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리더십자료

성경에서 찾아보는 바람직한 세대교체 방법

늘찬양 2006. 11. 15. 10:16
성경에서 찾아보는 바람직한 세대교체 방법
박수암  -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 1:4). 이는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다. 한 지도자가 가면 다음 지도자가 온다. 이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엄격한 경륜이다. 다음 지도자가 바람직하든 그렇지 않든 권력은 이양된다. 한 지도력은 어떤 방법으로든 마무리되어 승계, 혹은 단절된 채 정권은 교체된다.
이 교체의 방법은 형편에 따라서 다르다. 어떤 때는 혁명을 통해서, 어떤 때는 세습을 통해서, 어떤 때는 투표를 통해서 지도력의 교체가 일어난다. 그러나 이런 것은 모두 세상적인 방법으로 교체하는 것이다. 성경은 바람직한 세대교체 방법을 어떤 것으로 보는가? 성경 속에 나타난 리더십의 특징과 그들의 세대교체 방법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
필자는 이 글에서 이런 질문들을 생각하면서 그 해답을 고찰하고저 한다.

모세와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여러 가지 점에서 모세의 후계자였다. 그는 ‘제2의 모세’라 할 만큼 모세의 지도력을 계승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함께 하셨듯이 여호수아와 함께 하셨으며(수 1:5),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복종했듯이 여호수아에게 복종했다(수 1:17). 모세가 백성들에게 성결을 명했듯이(출 19:14), 여호수아도 백성들에게 성결을 명령했으며(수 3:5),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넜듯이(출 14:1~31), 여호수아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넜다(수 3:7~4:24).
모세가 율법을 돌비에 적었던 것 같이(출 24:4), 여호수아도 율법을 돌판에 기록했으며(수 8:32), 여호와께서는 모세의 음성을 들었듯이(신 9:19, 10:10), 여호수아의 음성도 들으셨다(수 10:14). 모세가 불붙는 가시떨기 앞에서 들었던 것과 똑같은 내용의 말씀(“네 발에 신을 벗으라”;출 3:5)을 여호수아도 들었으며(수 5:15), 모세가 이스라엘 앞에서 높임을 받았던 것과 똑같이 여호수아도 백성 앞에서 높임을 받았다(수 3:7, 4:14).
여호수아가 계약의식을 위해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았을 때 그는 이스라엘 역사를 요약해서 저들에게 전했는데(수 24:2~13) 이는 신명기 1장 16절~3장 29절의 요약과 병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듯이,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다.

모세가 120세가 되어 출입이 불가능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지명하셨다.“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들의 목전에서 그에게 위탁하여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의 온 회중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민 27:18~20).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가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인간의 어떤 뜻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모세 자신이 결정하거나 이스라엘 백성이 투표해서 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하나님 단독의 주권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즉, 하나님 마음대로 세우신 것이었다(하나님의 왕국).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세웠을까? 그가 나이많았기 때문일까(장유유서의 원칙에 따라)? 그가 모세의 친척이기 때문일까(정실인사의 원칙에 따라)?
그것이 아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최고령자도 아니었으며(출 33:11에서 여호수아는‘나아르(rxd)’로 지칭되고 있다), 모세의 친척도 아니었다(‘눈’은 에브라임 지파 사람이었고, 모세는 레위 지파 사람이었다). 그것은 다만 여호수아가 성령이 충만하며(신 34:9), 신앙 경험과 실력이 있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여호와의 신에 감동된 자였으며(민 27:18),“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할 만큼 신앙이 확실한 자였다(수 24:14~15). 더욱이 모세와 함께 지도경험이 있는 자였다. 그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장군으로 처음 모습을 나타냈으며(출 17:8~16), 그후 모세의 종(trfm, 부관)으로 등장하고(출 24:13, 32:7) 회막에서 모세와 함께 섬기는 일을 하였던 사람이다(출 33:11). 그는 에브라임 지파의 대표로서 가나안 정탐에 참여하였으며(민 13:8) 갈렙과 함께 능히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민 14:6).
그는 갈렙과 함께 말씀의 앵글(angle)을 통해 오늘을 해석한 젊은이였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애굽의 삶도, 출애굽의 과정도, 시내산 주변의 이야기도, 가나안 정탐도 이렇듯 광야의 모든 모습들을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주의 깊게 보아온 세대였다. 그들은 오늘을 보고 과거지향적으로 해석하려는 기성세대나 기득권을 누리려는 지도자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스스로 파고든 절망 앞에서 통곡하는 기성세대 지도자들과는 다른 안목이 있었다. 그들은 위기 앞에서 오늘을 거덜내고 과거로 도피, 안주해버리려는 광야 세대들과 달랐다. 그들에게는 미래를 바라보는 눈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가나안 땅에 대한 개척자적인 열의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신앙과 능력과 경험과 실력이 있고 미래를 열어갈 새로운 세대의 자질이 있는 여호수아를 택하여 모세의 후계자가 되게 하셨다.

