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롱 당하신 예수님
마 27:27-31,2012.04.01.늘찬양교회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시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받으실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되는 구속이 다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이 생각해야할 것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은 단지 십자가를 지신 것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우리의 죄악을 대속하신 것이 되지만, 그 전에도 많은 예비적인 형벌이라 할 수 있는 모욕과 멸시를 다 받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계십니까? 영존하시는 하나님, 천지 만물을 홀로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으로 알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이 영광의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내 죄를 사하시러 이 땅에 오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우리 때문에 온갖 멸시와 천대를 모욕을 다 당하셨습니다. 세상의 주인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만물들로부터 영광을 받아야 마땅하신데 반대로 우리 주님께서는 온갖 모욕과 멸시와 천대와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인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했습니다.
종려주일이자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이 귀한 주일에 나 대신 욕을 당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그 은혜를 감사할 뿐 아니라 나도 주님을 위하여 능욕을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살 각오와 결심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Ⅰ.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받으신 고난 그 첫 번째 형벌은 채찍질입니다.
마태복음 27장 26절입니다.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고 했습니다.
로마 채찍질은 무서운 고통의 형벌입니다. 채찍질 당하는 사람은 옷을 벗게 되고 손은 뒤로 결박한 채로 그 등을 구부린 채 기둥에 묶이고 긴 가죽채찍, 그 끄트머리에 날카로운 뼈나 쇠붙이를 붙인 것을 가지고 마구 때립니다. 채찍을 맞은 죄수의 등은 바둑판같은 모양으로 찢어지고, 이런 채찍을 맞으면 누구나 다 기절하거나 거의 미쳐버리고 죽기도 한답니다.
여러분 우리들 가운데도 고난을 당하여 보신 분들이 계시지만, 이런 채찍질의 고난을 당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이런 고초를 당하셨습니까?
그 해답은 히브리서 13장 12절에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는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속량해 주시는 구속의 십자가요, 나의 죄를 대신 하여 지신 대속의 십자가이며, 공의의 십자가요, 사랑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형벌은 바로 조롱과 희롱입니다.
마태복음 27장 27-29절에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을 데리고 그들은 너른 관정 안으로 갑니다. 모든 군대를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옷을 벗기고 붉은 홍포를 입혔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 할지어다.” 하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서 그 머리에 씌웁니다. 또 갈대를 그 오른 손에 들게 하고 그 앞에서 군병들이 무릎을 꿇고 희롱합니다. 무엇이라 조롱합니까?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 할지어다.”(29절)
여러분 중에 많은 군중들에게 둘러싸여서 놀림을 당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런 모욕을 당하는 사람은 죽임을 당하는 것 같은 모멸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 모욕을 당하시는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이들은 진정 십자가에 달리시는 분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만왕의 왕이시고,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모욕하며, 장난질하는 무서운 죄였지만,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모르기 때문에 담대했습니다.
옷을 벗긴다는 것은 어떤 위치에서 내려오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 사람의 과거의 어떤 이력을 생각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선한 일이나 교훈들에 대하여 다시는 생각나지 못하게 파묻어 버리는 잔인한 짓입니다.
그리고는 홍포를 입힙니다. 그들이 홍포를 입힌 것은 붉은 색 옷은 왕들만 입었는데, 이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하는 뜻에서 입힌 것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유대인으로 왕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왔다는 자면 다윗 같이 자신을 구하고 이스라엘을 구해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닥친 십자가 하나도 해결 못하는 자가 무슨 유대인의 왕이란 말인가 조롱하는 뜻입니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만 되십니까? 만왕의 왕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면류관을 씌웁니다. 그런데 그 면류관은 가시로 만든 면류관이었습니다.
팔레스틴 지방에 여러 종류의 가시가 있지만, 그 때에 예수님께 씌어졌던 가시면류관은 쓰면 살을 뚫고 들어가기 때문에 이것 쓰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이렇게 가시면류관을 씌운 것도 조롱입니다. 왕의 금 면류관은 영광의 상징인 반면에 가시면류관은 저주와 고통과 아픔의 상징입니다. 가시는 저주와 고통의 상징입니다. 그들은 알지 못하고 이렇게 했지만,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요, 그러나 저주와 고통을 당하신 것은 인생의 죄와 사망을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인 것을 보여주십니다.
또 왕이면 마땅히 권위를 상징하는 금홀을 손에 들게 해야 하는데 그 손에 갈대를 들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앞에 엎드려서 경배하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 할지어다!” 조롱했습니다.
