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주일설교

동역을 통한 변화(2) 바울과 실라의 동역

늘찬양 2006. 11. 29. 16:34
 

동역을 통한 변화(2) 바울과 실라의 동역


                        행16:19-34,2006.10.15.늘찬양교회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가끔씩 막다른 골목을 만나게 됩니다. 혹은 육신의 질병으로, 혹은 물질적인 어려움으로 혹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아픔으로 더 이상 어찌 해 볼 수 없는 그런 막다른 골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옷을 찢기고 벗김을 당하는 수난을 당하고 심하게 매를 맞은 후 발에 착고 가 채워진 채 깊은 감옥에 갇히는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것에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송사와 수치와 매, 그리고 발에 착고 까지 채워지는 고난과 아픔을 당하고 깊은 감옥 갇힌 이 두 사람의 모습은 심히 안타깝고 불쌍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놀랍게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환경을 탓하며 절망과 좌절 속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서로를 격려하며 의지함 속에 하나님을 소리 높여 찬양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 결과 감옥이 금새 찬양의 도가니가 되었고 그 찬양의 열기로 인하여 옥터에 지진이 나고 발의 착고가 풀어지며 옥문이 열리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옥을 간수하던 간수장이 죄인들이 탈옥한 줄 알고 자결하려다가 바울과 실라를 비롯한 모든 죄인들이 감옥에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극한 감동을 받고 저희들을 데리고 나가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행16:30)하며 당신들이 믿는 예수님을 나도 믿고 싶다고 고백합니다. 이에 바울과 실라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는 말씀을 증거하자 간수장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말에 순종하여 그 밤에 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침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킵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과 실라가 함께 이 놀라운 감옥전도의 동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적을 이루는 모습을 바라보며 동역을 통한 변화 두 번째 은혜의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Ⅰ. 바울과 실라의 만남


      지난 시간 우리는 바나바의 도움으로 바울이 안디옥 교회의 동역자가 되어 함께 복음을 증거할 때 사도행전 9장 31절에 기록된 대로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함께 1차 전도 여행을 하면서 버가 교회, 비시디아 안디옥 교회, 이고니온 교회, 루스드라 교회, 더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난 후 그 교회들이 얼마나 믿음 안에서 아름답게 성장하고 있는가 궁금하여 찾아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사도행전 15장 36절입니다.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이것이 바로 선교사의 마음이요, 순장의 마음이요, 일대일 지도자의 마음인 것입니다. 선교지에 가서 현지 사람들을 만나고 집을 짓고 신학교를 만들고 병원을 만드는 것이 선교사가 아니라 바로 이 마음을 갖고 있는 자가 선교사입니다. 설교하는 사람이 목사가 아니라 성도들을 향하여 이 마음을 가진 자가 목사인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한 형제들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잘 살고 있을까? 혹시 시험에 들지는 않았을까? 시련과 고난을 겪으면서 마음에 상처를 받고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닐까? 이런 염려로 인한 불타는 긴장감이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이것은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애틋한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나바에게 제 2찬 전도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도행전 15장 37-40절입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바울과 바나바 속에 의견 충돌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요한 마가라고 하는 한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로 1차 전도여행 때 함께 동행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전도 여행 중 너무 무섭고 두렵고 힘이 든 나머지 밤빌리아에서 도중하차하고 말았습니다. 마가는 부유한 집에서 별 어려움 없이 자라다 보니 전도여행에 대한 의지는 좋았으나 힘들고 불편하고 어려운 일에 훈련이 잘 안되어 있어서 힘에 버거운 나머지 도중하차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마가의 이 같은 행동이 무척이나 맘에 걸렸고 분노케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나바가 2차 전도여행 때에도 함께 데려가자고 권면하였지만 완강하게 거절하는 바램에 바나바는 생질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 쪽으로 전도하러 나갔으며,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오늘날 유럽에 해당하는 마게도냐 쪽으로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이러면서 바울과 실라의 동역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바울에 대해서는 지난주에도 들은 바가 있어서 잘 아는데 실라는 누구이며 어떤 인물인지 잘 모르실 것 같아서 잠깐 실라에 대하여 언급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실라는 '생각'이라는 뜻으로 로마식 이름은 '실루아노'(살후 1:1;벧전 5:12)입니다. 그는 로마의 시민권을 소유(행 16:37)한 자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 중 한 사람(행 15:22)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할례문제로 다툼과 분쟁이 생겼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는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의 규례를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갈등이 발생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사람들을 보내어 이 문제해결을 부탁하였습니다. 이 때에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가 예루살렘에 파견되었습니다.(행15:22)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결정된 사항 「첫째, 예수 보혈의 피로써 완전한 구원을 얻을 수 있으니 구원의 필수조건이 아닌 율법의 멍에를 이방인들에게 지우지 말 것과 둘째,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그 이름에 합당한 신앙의 삶을 살도록 하라」는 결정사항을 갖고 다시 안디옥 교회로 돌아오는데 이때 사도행전 15장 32절에 있듯이 유다와  실라가 돌아와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무척이나 기뻐하며 찬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렇듯 실라는 성도들을 믿음으로 잘 권면하여 교회와 가정과 개인을 굳게 하는 사역을 잘 감당한 것으로 책임감과 신뢰감이 있고 지도자적 자질이 뛰어난 자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은사를 바울이 높게 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실라와 함께 전도여행을 한다면 나의 사역에 더 멋지고 많은 영적 열매들이 풍성하게 맺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바울은 실라를 제 2차 전도여행의 파트너로 동역자로 세우게 된 것입니다.



