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역을 통한 변화 (3) 르비딤 전투의 동역
출 17: 8-16,2006.10.22.늘찬양교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마치 동화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과 아말렉이 르비딤에서 전쟁을 하게 되는데, 여호수아는 군대를 통솔하여 직접 전쟁을 하고,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게 됩니다. 모세의 팔이 피곤하게 되자 함께 있던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편에서, 다른 사람은 저편에서 모세의 팔을 붙잡았더니 모세의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았고, 결국 이스라엘은 아말렉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이 이해됩니까? 아마 어떤 사람은 이해가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
하는 사람들은 압니다. 기도하면 동화와 같은 일이 실제로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납니다. 기도하면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 가능해집니다. 기도하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르비딤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쟁에서 승리하는 아주 중요한 영적인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사건을 책에 기록하고 기념하라고 말합니다.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전쟁을 수행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승리의 사건은 책에 기록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념해야 할 정도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전쟁에 승리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승리의 비밀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 승리하는 중요한 영적 비밀을 깨닫고, 믿음 안에서 승리하는 늘찬양교회와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되기를 바라며 동역을 통한 변화 세 번째 말씀을 증거 하고자 합니다.
Ⅰ. 아말렉과의 전투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을 떠날 즈음 출애굽의 여정에서 두 가지의 큰 장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애굽을 떠날 때 이스라엘 백성이 떠나지 못하도록 뒤에서 물고늘어지는 애굽의 바로 왕이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앞으로 전진해 나가려 할 때에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나서는 원수가 있었는데 그것이 아말렉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죄악 된 세상을 떠나 영적 자유와 해방을 얻기 위하여 나가려 할 때에 뭔가 뒤에서 붙들고 늘어지는 유혹의 실체가 있는데 그것이 애굽의 바로 왕이라는 것이요 또 우리가 믿음으로 성숙하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펼쳐나갈 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실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말렉 군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뒤에서 물고늘어지는 애굽의 바로 왕과 군대를 물리치기 위해서 출애굽기 14장 13-14절에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의 과정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만히만 있으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가? 하나님이 얼마나 능하게 일하시는가? 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열 가지 재앙으로 바로 왕과 애굽을 칠 때도, 홍해가 갈라질 때도, 추격해 오던 애굽군대가 멸망할 때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을 구경하고 박수를 치고 기뻐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사정이 좀 다릅니다. 8절 말씀을 보면 "때에 아멜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는” 장면이 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변덕이 많으신 분으로 이해해야만 할까요? 분명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홍해의 약속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기 위해서 너희가 해야 할 일도, 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얻는 반면 신앙생활의 승리를 위해서는 많은 영적 싸움을 통해 굳건한 믿음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 아말렉에 대하여 더 깊은 관찰과 탐색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아말렉 족속은 에서의 후손으로 창세기 36장 12절에 보면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자손이며라는 말이 나옵니다. 에서는 이삭의 장자였지만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사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에서의 후손인 아말렉은 에서의 핏줄만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에서의 삶,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물려받은 족속이었습니다(신 25:17, 18).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을 향해 갈 때 전혀 예기치 못했던 걸림돌이었습니다. 성경은 아말렉이라는 무서운 방해자를 통해 아주 중요한 영적 진리를 보여줍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말렉 족속들이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악한 영적 세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신명기 25장 17-18절을 보면 아말렉 군대의 전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의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 이들은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에 전면전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을 지어 가는 동안 피곤하여 뒤에 처진 사람들을 골라 공격했습니다. 뒤에 쳐지는 사람들, 약하고 병든 사람들, 피곤에 지쳐있는 사람들이 바로 아말렉의 주 공격 대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행렬로부터 떨어지는 자가 있는지를 눈에 불을 켜고 노리고 있는 도적 떼였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뒤로 처지는 자들이 생길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칼로 쳐 그들을 죽였습니다.
