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이주일 설교 5편 ▒
어린이주일
1. 김찬종 목사 어린이들을 안수하시고 축복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10:13-16
2. 석원태 목사 예수께서 어린이들을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마태복음 18:1-14
3. 최성규 목사 어린이 마가복음 10:13-16
4. 정봉규 목사 부지런히 가르치라 신명기 6:4-9
5. 김운성 목사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면 마태복음 18:1-6
어린이들을 안수하시고 축복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10:13-16
김찬종 목사(과천교회)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그래서 자녀들 양육에 대한 말씀을 정리하며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말씀드리는 제목은 본문에 나와 있는 대로 ”어린아이들을 안수하시고 축복하신 예수님”이라고 정했습니다.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한 것은 소파 방정환 선생님입니다. 그는 어린이가 가정과 사회, 국가의 장래임을 부르짖으며 어린이날을 지킬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때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점되어있을 때입니다. 그러나 그 현실이 계속 될 수 없다는 것을 어린이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어린이날을 지킨 것은 1923년부터입니다. 1948년 우리나라의 정부가 수립된 후 공휴일이 되었습니다.
어린이는 가정의 꽃입니다. 미래의 희망입니다. 국가와 사회의 기초입니다. 새싹입니다. 어린이는 약해 보이지만 언제나 새롭고 싱싱합니다. 우리는 어린이들이 튼튼하고 싱싱하게 자랄 수 있도록 보살펴주고 가꾸어야 합니다. 어른들의 의무이며 부모님들의 의무입니다. 시대의 과제입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어린이를 축복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할 것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어린이를 축복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 때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속죄의 죽음을 담당하시려 제자들과 같이 올라가실 때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는데 큰 역할을 한 제자들 사이에 서로가 크다고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야고보와 요한의 다툼이 심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이들의 모습을 보고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자기 자식들의 지위를 부탁하게 된 것입니다. 오른쪽과 왼쪽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이의 겸손, 정직, 순수, 깨끗함, 정결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천국에 들어갈 표본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부모들이 예수님의 축복기도를 바라고 아기를 데리고 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본문 13절, 14절, 16절입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본문과 같은 내용이 마태복음에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13-15절 말씀입니다.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
예수님은 어린이를 사랑하셨습니다.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에게서 이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첫째, 축복하며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우리가 욕설을 들으면 기분이 나쁜 것은 말한 그대로 이루어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때론 욕을 들은 그대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은 것은 좋은 말대로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축복은 축복한 것만큼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저주는 저주한 것만큼 그대로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너희 혀를 자갈 먹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을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4장 28절에도 보면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의 근거는 이렇습니다.
출애굽한 히브리 민족이 광야생활을 마무리할 즈음에 하나님은 그 지파의 두령들을 한 사람씩 선출하여 그들이 장차 들어가서 살 땅을 정탐토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정탐한 땅은 한마디로 사람이 살아가기가 매우 좋은 땅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땅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했습니다.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이었기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신체조건도 좋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탐꾼들 어느 누구도 이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대장부들이고 자기들은 메뚜기 같다고 신세한탄부터 했습니다. 그곳으로 들어가느니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지도자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지도자를 넘어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의 10가지 재앙가운데 하나님의 보호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갈라진 홍해를 건너는 경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어본 사람들입니다. 바위에서 나온 생수를 마셔 본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원망했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아무리 큰 기적을 체험했다하더라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행하리라?입니다.
원망하는 자에게는 원망할 일만 있습니다. 짜증내길 좋아하면 짜증날 일만 생깁니다. 결국 그들은 정탐한 40일, 하루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40년 간을 더 광야에서 살게 되었고 출애굽했던 자들은 광야에서 재앙으로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부정적인 말의 무서운 결과입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또 다른 사건하나가 기억납니다. 예수님을 잡아서 재판하던 로마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석방시켜 놓아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군중들에게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죄 없는 자를 죽이는 이 피 값을 어떻게 할 것인가?…" 유대군중들의 대답입니다.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소서?
하나님은 그들의 입에서 나온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서대장에 의해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그 후 그들은 전 세계에 흩어진 민족이 되었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세계 제 2차대전 때는 600만이 독일 나치의 핍박을 받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유대인이기에 당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부모의 죄가 자식들에게까지 돌아가게 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자식에게 축복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자식에게 긍정적으로 인생을 사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복 받기를 좋아하던 야곱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가 애굽에 갔을 때 그의 아들 요셉의 두 아들 즉 손자를 축복 기도했습니다. 복은 축복하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어느 집에 가든지 그 집이 평안하기를 빌라고 했습니다. 그 집이 받아들이면 그 집것이요, 받아들이지 않으면 축복은 빈자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읽게 해야 합니다.
교회출석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 자녀들 마음 속에 하나님이 계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그때 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언젠가 비행기로 부산을 다녀올 때 있었던 일입니다. 부산까지는 이륙 후 약 50분 거리입니다. 부산에 거의 도착할 때쯤 옆자리에 젊은 아기 엄마가 아기를 안고 있었는데 그 아기가 울기 시작하더니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이리 안았다가 저리 안았다가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기를 받았습니다. 꼭 품어 안고 찬송을 불러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로다? 두 번쯤 불렀을 때 아기가 조용해지고 새근새근 잠이 들었습니다. 아기의 부모들도 교회에 다니는데 찬송소리에 아기가 잠이 드니까 신기하다고 하였습니다. 신기할 것이 무엇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전하여진 것이지요. 자기들도 이제부터는 아기에게 찬송을 불러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아기와 함께 찬송하십시오. 같이 성경을 읽으십시오. 영적으로 통합니다. 같이 교회에 나오십시오. 부모들이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면 아이들도 그대로 따라합니다. 술을 먹습니다. 담배를 피웁니다. 그러나 성경 읽고 기도하고 찬송 부르면 그대로 따라 합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그대로 합니다. 주일 잘 지키면 그것도 따라서 합니다. 정직하고 진실하면 그대로 따라서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훌륭한 자식들 뒤에는 반드시 훌륭한 부모님이 있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있습니다. 출애굽의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는 모세입니다. 그 아들 뒤에는 어머니 요게벳이 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네 가지의 교육기관이 있습니다. 가정과 학교와 교회와 사회입니다. 이 넷 중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 곳이 가정입니다. 비록 형편상 대학을 다니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릴 때 인격 훈련이 바로 된 사람은 유익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교회출석을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학교 안가는 것은 큰 일처럼 여기고 교회 가지 않는 것은 내버려두면 안됩니다. 피아노 레슨이나 과외 빠지면 큰일이고 교회는 갔는지 안 갔는지 헌금은 드렸는지 안 드렸는지 챙기지 않으면 큰 문제가 됩니다. 제사장 엘리는 자기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잘못해도 그냥 두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가정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내 자식이건 남의 자식이건 관심을 가지고 가르치고 기도하고 믿음의 훈련을 시킵시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먼저 믿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인간은 유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무한합니다. 30년 후의 과천교회는 우리들의 어린 자녀들의 몫입니다. 그들이 장성해서 이 교회를 봉사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자녀들을 양육하십시다. 그래서 위대한 신앙의 유산을 바르게 물려주는 선조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셋째, 사회성 있는 자녀로 양육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이 독선적이면 안됩니다.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봉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양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웃의 아픔을 알아야 합니다. 내 것을 줄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함에 맹목적이면 안됩니다. 내 자식이 하는 일이 전부 다 좋으면 안됩니다. 잘못했을 때 매를 들 줄도 알아야 합니다.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이기지 못했을 때는 승복할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Fair Play입니다. 지금은 아기들을 적게 낳기 때문에 자식들을 맹목적으로 사랑하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잘못 교육되기 쉽습니다. 이기적이고 고집스러운 아이들로 자라기 쉽습니다. 자신의 일을 스스로 처리할 줄 모릅니다.
