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인 성 과부 ♥
눅 7:11-17,2011,04.03.늘찬양교회
여러분들의 가족이나 친구, 친척 중에 뜻하지 않은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하여 커다란 슬픔이나 아픔을 경험해보신 분이 계십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죽는 것이 정한 이치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이별은 슬프고 고통스럽고 아프다는 것입니다. 아마,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다 장례식은 슬프고 고통스러운 자리인 것입니다.
저 역시 목회 생활을 하면서 여러 번의 장례식을 치러 본 경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잊히지 않은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운명하신 심정애권사님을 비롯하여 윤애순 집사, 그리고 젊은 처형의 죽음 등이 있습니다. 이렇듯 한 사람이 죽음도 애절하고 슬픈데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일본 동북부 센다이 지진으로 30여 가옥이 송두리째 사라지고 2만5천명의 사망 및 실종자의 가족과 부모는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고통스러울까요? 온 세계가 일본을 지원하고 있지만 그런 도움이 얼마나 힘이 될까요?
지금도 이 세상에는 여러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이렇게 절망과 좌절의 슬픔과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생명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행복함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차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바라기는 늘찬양교회 성도들만큼은 부활의 예수님으로 인해 생명과 소망과 기쁨 안에서 날마다 늘 찬양하며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Ⅰ. 두 행렬
오늘 말씀은 나인이라는 성에서 시작됩니다. ‘나인’이란 ‘사랑스럽다, 즐겁다’라는 뜻으로 아주 좋은 동네 이름입니다. 나인성은 가버나움으로부터 서남쪽으로 약 40Km 떨어져 있는 ‘모레산’ 기슭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이곳에서는 아름다운 이스르엘 평원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데, 아마 그 이유 때문에 ‘사랑스럽다’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스러운 마을’에 두 행렬이 지나갑니다.
한 행렬은 주검을 메고 마을로부터 성 밖으로 나오는 죽음의 행렬입니다.
12절에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한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외아들의 죽음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가슴앓이를 하며 통곡하는 어머니와 죽은 청년을 메고 나오는 동네 사람들의 행렬로서 슬픔의 행렬이었습니다. 절망의 행렬이었습니다. 한숨과 눈물의 행렬이었습니다. 나아가 죽음의 행렬이었습니다.
또 다른 행렬은 나인성 안으로 들어가는 예수님과 그 제자의 행렬입니다.
11절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 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여기에서 “그 후에”는 1절에서 10절의 사건 이후를 말합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병들어 죽어가는 백부장의 종을 고친 사건이 나옵니다. 죽어가는 백부장의 종을 살린 이 후에 예수님을 따른 행렬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을 보고 제자들과 따르는 사람들이 “너 봤지? 나도 봤어!” “세상에 그런 일이 다 일어나다니…. 놀라운 일이야!” “죽어가는 사람을 살렸는데 무슨 일인들 못하실까….” 아마 이런 이야기들이 하면서 사기충천해 있는 생명의 행렬입니다. 그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활기가 넘치고 힘이 있었겠습니까?
이렇듯 나인 성을 중심으로 죽음의 행렬과 생명의 행렬이 만났습니다.
세상 인생길에도 이렇게 죽음의 행렬과 생명의 행렬이 드러나 있습니다. 과연 지금 여러분
들이 걷고 있는 길은 죽음의 행렬입니까? 아니면 생명의 행렬입니까? 이 두 행렬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은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있느냐?” 즉 “예수님께 붙어 있느냐?”에 있습니다.
예수님께 붙어있지 않는 행렬은 겉보기에 성공 같으나 실패와 죽음의 행렬입니다.
반면 예수님께 붙어있는 행렬은 믿음‧소망‧사랑‧행복‧축복이 넘쳐나는 생명의 행렬입니다.
신명기 4장 4절에는 아주 재미있고 인상적인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사람들!” 이 말씀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알브올 사건을 회상하면서 강조한 인상적인 말씀입니다(민 21-24장).
