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주일설교

동역을 통한 변화(6)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동역

늘찬양 2006. 11. 29. 16:30
 

동역을 통한 변화(6)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동역

                    느 8:1-12,2006.11.12.늘찬양교회       


      오늘은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한 이후 말씀 회복을 통하여 영적부흥을 이룬 느헤미야와 학사 에스라의 놀라운 동역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Ⅰ. 3차 포로 귀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숭배와 악행으로 인하여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무너지고 남유다 마저 나라를 잃어버리고 바벨론에 70년 동안 포로로 잡혀있었습니다. 그 이후 메데 바사라는 나라가 일어나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 갈 수 있는 은혜를 허락 하였습

니다. 그리하여 총독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주전 537년에 1차 귀환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49,897명이 돌아와 성전을 건축하였는데 많은 방해로 인하여 15년 정도가 중단되었으나 다시금 허락을 받아 5년 후 즉 20년 만에 성전을 재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학사 에스라를 중심으로 주전 458년 2차 귀환 때 1,754명이 돌아왔습니다. 에스라는 안식일 제도를 확립하고 율법으로 돌아가도록 유대교를 재건한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학사 에스라를 가르쳐 제 2의 모세라고 존경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14년이 흘러가면서 예루

살렘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느헤미야가 바사의 아닥사스다 왕 밑에서 술 맡은 관원장으로 있을 때 그의 형제 중 하나인 하나니라는 자가 예루살렘에 다녀와서는 지금 예루살렘 성은 훼파 되었고 성문은 불에 탔으며 귀환했던 많은 사람들이 환난과 능욕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

는 울기 시작했고, 그 울음은 금식과 기도로 승화되어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는데 이 기간이 무려 4개월이나 되었습니다.(느 2:1)


아닥사스다 왕은 느헤미야의 초췌한 모습과 안색이 좋지 않음을 보고 마음을 열어 흔쾌히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는 통행증과 성을 보수하는데 필요한 자재를 내어주므로 주전 444년에 42,360명이 제 3차 귀환을 하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돌아온 날부터 오로지 성벽

을 재건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는 일이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오랜 시간 동안  성전재건에 총력을 쏟았지만 번번이 실패만 하였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은 좋은 집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전은 아직 건축할 때가 안되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

라면 순조롭게 성전재건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어찌 이렇게 적의 괴롭힘과 내분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가 이런 여러 조건을 바라볼 때 아직 성전을 재건할 때가 아니라며 나 몰라라 식의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

렘 성이 중수되어 가고 그 퇴락한 곳이 보수되어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하여 다 함께 꾀하

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느 4:7-8)며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으며 또 도비야는 “저들이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느 4:6)며 비아냥 거렸습니다.

 

세 번째로는 산발랏과 도비야를 비롯한 적 연합군이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자 당장 먹고사는 일에 어려움이 있게 되자 그 중에 귀인과 관리들이 백성들의 고난에는 아랑곳없이 물건을 비싼 값에 팔아 이득을 취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돈놀이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안팎으로 험난한 문제들이 느헤미야의 성전재건의 열망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Ⅱ.  성전재건 완성


     느헤미야는 안팎으로 다가오는 반대세력에 대하여 낙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

서 …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느 5:19,6:9)며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런 후

에 느헤미야는 담대하게 일어섰습니다. 먼저 일하는 사람과 일하지 않는 사람 즉  파수꾼과 일하는 사람 두 분류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성을 파수하는 사람들에게는 갑옷을 입고, 창

과 방패와 활을 가지고 성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느 4:1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성을

건축하되 한 손으로는 일을 하고 다른 손에는 병기를 가졌습니다. 그렇지 못한 경우 옆에

칼을 차고 일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아울러 나팔 부는 자들도 곁에 섰다가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나팔을 불도록 하여 모두가 힘을 합쳐서 싸우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이렇게 안팎으로 철저히 대비책을 세우면서 성전을 부지런히 재건한 결과 단 52일 만에 성전과 성벽을 완공하는 대역사를 이루었습니다. 할렐루야!   