어느 어머니가 아침식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주방으로 갔습니다. 식탁 위에 아들이 쓴 청구서가 한 장 놓여 있었습니다.
1. 이번 주 아빠 구두 닦아 드린 것. 5,000원
2. 엄마 심부름 세 번 한 것. 3,000원
3. 쓰레기 두 번 내다버린 것. 2,000원
합계 10,000원
어머니는 빙긋 웃으며 그 밑에 답장을 썼습니다. 그리고 10,000원과 함께 식탁 위에 놓아두었습니다.
1. 너를 몇 달동안 내 뱃속에 넣고 다닌 것.
2. 너를 그동안 먹이고 입히고 키우는데 들어간 돈.
3. 네가 아플 때 밤새 울며 기도하며 눈물 흘리며 간호한 것.
4. 이외에도 너에 대한 나의 진정한 사랑까지 전부 공짜이다.
아들은 얼굴을 붉히면서 그 편지를 읽고서 자기가 쓴 청구서 밑에 다시 이렇게 썼습니다. ?위의 것은 이미 다 지불되었음 그래서 만원은 돌려드립니다. 엄마의 아들.?
지금 아이들은 사랑할 줄 모릅니다. 봉사할 줄 모릅니다. 정리할 줄 모릅니다. 궂은 일에는 손을 대지 않습니다. 사회성이 없습니다. 학교 청소도 엄마가 가서 해주어야 합니다.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빗자루를 들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걸레를 손에 댈 줄 알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인간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어른들이 이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축복해야 합니다. 더불어 사는 이웃이 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꾸지람 속에 자란 아이는 비난하는 것을 배운다.
미움을 받으며 자란 아이는 미움을 배우며 자란다.
매를 맞으며 자란 아이는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된다.
놀림을 당하며 자라난 아이는 수줍음을 타게 된다.
사랑을 받으며 자란 아이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
용서받은 경험이 있는 아이는 남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
관용 속에 자란 아이는 참을성이 있는 사람이 된다.
격려 받으며 자란 아이는 자신감을 갖고 자란다.
칭찬을 받으며 자란 아이는 감사할 줄 안다.
공정한 대접을 받으며 자란 아이는 올바름을 배우게 된다.
안정 속에 자란 아이는 믿음을 갖게 된다.
기도로 자란 아이는 희망을 꿈꾸는 사람이 된다.
성도 여러분! 자녀들에게 예배를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를 가르쳐야 합니다. 봉사를 가르쳐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자녀들을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21세기 우리나라의 주인공, 이 세계의 주인공으로 양육되는 우리의 자손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3년 5월 4일
예수께서 어린이들을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마태복음18:1-14
석원태 목사(경향교회)
누군가 18세기는 남자를 발견했고, 19세기는 여자를 발견했고, 20세기는 어린이를 발견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역사의 원년을 이루는 그의 삶 속에서 어린이를 저희 한가운데 세우시고, 천국인의 표본으로 교훈하셨습니다(마 18:2, 막 9:36).
Ⅰ. 예수의 어린이관에 대한 성경을 봅니다(마 18:1-5).
마태복음 18장 2?5절 중에서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라고 하였습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9장 13?15절에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9장 35?37절에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3?16절에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3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어린이관은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셨다고 하였습니다. 결코 어린이는 한편 구석에 있어야만 될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른들 구석이나 가족들의 구석이나 사회나 국가의 한 구석이나 교회의 구석에 있어야 될 존재들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왜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저들 한가운데 세우셨을까?
우리는 어린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 사실을 능히 찾아낼 수 있습니다.
1) 어린이 자체의 존재적 중요성을 일깨워 줌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당시 예수님 제자들이나 어른들은 예수님께 오는 아이들을 꾸짖고 업신여겼습니다. 사실상 저들은 성년이 되기 전에는 여자들과 함께 수에 칠 가치도 없다고 여겨졌던 시대였습니다. 어린이는 아직까지 미숙한 존재로 가운데가 아닌 구석이나 밖에 있어야 될 자들로 취급받던 때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저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실로 놀라운 예수의 행동이었습니다. 그 존재적 중요성을 알려주는 일이었습니다.
2) 어린이는 마땅히 영접받아야 할 존재임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어린이는 부모와 가족과 사회와 국가에서 언제나 그 중심으로, 한가운데로 영접 곧 환영받아야 될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그 큰 이유는 어린이를 영접함이 곧 예수를 영접함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영접할 정도가 아니고,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결과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가운데 있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3) 어린이는 천국인의 표본이 된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이, 어린이는 누구든지 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린이에게 있는 특성을 강조함으로 중생인(거듭남)의 품성을 조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에게는 ① 돌이킴, 곧 회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잘못에 대한 자기 변화가 있다는 말입니다. ② 자기를 낮추는 겸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③ 남을 섬기는 받듦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④ 부모를 향한 신뢰심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⑤ 가르침에 대한 순종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⑥ 주어진 행복에 대한 만족과 감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⑦ 미래를 향한 소망심이 가득 차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3복음서에서는 어린이에 대하여 말할 때,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이야말로 참으로 한가운데 세움을 받는 자들이 아닌가!
4) 어린이는 사랑과 축복을 받아야 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① 영접하였습니다. ② 자기에게 나옴을 용납하였습니다. ③ 그 어린아이들을 안아주었습니다. ④ 저희 위에 안수해주셨습니다. ⑤ 그리고 축복해주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마땅히 가운데 세움을 받아야 할 자들이 아닌가! 예수 사랑과 축복의 대상들은 언제나 가운데 세움을 받는 자들입니다.
5) 어린이는 하늘에 천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마 18:10).
Ⅱ. 교회의 한가운데 어린이를 세워야 됩니다(마 18:6-14).
예수님의 삶은 바로 하나님 나라 운동 그 자체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운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에 대한 교훈을 행하신 그 배경에는 제자들의 다툼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누가 높으냐 하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나고 쟁론이 있었기 때문에 어린아이를 저희 가운데 세우게 된 것입니다(막 9:33?34). 저들은 또한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마 18:1)라고 주님께 질문하였습니다. 교회에서는 누가 크냐고 하는 질문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천국에서는 어린이가 제일 큰 자?라고 대답하시는 가운데, 한 어린아이를 저희 가운데 세우고 천국에 대한 교훈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 부분에 와서 교회로 하여금 어린이를 교회 가운데 세워야 한다는 책임 있는 교훈을 던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어린이를 한가운데 세우는 방법은 어떤 것일까?
1) 예수 믿는 하나의 소자라도 실족케 하지 말아야 된다고 하였습니다(마 18:6?9).
마태복음 18장 6절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소자?는 앞에 나오는 어린아이를 지목할 뿐만 아니라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마 25:40)에게도 해당됩니다. ?실족?이란 말은 ?넘어지게 하다?(마 16:23), 혹은 ?오해하게 하다?(마 17:27)라는 뜻으로 유혹에 빠뜨려 그 믿음을 넘어뜨리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고 함으로, 소자를 실족케 하는 자의 받을 앙화(殃禍)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소자를 실족케 하는 손이나 발이나 눈은 예외 없이 지옥 불에서 고통을 당한다고 하였습니다(마 18:7?9).