이스라엘 백성 앞에 두 길이 있었습니다. 한 길에는 육체의 욕망을 채우며 즐길 수 있는 모압의 여자들,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는 술과 음식이 있었습니다. 많은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이 이 즐겁고 재미있는 길을 따라갔습니다. 또 다른 길에는 마실 물도 먹을 음식도 시원치 않았습니다. 욕망을 채우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만 더해갑니다. 그 길을 가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한때의 즐거움과 재미를 찾아갔던 사람들은 24,000명이나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붙어 떠나지 않은 사람은 오늘까지 다 생존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므로 믿음‧소망‧사랑‧행복‧축복이 넘쳐나는 생명의 행렬을 걸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Ⅱ. 나인성 과부
특별히 오늘 본문에는 한 불쌍한 과부가 자기의 유일한 기쁨이자 소망인 외아들이 무슨 연유에서였는지 죽어서 상여에 맨 채 나인이란 성문을 빠져나가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은 이 여인의 아픔을 단적으로 증명이나 해 주듯 누가복음 7장 12절에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함께 나오거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이 여인의 슬픔이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 슬픈 사건임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어느 장례식도 슬픔이 없겠습니까만 이 장례식은 더욱 큰 슬픔이 있는 장례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이 한 과부의 독자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과부는 가난과 고난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생명처럼 아끼고 사랑하며 남편처럼 의지하는 외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이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심정은 절망과 슬픔, 비통함,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고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들을 잃고 통곡하는 여인과 함께 장례행렬에 동행을 합니다. 큰 슬픔을 당한 이 여인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기 위해 많은 사람이 동행을 한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동네에 한 분이 돌아가시면 모든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가족들을 위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동네 청년들이 다 나와 꽃상여를 메고, 상여 앞에는 수많은 만장 깃발을 들고 갔습니다. 장관이었습니다. 아마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장례행렬도 그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동지역의 장례에 있어서 우리와 조금 다른 것은 죽은 사람의 관을 두껑도
닫지 않고 검은 천을 덮은 채로 그대로 메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 검은 옷을 입은 여자들이 울면서 따라갑니다.
그런데 우연히도 죽은 자를 멘 관은 나인 성에서 나오고 있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마침 나인 성을 향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피곤하고 바쁜 전도의 여행길이셨지만 슬피 울며 상여(관)를 뒤따르는 여인의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 그냥 지나칠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상여를 메고 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정지하라
″ 하시고 우는 나인성 과부를 향해서는 ″울지 말라″(13절) 말씀하시고는 상여에 가까이 다가가서는 그 관에 손을 대시며 우렁찬 목소리로 죽은 청년을 향해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14절)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죽었던 그 청년이 다시 일어나 앉고 말도 하는 삭개오의 부활과 같은 동일한 생명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특별한 처방이나 주사약도 없이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14절)는 말씀 한마디로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 놀라운 기적은 일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전능자 예수님만이 가능한 엄청나고도 놀라운 기적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은 무엇 때문에 이 청년을 살리셨을까? 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죽은 사람을 세 번이나 살려주셨습니다. 야이로의 딸, 나사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인 성 과부의 아들입니다. 야이로의 딸은 아버지의 간청으로, 나사로는 누이의 간청으로 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주님이 자원해서 살려주셨습니다. 당시에 죽은 청년이 이 사람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 청년을 다시 살리셨을까요? 예수님 자신의 영광을 구하기 위함이었을까요?
나인 성에서 죽은 청년의 관을 메고 나올 때 그 따르는 과부의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과부는 죽은 아들의 관 바로 뒤에서 슬피 울며 따라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들을 잃은 슬 픔 때문에 넋이 나간 사람처럼 때로는 통곡하며, 때로는 가슴을 치며, 때로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걸어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여인이 먼저 눈을 들어 지나가시는 예수님과 그의 일행을 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과부를 보신 것입니다. 한 불쌍한 인생을 보셨습니다. 애절한 여인을 보셨습니다. 아들을 잃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한 비참한 여인을 보신 것입니다.
아들은 이 여인의 유일한 희망이었고 삶의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식이 젊은 나이에 죽어버린 것입니다. 이 자식의 죽음과 함께 여인 안에 있던 모든 희망도 죽어버렸습니다.
자식 하나만 죽은 것이 아니라 이 여인에게는 모든 것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다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다 묻는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남편이 죽으면 뒷산에다 장사 지내고, 자식이 죽으면 앞산에다 장사 지낸다.”고 하지요?
어머니들의 공통된 마음은 자식은 곧 자신의 목숨이요 생명입니다. 그런데 목숨과 같은 그 자식이 죽은 것입니다.
그 사랑스런 아들을 관속에 넣고, 그 뒤를 따르는 여인의 비애와 눈물을 상상해 보십시오.
주님은 자식을 잃은 이 애절한 어머니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주님이 죽은 청년을 살리신 것은 그 청년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살리신 것이 아닙니다. 자식을 잃어 안타까워 울고 있는 한 애절한 여인을 보시고 그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어 아들을 살리신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 고통을 함께 할 사람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나는 혼자라는 사실 아닙니까?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절대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하시고, 여러분이 고통스러워할 때 함께 고통스러워하시는 분이십니다.
“누구도 나를 이해 못 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여러분의 아픈 마음을 아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나의 딸아! 너의 아픔과 고통을 나도 안다. 내 마음도 아프단다. 네 아픔이 곧 내 아픔이란다.”
