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주일설교

재정의 역기능치유(7)-아나니아와 삽비라

늘찬양 2023. 1. 21. 21:18

매월 4주에는 치유설교를 하고있습니다. 재정의 역기능치유 (7)
아나니아와 삽비라
행 5:1-11,2023.01.22.늘찬양교회


재정의 역기능 치유 마지막 7번째 시간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 우리들에게 큰 충격과 깨달음을 던져주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죽음을 통해 신자이면서도 죄에 대하여 민감하지 못하고 무감각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부분과 물질에 대한 바른 신앙관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 줍니다.


Ⅰ. 아나니아와 삽비라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강력한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나타난 교회였습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 사건 이후로 성도들은 새 방언을 말하게 되었고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하였으며 각종 병자가 고침을 받는 놀라운 기적의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자신의 재산을 기쁨으로 교회에 헌납함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아름다운 일들도 일어났습니다. 이렇듯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말미암아 환란과 핍박을 받는 중에도 성도들이 즐거워하며 행복한 믿음 생활을 하는 교회였습니다.

특별히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바나바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레위인으로 복음을 받아드린 첫 개종자였습니다.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으로 온 교회의 존경을 받았고, 사도들마저 요셉이라는 그의 이름을 바나바 곧 권위자(勸慰子)라고 일컬을 만큼, 신앙과 덕행이 아름다웠습니다. 그런 바나바가 자신의 소유를 팔아 교회에 헌금함으로 아주 뛰어난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 발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존경을 받았습니다(행 4:36-37). 이런 헌신의 분위기가 교회 안에 넘쳐났습니다.(행 4:32-35).

바나바에 대한 칭찬과 존경을 잘 알고 있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바나바와 같은 칭송과 영예를 얻고자 그들의 소유인 땅을 팔았습니다. 사도행전 5장 1절은 이에 대하여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라는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참 아름다운 일입니다. 부부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거니와 함께 같은 마음으로 소유를 팔아 형제를 돕겠다는 결정을 한 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2절에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에서 나타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 소유를 팔아 하나님께 드릴 때 부부가 서로 논의해서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소유를 팔아 돈으로 받고 보니까 그 액수가 상당히 컸습니다. 여기서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려고 그들의 소유를 팔았지만, 자신들의 목적은 하나님께 물질을 드림으로 초대교회가 더 왕성하게 부흥하고 일어서는데 일조하는 것보다는 바나바와 같이 다른 교인들로부터 존경과 칭찬을 받는 일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보니 굳이 판돈 전부를 드리지 않고 일부를 드려도 바나바와 같은 헌신자의 반열에 들어서지 않을까? 하는 유혹이 부부의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더욱이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고 나면 남은 노후는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하는 걱정도 생겨났습니다. 마치 첫 월급을 타기 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십일조를 드리리라 생각하였지만, 막상 첫 월급의 십일조를 떼어서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니까? 액수도 크고 또 살 것도 많고 또 앞으로 더 잘하면 되지... 또 이 돈을 드리고 나면 무엇을 가지고 생활하지...하는 염려와 갈등으로 인해 첫 번째 십일조부터 포기하고 나니 다음부터는 더 드리기가 어려운 것처럼 많은 사람이 헌금과 드림의 문제로 갈등하며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미래의 노후 걱정과 물질의 탐욕 앞에 굴복하여 소유를 팔아 생긴 물질 전부를 드리지 않고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모두 다 드린 것처럼 사도들 앞에 바쳤습니다. 이렇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거짓말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부부가 공모하고 사도들과 교회를 속인 첫 사건이었습니다. 개인이 그렇게 속이는 행동을 하였을지라도 큰 죄악일 터인데 부부가 공모하였으니 그 행위의 패역성(悖逆性)은 더 심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서로의 신앙을 지켜주고 세워주는 좋은 파수꾼이 되도록 서로가 노력하며 돕는 조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결과 사건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바라는 것처럼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지금 아나니아의 행위가 하나님을 기만하는 악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주의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전부입니다.”(8절)고 말하자 베드로는 "땅이 그대로 있을 때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으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4절)는 질책의 말을 아나니아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아나니아가 놀라 파리하게 질리더니만 땅에 엎드려져 혼이 떠나 죽게 되는 참상이 일어났습니다(5절). 아무도 아나니아에게 소유를 팔아서 하나님께 바치라고 압력을 넣은 일도 없었는데 스스로가 자신의 욕심을 따라서 금액 일부를 빼돌리고 전부를 바친 것처럼 위선의 가면을 쓰고 행동하므로 그것이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인 죄로 인하여 그 영혼이 죽임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차라리 바치지 않았더라면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임에도 말입니다.

아나니아가 죽은 지 세 시간쯤 지나서 그의 아내 삽비라가 그 일어난 참상을 알지 못하고 성전으로 들어왔습니다. 아마도 삽비라는 바나바와 같은 칭찬과 주목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성전 뜰을 밟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삽비라에게 베드로 사도가 질문했습니다.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8절)며 동일하게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그래서 생명을 연장할 기회가 다가온 것입니다. 그러나 삽비라는 이 기회를 무산시키고 말았습니다. "예 이뿐입니다."(8절)고 말하는 순간 삽비라 역시 남편 아나니아와 동일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Ⅱ.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그 이름과는 달리 비참한 저주의 죽임을 당한 것일까요?