2) 예수 믿는 하나의 소자라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0절에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멸시하지 말라, 관심 밖의 존재로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있는 데도 없는 것 같이, 귀한 데도 천한 것 같이 여기지 말라고 한 내용입니다. 그 이유는 그 소자들은 이미 하늘에서 파송받은 하나님의 천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국가를 지키는 수호천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단 10:13, 12:1). 교회를 지키는 수호천사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계 1:20). 혹은 개인을 지키는 수호천사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행 12:15). 본문에는 어린이를 지키는 수호천사가 마치 신복이 왕을 가까이 배알하듯이(왕하 10:8), 하나님 앞에서 저 어린이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마 18:10).
3) 예수 믿는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지 않고 다 찾아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3?14절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에 대한 교회의 목자적 심정을 알려주는 말입니다. 그것을 100마리의 양 가운데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예수의 목자적 가슴에다 비유하고 있습니다.
한 소자에 대한 교회의 목자적 가슴은 ① 개인적인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한 마리 양, 한 소자입니다. ② 참으시는 인내의 사랑입니다.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는 인내입니다. ③ 궁극적으로 찾으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찾고 마는 것입니다. ④ 그것은 기뻐하는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⑤ 그것은 영원한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궁극적 구원의 사랑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은 오늘 교회가 어린이(小子)를 한가운데 세워야 할 책임있는 사명입니다. 교회가 어린이를 한가운데 세움에 있어 그 어린 소자 하나도 실족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를 잃어버렸을 때는 찾도록 찾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말씀하였습니다. 아니 감사하였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라고 하였습니다. 천국복음의 비밀이 어린아이들에게 임하고 있음을 감사하였습니다.
다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그 현장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 예수를 찬양하는 어린아이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마 21:16)라고 격찬하며 만족하셨습니다.
천국은 바로 아이들의 세계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였습니다. 사나운 짐승들이 어린아이에게 끌려 다니는 세계라고 하였습니다(사 11:6). 젖 먹는 어린아이와 젖 뗀 어린 아이들이 맹수들과 함께 사는 평화세계라고 하였습니다(사 11:8). 말하자면 갓난아이들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영적 중생인들의 세계를 말합니다(벧전 2:2, 벧전 1:23).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고후 5:17). 이것은 지상의 전투 교회와 내세의 승리 교회(천국)의 특색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들이 중심이 되는 세계입니다.
※ 어린이는 하나님의 날 한가운데서야 될 존재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어린이를 저희 한가운데 세우시고 천국시민성을 교훈 하였습니다. 중생 받은 영적 어린이는 하나님나라에서 중대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접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저들은 회개와 겸손과 신뢰심과 순종과 감사와 소망의 품성을 지닌 천국인의 표본이 됩니다. 저들이야말로 주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교훈 하였습니다.
※ 교회는 모름지기 이러한 어린아이들을 한가운데 세워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을 한가운데 세우기 위하여 하나라도 실족케 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되고, 그 하나를 잃으면 찾도록 찾아내고 마는 예수님의 목자적 심정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저희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천국인의 품성을 교훈 하셨습니다. 지적으로, 체력적으로, 영적으로 미숙한 어린아이들은 마땅히 교회의 한가운데 자리를 잡도록 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저들이야말로 가정과 교회와 역사의 중심들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의 중심에는 영적으로 거듭난 아이, 곧 갓난아이, 젖 먹는 아이, 젖 뗀 아이, 어린아이들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저들이 교회의 한가운데 자리를 잡아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교회된 특색과 미래적인 중심의 힘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받은 새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 아닌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을 교회의 한가운데, 역사의 한가운데 세우시고 일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영적 어린아이는 교회에서 가장 큰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요 기둥과 터가 됩니다(딤전 3:15). 이 집의 가운데는 어린아이들이 서 있어야 합니다. - 아 멘 -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3년 5월 4일
어린이
마가복음10:13-16
최성규 목사(인천순복음교회)
오늘은 5월 첫 주 성찬주일입니다. 또 오늘은 2003년도 예수님 부활주일 후 두 번째 주일입니다. 더 귀한 것은 오늘은 2003년도 어린이주일입니다. 이제 내일은 5월 5일, 2003년도 어린이날입니다. 어린이. 어린이는 부모들에게 큰 기쁨, 또 즐거움이요, 행복이요, 보람입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3살 때까지 그 삶이 부모에게 일평생 할 효는 다 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가정의 기쁨입니다. 또 어린이는 나라의 희망이요, 또 가정의 기둥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이 화를 낸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화를 잘 내지 아니하시는 분인데, 예수님이 화를 내셨습니다. 언제 화를 내셨느냐? 마가복음 10장 13절로 14절 상반절에 보니까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어린 아이를 만져주기를 바라고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이 좀 피곤하시다고, 힘드시다고 그들을 꾸짖습니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되게 화를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배신할 때도 화를 내지 아니하셨습니다(막 10:26-52). 예수님은 예수님을 찾는 소경 바디매오에게 조용히 하라고 꾸짖을 때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화를 내지 아니하셨습니다(막 10:13-14). 또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죽이자고 사람들이 선동할 때도 화내지 아니하셨습니다(요 8:1-11). 그런데 예수님은 화를 내신 것입니다. 언제? 어린 아이가 예수님께 오는 것을 제자들이 막을 때 그것을 보고 분히 여겼다, 그랬습니다.
혹시 지금 우리가 제자들처럼 어린이가 예수께 가는 것을 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린이도 천하보다 귀한 영혼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어린이를 사랑하시고 가까이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이 어린 아이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마가복음 10장 14절 하반절에 보니까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늘은 2003년도 어린이주일을 맞이해서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오늘 귀한 날, 이 시간 성경적인 어린이 양육법에 대해 알아봄으로 이 땅의 모든 어린이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 가정의 어린이뿐이 아니라, 예수 안 믿는 가정의 어린 아이도, 우리가 사는 인천의 어린 아이뿐 아니라 이 대한민국 어린 아이, 또 대한민국 어린 아이뿐만 아니라 저 북한 땅 어린 아이, 이라크 땅 어린 아이, 전 세계의 모든 족속, 모든 나라의 어린 아이가 다 예수께로 가게 해주고, 그래서 그들이 모두가 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서 예수 아이로 키워주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첫째, 사랑하자
첫째로, 어린이를 ?사랑하자.? 한 번 따라하시겠습니다. ?어린이를 사랑하자.? 그렇습니다. 어린이는 사랑으로 태어났습니다. 또 어린이는 사랑을 먹고 자랍니다. 어린 아이에게 먹는 것은 젖뿐이 아닙니다.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사랑, 엄마의 사랑을 먹고 자랍니다. 사랑 없는 젖은 어린 아이에게 배탈이 납니다. 몸이 병듭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먹이는 엄마의 젖은 그 어린 아기에게 영양입니다. 힘입니다.
