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역을 통한 변화(7)
♣ 바울과 아굴라 부부의 동역 ♣
행 18:1-4,롬16:3-5. 2006.11.26.늘찬양교회
(http://www.everpraise.or.kr)
성경에 나타난 많은 부부들 중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귀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부부는 그리 만치가 않습니다. 더욱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가장 성서적이며 이상적이며 모범적인 평신도 부부라고 칭찬을 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신약성경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이름이 여섯 번이나 반복해서 소개되는 데 언제나 부부의 이름이 함께 소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롬 16:3. 고전 16:19. 딤후 4:19. 행 18:2, 18, 26) 그 중에 두 번은 (행 18:2, 고전 16:19) 남편인 아굴라라는 이름이 먼저 사용되었고 그리고 4번은 (행 18:18, 26, 롬 16:3, 딤후 4:19) 아내의 이름인 브리스길라(브리스가)가 먼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어떤 중요한 의미를 상징하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남편 아굴라보다 부인 브리스길라가 하나님께 더욱 헌신적으로 충성하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서 우리는 아내 브리스길라가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남편 아굴라가 넓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아내 브리스길라는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도와 헌신적으로 장막 만드는 일과 바울을 도와 주의 일을 아주 모범적으로 한 신앙의 부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종종 이런 가정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내가 신학교를 나와서 교회에서 심방 여전도사로 일하는데 남편은 평신도로서 교회 봉사를 하고 있는 가정이 있는가하면, 또 아내는 권사에 각종 여전도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반면 남편은 서리 집사도 아닌 평신도로서 있는 가정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아내가 성가대 지휘자로 또는 성가대원으로 활동하고 있고 남편은 학생회 부장으로 열심히 봉사하고 있는 가정도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 일을 함에 있어서 남편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조아래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행하는 여성도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바울을 도와 고린도교회와 에베소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듯이 목사님을 도와 늘찬양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는 헌신적인 부부 동역자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만남
남편 아굴라는 본도 유대인 출신으로 본도는 흑해 남해안에 있는 소아시아 북부지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 브리스길라는 브리스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브리스가 역시 같은 유대인이었지만 로마의 전형적인 귀족 출신으로 남편보다는 더 나은 사회적 신분과 물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가(史家)에 의하면 아굴라는 유대인 노예로 로마에 잡혀왔으나, 후에 자유인이 되어 로마 시민권을 가진 브리스가 가문의 유대인 여자 브리스길라와 결혼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소는 아굴라는 천막을 만드는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물질이 없었기에 재정적으로 넉넉한 브리스길라와 합작하여 공동으로 천막제조 공장을 차리는데 뜻을 맞추어 함께 일하다가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어떻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서로 만나서 로마에다 큰 천막 제조 공장을 차렸으며, 고린도와 에베소에는 분점까지 차려놓을 정도로 사업이 번창해 갔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로마 안에 있는 유대인 사회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마치 LA에서 흑인 폭동이 일어났듯이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글라우디오 황제는 로마 안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은 로마를 떠나라는 추방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때 브리스길라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떠나지 않을 수 있었으나, 남편이 전에 유대인 노예였다는 사실이 들통 나면 가정에 큰 화를 당할 것으로 여겨 남편 아굴라를 따라 분점이 있는 고린도 땅으로 이사했습니다. 고린도에 옮겨온 후에도 이들의 천막 사업은 날로 번창해 갔습니다.