사무엘과 사울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사사시대를 종결하고 왕정시대를 도입하는 전환기에 살던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다. 그가 너무 노쇠하여 더이상 사사의 직무를 감당할 수 없고 그의 아들들도 제대로 그 직무를 감당할 수 없을 즈음, 백성의 장로들은 사무엘에게 나아가 그들에게도 열방과 같이 강력한 왕을 세워줄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그들 자신의 힘과 권세에 의존하며 정신적으로 열방을 모방하려 했다(삼상 8장).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이 원했던 바로 그런 왕을 택해 주셨다. 그가 바로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 사울이었다(삼상 9:16). 사무엘은 이 사울이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그는 미스바에 지파들을 불러모아 옛 방식대로 제비를 뽑았다. 그 제비는 사울에게 돌아갔고 사무엘은 그를 하나님이 택하신 왕으로 확인했다(삼상 10:17~2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 가운데 사울을 택하신 것은 역시 사울이 지닌 체구와 능력과 인격 때문이었다. 사울은 준수했고, 큰 체구를 지녔으며(삼상 9:2, 10:23), 이스라엘을 적으로부터 방어할 능력이 있었다. 암몬 사람 나하스가 야베스 길르앗을 포위했을 때 길르앗 사람들은 사울이 있는 기브아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알렸다. 소식을 들은 사울은 군대를 모아 나하스를 기습공격하고 암몬 사람들을 무찔러 자신이 왕임을 증명했다. 그후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울을 그들의 왕으로 인정했고, 길갈에서 크게 경축했다(삼상 11:15).
그는 또한 겸손한 사람이었다. 사무엘이 그를 왕으로 세우려 할 때 그는 자신의 자격없음을 말했고(삼상 9:21), 그가 왕이 되는 제비에 뽑혔을 때 그는 행구 뒤에 숨기까지 했다(삼상 10:22)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함부로 택하지 아니하시고 그 시대 백성이 요구하는 지도자에 걸맞는 실력과 인격을 갖춘 자를 택하셨다.

우리는 이상의 사울의 지도력 인계 과정을 통하여 성경에 나타난 세대교체 방법의 한 특성을 본다. 그것은 철저히 하나님에 의한 지도력 이양이란 것이다. 지도력 이양에 있어 인간의 의지가 작용할 어떤 틈도 없다.
이 세상 권력 인계자들은 자신의 퇴임 뒤의 신변 보장을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어떻게 하면 계속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측근을 후계자로 세우면 가능할까’, ‘어떻게 하면 자신이 통치기간에 행한 일들을 미화할 수 있을까’, ‘기록들을 고쳐서라도 자신의 지적이 옳았다는 것을 강조할 수 있을가’, ‘자신의 결백과 청빈생활을 홍보할 이야기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권력이양 후에 문제가 될지도 모를 소재들을 그 그루터기채 미리 뽑아버릴 수 있을까’, 권력이양을 앞둔 세상 지도자들은 이같은 문제들에 신경을 쓰기 쉽다.
그러나 성경의 입장으로 본다면, 지도자들은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의해 세워지기에 언제 그 자리를 떠나도, 또한 누가 자신의 후임자가 되더라도 괜찮은 깨끗한 지도력을 행사해야 한다. 그런 종류의 리더십이 되어야 한다. 사무엘은 후계자 사울과 함께 백성들 앞에 서서 다음과 같은 이임사를 했다.
“내가 어려서부터 오늘 날까지 너희 앞에 출입하였거니와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 기름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거하라 내가 뉘 소를 취하였으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뉘 손에서 취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삼상 12:2~3).
이 얼마나 깨끗하고 자신있는 하나님 앞에서의 지도력인가!

