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인물강해

책망받은 유오디아와 순두게

늘찬양 2011. 8. 27. 23:03

♣책망 받은 유오디아와 순두게♣

      빌 4:2-3,2011.08.28.늘찬양교회

 

어느 단체든지 조직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처음 가입한 자를 엄하게 훈련시키는 습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 때문에 조직이 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유교적인 집안에서는 새로 시집 온 새댁을 엄하게 훈련시켜서 그 가문에 적응하게 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군대에 입대하면 신병 훈련소에서 군인이 되는 고된 훈련 과정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군대라는 조직이 도저히 존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누구나 와도 좋소!’입니다. 교회는 누구든지 처음 온 사람에게 훈련소처럼 강한 훈련으로 교회 적응하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보살피고 인내로 돌보아 줍니다. 그러다 보니까 교회는 변화되지 못한 한 두 사람의 불순종으로 얼마든지 상처를 입을 수 있고 심한 경우에는 깨어질 수도 있는 형편입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신학교 동문교회를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개척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개척연수에 비해 무척 빠른 성장률을 보이고 있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게다가 교인들은 학력도 매우 높았으며 제법 부유층의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교인들을 바라보면서 많은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유인즉 교회 성도들 간에 교회관으로 약간의 논쟁과 분열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 단체보다는 개인의 영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교회를 조직화하거나 교단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교회가 보편적인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교회들처럼 교단에도 가입하고 또 다른 교회처럼 주일 저녁 예배나 수요일 예배도 드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는 몇 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교회가 별 문제없이 잘 성장하는가 보다 하고 생각을 했는데 실제로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런 생각의 차이가 잠재되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교회는 얼마가지 않아서 깨어지고 신앙이 어린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항상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진리만으로 교인들을 강하게 결속할 수 없습니다. 즉 다른 하나의 요소가 필요한데 그것은 공동체가 강한 결속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되기 위해서는 바로 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즉 교회 안에 진리가 풍성한데 공동체마저 강하게 결속되어 있으면 교회는 급속도로 부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진리가 있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같은 교회 안에 있다면 마치 그 사람은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며 그 사람 때문에 다른 어떤 사람이 상처를 입을지 모르는 형편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사회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동체가 힘이 있으면 개인은 어쩔 수 없이 자기 생각을 죽이고 거기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힘이 없으면 개인은 언제나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게 되어 있고 결국 그 공동체는 깨어질 위험을 받게 됩니다.

사실 저희 교회도 연수는 오래되었지만 교회 공동체 자체가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보니 몇몇 사람이 건축이후 교회를 이탈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유증은 지금도 남아있어 타교회를 다니다 들어오는 성도들에게는 왠지 조심성을 같게 되는 것을 봅니다. 이렇듯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한 두 사람의 기질이나 생각에 따라 얼마든지 교회가 상처를 입을 수도 있고 깨어질 수도 있는 형편입니다.

아마도 빌립보 교회의 형편이 이와 비슷한 처지였던 것 같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진리에는 별로 문제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공동체 자체가 약해서 한 두 사람의 입김에 의해서 교회가 상처를 입을 수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오늘의 주인공 ‘유오디아와 순두게’라고 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Ⅰ. 연보와 섬김을 다하는 교회

바울과 실라는 제 2차 선교여행을 통하여 마케도니아 지역에 빌립보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행 16:6-40). 빌립보는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접촉점이기 때문에 선교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대하여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통하여 경험한 해방과 자유의 복음의 감격을 잊지 않았으며, 수많은 연보와 구제 헌금으로 바울의 선교에 동참을 하였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교회가 계속되는 기근 속에서 수년간 고통을 당할 때 마케도니아를 대표하는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통하여 큰 액수의 구제연보를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 주었습니다. 결코 부유한 교회는 아니었지만 그들은 늘 풍성한 연보를 하였습니다(고후 8:1-3).

빌립보 교회는 복음을 중심으로 교제하는 신실한 교회이었습니다. 어떠한 인맥이나 지역적 특성으로 모여진 인위적 교회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갖고 있는 바울에게도 빌립보 교회를 향한 한 가지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 교회를 이끌던 중심 사역자인 ‘유오디아와 순두게’ 사이의 갈등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라는 척박한 빌립보 도시에 세워진 교회를 이끌던 두 여성 사역자가, 어떤 이유였는지는 몰라도 사이가 원만치 못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점차 심화되어 급기야는 교회의 기초를 흔들 만큼 치명적인 문제로 발전되어갔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여인 사이에 일어난 갈등의 원인을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빌립보 교회 내에 들어온 ‘유대교적 율법주의’에 대한 두 여인의 서로 다른 태도이며, 둘째는 빌립보 교회에 대한 ‘주도권 다툼’(헤게모니)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훈계의 내용이나 어법을 보았을 때에 두 번째 이유가 더 합당한 듯합니다. 하지만 두 여인의 교회를 향한 지나친 열심과 자신만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두 여인 사이의 갈등과 다툼은 빌립보교회의 혼란과 분열을 조장하고 있었습니다.