안타깝게도 현대 부모들은 자녀를 사랑할 줄 모릅니다. 그럴 겁니다. ?아이고, 목사님, 나는 우리 자녀 사랑하는데요.? 네, 사랑하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뭐냐? 사랑할 줄을 모른다, 그 말입니다. 과잉보호가 사랑인 줄 압니다.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물질을 많이 주는 것이 사랑이냐? 그것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과잉보호만 사랑이냐? 아니다, 그 말입니다. 물질만 해도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로 엄마의 사랑이 뭘까? 부모의 사랑이 뭘까? 부모의 손길, 손길. 어린 아이에게는 뭐가 필요합니까? 엄마의 손이 자주 가야 합니다. 손이 자주 가야 합니다. 이 손은 사랑입니다. 손은 사랑의 표시인 것입니다. 손은 참 아주 어떻게 보면 신기한 것입니다. 고무장갑 끼고 만든 반찬보다 고무장갑 안 끼고 만든 반찬이 맛있거든요. 왜 그렇습니까? 그 손에는 뭐가 있습니까? 사랑 맛, 있습니다. 사랑 맛, 있습니다. 어린이에게는 엄마의 손이 많이 가야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자녀의 이름을 부르고, 함께 놀아주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 이것이 자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직장 다닌다는 핑계로, 돈 벌어서 자녀들 학원비 내준다는 핑계로, 여러 가지 핑계로, 자녀 이름 불러주지 못하고, 함께 놀아주지 못하고,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했다면, 이것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누구처럼? 예수님처럼 어린이들을 부르고, 가까이 하고, 안아줘야 할 것입니다. 바쁜 엄마들, 바쁜 아빠들, 정말로 하루에 몇 번이나 자녀들의 이름을 불러 주냐, 그 말입니다. 하루에 몇 번이나 가까이 해 주냐, 그 말입니다. 하루에 몇 번이나 안아 주냐, 그 말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얼마나 바쁘세요? 우리 예수님은 인류의 구세주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메시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에게 얼마나 관심을 가지셨습니까? 누가복음 18장 16절 상반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그랬습니다. 또 마가복음 10장 16절 상반절에 보니까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랬습니다.
또 자녀를 사랑한다면, 그 자녀를 어떻게 키우느냐? 인격적으로 대우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할 때, 그 자녀에게 물질만 주는 것이 아니라, 과잉보호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 자녀를 인격적으로 대우해줘야 한다, 그 말입니다. 우리 부모들은 자녀를 무시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자녀들의 의견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그, 말이 잘 안 통하는 떠듬떠듬하는 말도 들어주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 말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은 모두가 다 명령입니다. 절대자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에서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을 받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우리 함께 기도하자?, ?우리 함께 기도하자?, ?우리 함께 감사하자.? 효도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효도하라?, ?부모 공경하라?, 그 말만이 아니라, ?우리 함께 효도하자?, ?우리 함께 부모와 어른들을 공경하자?, ?우리 함께 해보자.? 열 번 하라는 것보다 한번 함께 하자 그럴 때, 어린 아이들이, 학생들이 더 많이 따라오고 실천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라고 해서 업신여기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보세요. 현대인의 성경, 번역성경을 보면 마태복음 18장 10절 상반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이런 어린 아이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희는 이런 어린 아이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러므로 자녀를 사랑한다면 업신여기는 게 아니다. 명령만 하는 게 아니다. 인격적으로 대해줘라.
예수님은 광야에서 오병이어를 가져온 소년을 작다고 무시하지 아니했습니다. 먹여야 할 사람들은 남자만 5천 명, 부녀자까지 수만 명입니다. 그런데 고작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를 가져온 소년을 무시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받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감사하셨습니다. 귀중하게 여기셨습니다. 어린 소년이 가지고 온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어리, 그 많은 사람, 먹을 사람에 비교하면 아주 작지만 그것을 작다고 무시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 아버지께 축사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가 늙고 병이 들었습니다. 제자들이 모여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선생님,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메시지 하나만 들려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눈을 감은 채 말했습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아테네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시민들에게 크게 외치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그 때,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여, 재물을 모으는 일에만 충실하지 말라. 그것을 물려받을 어린이들에게 좀 더 많은 사랑과 정성을 쏟으라. 이것이 내 일생을 통해 얻은 가장 고귀한 교훈이다.?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를 어떻게 해야 한다고요? 사랑해야 합니다.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둘째, 가르치자
두 번째입니다. 한 번 따라하시겠습니다. ?어린이를 가르치자?, ?가르치자.?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신명기 6장 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성경 66권의 말씀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 제일 핵심적인 것 6가지가 뭡니까? ?창조주 하나님을 섬겨라.? 그렇습니다. 자녀들에게 예배드리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가르쳐줘야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또 두 번째는 부모를 공경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효를 가르쳐줘야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가정의 소중함을 가르치고 가정을 사랑할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두 나라가 있습니다. 천국 나라가 있고 조국 나라가 있습니다. 자기 조국 나라,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을 사랑할 것을, 애국할 것을 가르쳐줘야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자연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자연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사람을 위해서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을 보호할 것을 가르쳐줘야 돼요. 그 뿐이 아닙니다. 사람은 혼자 살지 못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과 인류를 위해서 봉사하라. 봉사를 가르쳐줘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얼마나 죄악 된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지를 너무나 사람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남북한 다 합쳐봐야 그 면적이 22만 평방 km밖에 되지 않습니다. 남한에 4천 6백만 국민이 삽니다. 북한에 2천 3백만 동포가 삽니다. 미국이나, 뭐 중국이나, 저 독일이나 큰 나라에 비교하면, 그 면적이나 인구가 너무나 작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한국이 음란, 자살, 도박 등 인터넷 유해 사이트 수가 미국 다음으로 세계 두 번째로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음란 메일은 무작위로 발송되어서 보고 싶지 않아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악된 것을 끊을 수 있는 힘은 무엇이냐? 오직 예수 믿고, 성령 받고, 말씀으로 무장하는 그 길밖에 없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이 아무리 걱정한다고 되겠습니까? 그게 되지 않아요. 어떻게 되느냐? 예수를 믿게 하고, 성령을 받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말씀대로 살 것을 가르쳐주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것들을 물리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에 말씀하십니다. ?힘으로 안 되고, 능으로 안 되되 여호와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말씀으로 양육하면, 누구처럼? 요셉처럼 유혹이 와도 유혹을 뿌리치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가르치면 인생을 실패 당하지 아니하고, 성령과 함께 이 세상을 물리치며 능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착각하는 것입니다. 벌써 엄마가, 산모가 아기를 잉태했을 때부터 태교로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들려주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 제일 좋은 교육일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젖 먹을 때, 엄마 품에 안고 젖을 먹으면서 자장가 불러주는 대신에 찬송가를 불러주고, 그리고 흥얼대기 전에 기도하면서 들려주는 것입니다.
어린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듣지 못했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서양속담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자식을 빌어먹게 하려면 재산을 남겨주고 자식을 성공시키려면 신앙과 신념을 넣어 주라.?