사울과 다윗
사울이 길갈에서 범죄하고(삼상 13:13), 아말렉에서 범죄했을 때(삼상 15:11) 하나님은 다윗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했다(삼상 16:13).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여 왕이 되게 하신 것은 다윗의 나이나, 사울과의 친척관계나, 용모나 신장이 아니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아들 가운데 말째 아들이었으며, 사울의 출신과는 다른 유다 지파 사람이었다. 용모와 신장으로 보면 다윗의 형들이 다윗보다 더 나았다(삼상 16:7).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여 왕이 되게 하신 것은 보다 내면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그에게도 아름다운 눈과 건장한 모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삼상 16:12). 그러나 하나님이 새로운 지도자상으로 찾고 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더 내면적인 요건들이었다. 다윗에게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과(삼상 17:45), 음악적 재능과 호기(豪氣)와 무용(武勇)과 구변(口辯)이 있었다(삼상 16:18).
하나님은 사울 다음 세대 지도력을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왕이 될 수 있다고 보는 외적인 데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내적인 데로 옮겨 찾으시게 했다. 하나님은 그가 ‘나이 많으냐 적으냐, 외모가 준수하냐 아니냐, 싸움에 능하나 아니냐를 보지 않으시고, 보다 더 하나님을 의지하느냐 아니냐, 차세대를 이끌어가는 데 필요한 능력과 자질들을 갖추고 있으냐 아니냐’를 보신 것이다.

엘리야와 엘리사
엘리사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었다.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왕상 19:16). 그는 엘리야가 떠날 때 엘리야의 영감이 갑절이나 자신에게 임하기를 원했다(왕하 2:9). 이는 신명기 20장 17절의 기업의 법에 의한 것이며, 능력있는 선지자의 수제자가 가진 특권으로 장자의 분깃과 같은 권리를 요구한 것이다.
그는 그의 스승이 떠난 뒤 스승이 준 겉옷으로 요단강 물을 내리쳤으며, 그의 스승이 행하였던 것과(왕하 2:8) 똑같은 이적을 행하였다(왕하 2:13~14). 그리하여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에 있던 선지자의 생도들은 그를 지도자요 엘리야의 후계자로 모셨다(왕하 2:15). 그는 엘리야가 행하였던 것과 꼭같이 과부에게 기적을 행했으며(왕상 17:8~16과 왕하 4:1~7 비교), 죽은 자를 살려냈다(왕상 17:17~24과 왕하 4:18~37). 그는 그의 선임자의 뒤를 이어 선임자가 맡았던 사명을(왕상 19:15~16) 대신 완성했다. 하사엘을 수리아의 왕으로(왕하 8:12~13), 예후를 이스라엘의 왕으로(왕하 9:1~10) 기름을 부었다. 그는 그의 선생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영적인 병거와 마병이었듯이(왕하 2:12) 그도 또한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 노릇을 했다(왕하 13:14).