더 놀라운 것은 느헤미야가 그렇게 소원하고 바라던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이 재건되어 지고 성문이 온전히 달아지게 되자 이제 내 사명은 내 본분은 끝났다 하고 바사 나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보이는 성전보다 보이지 않는 성전 즉 심령회복, 영적부흥

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동안은 성전 짓는데 온 힘을 쏟느라 제대로 돌보지 못

했지만 지금부터 영적인 부흥회복을 위하여 일할 때라고 여겼습니다. 마치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 말씀하셨듯이 영성회복에 관심을 남다른 가진 느헤미야는 즉시 학사 에스라를 초청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 증거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령으로도 새롭게 거듭 태어날 수 있도록 부탁을 하였습니다.



                        Ⅲ. 말씀 회복 운동


     이스라엘 백성들은 총독 느헤미야가 그렇게 헌신적으로 성전재건에 온 힘을 쏟고 노력한 결과 단 52일 만에 기적적으로 성전 재건을 마치게 되자 그 마음속에 우리도 무엇이든지 하면 된다는 자부심과 담대함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역사가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전적이 도우심이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느헤미야가 “이제는 심령회복을 해야 할 때이다. 그러니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찌어다”며 외칠 때 모두가 한 마음으로 성읍에서 예루살렘으로 말씀을 듣고자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이 모인 날은 유대인의 종교력으로 일곱째 달 티쉬리월 초하루였는데, 민간력으로는 정월 초하루였습니다. 초하루는 '로쉬하샤나'라고 하여 나팔절이었으며, 유대인들의 설날이었습니다. 우리의 달력으로는 9-10월에 걸쳐 있는 달이었습니다. 이 칠월의 초하루는 나팔절이 있고, 10일에는 '욤키프르'라고 하여 백성의 대속죄일이 있어, 금식하는 날이며, "수코드"라는 초막절이 있었습니다. 이 초막절은 장막절, 수장절이라고도 하는데, 모든 곡식을 추수하고 감사절로 지키며, 출애굽한 이후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보호하여 주신 것을 기념하여, 집 주변이나 옥상, 베란다에 초막을 짓고 한 주간 15일부터 21일까지 지냈습니다.



       1. 말씀에 귀를 기울인 이스라엘 백성들 (1-3절).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칠월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학사 에스라가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와서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만한 회중에 앞에서 이르러 새벽부터 오정까지 율법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율법을 낭독한 에스라와 듣는 백성들의 말씀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였습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는 무려 6시간으로 보는데(Rawlinson) 여러분 같으면 말씀을 듣기 위하여 여섯 시간 동안 꼼짝 않고 귀를 기울일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말씀을 듣기 위하여 새벽부터 모여와서 오정까지 흐트러짐이 없이 율법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하는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 늘찬양교회의 심각한 비극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적다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늦게 오는 것은 다반사이고 예배 도중에도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이리 왔다 저리 갔다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다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불신자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에게서 무시당하고 별 것이 아닌 것처럼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간절하게 말씀을 듣고, 사모하는 열정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높이 들려야 합니다. 말씀이 회복되어야, 교회가 부흥하고 가정과 나라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위하여 11월 27일 저녁부터 30일 밤까지 4일 동안 낮 ․ 밤 팀으로 나누어 말씀 집중훈련 부흥회를 갖는 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를 위하여 얼마나 기도하고 있으며 또 마음적으로 은혜 받기 위하여 사모하고 있습니까? 아마 여기 모인 분들 중에는 그런 광고가 있었어 .... 또는 외부 강사도 아닌 부흥회 뭐 하러 참석해 ... 그렇게 여겨서 그런지 말씀부흥회에 대한 갈망이 없어 보입니다. “목사님 아닙니다. 모두다 마음적으로 간절히 사모하고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모두다 열심히 참석할 것입니다.”고 위로하며 본문처럼 “일제히”, “모두다” 한 마음 다하여 이제 내 영혼이 말씀으로 다시금 살아나리라는 간절함을 가지고 낮 11시와 밤 7시30분에 한 분도 빠짐없이 참석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할렐루야!