악한 사단도 아말렉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합니다. 사단의 공격대상이 되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마귀의 밥이 되기 쉬운 사람이 누구일까요?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행렬 뒤에 축 처진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행렬에서 뒤쳐진 사람, 은혜의 자리에서 멀어진 사람들입니다. 예배 시간에 늦게 참석하고 또 교회에 와서도 말씀은 듣지 못하고 졸고만 가는 사람들(?), 믿음의 확신 없이 방황하는 사람들을 사단이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넘어뜨립니다. 그들 속에 하나님과 교회에 대하여 불평을 심고, 원망을 심고, 분노를 심고, 낙심을 심어 떨어뜨립니다. 예배 시간에 은혜를 사모함으로 앞자리에 앉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시험에 들지 않아요. 말씀을 사모함으로 설교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넘어지지 않습니다. 꼭 시험에 드는 사람을 보면 설교시간에 졸다가 어쩌다가 들은 말씀에 오해를 하고 시험에 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루빨리 방황을 끝내고 신앙의 앞자리에 서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뒤에서 비겁하고 졸렬한 수법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하던 아말렉 군대가 신광야 르비딤에서 모세가 반석을 치매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당시의 전쟁이나, 현재의 모든 전쟁이 다 따지고 보면 물싸움이요, 석유전쟁입니다. 창세기 21장 25절을 보면,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했다 했으며, 창세기 26장 19, 20절에도 그랄의 목자들이 이삭의 종들이 우물을 자기 것이라고 해서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말렉 사람들도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의 반석에서 물을 얻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 수원지를 빼앗기 위하여 이번에는 정면전으로 쳐들어 온 것입니다. 그 만큼 물이 소중하고 다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전쟁이 보통 전쟁처럼 칼이나 창의 전쟁이 아니요, 기도의 전쟁이었다고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수아를 대장으로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골짜기에 내려가 아말렉 군대와 직접 칼과 창으로 싸웠지만 또 다른 곳의 싸움터 즉 영적 싸움터로서 지도자 모세가 산꼭대기로 올라가 두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쟁의 승패가 여호수아의 통솔력과 싸움의 능력에 있지 않고 모세의 팔이 올라가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기고 모세의 팔이 내려오면 아말렉이 이기는 기도의 능력에 있었습니다.
11절에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라고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모세가 나이가 많았고 연약한 인간인지라 양손을 계속해서 들고 기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쟁의 승패가 기도의 능력의 있다는 것을 간파(看破)한 아론과 훌이 얼른 달려가 양손을 한 손씩 받쳐들고 함께 기도하매 모세의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하므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破)하는 대 승리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 군대를 물리치고 승리한 르비딤 전쟁을 통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그리고 교회 사역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투를 어떻게 하면 승리함으로 이끌 수 있는가?에 대하여 심도 깊게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Ⅱ. 축복의 손(11절)
본문 11절에 모세의 손이 위로 올라 갈 때에는 이스라엘이 진격하다가도 모세의 손이 내려오면 아말렉이 역습하여 오히려 이스라엘이 패배하는 참으로 희귀한 일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영적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먼저 모세가 두 손을 높이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항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일먼저 요구하시는 것이 뭐냐하면 "손들어!" 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말렉과 만날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 앞에 손을 드는 일 인줄 믿습니다. 전쟁에서 싸우는 일은 직접 하는 일입니다. 손을 들고 산 위에서 기도하는 일은 뒤에서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칼과 창을 들고 적군 앞에서 직접 싸우는 것보다 뒤에서 기도하는 것이 싸움에 이기고 지는 승패의 원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목회자는 교회부흥을 위해 그리고 성도들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기도하는 일에 전심전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모세의 손에 따라 승리를 주고 패배를 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이끄는 지도자 모세의 권위를 위한 하나님의 뜻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교회 부흥의 지름길도 또 사업의 번창과 자녀의 축복도 목회자의 기도의 손길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목회자와 등을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장로와 집사 대(對) 담임목사와의 보이지 않는 암투가 한국교회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늘찬양교회는 침례교회인지라 이런 면은 적지만 아말렉처럼 뒤에서 목사를 험담하며 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승리의 비결이 목사님의 축복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하루빨리 목사님과 뜻을 합하여 목사님이 교회를 위하여 성도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도록 순종하며 도와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부흥과 성장이 날마다 용솟음 치고 여러분의 사업과 가정이 잘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Ⅲ. 협동의 손 (12절)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호렙산 꼭대기에 섰지만 그도 인간인지라 팔이 아파 견딜 수 없어 손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군대가 후퇴하는 기현상이 벌어졌습니다. 그 순간 아론과 훌이 협동작전으로 모세를 도왔습니다. 아론과 훌은 큰 돌을 취하여 모세를 그 위에 앉게 하고 두 사람은 모세의 양팔을 양쪽에서 하나씩 붙들고 섰습니다. (12절) 그 결과 모세의 손이 오랫동안 내려오지 아니했지만 양쪽에서 모세의 팔을 붙들고 있는 아론과 훌의 두 손은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무척이나 저리고 아팠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힘든 것은 아론과 훌의 입장입니다. 아론은 모세의 형입니다. 모세보다 어른입니다. 그리고 모세보다 말을 잘 하는 달변가입니다. 모세보다 경륜이 많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입니다. 거기다 훌은 모세의 누이였던 미리암의 남편으로 보고 있습니다. 미리암은 모세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난하다가 나병이 걸렸던 여인입니다. 훌은 그러한 미리암의 부정적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제아무리 오라버니라 해도 "틀린건 틀렸다"라며 불평하는 아내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은 인척이라는 인간적인 생각을 떨쳐 버리고 영적인 사명과 영적인 전투를 생각하며 모세의 팔을 양편에서 부축했습니다.
