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렙돈 (재정의 역기능치유 5)
막 12:41-44, 2022.11.27.늘찬양교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봉헌함 맞은 편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 궤에 돈을 넣는 것을 바라보고 계시다가 두 렙돈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물질을 봉헌함에 넣는 가난한 과부의 모습을 보시고 그를 불러 세우시고 제자들에게 “나는 분명히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구차한 가운데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 넣었으니 생활비 전부를 모두 받친 것이다.”(막 12:41-44, 눅 21:1-4, 공동번역)며 극찬하는 참으로 보기 드문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가장 적은 물질을 드리고도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귀한 것을 드렸도다.” 칭찬을 받는 이 기적 같은 귀한 장면을 통하여 재정의 역기능치유 다섯 번째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Ⅰ. 두 종류의 헌금
본문에 나오는 헌금궤는 예루살렘 성전 여인의 뜰에 놓인 13개의 소바롯이라고 하는 연보궤로서 그 모양은 마치 나팔 모양처럼 생겼고, 각각의 헌금궤 마다, 십일조, 감사헌금, 건축헌금, 선교헌금, 주일헌금 등 그 각종 헌금이 쓰일 용도가 적혀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업무를 담당하는 제사장은 매일 매일 헌금하는 사람의 이름과 액수를 기록하여 보관했습니다. 기록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기록해야만 헌금 관리의 잘못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헌금에 대한 동기유발입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주님께서 헌금궤(연보궤, 헌금함)를 대하여 마주 앉으사 무리의 헌금 넣는 것을 직접 보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저는 몇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예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헌금 넣는 것을 일일이 관찰할 정도로 그렇게 한가한 분이셨을까? 하는 의문과 만일 그렇지 않다면 분명 여기에는 어떤 큰 영적 교훈이 담겨 있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자! 그렇다면 본문의 앞뒤 정황을 살펴볼 때, 예수님께서는 이 유월절이 끝나자마자 며칠 안 있어 자신이 저 성전 맞은편 동산에서 붙잡힐 것과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예수님에게 얼마 남지 않은 소중한 시간일 텐데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힘겹게 여기며 부담스러워하는 헌금궤를 바라보고 계셨을까? 그 이유를 찾아 떠나보기로 하겠습니다.
1. 부자와 가난한 자의 헌금
공교롭게도 마가와 누가는 본문에서 두 부류의 사람을 비교시켜 등장인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쪽은 돈이 많고 부유한 사람들의 상징인 부자를 등장시켰고 다른 쪽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상징인 과부를 등장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의 모습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이 헌금할 때는 긴 나팔 모양의 관을 통하여 놋쇠로 만든 헌금궤 바닥에 떨어지면서 돈의 묵직함으로 인해 요란한 소리를 내었습니다. 이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헌금궤에 쏠렸습니다. 부자는 그 시선을 의식하듯 거들먹거리며 뒷짐을 지고 어깨를 높이고 헛기침을 하며 요란스럽게 성전 안으로 들어갑니다. 반면 형편이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은 헌금 액수가 적다 보니 떨어지는 소리도 작았습니다. 심지어 너무 작은 경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느껴서 그런지 가난한 사람들은 겸손하게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유난히 더 조심스럽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으로 헌금궤에 다가와서는 무엇을 숨기듯 살짝 두 렙돈을 넣고 소리 없이 사라지려는 여인의 모습을 예수님께서 발견하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렙돈’이란 것은 헬라의 동전으로 당시 가장 작은 화폐 단위를 가르칩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노동하고 하루 품삯으로 받는 돈이 한 데나리온 이었는데, 렙돈은 1/64 데나리온에 해당하였으니 얼마나 작은 액수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과부를 불러세우시는 예수님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적은 액수의 두 렙돈을 헌금궤에 넣고 다람쥐처럼 도망가려는 과부를 예수님께서 불러 세우시고 제자들을 큰 소리로 부르셨습니다. 과부에게는 매우 황당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매우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막 3:13, 6:7, 8:1, 34, 10:42) 무슨 일인가 싶어 궁금해하며, 모여든 제자들에게 주님은 자신이 말하려는 내용이 매우 중요한 내용임을 인식시키기 위해 먼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을 써가며 말문을 여셨습니다.
