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인물강해

요안나의 섬김과 봉사

늘찬양 2011. 4. 29. 21:13

요안나의 섬김과 봉사

눅 8:1-3, 24:1-10,2011.05.01.늘찬양교회

 

천사가 귀한 보물을 가지고 지상에 내려와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을 가진 사람에게 이 보물을 선물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의 손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천사에게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천사의 마음에 쏙 드는 손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천사는 마을에서 가장 예쁘게 생긴 세 딸을 둔 가정을 방문하였습니다. 소문을 들은 큰딸이 천사에게 손을 내밀면서 "제 손을 좀 보세요. 항상 이렇게 부드럽습니다. 그리고 향기가 납니다." 둘째 딸도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제 손은 항상 깨끗하답니다. 자, 보세요." 그러나 한쪽에서 열심히 일을 하던 셋째 딸은 손을 감추면서 말했습니다. "제 손은 너무 거칠어요. 매일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만드느라 손에 물기가 마를 날이 없어요." 천사는 셋째 딸에게 보물을 주며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손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 셋째 딸 이상으로 아름다운 봉사의 손을 가지고 예수님을 섬겼던 귀하고 아름다운 여인 ‘요안나’에 대하여 공부하고자 합니다.

Ⅰ. 요안나는 어떤 여인인가?

여인 ‘요안나’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수많은 여인들중에 비교적 높은 세상적 지위와 권력과 부를 누리며 살고 있었던 여인으로 아름답고 귀한 마음씨를 가진 여인입니다.

‘요안나’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은혜를 주신다'라는 뜻으로서 ‘요안나’라는 여인은 헤롯왕의 궁전에서 궁중재산을 돌보고 있는 청지기 ‘구사’의 아내로서 주위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었던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이 여인이 알 수 없는 중한 병에 걸려서 참으로 오랜 시간동안을 병으로 인해 많은 고통과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의 질병을 깨끗하게 고침 받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일이었습니다(눅 8:1-3).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값없이 병 고침을 받은 ‘요안나’라는 여인은 예수님께 자신의 고마운 마음을 감사함으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예수님은 사례를 극구 사양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요안나’는 더 많은 감동을 받고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받고자 주님을 가까이 따르며 섬겼습니다. 특별히 ‘요안나’는 물질로 봉사를 많이 하였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 중에서도 물질이 많아서 교회를 물질적으로 크게 섬길 수 있는 그런 귀한 일군이 많이 나오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성경 대부분의 내용을 살펴보면 부자보다는 없는 자 가난한 자들이 더 열심히 주님을 따라 나섰던 것을 봅니다. 그러나 ‘요안나’ 예외였습니다. 남편이 ‘헤롯 안디바’의 재정을 맡아서 일하던 청지기였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유하고 넉넉한 삶을 살아 갈 수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직자의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약간의 권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칭찬을 받으며 넉넉하고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병 고침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열심히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늘나라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안나’가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따르기 위해 주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가진 자와 배운 자들 대부분이 교회를 선택하고 출석할 때 조그만 개척교회보다는 교회의 성도수가 많고 건물이 완성되어진 큰 교회를 찾는 경향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도 그런 레벨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안나’는 자신의 신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또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던 상관없이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에 참여하여 말씀 듣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믿음의 순수성을 요안나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믿음의 순수성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후 3일째 되는 부활절 새벽에 더 빛나는 모습으로 들어났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0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예수님의 열한 제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다 피신한 가운데서도 신앙의 지조를 지키며 부활하신 날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 ‘수산나’와 함께 예수님의 무덤에 향유를 바르고자 찾아갔던 모습 속에서 분명하게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요안나를 비롯한 세 여인은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는 그런 귀한 은혜를 덧입게 되었습니다. 요한나가 이렇게 믿음의 순수성을 지키며 살다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직적 목격한 축복을 통해 우리가 도전 받아야할 영적교훈은 오늘날 환경과 여건에 따라 쉽게 이 교회 저 교회를 옮겨 다니며 신앙과 불신앙의 경계를 넘나드는 현대의 신자들에게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살아가는 자들에게 어떤 축복이 주어지는가에 대한 좋은 선례가 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감사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몸 된 교회를 떠나지 않고 죽도록 충성하다가 마지막 날에 구원의 반열에서 잘했다 칭찬받으며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귀한 영광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Ⅱ. 요안나의 체험과 전도