오늘 우리 늘찬양교회에서 가장 어려움을 주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목사님의 친인척간에 얽힌 일들로 잡음이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주공격 대상이 목사님일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그 가족 중에 한 사람일 때도 있습니다. 형 아론과 매형 훌 그리고 누이 미리암도 성경에 보면 모세를 비난하는 일에 동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위기 상황이 다가오자 어려운 난관에 부딪히자 이들은 한 마음 한 몸이 되어 기도의 동역으로 힘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합력하여 동역한 결과 모세의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함으로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아말렉 군대를 물리쳐서 승리하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만일 아론과 훌이 자기들의 신분이나 경륜이나 감정을 앞세워 모세를 돕지 않았다면 이 전쟁은 패배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아말렉의 노예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목사의 협력자가 됩시다. 목사의 손을 들어 줍시다. 목사를 부축하는 사람이 됩시다.
모세의 피곤한 손을 끌어내리고 잡아 내리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Ⅳ. 실천의 손 (13절)
모세의 축복의 손과 아론과 훌의 협동의 손 때문에 승리한 것은 아닙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나아가 싸운 모든 병사들의 수고를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모세의 손이 내려지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또한 아론과 훌의 손은 능력의 손은 아니라 할지라도 모세를 부축하는 팔의 수고가 있어 모든 손이 맞았기 때문에 승리한 것입니다.
전쟁에 나아가 아말렉 군대와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 여호수아의 이스라엘 군대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그들을 위에서 기도하고 있는 모세와 아론과 훌의 동역을 바라보며 큰 용기와 힘을 얻었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여호수아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생명을 내 걸고 아말렉 군대와 싸웠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을 모두 전멸시켜버렸습니다. 모세는 이 귀한 전투의 승리와 동역하는 아름다움을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라고 단(壇)을 쌓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여호와 닛시” 즉 “우리로 전쟁에서 승리케 하신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15절)하며 승리를 주신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 부르며 찬양하였습니다.
아말렉과의 전투를 잠시 더 살펴봅시다. 잠시 동안 승리가 양 진영 사이를 오락가락했습니다. 때로는 이스라엘이 이겼다가 때로는 아말렉이 이겼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는 이스라엘의 차지가 되었던 것입니(13절). 이때 여호수아는 매우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싸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다 먹이시고 입히시고 채워주셔서 단 한번도 싸우거나 노동한 일이 없습니다. 더욱이 전쟁의 경험은 고사하고 싸움을 위한 훈련 한번 받지 못한 병사들을 이끌고 나가서 싸운 것입니다. 거기다가 무기도 빈약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오랫동안의 노예 근성이 몸에 배어 있어서 툭하며 원망하고 불평하고 포기하고 주저앉으려는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그런 외형적인 것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하인들은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여섯 항아리에 물을 가득 떠다가 부었으며, 또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어라 할 때에 그대로 순종하여 나갔을 때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났듯이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령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순종함으로 나갔습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순종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사람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물질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환경을 탓하지 마십시오. 오직 사명을 바라보십시오. 사명을 붙들고 함께 동역의 장에 참여하십시오. 사명과 연합이 기적을 낳습니다.
늘찬양교회에 큰 기적이 곧 일어날 것입니다. 부흥의 불길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찬양의 대 역사로 옥터에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어지듯 늘찬양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가로 막고 있던 악한 사단 마귀 권세가 물러가고 큰복을 받는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여호와 닛시의 영광의 축복이 우리모두에게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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