자녀는 부모의 말로 자라는 것 아니라,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새벽기도, 철야예배, 주일예배에 틀림없이 주일성수 하는 것으로, 그 뿐이 아닙니다. 십일조도, 감사헌금도, 선교헌금도 가르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배운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는 전도도 가르치고, 기도도 가르치고, 예배드리는 것을 가르쳐야 하는데, 그 중에 무엇도 가르쳐야 합니까? 헌금을 바르게 하는 것도 가르쳐야 합니다. 십일조를 꼭 해야 할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배운 자녀들은 주일성수를 잘 합니다. 새벽기도 잘 합니다. 철야기도 잘 합니다. 가정예배 드립니다. 구역예배 드립니다. 틀림없이 헌금도 합니다. 십일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자녀들에게 기도하고, 말씀 읽고, 예배드리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 말인 것입니다. 기도하는 부모님의 뒷모습을 본 자녀는 반드시 신앙으로 자랍니다. 틀림없이 부모 속 썩이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성경적 효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성 어거스틴은, 20대까지는 허랑방탕 했습니다. 자기 멋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 모니카가 기도했습니다. 그 어거스틴이 자기 어머니를 볼 때마다 그 어머니는 눈물 흘리며 기도를 합니다. 회개하며 기도합니다. ?내 아들 어거스틴을 용서해주시옵소서. 내 아들 어거스틴을 불쌍히 보아주옵소서.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람 되게 해주시옵소서.? 어머니 그 모니카가 울며 기도합니다. 통회하며 기도합니다. 가슴을 치며 기도를 합니다. 그 어거스틴이 본 어머니는 항상 기도합니다. 결정적일 때, 그가 회심할 때, 무엇을 보고 회심했습니까? 어머니의 기도한 모습을 보고 ?가자. 우리 어머니가 나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 내가 이렇게 살 게 아니다. 나 이제 가자.? 그리고 회심하고, 회개하고, 하나님 품으로, 가정의 품으로, 어머니 품으로 돌아와서 결국은 기독교를 세계화하는데 크게 이바지할 수 있는 많은 저서와 많은 기록으로, 그래서 그 한 일이 너무 귀하니까 어거스틴을 말할 때, 그냥 ?어거스틴? 그러지 않습니다. ?성 어거스틴?, 성자의 칭호를 받게 된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의 한 일을 맡았던 칼빈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식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여겨야만 자기 자녀들을 매우 뛰어나게 기르게 된다? 그랬습니다. 또 어느 교육자, 심리학자의 말입니다. ?문제 있는 자녀는 없다. 다만 문제 있는 부모만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문제 있는 자녀가 많다. 문제 있는 어린 아이가 많다. 청소년이 문제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합니다. ?문제 있는 자녀는 없다. 문제 있는 청소년은 없다. 다만 문제 있는 부모만 있을 뿐이다.? 부모가 문제일 때, 자녀가 문제인 것입니다. 기성세대가 문제일 때, 청소년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로만 가르치지 말고, 본을 보이며 가르치는, 어린이를 가르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셋째, 축복하자
세 번째, 어린이를 ?축복하자.?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어린이를 축복하자?, ?어린이를 축복하자.? 그렇습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손을 들어 축복하신 예는 딱 두 군데 있습니다.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축복하셨습니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어린이를 축복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6절에 보니까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나는 성경을 그대로 읽은 것입니다.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우리 예수님이 어린 아이들을 안았다, 그랬습니다. 그들 위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안수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축복하셨습니다.
누구처럼? 예수님처럼 자녀들을 안아줘야 합니다. 그들 머리에 손을 얹어줘야 합니다. 그리고 축복기도를 해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녀를 사랑하는 여러분, 얼마나 많이 자녀를 안아주셨습니까? 얼마나 많이 자녀들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 해주셨습니까? 오늘 깊이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나는 바쁘잖아요. 직장이 바쁘잖아요. 사업이 바쁘잖아요. 돈 벌기 바쁘잖아요.? 엄마들도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그럴 시간 없어요. 쟤들 학원비 대려고 파출부 가야 돼요.? ?나도 공장에 가서 일해요. 너무 바빠요.? ?나도 식당에 가서 일해요. 너무 피곤해요.? 그러나 여러분, 그것 다 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뭐냐? 자녀를 안아주는 것입니다. 손을 얹어주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축복해주는 것입니다.
믿음의 위인들은 자녀의 미래를 항상 축복했습니다. 보세요. 히브리서 11장 20절로 21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아브라함은 이삭을 축복했습니다. 이삭은 야곱을 축복했습니다. 야곱은 열두 지파장을 축복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세워졌느냐? 그 부모가 자녀들에게 축복함으로 말미암아. 선민국가 이스라엘이 세워진 것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부모가 손을 얹고 축복기도 해주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 한 번 따라하시겠습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그렇습니다. 어떤 대리자이냐? 축복권 대리자, 말씀권 대리자, 훈육권 대리자, 신앙전수권 대리자입니다. 축복권이 뭡니까? 하나님 말씀으로 자녀를 축복하는 권세입니다. 말씀권이 뭡니까? 하나님 말씀으로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권세입니다. 훈육권이 뭡니까? 하나님 말씀으로 자녀를 양육하고 훈계하는 권세인 것입니다. 또 신앙전수권이 뭡니까? 아버지의 경건한 신앙을 자녀에게 유산으로 넘겨주는 권세, 이것이 신앙전수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를 축복하는 부모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녀를 축복하는 부모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노아의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효자 셈과 야벳을 노아가 축복했습니다.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의 허물을 들춰낸 함을 노아가 저주했습니다. 그대로 하나님이 이루어지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장자 축복 기도를 가로챈 야곱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들은 아버지 야곱이 손을 얹고 기도한 그대로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복을 많이 받고, 자녀들을 위해서 더 많이 축복을 빌어주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공부하라?, ?공부하라?, ?공부하라? 그래요. 여러분, 부모가 자녀에게 ?공부하라?고 해서 공부했다면, 공부 못 할 놈 한 놈도 없을 거다. 아마. 그런데 여러분, ?공부하라?, ?공부하라?, ?공부하라? 그래도 공부가 되나요?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이 뭐냐? 하루에 한번이라도 그 자녀의 머리에 엄마가, 아빠가 손을 얹고 축복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도 있고, 건강도 있고, 순종도 잘 하고, 공부도 잘 하는 믿음의 아들로 성장하게 될 줄 믿습니다. 믿음의 딸로 자라게 될 줄 믿습니다.
부모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 힘으로 자녀를 키우는 것보다 하나님이 키우실 때, 더 잘 성장하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자녀는 부모의 사랑의 말과 부모의 사랑의 눈물과 부모의 사랑의 기도로 그것 먹고, 그 사랑 먹고, 사랑의 말, 사랑의 눈물, 사랑의 기도 먹고 자녀가 잘 성장하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입니다. 오늘은 2003년도 어린이주일입니다. 어린이는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라고, 부모의 가르침을 따라 살고, 부모의 축복으로 미래를 만들어 간다, 그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자녀들을 하나님 나라의 거목으로, 하나님 나라의 재목감으로, 하나님 나라의 큰 일꾼으로 키웁시다. 성령께서 우리의 피와 땀과 눈물을 아시고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틀림없이 모든 어린 아이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이 복 주시는 대로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형통하고,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 끼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잘 자라게 될 줄 믿습니다.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3년 5월 4일
부지런히 가르치라
신명기6:4-9
정봉규 목사(은성교회)
오늘은 세계교회가 지키는 어린이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주신 귀한 자녀들 위에 주의 은총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미 8군 부사령관을 지냈던 김영기 장로님은 4성장로님인데 그 장로님 얘기를 직접 들었습니다. 8군 사령관 아들이 어느 날 거짓말 한 것이 드러나서 아버지는 아들을 불렀습니다.
거짓말한 사실을 확인 후에 벌을 내렸습니다. 아들의 벌로써 군에서는 완전군장이라고 합니다. 배낭에다 모든 생활도구를 넣고 군화를 신고 그리고 행군을 합니다. 완전군장을 다 하고 인천을 다녀오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가다가 쉬거나 앉는 것도 금했습니다.