                Ⅱ.  바울과 실라의 사역


      바울과 실라는 제2차 전도여행의 목적지를 1차 전도여행 때 세워진 교회를 들러보고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함이었는데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은 물론 바울의 꿈에 “마게도냐 한 사람이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16:9)하므로 바울과 실라는 유럽의 관문인 마게도냐로 방향을 돌려 좀더 위험하고 어려운 전도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실라의 또 다른 위대함을 봅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요한 마가이었다면 왜 목적지를 바꾸는냐? 당초 계획과 틀리지 않느냐? 유럽은 너무 위험하다. 그곳은 로마 사람들이 주로 거하는 곳으로 특히 유대인들을 가장 싫어하고 미워한다 그러므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여행이므로 나는 안가겠다며 돌아설 수도 있었건만 실라는 묵묵히 순종하며 따름으로 동료 사역자인 바울을 적극적으로 돕습니다. 실로 동역자들간의 이러한 겸손과 협동이야말로 복음 전파를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벧전 5:6).


그리하여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빌립보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마케돈(Macedon)의 빌립 왕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불리워진 도시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12절). 그곳은 "마게도냐 지경의 수도였습니다" (역주: 한글 개역과 틀림). 또는 어떤 사본이 전하는 것처럼 그들이 드로아를 떠나 도착한 "첫 성"이었습니다. 그곳은 로마의 식민지로서 로마인 수비대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도시의 주민들은 로마인들이었습니다. 주민들이 다 로마인이 아니었다면 적어도 행정 장관과 관리들은 로마인이었습니다. 빌립보는 각양 각색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만일 유럽의 첫 관문인 이곳에서 복음이 받아들여진다면 그 나라의 모든 곳으로 복음이 좀 더 쉽게 퍼질 수 있는 큰 이점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바울과 실라가 안식일이 되어 이곳에 기도처가 있는가? 하고 사람들에게 물을 때에 그곳 두아리라 성에서 자주(紫紬) 장사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는 여인을 만나서 침례를 주게 되고 또 그 여인으로부터 집과 말씀증거를 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받게 되어집니다. 처음 얼마간 이곳에 머무는 동안 이들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알려지지 아니했지만 서서히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큰 문제에 두 사람이 봉착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이 두 사람을 알아보고 좇아와서는


