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찬양강해

440장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

늘찬양 2014. 1. 10. 17:56

440장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 (497)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이끌든지, 아니면 또는 어디로 가라고 명령하시든지,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든지 무조건 절대 복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를 따라 가겠다.”는 각오를 전제로 지어진 주와 동행의 주제 찬송으로 작사자는 이사야 4110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는 말씀을 바탕으로 오하이오 주 히람(Hiram) 출생으로 15살 때부터 신문에 논설을 썼으며, 신앙잡지에도 글을 발표할 정도로 글 솜씨가 뛰어난 제시 파운즈(J.B. Pounds;1861-1921) 여사가 1887년 작곡자 타우너의 부탁을 받고 작사하였다. 그녀는 J.파운즈 목사님의 사모로 살아생전 400여 편의 찬송 시와 50여 편의 가극, 칸타타 등을 만들었다.

 

작곡자는 미국의 위대한 찬송 작곡자인 다니엘 브링크 타우너(D.B.Tower;1850~1919)1887년 만들었다. 타우너는 그의 아버지가 음악교사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음악에 접하게 되었고, 목소리가 좋아 17살 때부터 이미 바리톤 가수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여 후에는 이름난 오라토리오 가수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자기보다 몇 십 년 연배인 루트(G.F.Root,1820-1895)나 웨브(G.J.Webb, 1803-1887)와 같은 당대 뛰어난 찬송작가를 따라다니며 함께 활동을 하게 되면서 그들로부터 음악 레슨도 받게 되고, 평생 막역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35세 때부터 무디의 선교 동역자가 되어 후에 무디 성경학교의 음악부 주임교수로서 여러 교회에서 지휘자로 봉사하였다. 타우너는 테네시 주립대학에서 음악박사학위도 받았다.

 

 

1절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 어디든지 예수 함께 가려네

예수 함께 아니 가면 낙 없고 항상 예수 함께 가면 겁없네

어디를 가든지 겁낼 것 없네 어디든지 예수 함께 가려네

 

1, 예수님과 동행하면 겁 없으니 예수 나를 이끌면 예수님과 어디든 가리라.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복의 근원이 된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12:1-2)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길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말씀만 하셨지 구체적으로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가라, 대전으로 가라, 대구로 가라, 광주로 가라.” 이렇게 지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나 믿음으로 순종하여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더욱이 그때는 부족사회로 고향을 떠나 다른 마을로 이주해 간다는 것은 다시 말해 부모 곁을 떠나 보호자의 도움도 없이 정처 없이 길을 나선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미친 짓과 다를 바가 없었던 때였습니다. 이 귀한 순종과 따름에 대하여 히브리서 118절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사람답게 순종하여 나갔던 것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복의 근원이 되게 한 가장 큰 이유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 곁에 나타나셔서 영수야! 네가 이곳을 떠나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갈 수 있겠니? 그 목적지는 그때그때마다 내가 일러줄 터이니 믿음으로 순종하고 나아가라! 그러면 내가 네게 복 주어 너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이렇게 말씀하신다면 과연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아브라함처럼 !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겠습니다.”하고 뒤따라 나설 자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 당시 아브라함은 우리들처럼 예수님의 권세와 권능에 대해서도 성령의 능력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부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이 그렇게 과감하게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갈 수 있었던 한 가지 이유는 오늘 본문 이사야 41:10절에 있는?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말씀과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네게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한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는 창세기 123절의 말씀을 믿고 그 험난한 여행길을 떠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신 그 명령이 지금 우리에게 임하였습니다. 마치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것처럼?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9:23-24)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우리 주님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이끌든지 아브라함처럼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 나서기를 원합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을 전도자로 사명자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불순종하며 주님을 따라나서지 아니하는 것은 그 속에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앞날에 대한 두려움 물질에 대한 걱정 등...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명의 길을 걷는데 장애물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요일 4:18) 오늘 낯 설교시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우리 속에 말 못할 고통과 아픔으로 인해 하나님을 찾아 기도로 부르짖고 간구함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시고 숨어 계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진정한 사랑과 진정한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발견과 고백처럼 오히려 하나님의 침묵과 숨어 계심 속에서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의 경지를 발견해야 합니다.”(3:17-18) 이러한 믿음의 관계 사랑의 관계를 회복한 사람은 오늘 찬송가 가사에 있는 것처럼 나 이제 예수님께서 어디로 나를 이끌던지, 예수님과 함께 가려네. 예수 함께 아니면 낙 없고 예수 함께 따라가면 겁 없네 어디를 가든지 겁낼 것 없네. 어디를 가든지 예수 함께 계시네를 즐겁게 부르며 따라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 이 아름다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절 세상친구 모두 나를 떠나도 주와 동행하면 외롬없겠네