하나님께서는 왜 엘리사를 택하여 엘리야의 후계자를 삼았을까? 그것은 무엇보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시종이었고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왕하 3:11) 그는 엘리야의 제자로 있으면서 엘리야가 가진 바알 우상에 대한 투쟁정신을 배웠고 엘리야의 영적인 은사들을 사모하고 있었다.
엘리사가 활약했던 시기는 주전 850~800년으로서, 아합의 통치 말년부터 시작하여 여호람, 요아스의 통치 초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반세기에 이르는 시기라 할 수 있다. 그 시기는 이스라엘이 바알 숭배로 인해 혼란에 처했을 때이며, 엘리야가 시작한 개혁이 구체적으로 국민생활 전반에 적용되어야 할 시기였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정신과 신앙과 능력을 재현할 인물이 필요했다. 그 인물이 바로 엘리사였다. 그는 엘리야의 전통을 따라 여러 곳에 세워진 선지학교들을 주관하여 선지자들을 길러 냈으며(왕하 4:38~44, 6:1~7, 참고 삼상 19:20), 여러 가지 많은 이적들을 행함으로 여호와가 참된 신임을 입증하였고,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영적인 전쟁에 크게 공헌했다.
그는 고행적이며 사람들 앞에서 떠나있기를 바라던 엘리야와 대조적으로, 자기가 상대했던 백성들과 함께 있기를 좋아했다. 그는 수도 사마리아에 집이 있었으나(왕하 6:32), 사무엘이 행한 것 같이 계속 그 나라를 이곳 저곳 찾아 다녔다. 그는 수넴에 있는 그의 친구들을 자주 방문하였다.
이는 금식과 광야의 사람이었던 세례요한(엘리야에 해당)과 달리‘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하인의 친구’로서 유대와 사마리아, 갈릴리 등 온 지방으로 다니셨던 예수의 사역을 생각나게 한다. 엘리사는 그리스도가 하신 것처럼 많은 이적들을 행했으며(물을 깨끗케 함, 왕하 2:19~22; 금식이적, 왕하 4:42~44; 문둥병 고침, 왕하 5:1~14;죽은 자를 살림, 왕하 4:8~37) 그리스도처럼 긍휼(도끼 자루를 건져줌, 왕하 6:5~7; 수넴 여인에게 아들을 약속함, 왕하 4:11~17)과 동정과 눈물 흘림(왕하 8:11~12), 그리고 위엄(심판선언, 왕하 2:23~24)이 있었다. 그는 과연 후 엘리야 시대(Post-Elijah Era)의 지도자되기에 합당한 인격과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와 열두 제자, 맛디아, 바울
예수께서는 차세대를 맡을 그의 후계자들로 열두 제자를 선택하셨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막 3:12~13).
열두 제자의 선택은 온전히 예수 자의에 의한 것이지 인간적인 의사가 작용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부활 후 승천하시면서 열한 제자들에게 자신의 권한을 부여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6~20).
예수께서는 왜 열두 제자들을 그러한 자들로 구성하셨을까? 그들에게 학식과 인품과 능력이 있어서일까? 성경은 그렇다고 보지 않는다. 그들은 한 사람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는모두 갈릴리 출신들이며, 그것도 어부나 세리같은 보잘 것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적은 무리’였고 모두가 자신의 공로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믿던,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 가난한 자들이었다(눅 6:20). 예수께서는 자신의 천국운동에 필요한 지도력으로 용모나 학식, 인품, 능력 등을 보지 아니하시고 그 천국운동에 필요한 요소로써 겸손과 온유를 생각하셨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굶주려하는 것이요(눅 6:21, 마 5:6),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않음으로 슬퍼하는 것이요(눅 6:21, 마 5:4), 예수를 인하여 핍박받는 것이었다(눅 6:22, 마 5:10~12).

맛디아가 사도가 된 것은 역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 사도들은 요셉과 맛디아 두 사람을 두고 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인지를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행 1:24). 그리고 그들은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얻게 되었다. 맛디아가 가진 지도력은 다만 요한의 세례로부터 승천하시기까지 사도들과 항상 함께 다님 때문에 사도들과 더불어 예수의 부활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바울이 사도가 된 것 역시 하나님의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갈 1:1).
하나님은 왜 바울을 사도로 부르셨을까? 그것은 물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차세대에 필요한 지도력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초대교회에 필요한 전도, 그리고 신학과 저술에 필요한 바울 나름의 자질이었다. 그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바리새인의 유대적 전통과 헬라 철학에 조예가 있었으며, 가말리엘의 제자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로마의 시민권이 있었고 예리한 지성, 예민한 감성, 타는 정열, 깊은 애정 등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전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며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체계화할 자질들이 있었다.