 때문에 그들은 알려지게 되었다. 그녀는 바울 일행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외쳤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17절)하며 그 뒤를 졸졸 따라 다녔습니다. 이 여종은 점치는 귀신에게 붙들린 무녀(巫女)로서 텔포스 신전에서 다가오는 내일의 일을 알고자 하는 그들의 헛된 욕망을 만족시켜 주고 있었으며 그녀의 점궤는 자주 틀리기도 하였지만 많은 신통력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올 때에 그냥 오지 않고 복채를 가지고 와서 점 값으로 내 놓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런 복채를 가로채는 주인이 있었습니다. 그 주인은 로마 관료들과 결탁되어 있었으며 그들에게 많은 뇌물도 주며 안전과 자리를 보장받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귀신 들린 여종은 점을 통해 "그녀의 주인들을 크게 이롭게 하고 있었습니다."(16절)


그런데 이 안타까운 모습을 보다 못한 바울이 18절에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18절) 명하여 점치는 귀신을 쫓아내어 주므로 그 여종을 자유케 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못된 주인들이 자신의 소득원이 사라진 것을 알고는 20절에 있듯이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搖亂)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風俗)을 전한다”하며 관원들에게 고소하였습니다. 이 당시 로마인들은 인종적 교만과 애국심에 불타오르고 있었던 터라 여인이 말하는 유대인이라는 말 그 자체로 분노하였으며 또 관원들은 이 여주인으로부터 각종 세금을 받고 있었던 터라 한 무리가 되어 바울과 그의 일행을 붙잡아 옷을 찢어 벗기고 '릭토르'(lictor)라고 하는 태형 집행자들에게 맨 몸을 치게 하였습니다. 유대인 태형법은 태형을 39대로 제한했지만 (고후 11:23,25) 로마의 태형법은 판사 마음대로 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바울과 실라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엄청나게 많은 매를 맞았을 것입니다.



                       Ⅲ. 바울과 실라의 찬양


      바울과 실라는 태형을 많이 맞은 후에 22절에서 24절에 있듯이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습니다." 여기에 보면 ‘깊은 옥(獄)’이라고 되어 있는데 당시 로마 총독 관할하의 감옥은 바깥에 현관(vestibule)이 있고 ‘바깥 감옥’(outer prison)과 '안 감옥'(inner prison)으로 되어 있었는데, '안 감옥'은 지하 땅굴로서 문이 열릴 때 외에는 빛과 공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그곳에 발이 "착고"에 든든히 채워진 채 내 던져 졌습니다. 사실 '안 감옥'은 그 자체로도 죄수들이 탈주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그냥 투옥시키면 됨에도 불구하고 나무 고문기구까지 동원해서 잔인하게 학대한 것은 그 만큼 상인들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바울과 실라가 깊은 감옥에 갇혀 있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낯선 땅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다 죄인이라고 뒤집어씌우고 또 그 이야기를 듣던 관리들은 물어보지도 않고 옷을 찢으며 정신 차리지 못할 정도로 때리고 게다가 초죽음이 된 사람을 그리고도 부족해서 그 발에 착고까지 채워놓았으니 말입니다. 고문 전문가들은 사람을 고문할 때 먼저 인격에 심한 모멸감을 주면서 스스로 자기를 지키는 것을 포기시키는 심리적인 방법을 먼저 사용한다고 합니다. 더구나 이 뜻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주어진 고통과 아픔보다도 바울 일행은 모멸감과 억울함 그리고 분함이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들고 나아가는 진행 중인 길에서 복음전파의 길은 여기에서 끝이 나는가 하는 두려움이 그들 속에 가득했을 것입니다. 이런 억울한 옥살이, 언제 나가게 될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를 막막한 순간에, 바울과 실라는 무엇을 했습니까? 억울하다고 소리쳤습니까? 그 불쌍한 여인을 공연히 도와주었다고 후회했습니까? 자기를 감옥에 가둔 저 못된 사람들을 원망했습니까? 주님 위해 복음을 전하는데, 하나님은 왜 이리 어려움을 주시는가 하고 불평했습니까? 아닙니다. 그 고난의 밤에 그들은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본문 2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할렐루야!