‘요안나’가 이렇게 열심히 주님을 쫓은 이유는 단지 그녀의 병이 예수님을 통해 고침 받은 것 때문 만은 아닐 것입니다. 요안나가 이방인의 아내로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명성과 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열심히 따라나섰을 때는 분명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저는 요한복음 4장 46절부터 54절에 나오는 말씀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이 내용은 갈릴리 가나에서 있었던 두 번째 이적으로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을 때 ‘그가’ 예수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직접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47절)하며 부탁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때 여기에 나오는 ?그? 다시 말해 왕의 신하가 누구냐?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사람이 ‘요안나’의 남편이자 ‘헤롯 안디바’의 청지기인 ?구사?라고 많은 성서학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볼 때 남편 ‘구사’가 직접 예수님을 찾아가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할 수 있을 정도의 믿음을 갖기까지 누구의 도움과 전도를 받았겠느냐는 사실입니다. 바로 자신의 병 고침을 체험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은혜를 받은 ‘구사’의 아내 ‘요안나’ 적극적이고도 담대한 전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구사’가 예수님을 찾아갈 때까지도 신유에 대한 확신과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사실을 100% 믿지는 못했습니다.

단지 아내의 끈질긴 권유에 못 이겨 예수님께 아들의 병 고침의 문제를 청탁한 것인데 50절과 53절에 있는 대로 예수님께서?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50절)고 말씀하신 그 시각에 아들의 체온이 떨어지고 깨끗하게 고침 받았다는 사실을 듣고서야 비로소 자신도 믿고 그리고 “그 온 집이 다 예수를 믿었더라.”는 말씀이 5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후 ‘구사’는 예수 믿는 일로 관직에서까지 쫓겨나는 어려움을 당하지만 오히려 믿음을 잃지 않고 주님께 감사하였습니다.

Ⅲ. 요안나의 가정과 믿음

로마제국 당시 상류층에 있던 여성들은 남편과 거의 같은 예우와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렇다 보니 남편의 신분은 곧 자신의 신분인고로 더 높은 신분의 남자를 얻기 위해 언제든지 높은 지위의 사람과 눈이 맞으면 현재의 남편을 걷어차고 쉽게 재혼을 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여자들은 자신의 신분확장과 세력 확장을 위해서라면 어떤 남자라도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행동하였기 때문에 그 당시 로마 관료들의 성적타락은 극에 달해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환경 속에서 요안나가 가정의 순수성을 잃지 않고 지켜오고 있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더욱이 남편이 아내를 위해 개종까지 하고 관직을 떠난 것은 그녀의 믿음과 남편에 대한 성실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사실을 살펴볼 때 가정에 귀감이 되고 남편과 부모에 덕을 끼치며 사랑 받는 존재만 된다면 얼마든지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여인들이 예수 믿는답시고 시부모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고 남편 밥 굶기는 것은 일상이고 집안 청소 도 해놓지 않는다고 하면 누가 이런 아내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을 증거 하기 이전에 내가 먼저 예수 사랑의 흔적과 믿음의 본을 가족에게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요안나’는 과거 자신이 예수를 믿기 전 어떤 여인이었다는 것에 대하여 생각을 지워 버렸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 선생이 예수라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주안에서 더 많은 영적 비밀을 발견하고자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주님을 따랐듯이 요안나는 주님 안에서 영적 세계의 큰 비밀을 깨닫고 평범한 여인, 이름 없는 한 여인으로 돌아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남들이 「부정한 여인」으로 「창녀」「미친 여인」으로 불렀던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여인과 행동을 같이 할 수 있었겠느냐? 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고자 ‘수산나’와 ‘막달라 마리아’ 등의 여인과 함께 떠날 때 자신의 체면과 이해력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의 부활은 도저히 믿어질 수 없는 것이지만 끝까지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자 무덤까지 따라 나섰던 ‘요안나’의 모습은 우리에게 순수한 믿음과 겸손한 신앙인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Ⅳ. 요안나의 섬김과 봉사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인 요안나는 오늘날 대통령 재정담당 보좌관이나 재경부 장관과 같은 자리의 아내로서 부와 권력과 미모를 소유한 막강한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요안나는 이렇게 남이 부러워할 만한 남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류층 귀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보다 예수님을 섬기기를 좋아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자랑거리보다 부귀영화보다, 예수님을 따르며 섬기는 것을 좋아한 아름다운 마음의 여인이었습니다. 특별히 이 시간에는 요안나가 받은 은혜와 섬김과 봉사의 모습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요안나는 예수님을 통해 병 고침의 은혜를 받은 여인이었습니다.