Ⅱ. 바울과 아굴라 부부의 만남
이때 주의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에서 우리를 도와 달라고 손짓하는 환상을 보고(행16:9-10) 아시아에서 발길을 돌려 아가야로 향했지만 그의 전도사역은 기대처럼 부흥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당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의 염려로 거의 병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한 정부의 박해가 점점 강화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다 아가야, 아덴에서조차 복음이 실패하자 의기소침한 상태였습니다. 더욱이 빌립보 감옥에서 심한 매를 맞은 관계로 육체적 건강도 거의 탈진된 상태였습니다. 바울은 아마 이때, 자신의 육체적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세 번씩 기도(고후 12:7-10)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주님의 반응은??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후 12:9)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규례를 따라 어려서부터 한 가지 기술을 습득해야 했는데 다름 아닌 장막(천막)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에 도착한 이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장막 만드는 일거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은 어떤 사람의 소개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운영하고 있는 천막제조 공장을 소개받고 이 두 부부를 찾아옴으로서 바울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역사적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서로 만나 쉽게 의견 투합이 이루어졌고 그래서 함께 일하였으며, 또 함께 같은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Ⅲ. 복음에 영적 눈을 뜨게 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와 사도 바울은 업(業)이 같음으로 시작된 공동생활 속에서 서로 마주 앉아 매일같이 천막을 만들면서 많은 대화들을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점차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에 대해 그리고 성령에 대해서 자주 증거 했을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그녀의 남편 아굴라는 바울의 말씀에 열심히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부족해 일거리가 없을 때는 바울이 회당에서 말씀을 증거 할 때 함께 동행 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물론 남편 아굴라보다 아내 브리스길라가 더 열심을 내어 참여했을 것이고 이로 인하여 아내 브리스길라가 하나님의 일에 더욱 충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의 만남은 이들 부부의 삶의 방향, 목적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무엇보다 고린도에서의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5절을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보십시오 고린도에서의 바울은 말씀에 붙잡혀 있었다고 말합니다. 또 고전2:1-5에 보면 당시 바울이 아덴에서 고린도로 갈 때에 어떤 심정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이런 말을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 하였나니"(1절) 아마 바울은 아가야와 아덴에서의 실패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어서 그는 말하기를 "내가 너희 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2절) 바울은 고린도로 오면서 오직 예수만을 말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또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3-5절) 보십시오 이 성경에서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를 전도할 때 어떤 마음으로 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 오직 하나님의 능력 이런 것들이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이런 바울의 심정이 그대로 전달된 첫 번째 사람들이 바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였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바울에게서 말씀으로 양육 받으면서 그들의 가슴은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찼습니다. 모든 것을 복음중심, 그리스도 중심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저는 이 부분이 참 좋습니다. 복음에 불타올랐던 바울의 심정이 그대로 이들 부부에게 옮겨가고, 그리스도를 향한 바울의 헌신된 마음이 이들 부부의 가슴에 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영적 전이"라고 말합니다. 영적 분위기가 그대로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열심히 기도하게 되고, 전도하는 사람을 만나면 열심히 전도하게 되며, 교회 일에 헌신된 사람을 만나게 되면 교회 봉사에 헌신하게 됩니다.
이들 부부가 얼마나 복음에 큰 도전과 변화를 받았는지 사도행전 18장 24절 이하에 나오는 아볼로라는 인물이 학문과 성경에 능한 자였으며, 언변도 뛰어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요한의 침(세)례, 즉 윤리적인 설교에 그치고 있는 것을 보고서는 아볼로를 자신의 집으로 식사초대하고 함께 교제하면서 바울에게서 듣고 배웠던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세계에 대하여 자세히 풀어 설명하였습니다. 결국 이들 부부의 영향으로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의 좋은 설교자가 되어 고린도 교회를 크게 부흥시킬 수 있었습니다.
Ⅳ. 복음에 헌신하는 아굴라 부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설교자는 아니었지만 평신도로서 하늘나라 확장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아굴라 부부가 바울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잘 양육 받고 훈련받는 일에 헌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말씀으로 양육 받는 일, 예배에의 헌신, 기도에의 헌신, 제자훈련 등을 통해 좋은 믿음의 일군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말씀으로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직분을 수여한 일이 없었습니다. 말씀으로 훈련받고 말씀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세상에 영향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영적인 영향력을 잃어 가는 것은 말씀에 헌신한 사람들이 줄어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2007년도 제직을 임명함에 있어서 말씀집중훈련에 동참하지 않는 제직에 대해서는 집사직에서 열외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27일(월)부터 30일(목)까지 진행되는 말씀집중훈련에 제직들은 100% 참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일 이 시간에 참석이 불가능한 분들은 별도로 사모님에게 1:1로 말씀훈련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기도의 후원자 이외에도 바울의 물질적 후원자가 되어 바울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8장 18절 이하에 보면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로 복음을 전하러 간다고 할 때 아굴라 부부도 함께 동행을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동행이 아닙니다. 아예 이사를 가는 것이었습니다. 아굴라 부부는 바울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돕기 위해 사업을 정리하고 함께 에베소로 향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복음을 위해 자기의 사업도 정리할 수 있는 이런 용기와 결단을 가졌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저는 이사하는 교우들 중에 "제가 이사하는 것은 그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섭니다" 아니면 "제가 이사하는 것은 교회에 좀 더 헌신하기 위해서입니다." 라고 신앙생활을 위해 이사한다는 분들을 많이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또 직장을 선택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신앙생활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를 생각하면서 직장을 선택하는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직장은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직장이 주님보다 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 자기들의 삶의 현장까지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주님께 헌신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의 헌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9절에 보면 바울이 로마에서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 "아시아에 있는 교회가 주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라고 기록합니다.