Ⅱ. 같은 마음을 품어라.

오늘 본문 2절에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하였고 2장 1절과 2절에서도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야”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유오디아와 순두게 사이에는 이런 것들조차 잘되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사도 바울과의 사이조차도 아주 좋지 못한 그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의 문제는 결코 그럴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이 편지에서 그 내용을 일부러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안에는 서로 하나 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한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기질과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어쩔 수 없이 하나가 되어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갈등과 부조화는 교회의 성장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입니다. 어쩔 수 없어서 서로 고개를 숙이고 눈인사를 하며 지내지만 어떤 계기로 인하여 서로의 갈등과 불만이 밖으로 표출될 수 있고 그 결과 교회에 깊은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두 여주인공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모습은 교회 안에서 갈등과 불만이 있을 때 어떻게 진정으로 하나 될 수 있느냐? 하는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한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요? ‘마음을 합하는 방법’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권면

바울은 가장 먼저 빌립보서 2장 1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권면이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무슨 권면’이라는 것은 설교를 말합니다. 기독교는 ‘귀의 종교’입니다. 그런 반면 천주교는 오감(五感)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시작하여 조직이 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권면 즉 설교가 예배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그래도 무너질 염려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조직보다 설교에 생명에 걸고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설교자를 찾아 이 교회 저 교회로 많은 성도들이 수평 이동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여기서 권면은 설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가르치고 양육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교회 안에 진리의 복음이 지속적으로 선포되어지며, 또 제자훈련이 살아있는 교회들은 꾸준하게 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믿던 성도들은 힘을 내고 믿지 않던 자들은 새롭게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무엇보다 말씀의 능력이 살아 움직이는 교회가 될 때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2. 사랑의 위로

교인들의 가정 사정은 매우 다양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위로와 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더욱이 지금같이 어려운 경제위기를 맞이하여 사랑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관계형성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다 중단하는 많은 성도들 중에 가장 큰 이유가 교회가 물질만 강조하고 자기 자랑만 할 줄 알지 서로 나눔과 희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큰 사고나 어려움을 당하여 힘들고 외로울 때 찾아주지 아니하고 내 팽개쳐 둘 때 더 그렇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큰일이나 어려움을 당할 때 이때가 우리를 더욱 하나로 묶어주는 축복의 끈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평소에 가깝지 않던 성도라 할지라도 어려운 일을 당하면 ‘기회가 왔구나!’ 생각하고 뻔질나게 찾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더 하나 되게 하기 위하여 그런 어려운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려운 일을 당했는데 혼자 내버려두면 그때는 정말 원수가 되게 됩니다.

우리 교회를 열심히 다니다 중단하고 있는 성도들의 대부분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저 역시 심방을 게을리 하였던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열심히 낙심과 절망에 빠진 성도들을 찾아가 사랑의 위로에 힘쓰기를 바랍니다.

3. 겸손

주님의 일을 하는데도 두 가지 자세가 있습니다. 하나는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서 하고 자기 잘난 체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겸손과 온유함을 가지고 서로 다른 사람을 나 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중세 때 어느 수도원이 몰락하게 되어 사람들이 다 떠나고 다섯 명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곧 이 수도원도 문을 닫겠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가까운 곳에 한 선지자가 기도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자기 수도원의 딱한 사정을 말하고 다시 부흥할 수 있는 길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선지자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당신들 중의 한 사람을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라”고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장은 돌아와서 그 이야기를 형제들에게 했습니다. 그 후 그들은 서로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은 원장님을 예수님처럼 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연장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장은 다른 형제를 예수님처럼 존경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너무 온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형제는 다른 젊은 형제를 예수님처럼 대했는데 왜냐하면 그가 성경에 능통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한 여행객이 지나가다가 그 수도원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곳이 다른 곳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섯 명이 있는데 꼭 여섯 명이 있는 것 같더라는 것입니다. 나머지 한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들만 있는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거기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 수도원은 다시 번창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볼 때 예수님처럼 대하십시오. 성가대 대원들은 지휘자를 예수님처럼 대하십시오. 그리고 지휘자는 반주자를 예수님처럼 대하십시오. 성도들은 교회에 새로 오신 분들을 예수님을 대하듯이 하십시오. 특히 장애인들이나 노인 분들이 들어오시면 더욱 그 분들을 예수님처럼 대하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사랑으로 겸손할 때 무엇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능력과 풍성함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겸손한 자들 안에는 반드시 주님이 계십니다.

