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주일설교

두 렙돈의 비유

늘찬양 2023. 1. 1. 22:07

두 렙돈의 비유

12:41-44, 2022.12.11.늘찬양교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봉헌함. 맞은편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 궤에 돈을 넣는 것을 바라보고 계시다가 두 렙돈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물질을 봉헌함에 넣는 가난한 과부의 모습을 보시고 그들을 불러 세우시고 제자들에게 나는 분명히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구차한 가운데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 넣었으니 생활비 전부를 모두 받친 것이다.”(12:41-44, 21:1-4, 공동번역) 며 극찬을 하는 참으로 보기 드문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가장 적은 물질을 드리고도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귀한 것을 드렸도다.” 칭찬을 받는 이 기적 같은 귀한 비유를 통하여 헌금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갖는 은혜의 시간 갖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유월절과 예루살렘 성전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은 항상 많은 사람으로 붐볐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 여러 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유월절 명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기 위해 각 곳에서 모여들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은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장을 봐 오고 준비해온 떡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갖습니다.

 

그러나 한 여인은 그 축제에 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월절의 본래 참뜻이 그들의 조상들을 애굽의 포로 생활에서 지금의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절기로 음식 마련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에 본뜻이 있기에 과부는 몇 푼 없는 돈을 먹는 데 사용하지 않고 기꺼이 하나님께 드리기로 마음에 작정하였습니다. 그래서 과부는 다른 곳을 둘러보지도 않고 곧 바로 성전으로 들어가서는 조금도 주저함 없이 연보 궤 두 렙돈을 넣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헌금궤는 예루살렘 성전 여인의 뜰에 놓인 13개의 소바롯이라고 하는 연보궤로서 그 모양은 마치 나팔 모양처럼 생겼고, 각각의 헌금궤 마다, 십일조, 감사헌금, 건축헌금, 선교헌금, 주일헌금 등 그 각종 헌금이 쓰일 용도가 적혀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업무를 담당하는 제사장은 헌금하는 사람의 이름과 액수를 기록했습니다. 기록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기록해야만 헌금 관리의 잘못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헌금에 대한 동기유발입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주님께서 헌금궤(연보궤, 헌금함)를 대하여 마주 앉으사 무리의 헌금 넣는 것을 직접 보고 계셨습니다. [렌스키]란 성경학자는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부활하셔서 여전히 보고 계신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5:1-11, 고후 9:6-7, 4:13)

 

그렇다면 여기서 저는 몇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예수님께서 한 사람마다 헌금 넣는 것을 일일이 관찰할 정도로 그렇게 한가한 시간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과 만일 그렇지 않다면 분명 여기에는 어떤 큰 영적 교훈이 담겨 있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 그렇다면 본문의 앞뒤 정황을 살펴볼 때, 예수님께서는 이 유월절이 끝나자마자 며칠 안 있어 자신이 저 성전 맞은편 동산에서 붙잡힐 것과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예수님에게는 얼마 남지 않은 소중한 시간일 텐데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힘겹게 여기며 부담스러워하는 헌금궤를 바라보고 계셨을까?

그 이유를 찾아 떠나보기로 하겠습니다.

 

 

. 두 종류의 헌금

 

예수님은 성전 안으로 들어가려는 많은 사람이 헌금궤에 헌금을 하고서 들어가는 모습 속에서 어떤 헌금의 요소 즉 드리는 자의 마음을 엿보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공교롭게도 마가와 누가는 이곳에서 두 부류의 사람을 대비시켜 등장인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쪽은 돈이 많고 부유한 사람들의 대표격인 부자를 등장시켰고 다른 쪽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대표 격인 과부를 등장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의 자세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이 헌금을 할 때는 긴 나팔 모양의 관을 통하여 놋쇠로 만든 헌금궤 바닥에 떨어진 돈이 묵직하고도 요란한 소리를 내었습니다. 자연히 많은 사람의 시선을 끌었을 것입니다. 그 시선을 의식하듯 거들먹거리며 뒷짐을 지고 어깨를 높이고 헛기침을 하며 요란스럽게 들어갔습니다. 그런 반면 형편이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은 조용히 헌금을 겸손하게 들어가는 것을 눈여겨보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더 조심스럽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으로 헌금궤에 다가와서는 무엇을 숨기듯 살짝 두 렙돈을 넣고 소리 없이 사라지는 여인의 모습을 예수님께서 발견하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두 렙돈렙돈이란 것은 헬라의 동전으로 당시 가장 작은 화폐 단위를 가르치며 고드란트는 로마의 동전으로 로마 화폐 중 가장 작은 단위를 가르칩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노동하고 하루 품삯으로 받는 돈이 한 데나리온 이었는데, 렙돈은 1/64 데나리온에 해당하였으니 얼마나 작은 액수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작은 액수의 두 렙돈을 헌금궤에 넣고 다람쥐처럼 도망가려는 과부를 예수님께서 불러 세우시고 제자들을 큰 소리로 부르셨습니다. 과부에게는 매우 황당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매우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3:13, 6:7, 8:1, 34, 10:42) 무슨 일인가 싶어 궁금해하며, 모여든 제자들에게 주님은 자신이 말하려는 내용이 매우 중요한 내용임을 인식시키기 위해 주님은 먼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을 써가며 말문을 여셨습니다.