『어떤 부자들이 와서 돈을 연보 궤에 넣는데 여러분이 생각하기에도 많은 돈을 연보 궤에 넣는 것을 내가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백만 원, 오십 만원, 십만 원, 일만 원 정도를 하였다. 더욱이 오늘은 유대인들이 가장 큰 절기로 지키는 유월절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최상의 것을 드렸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 여인은 무척 가난한지 와서 두 렙돈만 집어넣고 가려고 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도 얼마나 적은 양의 헌금인가? 그런데 나는 여러분에게 “이 가난한 과부가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도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고 싶은 이유를 44절에 “다른 이들은 풍족한 중에서 넣었지만, 과부는 궁핍한 중에도 자신의 모든 소유를, 즉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혔습니다.』
헌금 액수를 떠나서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결코 아닌데 가난한 과부는 무슨 이유로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은 것일까요?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을 벗을 수 없으니 차라리 남은 돈을 몽땅 헌금함에 넣고 굶어 죽겠다고 작심한 것일까요? 그동안 헌금을 하지 않아서 가난하게 사는 것이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부자가 되기 위해서, 아니면 평범하게나마 먹고사는 걱정을 하지 않게 해달라는 뜻으로 무리하게 헌금한 것일까요? 우리는 그 속사정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가난한 과부가 바친 두 렙돈은 그의 전 재산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곧 그녀가 자신의 인생, 즉 삶 전체를 하나님께 바쳤다는 의미입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확신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아빠의 손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공중부양을 할 수 있는 거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실제로 신뢰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걱정에 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기에 “시험을 당하여 넘어질 즈음에 피할 길을 열어주셔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는 하나님”(고전 10:13)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전 재산인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고도 담대하게 세상을 살아갑니다.
Ⅱ. 우리의 일상
어느 교회에 장로님이 한 분 계셨는데 교회 건물을 자기 돈으로 사서 교회를 세우신 분입니다. 재벌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 장로님의 십일조가 얼마나 많은지 그 교회 헌금의 80% 정도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90% 정도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교회를 전부 먹여 살리는 셈이었지요. 그분은 교회의 시무장로였으며 또한 수석 장로였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장로님들 대부분 역시 부자 장로님의 기업에서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장로님은 시장 난전에서 구두와 가방 그리고 우산 등을 수리하며 어렵게 가정을 이끌고 가시는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제가 우산을 수리하러 가면 얼마나 송구스러워하시는지 얼굴을 대하기가 민망할 정도입니다. 물론 수리비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 장로님이 몇 해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자인 수석 장로님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가히 하늘을 찌를듯합니다.
당회장인 목사는 이름만 목사이지 모든 결정권이 수석 장로님에게 있었습니다. 담임 목사님과 다른 교역자들은 장로님 눈치를 보기에 급급할 뿐입니다.
이런 모습은 장로님만의 모습이 아닙니다. 대형교회의 목사님들 또한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릅니다. 외제자가용에 그 씀씀이가 대단합니다. 목회자 모임에서도 자주 밥값도 내기 때문에 인기가 최고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반대하는 안건이 통과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부자 목사님이 제동을 걸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아울러 목사님에게 밉보이면 두고두고 후환이 두려워서 서로 잘 보이려고 아부하기에 바쁩니다. 저는 체질상 이런 것이 잘 안 되어서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이런 부자 장로님 대형교회 목사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가입해 있는 일하는 목회자 그룹에는 이름하여 붕어빵 목사, 땜질하는 목사, 카페에서 커피 내리는 목사, 양계장과 농장에서 일하는 목사, 대리운전하는 목사, 건축현장에서 시다바리하는 목사, 심지어 고철을 줍는 목사도 있습니다. 이런 일 하는 목사님이 노회나 지방회에 참석하기도 힘들지만 참석하면 “왜 목사가 이중직을 갖고 있느냐? 그래서 목회가 되겠느냐?”며 핀잔을 받기가 일상입니다. 일하는 목회자는 그래도 자주 빠지는 것이 너무 죄송스러워서 참석한 것인데 이해와 격려는 고사하고 욕만 잔뜩 먹습니다. 그렇게 목회자 모임이나 지방회를 마치고는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부리나케 일터로 달려갑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같이 몰려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모습을 헌금궤를 주목하고 보시듯이 주님께서 일하는 목회자를 눈여겨보고 계십니다. 그러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없는 시간을 내어 목회자의 모임에도 참석했구나! 너는 헌금을 드리지 아니하였다면 그 돈으로 하루 일당을 온전히 챙겨서 가족에게 큰 힘이 될 수 있었을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교회와 지방회를 위해 너를 희생하였구나! 나는 가난한 과부가 연보 궤에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헌금하였다고 칭찬하였듯이 너를 칭찬하고 싶구나!”고 말씀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언제부터 외모와 외형에 집착하며 살았나요? 우리나라처럼 옷 잘 입는 나라가 없습니다. 철마다 새 옷을 사 입고, 명품가방을 사기 위해 새벽부터 긴 줄을 서는 나라. 옆집 보다 옆에 교회보다 우리 목사님 차가 우리 집 차가 더 좋아야 한다며 성도와 아빠들을 부추기는 모습들... 더 좋고 화려한 집, 큰 아파트를 사야 행복합니까? 그만큼 우리나라가 잘 사는 나라입니까? 이렇듯 교회와 세상 사람들이 물질주의와 합리주의 맘모니즘 신앙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바른 목회관 바른 물질관, 바른 헌금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Ⅲ. 특별한 헌신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은 항상 많은 사람으로 붐볐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 여러 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유월절 명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기 위해 각 곳에서 모여들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은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장을 봐 오고 준비해온 떡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갖습니다.
