년 추수감사절을 맞아 열매를 바라보라는 제목으로 위기를 헤쳐나가는 3가지 자세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바라고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열매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농부는 아무 씨나 뿌리지 않습니다. 먼저 좋은 종자를 구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자신의 지역과 환경에 어떤 열매가 맞는지 그리고 그 열매는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얼마나 되는지를 살핍니다. 그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씨앗을 뿌려 얻은 열매를 견학하고 확신을 가진 후에 씨앗을 심습니다. 씨앗을 심은 후에는 가득히 열릴 열매를 바라봅니다. 바람이 없이는 심지 않습니다. 바람의 근거는 소망입니다.

 

저는 인생 3막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엄청난 소망과 바람을 가지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메타버스라는 가상의 공간에 늘찬양의 동산을 세우는 것입니다. 늘찬양이라는 동산에는 각종 열매의 방이 있습니다. 찬송큐티의 방, 찬송가 강해의 방을 비롯하여 인물설교, 기적설교, 회복설교, 치유설교, 비유설교, 변화설교, 건강설교, 가정설교, 승부수설교 등

의 공간이 세워질 것입니다.

 

이곳에는 나이 제한도 없습니다. 더욱이 아바타와 AI가 내 얼굴과 음성을 대신하여 세계 각국 언어로 번역하여 말씀을 전하여 주기 때문에 복음전파에 최상의 열매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곳은 땅에 세운 것이 아니므로 전 세계의 남·녀 기독교인들이 언제든지 자유롭게 들어와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상상을 해보십시오! 말도 안 통하는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아바타와 AI가 들려주는 번역의 말씀과 찬양에 은혜를 받으며 함께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 귀한 모습을 ...

땅에 교회도 유투브와 페이스북, 각종 인터넷 설교방송,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말씀을 전하지만 직접 참여가 아닌 간접참여이다 보니 그만큼 감동이 덜합니다. 그러나 메타버스안에 세워지는 늘찬양동산에는 고글이라는 가상전문안경을 쓰고 들어 자신이 직접 들어와서 참여하기 때문에 감동을 받는 은혜의 결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러한 효과를 잘 알고 있는 대형교회에서는 수년 전부터 메타버스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전문사역자들을 준비시키며 양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열매를 맺는 가치판단의 결과가 좋은 종자에 있듯이 좋은 설교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남이 가지고 있지 않은 불루우션 전략의 설교가 필요합니다. 늘찬양교회는 이러한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지금도 외로운 길을 달려가고 있습니다.

 

 

. 참고

 

본문 7절과 8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 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농부는 씨를 심고 조금도 조급해하지 않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릴 것을 믿고 추수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저희 늘찬양교회가 평택에 세워진 지도 올해로 34년입니다. 그동안 260여 평의 교회도 건축하고 새성전으로 입당하는 감격도 있었지만, IMF라는 치명타를 받고 쓰러진 이후 지금은 교회의 십자가와 간판도 없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교회를 살리기 위해 저는 58세에 소방학을 공부하여 일하는 목회자로 인생 2막을 열어 목회와 더불어 일터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자급자족하는 교회로 우뚝 섰습니다. 이를 위해 얼마나 힘들게 자격증 공부를 했는지 모릅니다. 대학교도 대전 우송정보대에 이어 전주 우석대 소방방재학과에 이르기까지 먼 곳까지 학교를 다니며 열심히 공부한 결과 위험물 기능사 2, 위험물산업기사, 위험물 기능장, 소방설비기사 기계분야, 그리고 산업안전기사에 이르기까지 각종 자격증을 취득하여 유해화학기술인력으로 65세의 나이에도 당당하게 직장을 다니며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토요일 19일에는 소방설비기사 전기분야 시험을 치르는데 이미 합격권의 실력을 쌓았기 때문에 무난히 합격할 것으로 보입니다. 더 나아가 최종 목표인 소방시설관리사 필기시험까지 합격하였기 때문에 내년에는 소방시설관리사 자격증도 취득할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를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아픔과 고통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너무 무리한 나머지 눈의 모세혈관이 터져서 대학병원에서 망막 시술을 두 번이나 지금도 6개월마다 정기검사를 받는 것은 물론 허리와 온몸의 통증은 바라봄의 법칙과 참을성과 끈기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참아야 합니다. 억울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참아야 합니다. 왜 참아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참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바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돌아오기까지 길이 참으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7절에도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강림이라는 말은 재림이라는 말과 동일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까지 끝까지 참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로 길이 참았습니다. 그들의 삶을 본받고 우리들도 오래 참아야 합니다.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길이 참는 자가 귀한 열매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참지 못하는 자는 귀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농부가 열매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참습니까? 좋은 열매를 얻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무를 심습니다. 영양분을 줍니다. 적당한 물을 줍니다. 해충을 잡아 줍니다. 적당한 가지치기를 합니다. 비바람에 쓰러지지 않도록 보호막을 쳐 줍니다. 과일이 벌레 먹지 못하도록 과일을 싸 줍니다. 뜨거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며 이런 일을 해야 합니다.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참습니다. 왜 참습니까?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 기다림

 

일본 사람들은 크고 오래된 건축물을 짓는 목수를 궁목수(宮木手)라고 합니다. 니시오카 츠네카츠는 궁목수입니다. 그 집안사람들이 천년이 넘도록 지탱하는 목조 건축물을 세울 수 있었던 비결은 천년 이상을 지탱할 수 있는 노송(老松)을 썼기 때문입니다.