경인고속도로를 경유해서 다녀오도록 하고 그 아들의 어머니 미8군 사령관의 아내를 동원해서 어머니가 차를 몰고 아들을 뒤에서 계속 따라가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머나먼 경인 고속도로를 도보로 다녀오는 무서운 벌을 주더랍니다. 잘못을 책임지게 하고 그 잘못을 철저히 뼈아프게 뉘우쳐서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무섭게 교훈 시키는 그런 철저한 교육 이야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주신 자녀를 어떻게 기를 것인가? 우리 가정에 주신 자녀는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주신 선물입니다. 아들이 더 귀하고 딸이 덜 귀한 것이 아니고 아들이건 딸이건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주신 선물이란 말이죠. 우리가 그런 자식을 달라고 요청한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아름다운 귀한 자녀들을 주시면서 주신 것도 받은 것도 축복이지만 어떻게 기르는 것까지 다 가르켜 주시고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 하는 것도 오늘 말씀에서 주셨다 이겁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 이시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네게 명하는 말씀을 네 마음 판에 새기고 네 자녀를 부지런히 가르치라. 집에 있을 때든지 길에 있을 때든지 누었을 때든지 너는 그 말씀을 잘 강론할 것이며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메어서 기호를 삼고 네 미간에 붙여서 표를 삼으라 사람이 드나드는 문설주에다가 써 붙여서 가르치고 그리고 바깥문에도 붙이라. 그렇게 말씀하여 가르친 것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저를 따라하세요. ?네 자녀를 부지런히 가르치라?
토인비는 하나님 없는 교육은 자기를 불행하게 하고 세상을 어지럽게 만든다 가르칩니다.
링컨은 말하기를 ?하나님 없는 중등교육은 작은 도둑을 만들고 하나님 없는 고등교육은 고등도둑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링컨의 어머니 맨슨은 아들이 말하기 시작했을 때 매일 성경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링컨이 9살 때 어머니는 세상을 떠납니다. 그때 링컨에게 유언을 남깁니다.
저를 따라하세요. ?사랑하는 내 아들아 매일 성경을 읽어라. 인생의 위기가 닥칠 때 더욱 열심히 성경을 읽어라. 네 인생 삶의 기준을 하나님 말씀에 두고 살아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매일 성경을 읽어라. 인생의 위기가 닥치거든 더욱 열심히 성경을 읽어라. 인생을 살아가는 삶의 원칙이, 바탕이, 축복이 하나님 말씀에 기인한다고 하는 것을 남겨두고 갔습니다. 맨슨은 그러기에 링컨의 어머니요. 미국의 어머니요. 세계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렇게 정의 할 수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터라-?
세계를 움직이는 위대한 인물들의 배후에는 거룩한 어머니의 사랑의 용광로가 있었다 하는 얘깁니다. 오늘날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를 부지런히 가르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 없는 가정, 생명이 없는 인생, 집은 있으나 가정은 없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세 쌍 중에 한 쌍이 이혼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또 재혼함으로 일년에 우리나라에 갑작스럽게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고아들이 일년에 만 명 이상이라고 지난주 뉴스에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비극적입니까?
허황된 삶, 허영의 삶, 돌아다니며 쓰고 먹고 마시고 쾌락의 죄를 짓고 음란 패역하고 그렇게 해서 이 무서운 죄악의 문화가 허공을 치면서 우리 가정이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자녀가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사회가 썩어져 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책임져야 하느냐? 정치? 경제인? 그 누구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습니다.
구세군 창설자 대장의 부인은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한 어린아이를 하나님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이 세계를 구하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하고 사탄보다 한 걸음 앞서서 하나님 말씀으로 내 자녀를 양육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한 어린 생명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양육하는 것이 온 세계를 구하는 것이며 나라와 민족과 나아가서는 무너져 가는 가정과 사회를 구출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마귀사탄 유혹에 빠지기 전에, 마귀가 유혹하기 전에 깨어 먼저 기도하고 먼저 말씀으로 기르고 있다 라고 하는 고백은 오늘 우리에게 정말 큰 감동이 되는 말씀입니다.
따라하시죠. ?네 자녀를 부지런히 가르치라?
다시 또 얘기합니다. 집이 너무너무 가난해서 아들을 키울 수가 없어서 열두 살 되던 해에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을 집을 떠나 보냅니다.
어머니의 품, 사랑하는 집을 떠나 보내는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때 어머니가 두 주머니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는 내 주머니요. 하나는 하나님 주머니다. 아무것도 가난해서 줄 것이 없습니다. 그 어머니 심장에서 피눈물을 흘리지 않겠느냐? 내가 난 자식을 내가 기르지 못하고 누군가가 밖으로 나가서 길러주고 가르쳐주기를 원하며 집을 내보내는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겠느냐 이거죠. 그때 어머니는 그런 지혜가 떠올랐던 거죠.
그 주머니를 주면서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언제나 네 주머니를 하나님 주머니보다 더 배부르게 하지 말아라. 네가 세상을 살면서 이것을 잊지 말아라? 하는 겁니다.
?얼마 후에 네 앞에 없고 죽을 네 어미가 마지막으로 얘기를 한다. 이것은 네 주머니, 이것은 하나님 주머니야.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살지 모르지만 네 주머니를 하나님 주머니보다 더 크게 더 배부르게 하지 말아라?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유언합니다.
여러분, 시간이 없어서 다 생략을 하고 그는 큰 거부가 됩니다. 후일에 그는 피나는 무서운 노력과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철저한 신앙생활 속에 어머니와 마지막 헤어질때 그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야 된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열심히 일을 해서 세계적인 갑부가 되었다 그 말이예요.
돈을 벌기도 힘들고 모으기도 힘들지만 쓰는 것이 더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거야.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신 것이야 생각을 하고 네 아들아 네 주머니를 하나님 주머니보다 배부르게 하지 말라는 그 말씀을 100% 그대로 실천을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세계적인 재벌, 그 돈을 가지고 가장 먼저 무엇을 했느냐 하면 세계성서협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만드는 공장을 만들었다 이 말이죠. 공장을 만들고 그리고 회사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여러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여행하면서 잠드는 호텔에 보면 머리맡에 반드시 성경이 방마다 한 권씩 놓여 있습니다. 오래 전에 저 공산주의 세계에서 헝가리를 갔습니다.
그때 한창 공산주의가 꽃피고 있을 때죠. 부다페스트 호텔을 들어갔는데 거기에서도 그 방에 내가 잠자는 침실 옆에 성경이 한 권 놓여 있더라 말이죠. 그 성경이 이 사람이 만든 세계성서협회가 만들어서 전 세계 호텔 방마다 비치한 그 사업이 바로 이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유명한 세계적인 대학을 만들고 세계 선교협회를 만들어서 하나님이 주신 그 큰 재산을 하나님 앞에 다 헌납을 해서 오늘까지 세계 방방곡곡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복음사업에 이바지하는 큰 축복의 선교사업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 여러분 내가 수 차례 여러분께 얘기했던 콜 게이트라는 사람이에요
바로 자기이름을 따서 콜게이트라 했습니다.
어머니가 그를 기르시고 가르치고 입힐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지만 그 어머니는
?나는 너를 책임 못지지만 너를 이 땅 위에 선물로 보내주신 하나님이 너를 길러 주실 것이야. 너를 부자 되게 해주실 거야. 어떤 경우든지 세상을 살 때 네 주머니를 하나님 주머니보다 배부르게 하지 마라-?
위대한 어머니의 유언대로 그는 하나님 앞에 멋지게 복되게 위대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영광스런 발자취를 우리에게 남겨두고 가셨습니다. 비록 가난했으나 어머니의 믿음의 가르치심은 결코 위대한 믿음의 아들을 만들어 내서 그 아들이 오늘 세계와 온 인류를 움직이는 축복의 아들로 된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밖에서 일등 했다구요? 학교에서 백 점이라구요? 일류회사에 들어갔다구요? 왜 우리생각은 거기밖에 가지 못합니까? 왜 우리 가정에 주신 귀한 자녀를 거기밖에 생각을 못합니까?