그 병이 자신의 병일 수도 있고, 남편의 병이나 자식의 질병일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을 치료 받았고, 요안나는 아들의 병을 치료함 받았습니다. 이들의 체험적인 신앙이 그들로 하여금 주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을 변함없는 믿음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혹 여러분의 육신적 질병을 고쳐주신 일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저주받은 영혼의 질병을 고쳐주기 위하여 골고다 십자가에서 보혈의 피를 흘려주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 은혜를 체험하고 믿음 안에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육신의 질병으로부터 해방 받은 여인들이 그 체험적인 신앙으로 열심히 주님을 사랑했거늘, 하물며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영생을 얻은 오늘 우리 신앙인들이 어찌 주님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그 구원의 확신과 성령의 능력의 체험은 오늘 우리로 하여금 갈릴리 여인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고 충성하도록 우리 속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뭐니 뭐니 해도 체험입니다. 머릿속에 성경 66권의 내용을 꿰뚫고 있어도, 신학에 박사가 되어도, 내 체험이 없으면 든든한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이제껏 신앙생활 해 오시면서 아마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셨을 것입니다. 그 체험의 은혜를 나누는 영적기쁨이 은혜의 충만함으로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둘째, 요안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끝까지 잊지 않고, 나아가서 예수님을 섬기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생애 중에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 어디 한 두 사람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 중에 도리어 배은망덕하고 배신하여 예수님의 은혜를 저버린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안나는 그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변함없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봉사하며 헌신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충성하되 죽도록, 죽기까지 충성하기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어떤 이는 교회에 다니되, 한 번 두 번 다니다가 슬그머니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열심히 봉사하면서 신앙생활은 하되, 한 해 두 해 열심히 하다가, 그만 시들시들 하는 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으면 안 됩니다. 기왕 예수 믿으려면 열심히 믿어야 합니다. 일단 신앙 생활하기로 했으면, 때론 피곤하고, 때론 어려운 일이 있고, 때론 유혹이 있어도 이런 것들을 다 훌훌 떨쳐 버리고, 적극적인 자세로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는 믿음의 산 증인들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 요안나는 자기의 재물로 주님과 제자들을 기쁘게 섬겼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의 대상에게 무엇이든지 주기를 기뻐합니다. 그러나 거짓된 사랑은 오히려 받기를 더 즐거워합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음을 깨달을 때가 진정으로 사랑할 때입니다.

요안나를 비롯한 세 여인들은 아낌없이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그것도 한 마음이 되어서 섬겼습니다. 얼마나 귀한 모습으로 섬겼으면 누가복음 8장 3절에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까지 기록하고 있겠습니까? 요안나를 비롯한 세 여인은 여자의 몸이었기 때문에 남들 앞에 서서 대중적인 집회를 인도할 수는 없었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의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여러 가지를 공급하며 기쁜 마음으로 섬겼습니다. 자기들의 소유와 가진 건강과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멋진 섬김과 봉사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넷째, 요안나는 끝까지 충성스럽게 주님을 따랐습니다.

요안나를 비롯한 세여인들 가운데 예수님을 은 30냥에 판 사람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을 버리고 자기들만 살겠다고 도망갔던 비겁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의 뜰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소심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안타까이 지켜보았습니다. 주님의 시체에서도 떠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무덤을 지키는 여인이 되었고, 영광스럽게도 예수님 부활의 첫 목격자이자 증인이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선포에서 시작된 종교입니다. 이 첫 증인이 바로 이 갈릴리 여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입에서 우리 기독교의 증거가 시작된 것입니다. 요안나를 비롯한 세여인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선교 후원회 팀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갈릴리 여인들보다 더 아름답게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는 성도들을 주님은 보고 싶어 하십니다. 누가 그 일을 감당할 것입니까? 오늘 이 시간 예수님은 바로 우리를, 나를 부르시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부디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물질을 바치며 시간도 바치며 봉사하는 복음이 동역 자들이 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요안나’는 주님께 치유함을 받고 자기의 소유를 주께 드려 감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 앞에 자신을 드리는 것이 이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 소중하고 귀한 것임을 깨달아.... 온 몸과 마음과 물질을 드려 주께 봉사함은 물론 ‘막달라 마리아’‘수산나’와 같은 과거 천한 여인들과도 함께 어울려 행동하기까지 자신을 낮추며 오직 주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구하는 자로 겸손한 삶을 사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수하고 성실한 믿음이 남편의 영혼을 구했고 아들의 병까지 깨끗하게 고침을 받게 되었으며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요사이 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거기다 배웠다고 가진 것이 있다고 더 나아가 조그마한 권력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얼마나 거드름을 피우고 오만불손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가진 자들의 횡포가 강단을 뒤흔들어 놓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요안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 겸손히 자기를 낮추며 변치 않는 믿음을 가지고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으며 행실을 통해 주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여러분의 모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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