 

여러분! 어떤 부자들이 와서 돈을 연보 궤에 넣는데 여러분이 생각하기에도 많은 돈을 연보 궤에 넣는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백만 원, 오십 만원, 십만 원, 일만 원 정도를 하였다. 더욱이 오늘은 유대인들이 가장 큰 절기로 지키는 유월절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최상의 것을 드렸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 여인은 무척 가난한지 와서 두 렙돈 천 원짜두 장집어넣고 갔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도 얼마나 적은 양입니까? 그런데 나는 여러분에게 이 가난한 과부가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도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고 싶은 이유를 44절에 다른 이들은 풍족한 중에서 넣었지만, 과부는 궁핍한 중에도 자신의 모든 소유를, 즉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혔습니다.

 

헌금 액수를 떠나서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결코 아닌데 가난한 과부는 무슨 이유로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은 것일까요?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을 벗을 수 없으니 차라리 남은 돈을 몽땅 헌금함에 넣고 굶어 죽겠다고 작심한 것일까요? 그동안 헌금을 하지 않아서 가난하게 사는 것이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부자가 되기 위해서, 아니면 평범하게나마 먹고사는 걱정을 하지 않게 해달라는 뜻으로 무리하게 헌금한 것일까요? 우리는 그 속사정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가난한 과부가 바친 두 렙돈은 그의 전 재산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곧 그녀가 자신의 인생, 즉 삶 전체를 하나님께 바쳤다는 의미입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확신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아빠의 손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공중부양을 할 수 있는 거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실제로 신뢰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걱정에 묶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기에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 선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전 재산인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는 태도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 과부의 값진 헌금

 

이 과부의 헌금을 그토록 값지게 한 요인이 무엇일까요?

 

첫째, 자신의 가진 것 전부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44절에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였듯이 다른 사람들은 풍족한 가운데서 드렸지만 이 과부는 이 돈이 자신의 마지막 생활비임에도 불구하고 전부를 다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 과부는 두 개의 동전 중 하나를 남겨 최저 생계비로 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다 드린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살겠다는 마음의 다짐과 나의 오직 소망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다는 믿음의 헌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상대해서는 안 됩니. 내게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기쁨이 없고 소망이 없는 것은 내가 주님을 적극적으로 상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의 전부를 주님께 드릴 때 주님도 우리를 전적으로 책임져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은 물질의 양보다 그 마음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다는 사실입니다. 결과보다 동기를 더 중요시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에게 있어서 얼마를 내었느냐? 는 것은 별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성도님이 내가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얼마 내고 감사헌금을 자주 드리며 성물도 귀한 것을 기증하였는데 이 정도면 목사님도, 성도들도, 하나님도 나를 사랑하여 주시고 인정해 주시겠지 하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

 

오늘의 초점은 하나님은 주님께 드린 물질보다 네 호주머니에 남은 돈이 얼마나 있느냐? 그것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쓰고 남은 물질을 드리려 하지 말, 쓰고 남은 시간을 드리려 하지 말고 쓰고 남은 정성을 들이려 하지 말고 남은 생명을 바쳐 주님을 사랑하기까지 먼저 주님 것을 생각하고 자신의 영광이 아닌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이 장면은 단지 두 렙돈 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건강과 시간과 지혜와 재능과 재물 등 온갖 것들이 나에게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을 나의 영광을 위하여 나의 배부름을 위하여 나의 인정을 위하여 쓰는 것을 전적으로 유보하고 포기하고 주님께 봉헌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인의 자세인가? 에 대하여 지적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쉬운 예화로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는 어떤 자매가 토요일이나 일요일 교회에 나가 반주자로 봉사하지 않고 피아노 학원에 나가 돈을 벌면 더 많은 돈을 벌 수가 있고, 또 그 번 것만으로 더 많이 헌금하면 하나님도 좋고 나도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이 아니냐며 주일에도 피아노 운영하는 모습이 많은데 ...하나님은 그런 헌금의 모습보다 적은 물질을 드린다고 할지라도 나를 위해서 전적으로 교회 봉사에 헌신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물질을 많이 드리는 자 보다 물질을 드리는 이들의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살아가는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과부는 시 68:5절의 말씀󰡒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 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다󰡓는 말씀과 이들은 또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감독 아래 있다는 것을(22:23, 10:18, 15:28, 146:9) 알았는지 모르지만 이 말씀대로 믿고 행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과부는 자신의 생계비 전부를 드렸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하는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6:31-33)는 말씀을 믿고 믿음 안에서 행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산 믿음의 증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는 갖가지 기적으로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앞길과 교회를 놀랍게 지켜 주실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지금 내게 있어 가장 값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과부는 자신에게있는 가장 귀한 것, 두 렙돈과 자신의 생명, 믿음 등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게 있는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재능, 은사, 물질, 시간, 건강, 정성 어느 것입니까? 마치 부활절이나 추수감사절 때에 주머니에 남긴 것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때보다 조금 더 드렸다는 사실로 만족하며 살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을 다 드리기까지 나 자신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보호와 축복 아래 참 평강과 기쁨 속에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귀한 물질의 축복이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넘쳐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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