누가 누구하고 경쟁을 해야겠습니까? 내가 누구를 밟고 일어서야 되겠습니까? 왜 그 생각밖에 못합니까? 돈 있으면 얼마나 있습니까? 오늘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진실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다 돈을 준 것이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이 나라, 이 사회는 왜 점점 더 무너져 가는 것입니까?
한국교회는 뭐하고 있으며 우리 한국교회 성도는 뭐하고 목사는 뭐 하는 것입니까?
누가 책임질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자기 자식을 입히고 먹이고 가르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해서 집을 쫓아 내버리는 어머니의 마지막 이 거룩한 유언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100점도 아니고 일류학교를 나왔단 얘기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후대와 이 지구촌에 위대한 일들이 미쳐지고 있습니다.
나는 왜 열심히 일해야 되며 땀흘려야 되며 나는 왜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셨는가?
?옳거니, 목사님 오늘부터 기도를 바꿔야겠습니다. 하나님 내게 복을 주시고 물질을 주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못하는데 그 적은 것 가지고도 계산하고 하나님께 바칠 거리가 없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 로또복권 하나 당첨되게 해주세요. 내가 하나도 안 쓰고 몽땅 다 바치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그런 생각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안됩니다.
돈 있으면 내가 다 하겠습니다. 이 어머니와 아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다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다 처음부터 빈손이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갈것이 없어요. 다 하나님 것입니다. 작으나 많으나 내게 있는 것, 지금 내게 있는 것도 다 하나님 거예요. 그런데 지금도 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서 열려져 있지 않아요.
보세요. 이 위대한 믿음의 어머니가 남겨놓은 거룩한 씨앗을 말이에요.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 집에 있든지 길을 가든지 눕든지 일어나든지 이 말씀을 부지런히 강론하여 가르치라?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허버트는 백 사람의 스승보다 한 분의 어머니가 위대하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자녀에게 하나님말씀을 믿도록 가르치고 알도록 깨우치고 순종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놀라지 마세요. 학교 교육은 평생에 3% 밖에 배울 수 없고 교회 교육은 2% 밖에 되지 않고 가정의 부모님 교육은 95%라고 통계가 나왔습니다.
어떻게 하십니까? 이 귀한 생명의 진리를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와 민족의 미래가 보입니까? 그 미래가 우리 가정에 자녀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감사하게도 우리교회 이-비전스쿨은 아주 대단히 유명해졌습니다. 수백명 아이들이 믿지 않는 아이들이 모였어요. 토요일도 나와서 보면 온 은성의 동산에 아이들이 많아요. 얼마나 마음이 기쁘고 즐거운지 알 수 없습니다. 주변에 있는 큰 교회가 우리교회 하는 것을 다 흉내내서 한다는데 참 흐뭇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 가르칠 선생님이 부족합니다. 우리 모두 아이들을 부지런히 가르칠 선생님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oh happy day로 어린이 주일을 가장 즐거운 날이 되어서 어린이 감사 축제의 한마당으로 만듭니다. 우리 교육부 선생님과 모든 선생님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격려해 주셔서 정말 이 세대에 많은 우리 자녀들이 교회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손길에서 양육되어질 수 있도록 말이예요.
?부지런히 가르키라? 오늘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자녀와 교회 자녀, 우리나라사회 민족의 자녀에게 하나님말씀 생명의 말씀 복된 말씀을 기도하며 사랑하며 부지런히 가르쳐서 하나님을 위하여 이 민족을 위하여 쓰임 받을 수 있도록 귀하게 쓰이는 그릇으로 축복의 재목으로 많이 길러내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3년 5월 4일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면
마태복음18:1-6
김운성 목사(영도중앙교회)
한 대학 교수가 쪽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가 뱃사공에게 물었습니다. "여보게, 자네 철학을 아는가?" "모릅니다." "허허, 자네는 생애의 4분의 1을 잃었군. 그럼 지질학을 아는가?" "전혀 모르는데요." "그럼 생애의 절반을 잃었군. 천문학은 아는가?"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자네는 생애의 4분의 3을 잃었군." 그 때 갑자기 배가 기울어져서 둘 다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공이S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교수님, 헤엄칠 줄 아십니까?" "못 치네." "그럼 교수님은 생애의 전부를 잃었군요!"
이 이야기 속의 교수님은 자신의 지식을 자부했습니다. 분명히 세상에는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차이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과 지식이 적은 사람, 부자와 빈자, 권력자와 보통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비교가 무색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은 살고 죽는 문제가 생기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에는 지식도, 재산도, 권력도 빛을 잃습니다. 그 때는 살아남는 사람만이 위대합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심각한 순간에도 ”누가 더 유식하냐, 부자냐, 높으냐”로 따진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대부분이 이런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본문 1절을 보세요.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제자들은 ”누가 크냐”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점잖게 질문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누가복음 9장 46절에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라고 되어 있는데, 공동번역 성경에 의하면 ”제자들 가운데 누가 제일 높으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서 말다툼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가장 위대하신 주님 앞에서 누가 크냐고 다투었습니다. 서로 잘난 척 하는 것처럼 흉한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런 일로 다투지 말도록 꾸지람을 받았는데도 또 그렇게 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4절을 보면 ”또 저희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고 했습니다. 9장에서 이 문제로 다투더니, 같은 문제로 또 다투었습니다. 그것도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이 다툰 자리가 최후의 만찬을 먹는 자리였다는 것입니다. 이제 한 두 시간 후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것이고, 몇 시간 후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텐데, 제자들은 누가 크냐고 다투고만 있으니, 얼마나 답답합니까? 선생님이신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고자 하시는데, 제자들은 높아질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 보다 조금만 더 나아도 우쭐한 게 우리 마음 아니던가요?