보십시오!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 때 브리스길라 부부도 로마에 있었습니다. 이때도 그들의 집에 교회가 있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들 부부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죽고 나자 다시 바울과 함께 로마로 온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 로마서 16장 3절에 보면 바울은 그들을 동역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4절에 계속 말하기를 "저희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이들 부부는 바울을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아마 이들 부부는 바울에게 "바울 선생님 당신을 위해 우리가 목숨까지도 내어놓겠습니다. 그러니 복음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헌신 하십시오" 하고 말했을 것 입니다.
늘찬양교회 안에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와 같이 주의 종들에 대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 늘찬양교회 속에 필요한 일은 말씀과 찬양사역의 확장을 위해 물질과 시간을 투자하여 목사님과 함께 동역 하는 일입니다. 바울이 당당하게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같이 헌신하는 평신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Ⅴ. 헌신의 장애물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에 헌신하려 할 때 많은 장애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질, 시간, 건강, 재능 등 갖가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지금 늘찬양교회 최고의 장애물은 무엇일까요?
첫째: 신뢰의 회복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상처와 아픔들, 악한 생각, 무관심, 부정적인 생각들이 너무 많다보니 목사님이 무엇을 한다고 해도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상처를 극복하고 일어설 수 있는 비결은 부족한 모습, 상처 난 모습 그대로 자신을 내어놓고 치료를 받을 때 빨리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뢰가 없다보니 그런 상처를 치료하느라 잃어나는 아픔을 가지고 문제를 삼아 더 큰 상처를 만들고 또 그 상처와 아픔 속에 자신을 가두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사야 55장 1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능력이외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신뢰성과 말씀대로 순종하여 연회장에게 갖다드린 종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007년도는 늘찬양교회가 지금보다 100배가 성장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지금 늘찬양교회가 꿈꾸는 말씀사역과 찬양사역에 시간과 물질과 몸을 투자해야 합니다. 우리모두 목사님과 한 마음 한 뜻을 가지고 부흥의 기적을 이루어 가는 2007년 한 해가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헌신에 장애 두 번째는 세상에 대한 염려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헌신에 주저하는 이유는 염려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합니다.
숭의교회를 담임하였던 김동호 목사님이 "신앙과 돈"이라는 주제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설교가 한국교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때 나온 단어가 "청부" 즉 깨끗한 부자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분의 설교에서 아주 강한 감동을 받은 것이 바로 십일조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김동호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100만원 십일조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보다 정확하게 십일조 하는 사람 100명이 더 필요합니다. 그러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십일조 많이 드리는 사람들도 교회에 중요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제대로, 정확하게 믿음으로 십일조 하는 사람들이 더 필요합니다. 제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대강 십일조 합니다. 월정헌금처럼 십일조 합니다. 작년에도 십일조가 10만원이었고 올해도 10만원입니다. 사실 늘찬양교회에 100% 정확하게 십일조 하는 제직만 있어도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는 능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2007년도에는 제직은 물론 모든 성도님들이 정확하게 십일조를 드릴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들로 거듭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헌신에 장애 세 번째 부분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졌습니다. 사랑이 식어지면 많은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부부사이의 헌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식어가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사랑이 불타오를 때는 아무 것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헌신자가 되기 위해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랑의 회복이 사명의 회복이며 헌신의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시험에 빠지는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함으로 헌신된 사람은 사단이 흔들 수 없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이 두 부부는 천막제조 사업으로 인해 많은 물질과 부를 누렸지만 정함이 없는 재물에 연연하지 않고 하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면서 낙심한 사도 바울을 도와 물질과 함께 거처할 처소를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순교자의 길을 걸었고 심지어는 아볼로에게까지 복음을 가르칠 정도로 두터운 믿음과 말씀의 깊이를 가졌습니다. 그러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평신도의 길을 걸어가면서 두 부부는 서로 격려해 주고 도와주며 주의 종과 교회를 섬겼습니다. 우리도 주의 종을 도와 목숨까지도 내어 드릴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물질과 직장과 가정과 명예에 노예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쓰고 남은 것만 드리고 먼저 하나님의 것을 구분하여 드리지 못하는 나의 모습은 아닙니까? 교회 일은 교회 일이고 목사는 목사 일이고 나의 일은 나의 것입니까? 진정 우리 늘찬양교회가 성장하며 한 지체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여러분의 영적 지도자인 목사를 돌아봐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목사님의 힘이 되어 드리고 도와드릴 부분은 없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치 아굴라 부부가 생명을 내걸고 바울을 도와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루었듯이 그런 영적 자세로 특별히 찬양사역에 함께 헌신하며 나타나는 여러분의 모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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