본문이 밝히고 있는 ‘밤중쯤’ 된 시간은 깊은 시간을 의미합니다. 바울이나 실라에게도 매우 피곤한  시간으로 웬만하면 만사 제치고 그냥 드러누워 잠을 잤을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매맞은 상처가 너무나 컸습니다. 그래서 매맞은 부위가 너무나 아프고 고통스러워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과 실라 두 사람은 서로를 붙잡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 곁에 믿음의 동역자와 함께 있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너무나 힘이 되고 의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이렇게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격려하다 보니 어느새 그 입에서 감사찬양이 흘러나왔습니다. 우리도 어려울 때 일수록 함께 있어주며 격려하며 위로해주는 목회자와 성도로서의 아름다운 동역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Ⅳ.  기적이 일어난 감옥


     깊은 옥중에는 바울과 실라 뿐 아니라 다른 중죄를 지은 죄수들도 있었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미는 이들에게도 들렸습니다. 이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2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할렐루야!

 

그들의 이런 기도와 찬미의 향이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올라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므로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의 기도와 찬미는 깊은 옥중이라도 능히 그 옥을 부술 수 있는 능력을 나타냈습니다. 옥은 그들의 이런 기도와 찬미를 감당할 수 없어 큰 지진을 일으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지진은 옥문을 부수뜨리고 그들의 발목에 단단히 채인 쇠사슬이 끊겨져 죄수들의 몸이 자유한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과 실라가 함께 위로하고 격려하며 기도함 속에 감격과 기쁨의 찬양을 올릴 수 있었던 영적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에 대하여 함께 살펴봅니다.


첫째, 저들은 고난가운데서도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 그리고 인도하심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신뢰하였던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잘 아는 바와 같이 세상 사람들이 흔히 기뻐하는 것을 가지고 기뻐할 정도의 수준이라면 더 이상 신자가 아닐 것입니다. 자녀가 좋은 학교 들어간 것 때문에 좋아하고 감사하 고 기뻐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도 다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와 같은 이유로 감사헌금을 주님께 드렸다면 별 것 아닙니다. 부처한테도 감사헌금을 드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렵사리 좋은 아파트를 분양 받았다면 기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온 천하 사람도 다 할 수 있는 것이므로 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세상 사람이 모르는 찬송이 있고 비밀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은 왜 내가 고난 중에도 환란 중에도 시련 중에도 찬송하는지 절대 모릅니다. 나만이 아는 비밀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아는 비밀입니다. 우리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기쁨의 샘이 있습니다. 그들은 일이 잘 돌아가야 그 샘에서 기쁨이 솟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일이 잘 풀리든 풀리지 않든 상관없이 항상 끊임없이 솟는 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찬송하고 기뻐하는 수준은 세상 사람과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수준이 높아도 한참 높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떤 경우에나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내 상황에 따라 달라지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감정, 처지, 모든 것을 묶어 제사로 주님 앞에 찬양을 드릴 수 있는 늘찬양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두 번째로 찬양은 자신뿐 아니라 듣는 사람들에게도 구체적인 속박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찬송하면 마음이 밝아집니다. 엔톨핀이 생성됩니다. 요즈음 유머치료가 유행인데 웃음보다 더 큰 능력이 찬양에서 나타납니다. 여러분 속에 마음껏 웃어 본 일이 얼마나 있습니까? 그런데, 찬양을 드리노라면 마음껏 웃을 수 있게 됩니다. 삶에 희망과 용기가 솟아납니다. 