더구나 제자들의 더 심각한 문제는 그 관심사가 이 세상에서의 일에 국한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누가 더 크냐”로 다툰 게 아니라, ”천국에서 누가 더 크냐”를 가지고 다투었습니다. 이 문제를 천국에까지 가지고 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천국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천국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경쟁하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다른 사람을 밟고 위에 올라서서 우쭐하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이 세상과 다릅니다. 천국이 이 세상과 똑같다면 무엇 때문에 천국에 가려고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천국과 이 세상이 완전히 차원이 다름을 보여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누가 크냐”를 두고 다투는 것은 잘못된 관심사입니다. 정말 제자들이 가져야 할 관심이 있다면 ”천국에서 누가 크냐”가 아니라,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것인가”입니다. 우선 천국에 들어가는 게 문제입니다. 천국에서 누가 큰지는 나중에 하나님께서 상주실 때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2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파격입니다. 예수님은 어른을 세우지 않으시고, 당시에 사람 숫자에 계산도 하지 않던 어린아이를 세우셨습니다. 어린이는 변두리 인물입니다. 세상은 어른 중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파격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어느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그곳에 있던 한 편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 세우시고, 그의 손을 치유하셔서 그 날의 주인공이 되게 하셨습니다. 또 다윗은 완전히 성숙한 청년이 못되었지만, 골리앗을 이기고 전쟁터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사울 왕도, 그 어떤 장군도 그 날 다윗보다 못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어린이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말씀하심으로써 엘리 제사장 보다 더 존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가운데 세우신 일은 우리 공동체의 질서가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영도중앙교회에서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누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습니까? 얼마 전에 교우들께서 제게 큰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제게 큰 박수도 보내주셨습니다. 그 순간 저는 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좋은 교회가 되려면 교역자들, 장로님들, 권사님들, 수고 많이 하는 분들을 알아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우리 교회가 더 아름다운 교회가 되려면,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이 한 가운데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작은 자를 가운데 세워야 합니다. 한 편 손 마른 사람처럼 약자를 가운데 세워야 합니다. 어려운 이들을 가운데 세우고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목사를 가운데 세워주고 박수를 쳐주는 여러분들이 교회 안의 약자를 깔보고 돌보지 않는다면 정말 가슴아픈 일입니다. 여러분, 저를 대접하려고 하지 마시고, 교회 안의 어려운 이들을 대접하십시오. 제게 잘 하려고 하지 마시고, 교회 안에 힘들고 인정받지 못하는 분들에게 잘 하십시오. 특히 어린이들에게 잘 하십시오. 그런 모습을 볼 때, 저는 기쁩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장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 다음 구절로 가 봅시다. 어린이를 가운데 세우신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3절을 보세요.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보세요. 주님은 ”천국에서 누가 크다”는 식의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가지고 말씀하셨지요? 이것은 ”큰 자가 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갑니까? 주님은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심각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린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거꾸로 어린이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불가능한 세월의 역류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린아이가 어떤 존재이기에 예수님께서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어린아이가 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4절을 보면 그 특징 한 가지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어린이의 특징은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 이것은 제자들의 관심과는 정반대입니다. 제자들은 누가 크냐고 다투었습니다. 큰 자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교만했습니다. 그게 어른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어린이는 자기를 낮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천국의 조건으로 겸손을 요구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문제는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겸손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겸손해질 수 있습니까? 앞에 나서서 말을 많이 하지 않고 한 구석에 앉아 침묵하고 있으면 됩니까? 아닙니다. 겉으로는 침묵해도 속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책잡는 게 우리 못된 본성입니다. 아니면, 날마다 ”나는 못난이야”라고 자책하면 겸손해집니까? 아닙니다. 백 번을 그렇게 해도, 순간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잊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욕망을 잊고 주님을 닮고자 사막에서 묵상하면서 수도했습니다. 사단이 유혹합니다.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유혹합니다. 물질로 유혹합니다.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사단은 지쳤습니다. ”저 수도사는 진짜 예수쟁이다”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그 때 한 악령이 말합니다. ”제가 수도사를 타락시키겠습니다” 악령이 수도사에게 다가와 속삭입니다. ”네 동생이 이번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단다” 그러자 그렇게 경건하던 수도사가 갑자기 흥분하더니 ”그 형편없는 녀석이 어떻게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될 수 있나? 그 자리는 내 자리야!” 수도사는 동생과 비교하여 교만한 나머지 실패하였습니다.
이게 우리 본성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겸손할 수 있나요? 우리는 여기서 위대한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합니다. 어거스틴은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놀라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어른이 어린아이가 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된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새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과거의 교만하고 죄에 물든 옛 사람을 죽이고, 갓난아이처럼 순결한 새 영혼으로 거듭나라는 것입니다.
가끔 교회 안에 보면 새로 믿는 분들 중에서 어린이처럼 순수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 신앙이 아주 순수합니다. 계산하고 따질 줄을 모릅니다. 신앙에 감동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날마다 감격하면서 삽니다. 기뻐서 교회에 옵니다. 찬송하고 기도할 때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어린아이의 영혼을 가진 분입니다. 육체의 나이는 들었어도, 영혼의 나이는 갓난아이입니다.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출애굽기 15장을 보면 모세의 누나인 미리암과 이스라엘 여인들이 악기를 연주하면서 찬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얼마나 순수한 찬양인지 모릅니다. 기쁨에 넘치는 찬송입니다. 이렇게 찬송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다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원래 그들은 애굽 군대에게 붙잡혀 다시 노예가 되거나 홍해에 빠져 죽었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홍해가 갈라지면서 생명을 건졌습니다. 그 생명은 다시 얻은 생명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태어난 것과 같았습니다. 구원의 감격이 그들을 어린아이로 만들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이런 찬송을 진실하게 부르는 사람이 어떻게 교만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그 순간 주님 안에서 어린아이가 되었습니다. 겸손해지시려면 예수님 안에서 거듭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과거의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십시오. 새로 태어나면 어린이가 될 것입니다.
300장 찬송을 보세요. 이 찬송을 나이가 어린 아이들만의 찬송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의 영혼을 가진 겸손한 모든 사람들의 찬송입니다.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걱정 근심 없고 정말 즐거워 / 예수께로 가면 맞아 주시고 나를 사랑하사 용서하셔요 / 예수께로 가면 손을 붙잡고 어디서나 나를 인도하셔요 /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나와 같은 아이 부르셨어요” 예수님 안에서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찬송입니다. 우리 모두 영적으로 어린이로 다시 태어나길 기원합니다. 모든 교만과 더러운 것을 버리고 어린이의 영혼으로 거듭나서 천국 백성이 되길 원합니다.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 봅시다.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되어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신 후에 어린이들을 실족시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6절을 보세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어린 아이를 실족케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이를 실족시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장난감 사 주지 않는 것입니까? 야단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필요하면 야단도 쳐야 하고, 잘못된 것은 사 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게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로 우리 자녀들을 실족시키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큰 자가 되는 것” 보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함을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녀들을 천국의 자녀로 키우지 못한다면 그것보다 더 심각하게 실족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어느 날 이새의 집에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인 사무엘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사무엘이 찾아온 것은 하나님이 찾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렇다면 이새가 뭘 잘했기에 찾아왔습니까? 이새가 훌륭해서입니까? 아닙니다.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자식 잘 둔덕입니다. 자식 잘 둔다는 게 무엇입니까? 똑똑하고 잘 생긴 자식을 둔 것을 말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자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자녀가 누구였습니까? 다윗이었습니다. 이새가 일생에서 가장 위대한 성공이 있다면 ”다윗”을 낳은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출중한 외모를 가지지 못했고, 막내의 설움을 받았으며, 집안 허드렛일이나 하고, 양떼나 먹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름다운 영혼이 있었습니다. 출중한 영성이 있었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하는 영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믿음이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인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녀를 어떻게 키우고 있습니까? ”누가 크냐의 경쟁에서 이기는 자녀”를 만드는 일에만 치중하지 않습니까? ”천국의 자녀”로 키우는 일에 소홀하지는 않습니까?
어거스틴의 ”참회록 제2권 제3장”을 보면 부모를 원망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당시 멀리 유학 길을 떠나는 자식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힘에 겹도록 마련해 주는 아버지에 대하여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으나, 자식을 위하여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의 아버지는 나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정상적으로 성장해야 하며, 정결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에 관하여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자식이 훌륭히 학업을 마치고 세상적으로 성공하기를 원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망은 나의 마음의 밭을 경작하시는 농부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뿐이었습니다”
외모가 아름다운 자녀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주목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신체가 건강한 자녀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주목을 받을 수 없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방문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혼이 아름다운 천국의 자녀를 만드십시오. 그렇게 키우지 못한다면 우리 자녀들을 실족시키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자녀를 키우면 가정에 영광이 옵니다. 다윗으로 말미암아 베들레헴의 보잘 것 없던 이새의 가정은 왕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을 키웠더니, 그것은 큰 자가 되는 복까지 가지고 왔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큰 자가 됨으로써 천국 백성이 되는 게 아니라, 겸손한 천국 백성이 됨으로써 큰 자가 되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 4절의 말씀처럼 ”자기를 낮추는 그가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우리 각자가 거듭난 겸손한 어린아이가 되길 기원합니다. 아울러 우리 자녀들을 천국의 자녀로 키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게 되길 기원합니다.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3년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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