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주일설교

동역을 통한 변화(4) 바울과 디모데의 동역

늘찬양 2006. 11. 29. 16:32
 

동역을 통한 변화(4) 바울과 디모데의 동역   

                         빌2:19~24.2006.10.29.늘찬양교회


     오늘은 동역을 통한 변화 네 번째 시간으로 “바울과 디모데의 동역”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교회에는 많은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담임목사님을 비롯하여, 안수집사,

서리집사, 권사, 교회학교 교사, 찬양대원, 주방봉사, 예배안내위원, 헌금위원, 차량봉사자

구역목자 등 이런 일꾼들에 의해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져 가는 법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를 향하여 󰡒너희는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전4:1-2)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교회에 많은 일꾼들이 세워져서 하나님의 일을 더욱더 잘하므로 하나님의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빌립보 교회에도 일꾼이 필요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혀 가지 못하게 되자 자신을 대신하여 성실하게 일해 줄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두 사람의 일꾼을 빌립보 교회에 추천하여 보내게 됩니다. 이 두 사람 중에 오늘은 바울과 디모데의 동역에 대해서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말씀의 핵심은 어떻게 하면 교회에 좋은 일꾼들이 세워지는지 또 목회자와 어떤 마음을 가져야 좋은 동역자의 관계를 유지하며 교회를 부흥시켜갈 수 있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Ⅰ. 뜻을 같이한 일꾼


     디모데는 바울이 제1차 전도 여행시 빌립보 지방에서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을 만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바울의 믿음의 아들이 되었으며(행 16:3),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시 에베소의 소동으로 바울이 휘말려 있을 때 바울을 대신하여 빌립보 지역을 순회(巡廻)하며 심방하였고(행 19:22)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시 핍박을 피해온 바울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복음 전도에 동참한 사람입니다(행20:4).


오늘 본문 19-20절 말씀입니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 보거나... 함께 일하다 보면 맨 먼저 걸리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뜻'입니다. '뜻'이라 표현해도 좋고 마음이라 해도 좋고. 의미라고 해도 좋고, '가치관'이라 표현해도 좋은데 본문에 나타난 대로하면 '뜻'이 맞아야 합니다. 

디모데는 누구보다도 바울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디모데가 빌립보에 가서 무슨 결정을 내리든 그것은 바로 바울의 결정과 같은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또한 목사와 성도들이 평소에는 협력을 잘 할 것 같은데 어떤 구체적인 일을 하다가 보면 마음이 맞지 않아 어려움이나 문제를 겪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가 마음이 맞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이 바울과 디모데 마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역자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다면 뜻을 세워도 같은 뜻을 세우고 또 서로가 협력하게 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왜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가? 내가 왜 이 직분을 받아야 하는지,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 하실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불협화음이 일어나는 이유가 하나님의 뜻, 꿈, 비전, 목표, 이런 것들이 하나가 되지 않았거나, 그 뜻을 모르고 자신의 생각과 욕심을 좇아 행하다 보면 이런 어려움 들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똑같은 사건, 일을 보더라도 마리아는 귀한 옥합을 깨뜨려 주님 발앞에 부어드림으로 주님의 죽으심을 준비하였고, 주님도 이 일을 기념비적인 신앙으로 칭찬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값비싼 300 데나리온 하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지, 하면서 마리아를 비난했습니다. 실상은 가난한 자를 생각함이 아니라 저는 도적이라 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다를 수 가 있습니까?

여러분! 일단 맡았으면 자기 뜻을 죽이고, 일 시킨 사람, 부르신 분의 뜻을 헤아려가면서 일해야 하는데 사람인지라!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20절 보면 디모데를 향하여 바울은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디모데는 오랫동안 사도 바울을 도와 일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도 일이지만 항상 사도 바울이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눈길만 봐도 무엇을 원하는지 그 뜻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뜻을 따라 함께 하시는 귀한 일군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뜻을 알아 일하는 교회의 좋은 일군 디모데 같이 되시기 바랍니다.

               


                   Ⅱ. 사정을 진실히 생각하는 일꾼


     다음으로 교회가 필요로 하는 좋은 일군은 무엇보다도 교인들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19절에 “교인들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하며 디모데를 추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정을 진실히 생각한다󰡓는 말은 무슨 일이나 사건을 주관적으로 보지 않고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아주 냉철하고 합리적이며 정직한 그러한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공동체를 들여다보면 여러 사람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때로 보면 삐지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삐지는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체로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인 사람들로 어떤 사건을 객관적으로 잘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로 잘 삐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물질적인 이해관계로도 서로간에 앙금이 생기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본문의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한다󰡓의 깊은 뜻은 아버지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항상 자식들을 걱정합니다. 무엇이 부족한지 어려움은 없는지 내가 도와주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자식이 알지 못하는 부분까지 아버지는 자식을 걱정합니다.