그러나 한 여인은 그 축제에 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월절의 본래 참뜻이 그들의 조상들을 애굽의 포로 생활에서 지금의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절기로 음식 마련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에 본뜻이 있기에 과부는 몇 푼 안되는 돈을 먹는 데 소비하지 않고 기꺼이 하나님께 드리기로 마음을 작정하였습니다. 그래서 과부는 다른 곳을 둘러보지도 않고 곧바로 성전으로 들어가서 조금도 주저함 없이 연보 궤 두 렙돈을 넣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을 주목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녀는 주어진 일상의 기회에서 특별한 때를 놓치지 않고 적지만, 최상의 것을 구별하여 드렸습니다. 그 최상의 때가 4대 절기(부활절, 맥추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의 행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인생의 마당에는 단순한 최선 이상의 특별한 헌신을 요구하는 기회들이 종종 있습니다. 성공한 모든 사람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소년 다윗은 자신의 호신용 물매 돌 5개를 골리앗을 쓰러트리기 위한 주님의 목적에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현장에서도 이름 없는 한 소년이 자신의 점심 도시락을 기꺼이 주님께 내어드리므로 5천 명이 먹고도 12 광주리를 남기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과 같이 소중히 여기던 옥합을 깨트려 순전한 나드 향유를 주께 부어 드린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초대교회 부흥의 초석을 놓았던 바나바는 자신의 소유인 밭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아름다운 헌신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에게 다가온 환경에서 자신이 드릴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찾아 아낌없이 그 전부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귀한 부흥의 역사를 이루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현재 가지고 있는 그것으로 자신의 위상과 품격과 위치를 높이려 하지 말고 가지고 있는 그 기득권을 다 내려놓고 포기하므로 주님의 인정함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어가는 지혜로운 믿음의 주인공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Ⅳ. 찾아라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전쟁 영화중에 수작에 들어가는 영화입니다. 라이언 이라는 일병 한 명을 구하기 위해 분대가 희생합니다. 라이언 일병이 뭐 그리 대단합니까? 대대장, 소대장, 중대장 심지어 분대장보다 낮은 계급의 이름 없는 병사일 뿐입니다. 그러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는 군대와 민족이라는 공동체의 더 큰 가치가 숨어 있습니다. 전쟁 중에서도 한 사람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줌과 동시에 평화와 가족이라는 기본적인 가치가 얼마나 더 위대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하는 영화입니다. 작은 것을 살리면 큰 것도 삽니다. 신앙적인 눈을 가졌다는 것은 작은 것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작은 자의 소중함을 아시고 헌금궤 앞에서 골똘히 지켜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눈을 가지고 두렙 돈밖에 없어 내일 먹을 것을 걱정하고 삶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없는 가운데서도 주님 한 분만을 바라보며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려는 한 사람 믿음의 주인공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어떻게 하면 교회재정에 도움이 되고 힘이 될 사람을 찾아 권사로 세우고 장로로 세워 교회를 건축할까? 에 골똘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면 한국교회는 미래의 희망이 없습니다. 큰 것에 현혹되지 말고 작은 것의 가치를 소중하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작은 게 작은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을 무시하면 큰 것도 죽습니다. 그 결과 오병이어의 기적은 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교회는 물론 세상과 사회는 더 각박하게 돌아갈 것입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지금 내게 있어 가장 값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과부는 자신에게 있는 가장 귀한 것, 두 렙돈과 자신의 생명, 미래의 삶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게 있는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작은 것이지만 귀하게 보시는 주님 앞에 내가 가진 젊음, 재능, 은사, 물질, 시간, 건강, 정성 등을 드려 하나님 나라의 기적을 만들어 냅시다.
작은 냇물이 모여 큰 강을 이루듯이 두렙 돈이라는 작은 물질에 갇혀 있지 말고 그것을 밖으로 끌어내어 교회 공동체를 살리며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바라는 모습이 역기능 다섯 번째가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최대 교훈입니다.
【김영수 목사】 재정의 역기능 치유(5)-두 렙돈 막 12:41-44
http://www.bonhd.net/news/articleView.html?idxno=13437
재정의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의 아픔을 믿음으로 승화시키고자
연속시리즈로 만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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