어떤 남자가 자살하려고 밧줄을 들고 산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산밑에 있는 오두막집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심결에 발걸음을 그리로 옮겼습니다. 그랬더니, 거기는 가난한 식구들이 저녁예배 중이었습니다. 은은한 찬송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는 문밖에서 예배가 다 끝날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갈 곳이 생긴 것입니다. 집이었습니다. 찬양이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린 것입니다. 어디 그 한 사람뿐입니까? 그 사람의 가정을 살렸습니다. 현실성이 없어 보입니까? 실제로 여러분이 절망 가운데 그렇게 걸어가다가, 찬송 소리를 듣게 되면 발걸음을 멈추게 될 것입니다. 자동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찬송의 능력으로 자살충동이나 그 밖의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다 깨끗이 사라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찬양은 우리뿐 아니라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소망이 되고 있음을 각인하시기를 바랍니다. 


빌립보 감옥에서도 바울과 실라가 찬양할 때에 옥문이 열리고 묶인 쇠사슬이 풀어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귀한 역사가 일어났는데 그것은 자살하려던 간수장과 그의 가족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의 놀라운 축복과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늘찬양교회가 이렇게 찬양을 앞세우고 나갈 때 저와 여러분의 신앙만이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교회 부흥은 물론 여러분의 삶과 사업체 그리고 이웃과 민족이 열려지는 풍성한 은혜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운 때일수록 찬양을 통하여 삶을 강력하게 변화시켜가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과 실라의 찬양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30-31절 말씀을 봅시다.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즉 바울과 실라가 찬양 할 때에 이 찬양은 이미 간수의 가슴에 파고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찬양을 통한 자유함이 있을 때에 바울은 자기의 유익만을 취하지 아니했습니다. 아마 바울이 그대로 도망쳤더라면 이 간수는 죽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 간수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찬송에는 세 가지 힘이 있다고 합니다. 위로 올라가는 힘 즉 기도응답이요, 둘째는 가슴을 파고드는 힘 즉 회개와 용서요, 마지막으로 밖으로 뻗어 가는 힘 즉 사명의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찬양은 병든 가슴을 찾아갑니다. 낙심한 마음, 인생의 사슬에 묶여서 헤매며 죽어 가는 사람들의 영혼을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를 향하여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까 라고 물어볼 수밖에 없던 신세에서 오히려 죄수를 지키던 간수가 이 바울과 실라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찬양이 그의 마음을 파고 들어갔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선포는 기독교 역사가 혼란 가운데 있을 때, 그리고 구원의 문제로 논쟁을 벌일 때마다 이 한 구절의 말씀이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이해하는데 이정표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렇듯 찬양은 나도 살리지만 다른 사람도 살리면서 그 공동체도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를 남깁니다. 여러분! 지금 처해있는 상황이 어떠하든지 너무 마음쓰지 마십시오. 밤은 반드시 밝아 아침이 옵니다. 오늘의 모든 고통과 역경을 하나님께서 다 제거해 주시고 찬란한 아침 햇살을 안고 기뻐할 날을 반드시 주십니다. 그와 같은 소망을 바라보고 부르는 이 영혼의 노래가 우리 안에 늘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합니다. 찬송 생활의 기적, 이 놀라운 역사가 여러분의 삶 속에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바울과 실라가 첫 만남에서부터 시작하여 빌립보 감옥에 갇히기까지 그리고 그곳에서 찬양으로 옥문을 열고 간수장과 그 가족이 예수 믿게 하기까지 두 사람의 위로와 격려 돌봄의 동역은 엄청난 힘과 도전과 능력으로 두 사람에게 부어졌을 것입니다.

우리 늘찬양교회의 단단한 이 마음의 장벽도 찬송의 동역으로 활짝 열려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딱딱하게 굳어서 전혀 움직일 줄 모르는 강퍅한 마음들에 지진이 일어나고, 그 마음 문이 활짝 열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을 얽어매고 있던 온갖 죄악의 사슬과 욕심과 탐심, 그리고 악한 생각과 질병 원수 마귀들이 다 물러가고 새롭게 고침을 받고 자유케 되는 구원의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날것을 믿습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