산정현교회 고당 조만식장로님은 삼일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의 아버지 조경학은 그가 갇혀 있는 평양 감옥 주위를 날마다 한바퀴씩 돌면서 아들의 건강을 빌었다고 합니다. 자식의 어려움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나의 어려움으로 삼고, 자식이 아프면 대신 아파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부모는 자식 잘되기만을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좋기만 합니다. 살아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좋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도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전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살아 돌아온 것이 너무 기쁘고 반가워서 “이는 죽었다가 다시 산아들이요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눅15:24)이라고 그렇게 기뻐하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다 알아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원망하며 불평하며 곡해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너의 사정을 너희 어려움을 진실히 생각하고 돌볼 수 있는 자로 디모데를 천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좋은 일군은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와 성도를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식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하는 일군이 좋은 일군입니다.


본문 21-22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여기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고 다 자기의 일을 구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맨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 거짓이 없는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일을 하지만 서서히 시간이 가면서 그 순수한 마음이 식어지고 변질되어지고 타락하여 자기 중심, 자신의 욕심으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은 일편단심 자식이 잘되기만을 바라는 것처럼 디모데는 많은 연단을 거쳐오면서 그때마다 자식이 아비에게 순종하듯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디모데를 향하여 “빌립보 교인들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하며 강력하게 추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목사는 성도들을 바라보며 “이 사람은 내 자식처럼 귀하고 소중하며 믿을만하다”라고 말할 수 있으며, 또 성도들은 목사님을 바라보며 “오직 나의 형편을 바라보며 나와 가정이 잘되기만을 힘쓰고 애쓰는 아버지와 같은 우리 목사님”하며 나타나는 교회는 부흥하지 말래도 부흥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늘찬양교회의 성도와 목사님의 관계가 이런 부자지간의 아름다움 관계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Ⅲ.  연단을 통과한 일꾼


     본문 22절입니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디모데는 나이가 많지 않았습니다. 성격은 아주 여리고 소심했습니다. 그의 목회 현장을 보면 그렇게 편하질 않았습니다. 교회 안에 언제나 드센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하시오. 저렇게 하시오. 아니면 딴 데로 가보시오" 외면하기 일쑤인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모든 교회가 별일 없는 것 같아도 속을 들여다보면 희한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유는 인간들이 모인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디모데의 마음은 많이 상하였고, 심지어 소심한 사람이 신경 쓰다보니 위장병도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병을 위해 포도주를 약간 사용할 것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런 고난과 연단 중에서도 디모데는 많이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고난 중에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쓰러지지 아니하고 누가 크게 위로하는 자 없어도 항상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피고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구하며 묵묵히 순종하며 사명의 길을 걸어온 디모데를 사도바울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래도 나와 함께 복음을 순종하며 영원히 함께 할 일꾼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아닌 일반 성도에게 목사님은 무섭게 회초리를 되지 않습니다. 뭔가 회초리를 되고 충고를 하는 것은 그만큼 지도자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목사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희근이에게 대안학교에 가도록 추천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기숙사에 살아야 한다는 것 때문에 무척이나 가기를 주저했습니다. 아버지인들 자식을 곁에 두고 보고 싶지 않은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아이의 미래의 성숙을 위해서는 넓은 곳으로 내어 보내는 것입니다.


참으로 목사님이 몇 마디 싫은 소리를 하면 거기다가 살을 붙이고 없는 말까지 가미해서 목사님을 힐책하고 목사님의 말을 호도합니다. 그런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걷는 길은 남들이 다 찾는 넓고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좁은 길입니다. 주님가신 고난의 길입니다. 당장은 아비의 충고와 명령이 힘들고 어려운 것 같지만 묵묵히 순종하고 뒤따르다 보면 언제 모르게 커다란 지도자로 성장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모세를 그렇게 묵묵히 순종하며 따르다가 제 2의 지도자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듯이 여러분 속에 그런 귀한 축복의 역사 세워짐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Ⅳ.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신하는 일꾼