현대 교회도 교회의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령이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라고 여러 번 말씀하고 있습니다(계 2:7,11:17, 3:6, 13:22). 한국교회가 너무 외부적인 것 즉 건물치장과  눈으로 확인되는 성도수에 치중하다 보니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외면적인 것에 몰두하므로 내면적인 궁핍을 느낀다는 것은 교회의 본래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새롭게 된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말씀에 귀를 기울여 교회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2. 말씀에 대한 존중함을 보인 이스라엘 백성들(4-5절).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섰습니다. 에스라 우편 여섯 명, 좌편에 일곱 명이 함께 섰습니다. 에스라가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섰습니다. 일어선 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의 외적표현입니다(Fensham). 본래 유대인들은 기도드릴 때는 일어서고, 찬송할 때는 일어서지만, 말씀을 들을 때는 앉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결단하고 말씀을 들을 때에 일어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경외하는 마음과 철저하게 헌신하겠다는 심정으로 일어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오늘 들려지는 말씀을 내 말씀으로 들려질 때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일어서서 주여 내가 “말씀집중훈련”에 참석하여 큰 은혜를 받겠습니다 결단할 때 일어서는 용기도 보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 나에게 주시는 생명의 말씀, 축복의 말씀으로 들을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학사 에스라 옆에 13명의 레위인들이 좌우에 둘러서서 있었는데 이들 레위인의 사명은 평신도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듣고 잘 이해하지 못할 때 그들이 찾아가 쉽게 해석해주고 이해시켜 주어 말씀의 능력이 그들의 심령을 뜨겁게 사로잡도록 도와 준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이 같은 사명이 한종열 사모님과 각 목장의 목자들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의 역할은 목장예배에서 쓸데없는 세상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주일 날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을 잘 이해하고 깨달아 삶에 적용시킬 수 있도록 “은혜의 말씀 나누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단에서 선포된 말씀이 재탕 삼탕을 통하여 성도들의 심령에 생명을 살리는 영적 보약이 되어 영적 부흥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놀라운 말씀의 회복의 역사 속에 늘찬양교회가 곧 부흥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3. 아멘으로 응답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6절).

     본문 6절에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① 손을 들고 ② 아멘 아멘 응답하며

③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여기서 "손을 들고"는 기도의 자세를 말합니다(스9:5, 시28:2). 일반적인 의미는 항복을 말합니다. "아멘"은 ‘진실로’, 또는 ‘확인하다’는 뜻인데 구약에서는 진술 또는 선언을 확인할 때 사용하였고(왕상1:36, 렘28:6), 그것이 예배 시에는 기도의 응답으로 사용되었습니다(시106:48).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경배함'은 여호와께 대한 극한 경외심의 외적인 표현입니다(대하7:3). 경배하는 것은 ①몸을 굽혀 ②얼굴을 땅에 대고 ③경배했습니다.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몸을 굽혀'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경배하다는 말씀과 함께 사용되었습니다(창24 :26, 24:48, 창43:28, 출4:31, 출12:27).


“아멘 아멘”으로 응답한 것은 입으로 한 것이고, 몸을 굽혀 경배한 것은 몸으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입으로 응답한 뿐만 아니라 몸으로 하나님께 늘 영광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광대하시다는 에스라의 말에 백성들은 전적으로 동감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아멘으로 응답하고 몸을 굽혀 경배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광대하신 하나님께 경배하십니까?]