Ⅱ. 십자가를 지신 이유
그런데 이런 모욕과 희롱과 고난을 왜 예수님께서 당해야만 했습니까? 이것은 다 우리를 위한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또한 이렇게 당하신 그 형벌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실 그 놀라운 은혜의 성질을 알게 하시는 것임을 깨달음으로 하나님께 찬양해야합니다. 만일에 이들의 조롱과 희롱과 고난이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지셨는지를 우리들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채찍에 맺은 것도, 옷 벗김음을 당한 것도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원수들의 조롱과 멸시를 다 받으시되 한 말씀도 않으신 것도 우리를 위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침 뱉음을 당한 것도 우리를 위한 것임을 믿어야합니다.
주님께서 갈대에 머리를 맞으심도 우리를 위한 것임을 믿어야합니다.
이를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주님 오시기 전 700년 전에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53장 2절부터 8절까지 말씀을 함께 읽되 ‘우리’라는 단어 대신에 '나'라는 단어를 넣어서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나)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나)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나)의 질고를 지고 (나)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나)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나)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내)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도다. (나)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나)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이것이 믿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속죄함을 받은 보혈의 은혜에 참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천국보좌 하나님의 우편에 앉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께 질문합니다.
주님께서 왜 옷 벗김을 당했습니까? 왜 붉은 홍포를 입었습니까?
왜 주님께서 그 무서운 채찍에 맞았습니까?
주님께서 왜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까?
우리 무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채찍에 맞아야하는 것이 마땅하건만 주님께서 우리 대신에 다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우리가 고침을 입었습니다.
Ⅲ. 십자가 사랑을 깨달은 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사랑을 깨달은 자 이를 마음에 믿고 보혈의 은혜와 능력에 참여한 자들은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할까요?
베드로전서 2장 21절부터 24절이 그 해답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우리 주님은 자기에게 욕하는 사람들에게 욕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저주하며 조롱하는 사람들을 저주하거나 조롱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아버지께 기도했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그 일을 완성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이 모습이 오늘 교회의 모습이고, 고난당하신 종의 모습을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고난당하신 그리스도를 많이 묵상해야 합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모습 즉 십자가 앞에서 온갖 고난과 모욕과 멸시를 당하시면 서도 끝까지 참으신 온유하시고 겸손하시며 그러나 위엄 있으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모습이 있습니까?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목회자들은 교회가 하루속히 부흥하여 큰 교회, 큰 건물을 세우는 데에만 시선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성도들은 기복신앙과 복 받고 만사형통함을 받아 평안함을 누리는 것이 신앙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목회자의 자랑은 교회 성도수와 교회건물이 되었고, 성도들은 이 땅에서 얼마나 부유함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가 행복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은 십자가 고난에 있습니다. 아무 말씀을 하시지 않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신데 그 능력이 있습니다. 희롱을 다 당하시기 까지 순종하신 데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변명하거나 보복하지 않고 욕을 당하나 욕하지 않으시는 능력, 억울하게 누명을 썼지만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용서하고 그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면서, 그들을 위해서 십자가 지시고, 희생의 제물이 되신 이것, 이것이 십자가 사랑의 능력입니다. 이 사랑의 능력이 온 세상을 변화시켰고, 천국을 이루어나갈 것입니다.
저는 두밥실용음악학원과의 일어난 일련의 불미스런 모습 속에서 목회자가 법적으로 대항하며 싸우는 것이 덕이 되지 않음으로 아내와 함께 십자가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어려워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아내는 직장으로 나가고...현재는 주말 부부가 되어 만남 속에 학원일, 가정일, 교회 일을 돌아보느라 매일 피곤하지만, 내 영혼과 마음만큼은
얼마나 평온하고 기쁜지 내 입에서 감사 찬양이 저절로 나옵니다. 거기다가 주말부부로 지내면서 아내와의 만남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앙코르 신혼생활을 하는 기분입니다.
이 모든 은혜와 감격과 기쁨이 십자가 능력 안에서 주어진 것을 생각할 때, 그저 감사찬양할 뿐입니다.
사도 바울도 골로새서 1장 24절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고백하였듯이 내가 십자가를 짐은 내가 죄인임을 밝힘이요, 동시에 내가 죄 사함 받았음을 간증함이며, 은혜에 대한 감사의 고백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짐은 내가 기독교인임을 증명하는 생활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못함은 성령침(세)례를 받지 않음이요 성령 충만하지 못함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자가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의 하나님을 알되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 독생자 외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하나님을 먼저 알고, 믿고, 그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다. 기독교인은 복만을 좇아다니는 종교인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려고 십자가를 찾아다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왜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왜 교회에 옵니까?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러 오는 것입니다.
“그 흘린 보배 피로써 날 속량 했으니, 저 하늘 문을 여시고 날 인도하시리. 그 귀한 주의
사랑 나도 본받아 주 위해 힘쓰리…“(찬송가 146장 3절) 찬양하며 주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므로 마지막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귀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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