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가 성 사마리아 여인 ♧
요 4:3-26,2011.09.18.늘찬양교회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결혼하는 목적은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형성하여 혼자만의 힘보다는 가족의 연합과 화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겠다는 생각일 것입니다. 그런데 개중에 일부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과 눈총 때문에, 또는 자신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 결혼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이상과 철학에 맞아야 하고, 자신의 체면을 세워줄 말한 대학 졸업 이상의 사람이어야 하고, 직장도 좋고, 더불어 돈 많은 사람, 키 크고 예쁜 사람들을 찾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노총각과 노처녀로 늙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공부할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은 무슨 재주를 가졌던지 다섯 번씩이나 결혼을 하였으며, 여섯 번째는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은 채 한 남자와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이 무척 부럽고 굉장한 미인처럼 생각될 수도 있지만, 한번이라도 이혼을 경험한 적이 있는 여자라면 이 여인의 아픔과 고통이 얼마나 크고 엄청난 것인지 잘 알 것입니다. 아마 이 여인의 마음속에는 모든 남자가 다 원수로 보일 것이고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조차 귀찮고 싫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녀가 뿌려놓은 죄악의 대가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수 없는 분명한 자신의 과오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도 이런 여인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마저 손가락질 받고 냉대 받는 여인들에게도 큰 관심과 사랑을 가지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우리 주님께서 오신 목적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얻게 하고자.” 오셨기 때문입니다.
원래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은 한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B.C. 722년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멸망을 당한 후 사마리아 살고 있는 많은 여인들이 앗시리아에 포로로 끌려갔으며, 또 많은 여인들이 그들에게 짓밟힘을 당하였으며, 남은 여인들조차도 더 이상의 상처를 당하지 않으려고 다른 나라 사람들과 서둘러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사마리아 사람들 속에 혼혈아가 많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쪽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취급을 하며 상종치도 아니하였습니다. 이런 와중 속에서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도 다섯 번씩이나 결혼을 하지 않았는가? 생각됩니다. 어떻든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 간에는 엄청난 간격과 미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갈릴리로 갈 때도 직선 도로인 사마리아 길을 통하지 않고 요단강을 건너 먼 거리로 후회하여 다녔습니다.
Ⅰ.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느 날 갈릴리로 가시고자 여장을 준비한 후 제자들과 함께 유대 땅을 출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가심에 있어 직선 도로인 사마리아 길로 들어가려고 하심을 깨닫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예수님! 이 길로 가시면 안 됩니다.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요단강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습니다. 그러잖아도 지금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로부터 세리들의 친구요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라는 놀림과 공격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더욱이 지금도 요한 보다 침례를 더 많이 주고 제자를 많이 삼는다고 하여 공박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번에 또 사마리아로 들어간다면 저들이 무슨 비방과 모략을 하겠습니까? 예수님! 저희사정을 봐서라도 한번쯤 돌아가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하고 건의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제자들의 부탁을 거절하시고 사마리아로 가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 앞에는 그 어떤 것도 걸림돌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며, 또 다른 이유는 그곳에 가서 어떤 중요한 일을 해야 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 중요한 사건이 오늘 우리가 공부하며 은혜 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구세주이십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길로 들어가는 길은 험하고 뜨거운 사막지대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행은 그 뜨겁고 힘든 사막 길을 너무 오래 걷다보니 무척 피곤도하였고 목도 말랐습니다. 그런데 천만 다행으로 수가라는 성에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에게 땅을 나누어 줄 때 같이 준 야곱의 우물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는 힘을 다해 수가 성까지 달려갔습니다. 정말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는 두레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제자들은 예수님을 우물가에 모셔 놓고 먹을 것과 두레박을 구하고자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이때였습니다. 마을로부터 한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수심과 근심과 염려로 가득한 얼굴을 한 채 물 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힘없이 터벅터벅 예수님이 앉아 계신 우물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오지 않는 대낮에(정오 12시)사람의 눈을 피하여 우물을 길어 먹던 이 여인은 우물가에 한 남자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더욱 놀란 것은 그 남자가 자신에게 “물을 달라”(7절)고 말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더 더군다나 유대인 남자가 말입니다.
Ⅱ. 생수를 구한 사마리아 여인
사마리아 여인은 정색을 하며, 떨리는 어조로 그 남자를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9절) 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릇도 같이 사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말이나 상종도 절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릅니까? 그런 불편한 관계의 사람들이거늘 “당신은 왜 나를 귀찮게 하느냐?”는 식의 대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달라”하신 것은 우물 물 한 그릇의 물 보다 이 여인 속에 있는 영적 목마름의 갈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을 여섯 번씩이나 가져 보았지만 그래도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 여인의 마음을 주님은 간파하셨습니다. 퉁명스럽고 짜증 섞인 말을 하는 이 여인! 남들이 뜨거워서 다 쉬는 시각에 더위를 무릅쓰고 물을 길러 나와야만 하는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영적 목마름으로 갈등하는 여인의 아픔과 애처로움을 예수님은 느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향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너에게 주었으리라”(10절) 여기서 말하는 생수는 영혼의 샘물로 그것은 예수님께서만 베풀어주시는 성령을 가르치는 것이며(요7:39), 더 나아가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생수를 마시기만 하면 정녕코 영적 목마름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가 성 우물가의 여인은 아직까지 성령을 받지도 못했으며, 또 알지도 못했습니다. 여인은 놀랍게도 예수님께 다시 여쭈어봅니다. “선생님! 우물이 이렇게 깊은 데다 선생님께서는 물길을 두레박도 없으시면서 어디서 그 샘솟는 물을 떠서 나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13절) 이때, 예수님은 재차 여인에게 “이 우물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14절)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15절)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생수를 구하였습니다.