바울과 디모데
바울은 디모데를 믿음의 아들이라 불렀다.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딤전 1:2). 바울이 1차 선교여행에서 더베와 루스드라에 이르렀을 때 디모데는 개종한 듯하며(행14:6~22), 그후 2차 선교여행중 이곳에 왔을 때 바울은 그를 마가 대신 자신의 전도여행에 제자와 동반자로 삼았다.
바울이 이같이 디모데를 그의 아들로 삼은 것은 순전히 바울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디모데 역시 바울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나름대로 어떤 지도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라 본다. 그는 왜 디모데를 자신의 아들로 정했을까? 디모데의 용모나 학식을 보았기 때문일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디모데는 자주 나는 병으로 인해 유약한 모습을 지닌 것으로 보이며(딤전 5:23) 그의 학식 역시 별로 두드러진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바울이 디모데에게서 보았던 훌륭한 점은 그의 ‘거짓이 없는 믿음’과 그의 어머니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 밑에서 받은 영적인 훈련과 그 지방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디모데의 아름다운 인격 때문이었다고 한다(행16:1~2, 딤후 1:5, 3:14~15). 바울은 디모데가 앞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리라는 어떤 예언적 암시를 받았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딤전 1:18),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받은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딤전 4:
14).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가 지닌 이런 영적인 자질들이 디모데의 지도력을 입증해준다고 보았다.

예수님과 성령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가 떠나시면 ‘다른 보혜사’가 와서 자신을 대신하여 제자들을 도와주며 자신을 증거해 주리라고 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 여기 ‘또 다른 보혜사’란 말은 예수 자신이 보혜사이며 성령께서는 또 다른 보혜사 즉 ‘예수의 후계자’가 됨을 보여준다. 성령은 과연 그리스도의 뒤를 이어 그가 이루어 놓으신 구속사역을 효과적으로 사람들에게 적용시키며 완성하신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적 후계자가 되신 것은 하나님의 구속 경륜과 계획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어떤 의지에 의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왜 성령을 성자의 후계자로 정하셨을까? 그것은 성령께서 그리스도가 부재한 시대에 시공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온 세계에 적용시키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되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영성, 감화력, 증거력, 권고력, 지혜력, 심판력은 세상 끝날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형성하고 보호하고 돕는 지도력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지도자
성경 속에 나타난 리더십의 특징은 외모나 학식이나 외적인 지도력보다는 영적이고 내적인 지도력을 강조한다. 성경이 말하는 바람직한 세대교체 방법은 투표나 혁명이나 세습이 결코 아닌,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한 교체며, 그 뜻을 확인하기 위한 방법으로 간혹 ‘제비’가 사용되었을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 후계자를 선정하실 때 아무런 표준 없이 무작위로 선정하지 않으신다. 차세대 그 일을 감당할 만한 능력과 자질이 있는지를 보시고 그 시대마다 합당한 인물들을 선정하신다. 하나님이 보시는 인물 요건은 외적인 요건보다는 내적인 요건이며, 이런 것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갈수록 더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나이 많고 적음이나 남녀 성별이나 인척관계 및 학식의 유무나 신분의 고하, 외모와 체격의 조건들(사울의 경우는 예외)보다는 그가 ‘얼마나 차세대를 이끌어갈 신령한 능력이 있느냐,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맡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느냐, 그 사명을 감당할 만한 인격과 성품을 구비했느냐’를 보신다. 하나님의 세대교체에 있어 장유유서의 원리는 연령의 장유유서가 아닌, 영력과 능력과 실력의 장유유서인 것이다.

박수암 / 장신대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턴신대원(Th. M.)을 나와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와 녹스대학(Th.D.)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장신대 신약학 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