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
눅 15:11-24, 2011.08.21.늘찬양교회
두 아들과 더불어 많은 종을 거느린 어떤 한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둘째 아들이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을 나눠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받은 유업을 모두 정리하여 먼 나라로 떠나서 제멋대로 살다가 받은 재산을 다 탕진하고는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런 고난의 과정에서 드디어 아버지의 품을 생각하고 회개하며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 다시금 아버지의 아들로 회복되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누가복음 15장 11-24절에 나옵니다.
저는 둘째 아들이 허랑 방탕의 모습 속에서 다시금 아들의 권세를 회복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의 신앙에서도 멋지게 회복되어지는 기쁨이 있기를 희망하며 말씀을 증거 하려고 합니다.
Ⅰ. 분깃을 요구하는 둘째 아들
누가복음 15장 12절에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둘째가 아버지를 찾아와 “아버지여”라고 합니다. 얼마나 흐뭇한 모습입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정겹습니다. 본문에는 ‘아버지라’는 말이 우리말로 무려 20번(헬라어 성경은 12회)이나 ‘아버지’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특히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 것의 근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모든 것이 나왔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모든 것이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의 근원이십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속에 둘째 아들의 문제점이 발견됩니다. 무엇입니까?
그것은 12절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을 요구한 것입니다. “분깃”[mevro"/메로스]은 글자 그대로 하자면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지역을 말합니다.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몫을 달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지도와 감독과 간섭아래 있기 싫다는 것입니다. 어떻든 아버지는 순순히 둘째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작은 아들은 그 돈을 받자마자 멀리 떠나갔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3절입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먼 나라에 가’라는 말씀의 의미는 ‘이제까지의 모든 끈을 끊어버리고 할 수만 있으면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유대인은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때 재산을 물려받았다면 그것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었습니다. 상속받는 재산으로 이익을 남겨도 아버지에게 돌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둘째는 아버지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챙기기 위하여 멀리 떠났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나는 죄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타락한 인간이 누리려는 자유의 속성이 얼마나 천박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권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욕심을 채우려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고상하게 기도하지만 욕심에 사로잡혀있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버지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멀리 떠나 버렸습니다. 갈 때는 잘 살아보겠다고 다짐도 했을 것입니다. 보란 듯이 성공해서 고향으로 돌아오겠다고 생각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가다 보면 삶이 내 각오와는 다르게 전개됩니다. 그래서 이 탕자가 멀리 가서 방탕하고 놀고 즐기고 재산을 탕진하고 흥청망청 다 탕진하여 버렸습니다.
대부분의 부잣집 아이들은 재산 귀한 줄 알지 못하지 않습니까? 요즈음 강남에 사는 아이들 가운데 그런 아이들 많습니다. 돈을 물 쓰듯 하면서도 돈 귀한 줄 모르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돈이 다 떨어지니까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친구들도 다 떠나가고 있을 곳도 마땅치 않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흉년까지 닥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비로소 궁핍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집에 얹혀살게 되었는데, 주인이 저를 들로 보내서 돼지를 치게 하였습니다. 그는 춥고 배고팠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그것도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배가 고프고 힘이 들었습니다. 너무나도 비참한 생활이었고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비참한 궁핍은 영혼의 궁핍입니다. 둘째 아들에게 있어서 정신과 영혼의 궁핍은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탕자인 그는 재산을 다 허비하고 거지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국에서 돼지를 치는 신세가 되었는데, 돼지는 히브리 사람들이 가장 경멸하는 짐승이니 그것을 치는 목부가 된 것은 인간으로서 마지막으로 지녀야 할 자존감마저 박탈된 채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지경에 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로 인한 궁핍 그 이상의 궁핍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이고 정신적인 궁핍이었습니다. 아무도 불쌍히 여기는 자 없이 홀몸으로 죽음 같은 궁핍 속으로 내동댕이쳐진 자신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육신이 돼지우리에 던져졌을 때, 그의 정신과 영혼도 또한 돼지우리와 방불한 죽음 같은 궁핍에 던져졌으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도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아도취에 빠져, 물질의 풍요로움에 빠져 세상쾌락을 즐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은 집나간 탕자의 모습처럼 영혼이 궁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하게 되고, 방탕하게 되고, 타락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 반면 영적 하나님의 자녀들은 전심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살아갑니다. 물질의 풍요로움보다 세상명예와 쾌락보다 말씀, 설교, 예배, 묵상, 간절한 기도 등을 은혜의 도구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이런 귀한 은혜의 수단을 잃어버리고 영적타락의 길로 들어섰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아주 혹독한 궁핍세계로 이끌어 가십니다. 마치 둘째 아들이 친구들의 버림과 배고픔과 외로움의 고통 속에서 아버지를 기억하듯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갖가지 시련과 환난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찾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회복입니다.