니시오카 가문은 천년 이상을 지탱하는 건축물을 지으려면 천년은 된 노송을 써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니시오카 가문은 천년 된 나무라면 모름지기 천년을 지탱하도록 건물을 만들어 주어야 궁목수로서 그 나무에게 면목이 서는 일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천년의 기다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천년 된 노송으로 건축물을 짓고 나면 반드시 새로 나무를 심었다는 것입니다. 그 나무들은 미래 새로 지을 집의 재목감이 되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니시오카 가문은 나무를 사지 않고 산을 샀습니다. 곧 나무 심을 산을 사서, 계속해서 목재를 공급했던 것입니다.

 

천년을 견딘 나무는 천년 이상의 쓰임 받습니다, 견딤의 시간, 기다림의 시간이 나무의 쓰임을 결정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래 견디는 자는 그만큼 오래 쓰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할 능력은 기다림과 견딤의 능력입니다.

 

이탈리아 화가[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어느 날[프란체스코 델 조콘다]라는 사람이 찾아와 작품을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다름 아닌 자기 부인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이었고 얼마의 시간이 걸리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레오나르도 다빈치]1개월로도 안 되고 1년으로도 안 되니 그냥 맡겨두고 다 그리면 연락하겠노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는 다빈치는 장장 4년이나 걸려 초상화를 그립니다. 그리고는 그도 모자라서 그림을 [조콘다]에게 건네면서 "이 그림은 아직도 미완성입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 그림이 그 유명한 <모나리자>라는 작품입니다. 모나리자는 그런 사연이 있는 작품입니다. 명작은 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명작은 완성이 없습니다. 순간적인 욕심이나 이득을 위해서 급조하고 거짓말하고 겉치장만 하는 것으로는 세상에 감동을 줄 수가 없습니다.

 

저는 메타버스 늘찬양의 동산에 세울 각종 방을 만들기 위하여 오랜 시간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제가 설교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1~2년 걸려 만들어진 것이 없습니다. 최소 3년에서 5, 7, 10년이 걸려서 완성한 것들입니다. 심지어 찬송가 강해 620여 편의 설교를 만드는 데 30년이 걸렸습니다. 결코 기다림과 인내의 수고가 없이는 좋은 작품을 완성할 수가 없습니다. 순간적인 때우기식의 설교로는 기적의 역사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농부의 심장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농부는 열매가 맺혀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성경에 나타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참고 기다린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알같이 많은 자손을 준다고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25년 만에 이삭 겨우 아들 하나를 주셨습니다. 25년 기다려 겨우 씨앗 하나 생겼지만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대민족이 되었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40살에 민족을 해방하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급하였습니다. 그래서 애급 사람을 죽여서 모래 속에 파묻었습니다. 급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급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부르셨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날 때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0년 만에 축복을 주셨습니다. 기다림이 없이는 거둠이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영적 농부입니다. 무엇이나 심고 때가 이르면 거둘 것을 기다리는 영적인 농부들입니다. 농부는 봄에 뿌리고 가을까지 기다립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은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6:8-9)

 

예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4:26-29)

 

씨를 심고 싹이 나고 자라서 이삭이 되고 충실한 곡식이 될 때까지 농부는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농사의 비결은 오직 인내입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고이자 고물가의 경제위기 속에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월급의 나머지 전부를 이자 내는데 정신이 없는 사람들의 소리가 있는가 하면 반대편에서는 5%를 넘어 6%대의 이자를 준다는 예금에 이른 아침부터 은행 앞에 줄을 서서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참으로 불공평한 세상입니다. 더 참담한 것은 이 불공평한 세상에 가진 자가 아닌 없는 자, 약한 자로서의 위치에 서게 하신 그래서 삶이 너무나도 팍팍하고 힘들고 어려워서 어떤 때는 눈물 나게 하나님을 원망한 적도 있는 우리들의 슬픔 자아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공평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눈동자같이 지켜보고 계십니다. 이유는 한가지 저와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천년의 축복을 주기 위함입니다. 천년의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입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작게나마 체험하며 고백한 사람들은 오늘도 믿음의 반열에 서서 바라고...참고...인내하며...”(7) 감사 찬양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 기쁨의 은혜가 하늘의 상급과 열매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나가는 여러분에게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