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주일설교

발의 비유

늘찬양 2023. 3. 5. 21:39

발의 비유

13:1-30.2023.03.12.늘찬양교회

 

 

신체 부위 중 우리 몸을 지탱해주는 것은 발입니다. 온종일 걷고, 전체 하중을 견디는 중요한 역할에 비해서 정작 발 건강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관심한 편입니다. 발이 보내는 경고 신호를 무시하거나 가볍게 여기면 결국 심각한 통증 및 변형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다양한 스포츠 활동을 즐기는 사람이 늘었고, 발 건강에 이상 신호가 온 환자수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습니다. 또 여성은 하이힐 같은 높은 굽의 신발을 신는 것도 발 건강의 위험을 높이는 중요 원인입니다. 지나치게 오랜 시간 걷기나 뛰기를 반복할 경우에는 족저근막염이나 아킬레스건염 등 과부하에 의한 질환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무리한 운동이나 발사용은 삼갈 필요가 있습니다.

 

 

. 발건강, 왜 중요한가?

 

성경 고린도전서 1215~16절에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21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는 말씀을 통해 발이 몸의 요긴한 지체임을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 발에 약간의 통증만 발생해도 곧바로 인간의 기본적인 활동인 서기나 걷기가 불가능해지며, 그러면 일생생활 및 운동 등을 할 수 없게 되므로 전신건강이 악화됩니다. 발건강을 지켜야 전신건강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 건강을 지키는 데에는 대부분 소홀해지고 있습니다.

 

발에는 26개의 뼈, 32개의 근육과 힘줄, 107개의 인대가 얽혀 있습니다. 걸을 때마다 체중의 1.5배에 해당하는 하중이 발에 가해지고, 하루에 5000~8000번의 걸음을 내딛습니다. 발은 신체의 2%만을 차지하면서 나머지 98%를 지탱하는 몸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심장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심장에서 받은 혈액을 다시 올려보내는 2의 심장역할을 하는 곳이 발입니다.

 

노인들이 골절이나 기타 사유로 자리에 눕게 되면 급격히 의식이 흐려지고 살아갈 기력을 잃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이것은 발이 뇌에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다리의 넓적다리부부터 발끝까지에는 온몸의 근육 2/3가 모여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뇌는 근육을 움직임으로써 뇌 자체도 활발하게 활동하기 때문에, 다리와 발을 사용하지 않으면 뇌의 활동도 당연히 둔해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8년 동안 누워서 잠만 잤던 사람의 뇌의 무게가 그 전의 4분의 3이하로 떨어진 예도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발을 사용하고 온몸으로 움직이는 것은 뇌의 발달이나 활동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발이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하는 지체임에도 불구하고, 왜 다른 지체에 비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을까요? 발은 인체의 다른 중요기관과 달리 그것이 상한다 할지라도 목숨이 걸린 치명적인 작용을 하지 않는다는 점과, 오늘 본문에도 나와 있듯이, 발은 특성상 쉽게 더러워지는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샌들을 신고 다녔는데, 온종일 바깥에서 생활하다 보면, 발은 모래와 먼지로 범벅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자연히 발은 더러움의 대표적 표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현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땅과 가까이 있는 지체요, 또 아래쪽이 있다 보니, 가장 불결해지기 쉬운 지체임에는 분명합니다. 이 같은 발의 특성이 성경에서도 다양하게 비유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 성경에 나타난 발의 비유

 

첫째, 헌신과 희생의 비유(13)

요한복음 131절부터 17절에 나오는 발의 비유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발은 지체 가운데 가장 불결한 부분으로, 외출 후에는 반드시 깨끗이 씻어야 하는 대상이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환대의 뜻으로 손님들에게 발 씻을 물을 주었고, 노예나 종들이 주인이나 귀인들의 발을 씻겨주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더불어 샌들의 신발끈(신들메)를 푸는 것도 종들의 일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발 관리는 천한 사람들이 하는 가장 천한 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런데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여기서 먼저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 준 적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복음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제자들도 예수님의 발을 직접 씻어드린 적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때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발 씻을 물도 내어드리지 않았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날 밤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행동은 제자들에게는 엄청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저들의 평소의 인식을 완전히 깨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시면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4-15)며 서로의 발을 씻어 주기를 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발을 씻어 주기를 명하시는 주님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구원자로, 메시아로, 선생의 자격과 신분을 내려놓고 천한 종이 되어 너희들의 발을 씻어 주었던 것처럼 너희들도 너희 자신의 모든 기득권, 권리, 자존심 등 모든 인간적인 것을 내려놓고 복음을 위해,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기 위해 낮아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가장 불결한 것, 부끄러운 것까지도 받아들이고 감싸는 기독교의 자기희생적 헌신과 봉사, 섬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는 장면입니다.

 

둘째, 섬김과 낮아짐의 비유(7)

누가복음 736절 이후에 보면 예수님께서 식사 초대를 받아 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아있을 때 죄를 지은 한 여자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께 다가가 그것도 뒤로 다가가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붇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인의 머리털은 최고의 자존심과 자긍심을 상징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여인의 눈물은 죄에 대한 통회와 자복을 뜻하며, 사랑, 감사, 헌신을 상징합니다. 합니다.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린 것은 마음을 바친 것을 뜻하고 그 발에 입맞춘 것은 몸을 드리는 헌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고귀한 머리털로 값비싼 향유를 붓고 가장 불결하고 천대받는 발을 씻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이 여인 또한 값비싼 향유를 부어 천하디천한 발을 씻겼다는 것 또한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헌신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답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8:14) 그렇습니다. 헌신은 사나 죽으나 내 몸을 주님께 온전히 맡기는 일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 같은 헌신과 섬김의 실천 위에 서 있는 종교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진정한 섬김과 낮아짐의 본질은 잊어버리고 형식만 붙들고 있는 죽은 신앙인들로 살아가고 있는 내 모습은 아닙니까?