첫째, 하나님과 성령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재산을 팔고 난 돈의 일부를 숨기고, 나머지를 가져온 것은 어떤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렇게 할지라도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모르리라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양심이 화인 맞아 하나님의 눈까지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겉과 속이 다른 외식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사람의 눈은 능히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은 능히 속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중심을 꿰뚫어 보시고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시 139편 2절에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내 생각을 통촉하신다.”고 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사도의 눈을 속이고, 성령을 속이면서까지 성도들의 존경을 받고, 교회의 칭찬을 받으려 했습니다. 그러한 행위가 잠깐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러한 위선적인 것은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속인 것은 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가증이 여기십니다.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하나님의 성령을 속이다가 저주를 받고 급사했습니다. 그러므로 꿈에라도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의식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사람의 칭찬과 인기만을 탐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구제 헌금 동기는, 그들이 바나바와 같은 칭찬과 인기를 탐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왜 그토록 예수님께 많은 책망을 받았습니까? 중심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실한 마음은 전혀 없이,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과 인기만을 탐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어떻게 하여야 사람을 구제하고, 교회에 덕을 세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까? 하는 생각보다,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명예를 얻고자 했던 것이 그들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산상보훈에서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마 6:1) 사람들의 영광만을 탐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행위가 어떠했습니까? 구제할 때에는 많은 사람이 모이는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며 하였고, 기도할 때 역시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에서 하기를 좋아했으며, 금식할 때는 일부러 슬픈 기색을 하며, 얼굴에 재를 발라 상한 모습으로 경건하게 보이려고 했습니다(마 6:5).

셋째, 외식이 얼마나 큰 죄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행위를 성령을 속인 행위라고 엄히 꾸짖었습니다. 참된 헌신의 자세가 없이 겉으로만 드리는 척하는 외식 적인 행위야말로, 모든 것을 살피시는 성령을 속이려는 가증한 죄요, 진리와 의의 빛이 되는 성령을 거스른 패역한 죄라는 것입니다. 실로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크나큰 죄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 1장 13절에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러한 자신들의 외식적인 신앙이 그렇듯 심각하고 크나큰 죄인 것을 알지 못했기에, 두려움 없이 그 외식의 죄를 범했고, 결국은 그 죄의 결과로 죽임을 당하는 불행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나니아 부부의 이 비참한 죽음을 보면서, 외식적 신앙이 얼마나 큰 죄인가? 를 명심해야 합니다.

아나니아 부부가 이런 큰 벌을 받지 않았다면, 교회 안에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까요? 그 후에도 많은 사람이 교회 안에서 거짓말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이 교회 안에 스며들었을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저지른 행동이 벌을 받지 않은 채 무사히 넘겨졌다면, 결과적으로 온 교회가 타락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받은 심판은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모델케이스요, 일벌백계를 위한 시범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삼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힘써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넷째, 부부가 함께 죄를 공모한 죄 때문입니다.
만일 아나니아와 삽비라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정직할 수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가령, 남편과 아내 중 누구 한 사람이 “우리의 노후를 위해 금액의 일부를 남기자!”고 말할 때 “그러면 안 되지!...”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런데 두 사람 똑같이 “예 이뿐입니다.”(8절)며 거짓으로 답했습니다.

부부는 서로를 닮는다고 하지만 나쁜 것을 닮으면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진실한 신앙에 대해서는 서로가 건전한 야당이 되어야 합니다. 올바르지 못한 신앙에 대해서는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이 있더라도 지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부부가 똑같이 무너지고 넘어지면 이들 부부처럼 가정이 망하는 겁니다. 기억하십시오. 아름다운 신앙의 부부는 밀고 당겨주는 신앙의 협력자이자, 충고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르지 못할 때는 바른길로 가도록 당겨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올바른 길을 갈 때는 끊임없이 서로 밀어주어야 합니다. 이런 은혜로운 믿음의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재정의 역기능 치유 마지막 주제로 잡은 것은 형통할 때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재정적으로 축복을 받아서 물질이 차고 넘칠 때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박00라는 제 1년 후배 부부가 사업을 잘해서 자신이 교회에서 십일조를 가장 많이 드린다며 자랑을 하였습니다. 성경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고 가르치고 있건만 이들 부부는 겁나게 자신을 추켜세웠습니다. 그 결과는 5년을 못 넘기고
사업에 실패하고 야밤도주하여 20년 지난 지금도 어디서 사는지 그 소식을 알수가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렇게 선교사업을 주보에다 자랑하며 입으로 떠벌리고 다니는지 교회와 목사 자신의 존재가치를 외형적인 허세에서 찾으려 하는 것 같아 무척이나 안타깝습니다. 교회의 자랑은 교회의 크기나 성도의 수나 보이는 어떤 모습이 아니라 내면의 하나님, 성령의 함께하심, 고난의 십자가, 섬김의 사랑 이런 모습이 삶에 녹아나는 것에서 축복의 통로가 되어 나타날 때 행복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의 최고의 관심은 주님의 십자가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행복과 은혜와 기쁨을 누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정적인 축복도 끊임없이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이런 귀한 축복이 아나니와와 삽비라의 잘못된 행동처럼 하여 끊어지는 일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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