4. 멍에

바울은 3절에서 빌립보 교인들을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보통 사이가 아니라 특별한 사이를 의미하고 있는 겁니다. 시골에서 밭을 갈 때 황소와 암소가 나란히 보조를 맞추어야 쉽게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복음을 위해 같이 일하는 성도들은 주의 말씀을 따라 보조를 맞추며 나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목회자 세미나에서 강사가 목회자들에게 교인들에게서 무엇을 가장 원하느냐? 고 질문했을 때 여러 목회자가 교인들의 지지와 인정을 원한다고 대답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만일 목회자가 교인들로부터 인정과 지지를 잃는다면 그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버지가 집에서 전혀 식구들로부터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삶의 의욕조차 잃고 말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속에서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을 찾아와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약간의 돈도 보내어 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의 사랑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의 방문과 물질적인 도움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의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빌 1:7)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외롭고 힘들 때 찾아와 준 빌립보 교인들로 인해 큰 힘을 낼 수 있었고 법정에 복음을 변호할 때에도 잘할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늘찬양교회를 지키고 성장시키기 위하여 얼마나 외롭고 힘든 세월을 보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집단 상담에서 보여준 여러분의 참여와 사랑의 헌신은 저에게 다시금 히스기야의 기도와 같은 결단을 하고 매어 달리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서로 멍에를 지고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나의 주장과 권리와 잘남을 뽐내기에 앞서 주님의 뜻을 생각하고 목사님의 입장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합력 할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으로 생각만 하는 자가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을 나누고 아픔을 나누며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Ⅲ. 순종하는 두 여인.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바울의 질책이 담긴 권면의 말을 듣고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마음을 상한체로 빌립보 교회를 떠나 각기 제 길로 갔을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다."(3절) 있다고 자신하는 것으로 보아서 이 두 여인은 말씀의 권면을 받고 자신들 속에 있는 죄악을 회개하고 서로의 마음을 문을 열고 대화를 통해 두 사람 간에 일어나고 있는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화목과 사랑의 길로 긍휼과 자비의 길로, 화목의 길로 돌아선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신임 여전도회장과 전임 여전도회장의 사이가 좋아서 두 사람이 연합해서 더 귀하고 아름다운 여전도회를 만들어 가야 하는데 왜 그런지 사이가 안 좋은 경우가 많습니다. 다행이도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뒤 늦게나마 마음 문을 열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상대방을 서로 용서하고 받아드렸습니다. 그 결과 빌립보 교회는 다시 든든히 서가는 하나님의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때때로, 목회자와의 대화에서나 설교에서 책망을 듣습니다. 책망을 들으면 기분이 썩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책망하고 있다는 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포기한 사람에겐 책망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언 1장 7절은,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잠언 4장 13절은 "훈계를 놓치지 말고 굳게 잡아라. 그것은 네 생명이니, 단단히 지켜라"하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잠언 15장 32절은 "훈계를 싫어하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잠언은, "책망을 들을 때 순종하라. 그것이 바로 네가 살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이다"(잠 6:23)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책망할 때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들었을 때에 순종했지만,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의 책망을 들었을 때에 변명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크게 들어 쓰셨고, 그의 혈통에서 그리스도가 나게 하셨지만, 사울은 버리셨던 것입니다. 책망을 듣고 순종하는 것과 순종하지 않는 것, 이 둘의 차이는 사소한 것 같지만, 축복과 저주를 가르는 엄청난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 맘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책망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바울로부터 책망을 받은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여인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갈등을 대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한국교회가 언제까지 목사와 장로가 장로와 집사가 집사와 평신도가 갈등을 일으키며 대립 속에 살아가야 할까요? 이 같은 모습은 사탄이 교회분열을 노리고 조장하는 일들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제라도 목사님의 권면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드리고 사랑의 위로와 겸손의 미덕과 복음의 한 멍에를 지고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며 주님의 길을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빌립보 교회가 회복되어지고 부흥되었듯이 그리고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듯이 늘찬양교회가 회복되어지고 부흥되어지며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지는 놀라운 축복의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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