Ⅱ. 탕자의 회개
고생이 극에 달했을 때 둘째 아들은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신을 바로 차리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고생하면 정신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요즈음 우리 자녀들이 너무 고생을 모르고 자라는 것 같습니다. 고생을 해도 뼈 저리는 고생을 안 해 보아서 걱정입니다. 그래서 돈 귀한 줄 모르고, 집 좋은 줄 모르고, 부모 좋은 줄 모르며, 심지어 하나님 귀한 줄 모른다. 아이들만 그런 것 아니고 심지어 어른인데도 그런 것을 모르고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인 아이라고 할 수 있지요.
둘째 아들이 정신이 차리면서 한 첫 번째 말이 본문 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본문의 핵심은 잃어버렸던 아버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둘째 아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죽음과 같은 궁핍의 궁극적인 원인이 단지 물질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하였습니다. 전에는 아버지의 집에서 아들로 살아가는 것이 속박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것이 행복이요, 기쁨이요, 자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 18절입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자신의 죄가 어떤 것임을 깨닫게 된 둘째 아들은 더 겸손해졌습니다. 그 겸손함은 19절에서
아주 극적으로 나타납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며 ‘자신은 이제 아버지의 아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품꾼의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렇게 품꾼의 하나로만 받아주셔도 나는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며 낮아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오기 전에 마음에 일어났던 깊은 변화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한 사람의 ‘신앙의 깊이’란, 자기 마음속에 있는 타락의 경향을 미리 읽어내어, 일어나지 않은 결말을 미리 알아서 그것이 현재 일어난 일인 것처럼 아파하며 하나님께 속하여 살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에 있는 죄와 드러나는 죄 사이에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III. 기다리시는 아버지
둘째 아들은 마음에 작정한 것을 즉시 행동으로 옮깁니다. 본문 20절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 가니라 ... ” 사실 말씀은 간단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실천하기가 결코 쉽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둘째 아들의 귀향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개선장군의 모습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돈을 다 날려버린 실패자의 모습으로 초췌한 얼굴에 다 찢어진 옷을 입고 거지와 같은 복장으로 아버지 집을 찾아간다는 것은 죽기보다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수치심과 두려움 속에 축 늘어진 어깨를 한 채 힘없이 아버지 집으로 향하고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0절 하반 절입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거리가 상당히 멀지만 또한 세월이 흐르고 고생을 많이 해서 몰골이 험하게 변한 아들의 모습이었지만 아버지는 한눈에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이는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버지는 식사를 하면서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심지어 잠을 자면서도 항상 집을 떠난 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던 것입니다.
지금도 죄인을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동일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 들어설 때까지 하나님을 잊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여러분들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오래 참으시며, 여러분들을 기다리십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서 아버지의 집으로 귀향을 결단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용서와 사랑을 베푸십니다.
자신을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기뻐하는 아버지께 아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21절) 그러나 아버지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어떻게 합니까?
22절입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말은 그를 품꾼이 아닌 둘째 아들로 다시 받아 주는 행위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존귀를 상징하는 금가락지를 끼우고, 새사람을 상징하는 새신을 신겨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풀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합니다(24절).