      본문 23-24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안에서 확신하노라󰡓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확신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는 디모데는 자신의 윗사람인 사도 바울에게 완전히 신임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보면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고 즐겁게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은 열심히 하는데도 윗사람에게 전혀 신임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신임이란 하루아침에 얻고 안 얻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두고 서로 신뢰관계가 구축되었는가 불신관계가 구축되었는가 하는 이것이 관건이기 때문에 오늘 열심히 일한다고 "그는 좋은 일군이다" 이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사도 바울에게 완전히 신임 받는 일꾼으로 등장하고 있으니 그의 정직성과 성실성을 우리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대신해서 이 사람을 보낼 정도로 신임하고 보내기를 바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도 항상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에게 그리고 우리 주위 사람들에게 신뢰받은 사람으로서 자리 매김하고 살아가며!! 무엇보다 우리 주님에게 신뢰받으며 사역해 가는 좋은 일꾼들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합한 일군들 다되시기를 바랍니다(행13:22).


또 다른 확신은 자신의 앞날에 대한 것으로 디모데를 보내고 난 후 자신도 속히 가게 될 것, 석방될 것을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이제 순교를 당하기 때문에 석방에 대한 확신이기보다는 늘 언제나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주안에서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같으신 사랑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신함이 좋은 일군의 아름다운 모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감옥에 갇혔어도 그 하나님은 나의 앞날을 계획하시고 나를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충성하면 주님은 우리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헌신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감당할 만한 힘도 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비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향해 충성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시고 함께 하심의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자녀를 키우면서, 일꾼을 키우면서, 지도자를 키우면서 사람의 칭찬을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이해를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가서 제물로 받치라 할 때에 사람들의 시선과 도덕과 양심을 불문하고 순종하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책임져 주시고 나와 이삭의 가는 길을 축복해 주실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코뚜레"라는 말을 아십니까?

코뚜레란 쇠코뚜레의 준말로서 소의 코를 꿰뚫고 그 코에 끼는 고리 모양의 나무를 코뚜레라고 하는데 이 코뚜레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한 어미 암소가 두 마리의 새끼를 낳았습니다. 새로 태어난 두 송아지(성도)는 세월 가는 줄 모르고 한동안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몸집도 커지고 제법 일할 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주인은 제법 커진 이 송아지들의 코에 코뚜레를 끼우려 하였습니다. 그때 두 송아지 중 먼저 태어난 맏이 송아지가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인님, 저한테는 코뚜레를 제발 꿰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때 농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뭐? 네가 알아서 일한다고? 만일 코뚜레를 하지 않으면 나중에 망아지가 되고 말텐데?" "아닙니다!! 주인님, 코뚜레를 해야만 일 할 수 있다는 것은 옛날 생각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제가 코뚜레를 하지 않아도 일을 곱절로 하는 것을 해 보이겠습니다" 할 수 없이 주인은 "그러면 일단 그렇게 해 보자." 하면서 마지못해 승낙했습니다.

그리고는 둘째 송아지 코에만 코뚜레를 했습니다. 그러자 코뚜레를 하지 않은 맏이 송아지는 자발적으로 멍에도 메고 쟁기를 끌었습니다. 뭔가 일이 잘 되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니 코뚜레를 한 동생 송아지도.. 형을 따라 열심히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형님 송아지가 갑자기 잔꾀가 떠올랐습니다. "난 코뚜레가 없으니... 자유로운 몸이야. 스스로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어.... 암!!" 그러면서.. 슬슬 농땡이를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들켜 가끔 주인이 화를 내면... 주인에게 뒷발질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은 이상하게도 소가 두 마리가 일하지 않고 한 마리만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한 마리는 코뚜레를 한 작은 소였는데, 혼자서 멍에를 메고 쟁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던 주인의 친구가 물었습니다.

"여보, 자네, 그 코뚜레 안한 큰송아지는 오늘 왜 안나왔나?" "응, 어디 보냈어...." "어디로?" "도살장으로!" 도살장으로 보내었다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주님 주신 멍에를 메는 일군이 되시기 바랍니다. 코뚜레 안하고 편하게 부담 없이 내 맘대로 나갈 때 영성이 사라집니다. 은혜가 떠납니다. 주인에게 뒷발질하며 대항합니다. 축복이 어떻게 임합니까?


성도 여러분! 디모데와 같은 좋은 일군들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뜻을 아는 일군, 사정을 잘 아는 일군, 연단도 잘 받는 일군,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확신하는 일군 이런 일군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우리함께 124장 “오 신실하신 주”를 찬양하며 헌금드리겠습니다.


 1절 하나님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2절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후렴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