무엇보다 우리 주님은 쓰러진 자를, 넘어진 자를, 죽은 자를 일으켜 세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질병에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걱정과 근심에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낙심과 좌절에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불행의 늪 속에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사업에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그리하여 다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린 이 사건이 바로 이것을 말해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식을 잃은 이 여인처럼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분이 계십니까?
좌절과 절망과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분이 계십니까?
이 고통은 누구도 알 수 없어! 하면서 한 숨 가운데 보내시는 분이 계십니까?
이 여인의 주님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주님이십니다.
애절함과 아픔을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 앞으로 가지고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어루만져 주셔서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주님 앞에 가지고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눈물이 기쁨으로, 통곡이 찬송으로, 울음이 웃음으로, 통곡이 감사로, 절망이 희망으로 변화 되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Ⅲ. 과부의 진정한 변화
본문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상여 멘 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는 그 관에 손
을 대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명령하실 때에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시니…” 이 놀라운 기적의 현장에 있던
사람들과 죽음에서 살아난 청년의 어머니가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요?
본문 16절은 이에 대하여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며 예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더불어 17절에서는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위로를 받아야 할 시대에 살고 있고 또 받아야 할 존재들입니다. 우리 주위에서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현실 속에서 아파하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배고파서 우는 아이들로부터 시작하여 심한 물가고(物價高) 난(亂)으로, 마음이 무거워진 어머니의 장바구니의 고통에서, 윗사람과 아랫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각종 업무와 스트레스로 고통 받는 아빠들의 슬픔, 그리고 고부간의 갈등과 며느리로부터 천대 당하면서 흘리는 노인의 눈물까지 우리의 눈물은 다양합니다. 뿐만 아니라 노사분규로 인한 경제적 갈등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이 오늘도 끊임없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슬프게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이 많은 눈물 중에서 외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나인성 과부의 눈물을 보시고 ″울지 말라″(13절)고 말씀하시고 “일어나라”(14절) 말씀하시므로 죽은 아들을 살리셔서 건강한 아들로 되돌려 주셨듯이 우리의 찌들고 병든 삶을 비롯하여 슬픔과 눈물을 닦아주시고 믿음‧소망‧사랑을 회복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빈자리에 인간은 탐욕과 우상으로 채웠습니다. 우상이란 자기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모든 사물과 사상을 총망라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하나님이 된 사람이 있고, 명예나 인기가 하나님이 된 사람도 있고, 친구나 자식이 하나님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그러나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으며 영원한 것이 못됩니다. 나인성의 과부는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이런 귀한 교훈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런 깨달음을 받은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죽은 아들을 다시 건강한 아들로 돌려받은 것으로 끝났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죽은 아들을 돌려받은 것으로 끝났다면 그 만남은 반쪽의 효과만 얻은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와 있지는 않으나 그 여인은 예수님을 구주로, 주님으로 믿고 받아 드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 영혼까지 회복시키고자 의도적으로 그 여인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고백을 주님이 받으셨으며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같은 부활의 기적과 과부의 회심을 통한 구원의 기쁜 소식 즉 구원자 예수님의 소식은 온 유대 사방에 두루 퍼져 나갔 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의 슬픔과 애통과 아픔을 진정으로 돌아보시고 위로해 주실 참 위로 자이시며 치료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말고 예수님께 나아가 우리의 어려움과 아픔 그리고 슬픔과 고통을 쏟아놓기를 원합니다. 그리하면 나인성의 과부의 아픔과 슬픔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듯이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나인성 과부가 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심한 좌절과 절망감속에 나인 성을 빠져나가지만 생명의 주님을 만남으로 아들이 살아나고 자신도 기쁨을 얻은 것처럼 하물며 밤낮 부르짖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절대로 외면치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 문제를 안고 혼자고민하며 방황하지 말고 주님께 가지고 와 내려놓음으로서 예수님의 치유와 사랑을 맛보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물질주의와 기복주의 합리주의에 물 들어가는 잘못된 신앙인 들을 믿음으로 깨우치며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사도 바울이 ‘모든 것을 가진자’로서의 영적 풍요함을 누리며 나인성의 과부와 같은 실패자, 낙심자, 절망 자들을 찾아내어 그들에게 하늘의 기쁨과 소망과 사랑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당당히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14절)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절망의 나래, 슬픔의 나래, 걱정의 나래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며 믿음 안에서 주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며 살아가는 늘 찬양 성도님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 > 인물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안나의 섬김과 봉사 (0) | 2011.04.29 |
---|---|
헤로디아와 살로메 (0) | 2011.04.16 |
실로암 소경 (0) | 2011.03.18 |
[스크랩] 약속(約束)된 영광(榮光). (학개 2:1-23절), (0) | 2008.05.03 |
[스크랩] 여호와의 집을 세우라는 명령. (학개 1:1-15절) (0) | 2008.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