Ⅲ. 복음의 증인이 된 사마리아 여인
이때, 예수님은 생수를 달라는 여인에게 갑자기 주제를 바꾸어 “네 남편을 불러오라”
(16절)고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왜 주제를 생수에서 남편으로 바꾼 것일까요? 그것은 영혼의 생수를 얻기 위한 첫 출발점이 「나 자신을 바로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어떻든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명령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수가성의 여인은 얼떨결에, 아니면 본능적으로, 그동안도 자신의 결혼을 다섯 번씩이나 속여 가면서 결혼한 실력을 발휘하여 이번에도 쉽게 변명으로 위기를 넘어 가고자 수가성의 여인은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17절)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외로 거짓으로 대답하는 그녀를 향해 오히려 칭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7-18절)하며 칭찬을 하셨습니다. 이때, 수가 성 여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자기의 가장 상처 깊은 부분, 그래서 남에게 얼굴조차 내밀기를 싫어했던 여인이 자신의 속사정을 이렇게도 속속들이 알고 계시는 주님 앞에서 얼마나 난처하고 황당했을까요?
사마리아 여인은 순간 ‘이 분 앞에서는 더 이상의 거짓말이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솔직하게 예수님께 대답하기를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 저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오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25절) 주님은 즉시 또 이 말씀을 받아서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26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순간, 수가성의 여인은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큰 기쁨과 평화를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물동이를 그 자리에 내동댕이치고 단숨에 마을로 뛰어 내려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29절)며 예수님을 증거 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입니다. 동네 사람들을 만나기조차 싫어서 그 뜨거운 대낮에 물을 길러 오던 이 여인이 부끄러움도 잊은 채 마을로 뛰어 들어가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이 사람을 와 보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 여인으로 최초의 전도자가 생기는 순간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은 과거의 부끄러운 모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얻은 영적 감격과 기쁨에 여인은 “와보라!”는 간단한 말 한마디로 전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영적 기쁨입니다.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참 행복입니다. 주님을 만난 이 수가성의 여인은 이제 더 이상 숨어 다니지 않아도 되었고 과거의 부끄러움 때문에 더 이상 괴로워할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우리로 하여금 자유함의 기쁨을 누리며 살게 하고자 오셨기 때문입니다(요 8:32).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할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부터 구원함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점차 달라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9절에서는 예수님을 「당신」으로 11절에서는 「주여」, 19절에서는 「선지자」, 29절에서는 「메시야」「그리스도」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변화과정을 통하여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은 영적 참 자유 즉 생수의 강물이 내면에서부터 흘러 넘쳐나는 기쁨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Ⅳ. 사마리아 사람들의 확신
조용하던 수가성의 사마리아 사람들은 한 여인의 증거로 말미암아 갑작스럽게 생기가 솟아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여 여인의 뒤를 떼를 지어 따라 갔습니다. 그들은 곧 야곱의 우물가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곳에서 구원의 말씀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예수님의 말씀에 심취되었던지 이들은 예수님을 이틀씩이나 마을에 유하게 하면서 까지 말씀을 더 들었습니다. 그런 이후에 마을사람들도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된 마을 사람들은 수가 성 여인에게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42절)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수가 성 사람들이 그 여자를 무시해서, 멸시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자기를 주님께로 인도한 사람을 고맙게 여기지도 않고 멸시까지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주님을 영접하게 된 기쁨을 확신가운데 자랑스럽게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처럼 여러분들도 수가성의 여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처럼 듣지 말고 내 생애에 일어날 구원의 기쁨과 성령 역사의 체험으로 받아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믿은 것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하고 또 복음을 남에게 담대하게 증거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수가성의 여인이 생수를 구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영혼의 생수, 즉, 성령 충만을 간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가 생동감 있는 신앙생활, 능력 있는 신앙생활, 별같이 빛나는 인생을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주안에서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거듭남의 은혜를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로서 아름답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날마다 바라보며 믿음 안에서 사는 자만이 결국에는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사마리아 여인의 그 후 생활을 기록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예수님을 만난 후 “와 보라!”는 전도의 말 한마디를 통해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실을 목격한 이 후 가는 곳마다 오늘 겪은 이 이야기를 간증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보이지 않는 제자로 예수님을 따라 나섰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리스도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생명을 마쳤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이 변화된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제자 삼는 사역을 명하시면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말씀하실 때에 ‘사마리아’를 강조한 것은 여인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400년 막힌 담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우물가 대화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쓰심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다 똑같지는 않지만 우리가 처한 상황과 내가 가지고 있는 경력에 의해서 쓰임 받습니다. 여러분! 모두 다 이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사역에 쓰임을 받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결론으로 말씀 드립니다.
수가성의 여인은 오늘도 이 땅에서 참 만족과 참 기쁨과 참 평강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며 고통당하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수가성의 여인이 다섯 번씩이나 결혼을 하고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으면서도 참 만족을 얻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가 제 아무리 높은 세상 권력을 잡아서 쥐어흔들어 보고, 돈을 많이 벌어서 하고 싶은 것을 다해 보고, 없는 것 없이 다 꾸며 놓고 살아보아도 참 만족과 참 기쁨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그 방법은 단 한가지뿐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주시는 생수의 강을 마셔야 합니다. 그것이 곧 성령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늘찬양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님들은 다 한 마음을 가지고 이 귀한 생수를 받아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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