얼마나 감격적인 장면입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회복되는 순간입니다. 아들의 권세가 다시 회복되는 순간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의 아들로 회복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품꾼의 하나로만 봐 주어도 감지덕지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를 아들로 취급해 준 것이었습니다. 아들의 권세를 회복시켜 준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죄인들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의 친절과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서 두 개의 갈림길을 만납니다. 한 길은 그렇게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이고, 또 한 길은 하나님께로 돌이켜 다시 사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그 후의 둘째 아들의 삶은 어떠했겠습니까?
아버지와의 만남은 늘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즐거움이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제 더 이상의 불평과 원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면서 매일 매일을 감격으로 지냈을 것입니다.
Ⅳ. 우리의 회복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회복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는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렸습니다. 그때는 감사하고 감격했습니다. 예수를 처음 믿고도 그런 감사나 감격을 느껴보지 못했다면, 진정으로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영접해 들였는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영접했다면, 우리에게는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에 대한 경험이 있고 감격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자녀 된 기쁨과 감격도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무디어 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떤 때는 하나님 아버지께 불만도 갖게 되고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나 안 믿는 사람처럼 살아보고 싶은 충동도 느끼게 됩니다. 충동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실제로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서 내 마음대로 살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하면서 육체적인 삶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주일날 예배도 안 드리고, 성경책은 읽지 않아 먼지가 쌓여 있으며, 기도해 본지 오래된 그런 삶을 살게 됩니다. 믿음의 친구들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세상 친구들과 가까워져서 세상 방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세상 살아가는 재미에 푹 빠져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분명 한 때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있었지만, 그 권세를 다 빼앗기고 마귀의 종과 같은 삶을 삽니다.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지라도, 적어도 집에 있던 맏아들과 같이 교회 다녀도 감사나 감격 따위는 다 잃어버리고, 습관과 의무감에 사로 잡혀서 감격 없이 마지못해 교회 봉사를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그냥 놔두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쓰시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환난과 고통입니다. 마치 집 떠나간 둘째 아들이 기근이 닥치고 궁핍하게 되니까 정신을 차린 것처럼, 우리도 이 땅에서 환난을 겪고 고통을 겪을 때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라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우리의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때로는 징계하기도 하십니다. 혹 우리 가운데 그런 징계를 받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경우, 그것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럴 때 둘째 아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용기를 내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듯이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언제든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믿음의 복된 권세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 즐거움, 세상 재미는 잠깐입니다. 세상 부귀영화도 잠시 잠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품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 품을 떠나서는 가면 갈수록 고통과 죄악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늘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예배드리는 시간이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또 하나님 아버지와 늘 대화하는 기도의 시간, 큐티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더 나아가 찬양의 시간,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생활을 해야합니다.
말씀, 기도, 찬양, 감사를 통해 늘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하는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나타납니다. 그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보호하심을 힘입어 사는 삶, 그것이 우리 신자의 삶입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 곁에 있을 때는 아버지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간섭으로 억압으로만 여겼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 곁을 떠나 자기만의 세계, 자기만의 기쁨과 행복을 세상에서 누리며 살아보겠다며, 아버지께 분깃을 요구하여 얻은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대로 뜻대로 삶이 열려지지 않았습니다. 맨 처음에는 자신에게 돈이 있다는 것을 알고 많은 친구들도 여자들도 뒤 따랐지만 그래서 그런 기쁨의 착각에 빠져 돈을 흥청망청 쓰다 보니 어느새 돈이 바닥이 났습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친구들이 사라져 버립니다. 때마침 가뭄이 들어서 일자리를 얻기도 그리 넉넉지가 않았습니다. 결국 둘째 아들은
배고픔과 궁핍의 고난을 통하여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품을 떠나온 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단 합니다.
혹시나 내 속에 있는 시련과 환란이 내가 있어서는 안될 자리에 있기 때문에 오는 환난과 시험은 아닌가를 한번 살펴보시고, 과연 하나님의 자녀로서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를 생각해 보는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서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다고 생각되면, 지금 이 시간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버지 집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 말씀을 듣고 그 결심을 실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루빨리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인자하심과 베푸심을 맛보면서 은혜 안에, 믿음의 축복과 자녀의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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