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첫번째 사람이다.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이 그에게서 시작되었다.우리의 유전자는 모두 그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그는 우리의 표상이고 근본이다.그는 모든 인간으로부터 존경받아야 마땅하고 사모의 대상이 될 만하다.그러나 그는 유감스럽게도 인류의 타락에 대한 책임을 홀로 지고 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롬 6:19)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세상은 살인, 강도,사기에서부터 유괴,강간에 이르기까지 흉악한 범죄로 가득차 있다.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흔히 성경의
‘죄’와 세상의 ‘범죄’를 동일시하여 아담을 온갖 흉악한 범죄의 원흉처럼 몰아붙인다.그의 사진이라도 있다면 수배자 전단처럼 경찰서나 교도소
담벼락에 걸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담은 사실 너무 억울한 사람이다.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태어났다.하나님이 그를 만드셨고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는데
그곳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하나님이 그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셔서 아담은 그것을 먹지 않았다.그런데 어느 날 잠에서 깨어보니
여자가 와 있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하나님이 아담에게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는 당연히 그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이렇게 해서 이미 아담의
때로부터 ‘…더라면’ 하는 욥의 탄식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사망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였더라면…”(욥 3:2∼5)
고난 중의 욥은 이렇게 자신이 태어난 날을 원망했다.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지 않았다면 그는 오명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또
하나님이 동산 가운데 그 나무를 심어놓지만 않았더라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그리고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지만 않았어도
그것을 먹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태어남을 원망하는 욥을 꾸짖으셨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네가 내 심판을 피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려 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욥 40:7∼8)
하나님은 아담을 골탕먹이려고 창조하시지 않았다.그분은 선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시 100:5)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사랑이었다.큰 외로움 가운데 계시던 하나님은 사랑하기 위해서 사람을 창조하셨던 것이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아담에게 무엇이든 다 주고 싶으셨다.그 분이 아담을 위하여 준비하신 가장 소중한 선물이 바로 ‘자유’였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창 3:16)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이 바다의 새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고 싶으셨다.(창 1:28) 그렇게 하려면
그에게도 자유에 대한 책임의 ‘마지노선’이 필요했다.선하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겠다는 신뢰의 약속이 필요했던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창 2:17)
그러나 아담은 그 실과를 먹었다.그것은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겠다는 뜻이었고 하나님과의 결별을 선언한 것이며 그가 받은 복을 거부하겠다는
의사표시였던 것이다.그것이 선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그 선하신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바로 ‘죄’였던 것이다.그런데도 하나님은
여자에게 남편을 사모하라고 말씀하신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
아담이 잠에서 깨었을 때 없어진 것은 갈빗대뿐이 아니었다.하나님이 아담의 외로운 삶속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기 위해 만들어주신 여자는
흙이 아니라 한 공정을 더 거친 재료로 만들어졌고 그래서 아담보다 더 강렬한 호기심과 진취적 모험심으로 가득찬 빛나는 존재였다.여자는 남자의
가장 소중한 것을 다 가져가 버렸던 것이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아담은 금단의 실과를 먹고 하나님의 꾸지람을 들은 후에 경황이 없었는지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지어 주었는데(창 3:20) 그
이름에는 ‘생명’이라는 뜻과 ‘생활’이라는 뜻이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여자는 아기를 낳아 인간의 생명을 이어가야 하므로(창 3:16)
‘생명’이라는 뜻은 당연한 것이었으나 아담은 경황 중에 ‘생활’까지 넘겨줌으로써 그만 경제권을 덜컥 넘겨주고 말았던 것이다.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관할하는 자는 부녀라”(사 3:12)
아담 이후로 세상에 태어난 모든 남자는 얼굴에 땀이 흐르도록 일하여 그 통장을 아내에게 맡겨두고 용돈을 타서 쓰는 신세가 되었다.이렇게
아담은 평화도,경제권도,권위도 다 잃어버렸으나 오히려 아직 남아있는 것이 있었다.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닮은 ‘고독’과 사랑하는 자에게 무엇이든지
다 주어버리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그것이었다.그것이 바로 아담에게 남아있는 ‘복’의 길이었고 하나님은 여자에게 그것을 사모하라고 하셨으며
예수께서는 ‘마지막 아담’(고전 15:45)으로 오셨던 것이다.
김성일 (한세대교수) |
출처 :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
글쓴이 : 예수메니아 원글보기
메모 :
'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 > 인물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다큐멘터리] 아브라함 8부작 - 2부 (0) | 2007.07.31 |
---|---|
[스크랩] [다큐멘터리] 아브라함 8부작 - 1부 (0) | 2007.07.31 |
[스크랩] 예레미야 (0) | 2006.06.13 |
[스크랩] 마르다 (0) | 2006.06.13 |
[스크랩] 마리아 (0) | 2006.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