 

셋째, 배신의 비유(13:18)

다음으로 18절에 보면,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구절은 시 41:9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이 표현은 중동에서는 하나의 모욕적인 몸짓으로써, 남에게 발바닥을 보이는 것을 뜻합니다. 비근한 예로 조폭의 두목이 부하들에게 맹세와 존경을 표하는 자세로 부하들에게 발바닥을 내밀며 핥으라고 합니다. 이렇게 맹세와 존경을 뜻하기도 하지만 배반을 의미하는 말로 가롯 유다의 반역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런가하면 야곱은 태어날 때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는데, 이후 발뒤꿈치를 잡다’(25:26)는 말은 상대방을 속인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발꿈치라는 말은 창세기 315절에서도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뱀을 저주할 때 사용한 말로서, 여자의 후손이 독사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며, 독사도 역시 그의(여자의 후손을 말함)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은 사단과 하나님의 아들 사이의 싸움과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대적에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사실을 가리킨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발꿈치일까? 물론 뱀이 사람을 물 때, 가장 일반적으로 공격하는 곳이 발꿈치이기도 하고, 또 발꿈치는 흔히 아킬레스건이라고 일컬어지는, 가장 강력한 힘줄이 있는 곳이자, 동시에 이것이 끊어지면 꼼짝도 못 하므로 인간의 취약점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발꿈치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 외에도 발은 제사장을 성별할 때 수양의 피를 발가락에 바르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온몸을 성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에훗이 모압 왕 에글론을 암살할 때, 완곡어법으로 은밀한 곳을 가리켜 이란 말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3:24). 사무엘상 24:3에 보면 엔게디 황무지에서 사울이 동굴에서 그의 발을 가리우기 위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잠을 자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용변을 보다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다양하고 흥미있는 개념들이 발에 의해 전달되었습니다.

 

 

. 내 발이 그의 걸음을

 

섬김의 발

욥기서 23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다.”고 한 말은

욥이 하나님과 변함없이 동행했다는 뜻입니다.

 

변함없이 한결같은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발의 교훈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듯이 모든 기득권, 권리, 자존심 등을 내려놓고 복음을 위해,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기 위해 낮아짐, 겸손의 모습으로 주님가신 십자가의 길, 섬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교회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 중의 하나가 섬김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가장 그 뜻을 훼손하고 있는 말도 섬김이라는 말입니다. “섬김의 삶은 인간의 본성을 이겨야만 살 수 있습니다. 이 본성을 이기지 못하면 섬김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 갈라디아서 2:20에 있는 말씀을 잘 아시지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2. 희생의 발

발은 온 몸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합니다.

산을 정복할 때 가장 희생하는 것이 발입니다. 발이 건강하지 아니하면 정상을 정복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정상을 정복한 이후에 눈은 호강을 하지만 발은 아무런 표현도 주장도 하지 못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올바른 희생의 모습입니다.

 

희생이 무엇입니까? 더 소중한 분 예수님을 위해서 나의 소중한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은 자신을 희생하며 포기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4:32).

그런 삶이 초대교회를 부흥시켰으며 각종 기적과 이사가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하면 치유가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나야 진짜 능력인 줄 알지만 그러나 오늘날 진짜 기적은 돈과 소유가 우상이 된 이 시대에서 진실로 기쁜 마음으로 이것 중 어느 하나도 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세요라고 발처럼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짜 하나님의 사람을 체험한 자의 모습입니다. 이 시대 진정으로 필요한 사람은 발처럼 보이지 않게, 드러나지 않게, 끊임없이 자신을 희생하며 섬기는 사람입니다.

 

3. 사랑의 발

갈라디아서 513절에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종이 됩니다. 발을 씻어 줘도 자존심이 상하지 않습니다. 밥해 주고 빨래해 줘도 즐겁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섬기고, 남편이 아내를 섬기는 것은 무거운 멍에가 아닙니다. 사랑의 동기에서 섬기는 것이라면 그 멍에는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도 사랑하는 것은 뜻합니다.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들도 섬기겠습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자랑도 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사랑의 발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늘날 인간관계가 파괴되는 이유는 바로 <서로서로 주인 노릇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서로 다스리고 서로서로 잡아먹으려고 해서 망하는 것입니다. 서로서로 이용하고 /서로서로 착취하고 /서로서로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 경쟁사회의 비극입니다.

주님 저도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주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대접받고 인정 받는데만 관심을 갖지 말게 하시고, 사랑하며, 섬기며 살게 하소서.

서로 불쌍히 여기라 하셨사오니 불쌍히 여기며 섬기게 하소서.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발이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더 많은 섬김과 희생과 사랑의 빛을 밝혀주기를 원합니다. 세상에는 범죄에 빠른 발, 교만한 발, 넘어지는 발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발걸음이 되기를 원하는가? 좋은 소식을 가져다주는 자의 발은 지극히 아름답다고 했습니다(52:7). 여러분의 발걸음이 이처럼 복되고 아름답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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