교회에 출석하며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광대하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경배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께서 알곡과 가라지가 있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는 보이는 우상에게 가서 절을 하고 복을 달라고 하지는 않지만 오늘 본문에서처럼 전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교회에 양발을 딛고 서 있다가 유리한 쪽으로 기울여 지기도 합니다. 자신의 이권에 따라서 이쪽도 저쪽도 함께 취하거나 하나를 버리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은 손을 들고 아멘으로 응답하며 하나님께 몸을 굽혀 경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인은 분명한 선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일상적인 일에는 타협도 하고 양보도 해야 하지만 하나님 믿는 신앙은 희미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교회로서의 사명이 있고 교회의 본래의 모습이 있습니다. 교회의 정체성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계약 백성이요 거룩한 공동체였는데, 오늘날은 교회가 바로 새 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손을 들고 아멘으로 응답하고 몸을 굽혀 경배해야 합니다.


아멘은 여기 거꾸로 있는 컵을 올바로 놓는 것과 같습니다. 올바로 세워놓을 때 컵속에 물을 넣을 수가 있는 것처럼 여러분들이 “아멘”, “아멘”으로 응답할 때에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의 믿음과 삶 속에 크신 능력이 되어 나타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4. 여호와를 기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10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그 날이 나팔절이요, 여호와의 성일이었습니다. 사실 그 날은 즐거운 날이요,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즐기는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성일을 온전히 성수하며 살기 위해서는 주일날 만큼은 예배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신 주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며 기뻐함으로 온전히 주일 성수를 해야 합니다. 주일 날 싸우거나 울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율법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해 주었을 때, 백성들이 다 울었다고 했습니다. 아마 너무 감사하고 감격해서 울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뜨거운 회개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 때, 총독 느헤미야와 에스라와 레위 사람들이 백성들을 향하여 말했습니다.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9,11절) 그리고 느헤미야가 다시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그리고 특별히 10절 하반 절에 보면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신앙생활은 눈물과 탄식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늘 울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얼굴을 흉하게 하고 징징 울면서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은 덕택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받는 사람으로 기쁘게 살아가야 합니다. 즐겁게 신앙 생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앙생활을 무거운 짐으로 생각하며, 얼굴에 수심(愁心)이 가득하고 도무지 기쁘지 않게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신앙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은둔의 종교도 아니고 세상을 비관하거나 부정하는 염세주의 철학을 가르치는 종교도 아닙니다.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종교요,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는 종교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 중에서도 낙망하지 않고 오히려 찬송 부르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날 첫 찬송으로 350장 “이날은”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날은 이날은 주의 지으신 주의 날일세 기뻐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즐거워하세

  이날은 주의 날일세 기뻐하고 즐거워하세 이날은 이날은 주의 날일세”


스바냐 3장 17절에서도 “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하였습니다.


우리 사람의 제일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즐겁고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권세를 잡은 것 때문에 기뻐합니다. 명예를 얻을 것 때문에 기뻐합니다. 물질적으로 부요하면 기뻐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은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신앙생활은 기쁨이고 축제입니다. 그러므로 즐거움으로 교회에 나와 기쁨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기쁨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 일을 통하여 우리가 참 힘을 얻고 기쁨을 얻고 능력 있는 성도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 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과 봉사를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요청하시고, 부르시고 세우시는 일은 모두가 즐겁고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늘찬양교회가 성전건축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IMF를 겨우 넘어서고 물질 걱정이 없는 그런 재정적으로 넉넉한 교회가 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좀 부족해도 또 계속해서 적의 시험과 환란이 다가오듯 내 삶속에 많은 시련의 파도가 몰려와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나의 힘인 것을 믿고 늘찬양함으로 감사하며 말씀을 붙들고 기도함속에 살아갈때에 우리속에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이번 말씀집중훈련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하시되 말씀을 듣다가 일어서기도 하고 아멘 아멘 소리치기도 하고 기뻐뛰며 찬양하기도 하는 놀라운 영적부흥의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