가는 길이 위태하고 험해도 어디든지 예수 함께 가려네

 

2, 가는 길 위태하고 험해도 주와 동행하면 어디든지 예수와 함께 가리라

 

예수님은 나의 위 어른으로 나에게 명령만 내리시는 자가 아니라, 나의 영원한 동반자(同伴者)가 되어 주시며, 나의 변함없는 친구(親舊)와 애인(愛人)이 되어 주십니다. 나와 굳게 100년 가약을 맺은 남편도, 아내도 맘이 변하면 이혼하고 떠나 버립니다. 우리 늘찬양교회 부설로 운영하고 있는 한나놀이방에 오는 아이들 중 엄마가 집을 나가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가 보는 아이들이 한 두 가정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자식 바라보며 모든 고통을 감내하였는데 지금은 자녀들이 자신의 삶에 거추장스럽다 여기면 언제든지 버리고 떠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세상이 되다보니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남편이 아내를 버리고 새 시집 장가가는 것은 당연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물며 부부사이가 이렇다보니 친구사이는 어떨까요?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집나간 둘째아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맨 처음 집을 나설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이 많았을 때는 그 가진 재물로 인하여 주위에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친구들의 겉치레 칭찬으로 세상에서 자기가 최고인줄로 알고 호화호식 하며 방탕함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해 가진 돈이 다 떨어지자 그 많던 친구들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둘째 아들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떠난 정도가 아니고 탕자가 너무 배가 고파서 친구의 집을 찾아 문을 두드리면 언제 보았느냐? 며 문전박대하며 내어 쫓았습니다. 심지어는 심한 욕설과 매질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친하다는 친구도 자기가 필요할 때면 나의 사랑을 요구하며 부탁도 하지만 내가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을 땐 야멸치게 친구관계를 파괴하고 떠나 버립니다.

 

둘째아들은 하루아침에 거지신세가 되어 거리에 나자빠지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삭막한 밤거리에 앉아 저 하늘에 별을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원망들을, 아니 자신의 철없던 과거의 모습들을 회상하며 후회했을까요? 이제는 얻어먹을 것이 없어 돼지들에게 주는 쥐엄 열매라도 얻어먹고 싶었지만 그것마저 주는 이가 없어 쓰디쓴 배고픔의 고통을 안은 채 밤을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제야 탕자는 아버지의 집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의 유산을 이미 다 받아 챙겨 가지고 나왔으니 어떻게 아들의 신분으로 아버님을 뵐꼬! 이제는 아들의 신분이 아니고 아버지 집의 종으로라도 써 달라고 부탁해야겠다는 마음을 정하고 아버지의 집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에 가까웠을 때 그의 아버지는 멀리서도 아들의 생김새와 걸음걸이를 보고 한눈에 자기의 둘째아들임을 알아보고 맨발로 뛰어나와 얼싸안으며 기뻐함은 물론 큰 잔치를 열어 주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친구는 날 버리고 날 비웃어도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며 항상 넉넉함의 사랑으로 채워주시고 갚아주시는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주님 앞에 돌아가기만 하면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위태하지도 않습니다. 배고픔도 없습니다. 오직 기쁨과 즐거움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떠나 없어질 세상쾌락을 추구하며 살기보다는 영원한 생명과 참 평강을 주시는 예수님과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며 뛰어 노는 친구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주님을 따르는 것이 험난해 보일지라도 세상의 고통은 잠깐이요 내일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즐거움과 쾌락을 떨쳐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가기만 하면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에게 참 평안과 영생의 축복만이 있을 것입니다. 믿습니까? 아멘

 

 

3절 어둔 그늘 나를 에워쌀 때에 주가 함께 계심 믿고 자려네

죽은 후에 천국에서 깨어나 예수 함께 길이길이 살리라.

 

3, 주가 함께 계심 믿고 평안히 자리라 천국에서 깨어나도 예수와 함께 살리라

 

우리가 주님을 쫓는 이 길은 잠깐 쫓다가 뒤돌아서는 길이 아니요, 영원히 주와 함께 걷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어둔 그늘 에워싸고 환난이나 시험이 닥쳐와도 주님지시고 가신 골고다 그 언덕길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남은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 앞에서는 그 날까지 믿음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마태복음 819절에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말하기를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예수님을) 좇으리이다.“ 하였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居處)가 있으되 오직 인자(人子)는 머리 둘 곳이 없다.“(8:20)고 말씀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서기관에게 이같이 말씀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첫째, 세속적이고 탐욕적인 동기에서 주님을 따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를 따르는 많은 군중들과 이적들, 그리고 열광들을 보면서, 이 모든 일의 중심인물과 밀접하게 교제하는 것이 유익하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을 목격했고, 그만한 권능이면 굉장한 사례금도 받아 곧 재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고,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부하게 되려는 욕망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많은 군중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서기관도 예수님을 빵과 부와 명예와 권력과 이 세상 행복을 가져다 줄 정치적인 메시아로 오해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의 이 같은 오해를 바로잡아 주기 위해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둘째, 주님을 따르는 길의 고난은 생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여러 가지 매력적인 면만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일시적 감격에서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격은 일순간 불타다가 곧 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또 감정의 물결대로만 따르는 사람도 아닙니다. 감정의 물결은 급히 밀려왔다가 속히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감동을 받는 순간에는 '나는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사소한 어려움만 있어도 주님을 헌신짝 내버리듯 버리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를 때 겪게 될 희생이나 대가는 전혀 생각지 않고, 만사형통만을 꿈꾸는 서기관의 허망한 망상을 깨트리시고 정직하게 현실을 직시하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겠다는 사람 가운데 또 다른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 제자는 12 제자중 하나가 아닌 넓은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신앙을 고백한 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하고 요청했습니다.

 

이 제자의 요구에 대하여 우리는 세 가지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그가 주님을 떠날 구실로 부친의 장례 문제를 들고 나왔으리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서기관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고 하신 말씀을 듣고, 이 제자는 자기의 기대와는 너무나 차이가 있어서 실망한 나머지, 주님을 떠나려고 부친의 장례 문제를 들고 나왔으리라는 것입니다.

 

2) 지금 그 제자의 부친은 살아 있지만, 언젠가는 별세한 후에 그 때 가서 따르겠다는 생각으로, 그 때까지는 부친을 공양하겠다는 뜻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친을 장사지내기까지는 몇 년이 걸릴지, 몇 십 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제자가 되겠다는 결단을 지연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그는 먼저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의 삶에 있어서 부친을 봉양하는 것이 제자가 되는 것보다 우선되고 있는 것입니다.

 

3) 글자 그대로 이 제자의 부친이 당장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장례를 먼저 치르고 따르겠다는 뜻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장사를 지내고 돌아오겠다는 데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당장 '갔다 오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대답은 아주 단호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8:22) 우리는 여기서도 인간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의 전지성을 전제하고서, 이 말씀을 탐사해 보아야 합니다. 서기관이 열정적이고 즉흥적이었음에 비하여, 그는 미온적이고 소극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따르는 일을 경시하고, 핑계만 있으면 피하려는 사람임을 주님께서는 간파하셨던 것입니다.

 

주께서 이 제자에게 말씀하신 참뜻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기회를 상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제자가 즉시 결단하여 따르지 아니하면 영구히 따르지 못할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일을 후일로 미룹니다. 교회 나가는 일을 다음 기회로 미룹니다. 많은 직분 자들이 후일에 충성할 것을 다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사람들에게 경고합니다. 야고보서 4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했고, 잠언 271절에 너는 내일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둘째,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으라는 전도를 받을 때 이런 식으로 대답합니다. 아이들을 좀 키워 놓고서, 사업의 기반을 좀 다져 놓고서, 돈 좀 벌어 놓고서 예수를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일도 예수를 믿는 일보다 우선이 될 수 없고, 또 되어서도 아니 됩니다.

 

저는 은성수도원에 있으면서 엄두섭 목사님이 자주 외치는 이현필이라는 한국의 성인에 대해서 많은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쓴 글을 노래로 만들어서 불렀는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 가신 길이라면 태산준령 험치 않소 / 방울방울 땀방울만 보고 따라 가오리다.

주님 가신 길이라면 가시밭도 싫지 않소 / 방울방울 피방울만 보고 따라 가오리다.

주님 계신 곳이라면 바다 끝도 멀지 않소 / 물결물결 헤엄쳐서 건너가서 뵈오리다.

주님 계신 곳이라면 하늘 끝도 높지 않소 / ale음 날개 훨훨 쳐서 올라가서 뵈오리다.

 

이런 자세로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또는 고 주기철 목사님의 영화 순교보의 길처럼, 또는 360장에 나오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천국의 예루살렘성에서 받기까지 달려가는 의의 길, 믿음의 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한번 이렇게 큰소리로 외쳐 보십시다. "주님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만을 영원토록 따르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어디로 이끌던지 또는 어디를 가라고 명하든지, 무엇을 하라고 이르던지 무조건 절대복종하며 주님의 뒤를 따라 가겠나이다. 예수 함께 아니 가면 낙 없고 예수 함께 가면 겁 없네 어디를 가든지 겁낼 것 없겠네 어디든지 예수 함께 가려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