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심리학적 측면에서 본 한국 목회자의 지도유형 분석
양창삼 -
이 글은 목회유형을 중심으로 한국 목회지도자들의 현재 모습을 살피고, 앞으로 목회자가 지향해야 할 목회유형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한국의 목회자들은 세계교회가 놀랄 만큼 경이적인 교회성장을 이루게 하는 데 공헌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명목적으로 성장했을런지는 몰라도 실질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했다고 볼 수 없다는 비판을 아울러 받고 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한국 목회지도자들의 유형분석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목회자의 지도유형분석에서 드러난 여러 문제 목회는 목회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나 교인들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함께 책임을 나누어야 한다.
이 글은 역사적으로 목회유형이 어떻게 달라져 왔고,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고자 한다. 다음 사회심리학적 분석방법을 통해 여러 목회유형을 분석하고 그 장단점을 밝히며, 미래의 목회를 위해 어떤 유형의 목회가 바람직한가를 제시하는 순서로 이어질 것이다.
Ⅰ. 목회유형의 역사적 변화
역사적으로 볼 때 목회유형은 관리적 목회에서 사회적 목회로 발전해 왔으며 지금도 사회적 목회는 목회에 있어서 상당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앞으로는 사회적 목회에서 문화적 목회로 발전할 것으로 예견되고 있다. 그렇다고 현재에 관리적 목회나 문화적 목회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목회유형을 큰 흐름으로 따져볼 때 이런 식으로 대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1. 관리적 목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사도들의 향후목회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만 해도 사도들은 자기들의 눈과 머리로 예수님을 이해하려 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순절 사건으로 인해 약속하신 성령님이 오시어 그들 속에 강하게 자리를 잡고 역사하심으로 그들이 자신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님의 눈과 마음으로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전도가 시작되었고, 전도의 결과 이곳저곳에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세워진 많은 교회들을 사도들이 다 관리할 수 없게 되자 여러 교회에 장로를 교회의 직분자로 도입했다. 그러나 그들만으로 한계에 이르자 주의 교회를 감당함에 있어서 보다 전문적인 일꾼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교회를 지도하고 감독할 목사를 세워 그 교회의 행정을 맡아보고 그 교회를 이끌어 나가게 되었다. 이른바 관리목회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한마디로 사도들이 전한 복음에 바탕을 두고, 그 복음을 굳게 지키기 위해 세워진 교회를 관리하는 청지기 역할을 담당한 전문인이다.
종교개혁 후 장로교회는 1555년 파리에서 칼빈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라 리비에르(La Riviere)가 목사로 임명되고, 이어 장로와 집사가 선출된 것을 기점으로 교회로서 완전한 조직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후 제네바, 스코틀랜드에 이어 1643년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목사를 항존직으로 규정하면서 목사는 교회의 대표적인 직분이 되었다.
초대교회는 사도들 이후, 목사라는 명칭의 직분보다는 감독이라는 직분명을 더 자주 사용하였고, 종교개혁 이후 교회행정과 사도직을 수행함에 있어서 어떤 직분 명칭이 가장 성경적인가를 놓고 연구한 결과, 감독보다 목사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에 관한 대표적 주창자가 바로 칼빈이다.
칼빈과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사도 시대에 있어서 교회의 주직은 사도였으나 사도 시대 이후에는 목사가 주직을 맡고 장로와 집사는 보조직임을 확실히 하였다. 로마교회나 감독교회 체제에서는 교황이나 감독이 사도를 계승한다는 사도계승론(apostolic succession)을 주장하지만 개혁교회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사도들의 목회가 목사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수행된다고 본다. 감독이나 목사는 일차적으로 양을 복음적으로 잘 관리하는 목자, 양을 보호하고 감독하는 직분자로 인식되어 관리적 목회 성향이 강했다.
2. 사회적 목회
지금까지 목사는 교회를 맡아 관리하고 그 교회를 통해 복음을 수호하고 믿음을 지켜왔다. 앞으로도 이 역할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를 관리하고 지도해 나감에 있어서 목회자는 놀라운 사회변혁과 함께 그 지도의 속성이 달라져야 했다. 이것은 목회가 관리적 차원을 떠나 사회적 차원으로 변화되었음을 뜻한다.
목회의 성격이 사회변화와 함께 달라진다는 것은 여러 역사적 경험이 말해준다. 교회에 대한 핍박이 심할 때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당면한 어려움을 순교자적 정신을 가지고 이어나가기를 강조했다. 이 땅의 삶보다 더 행복한 하늘의 삶이 있음을 심어주고 교인들의 마음에 위안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다.
수없이 계속된 종교관련 전쟁에서도 목회자는 이와 유사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현실을 극복해 나갔다. 영국이나 프랑스, 심지어 미국의 경우 산업혁명으로 기계화에 대한 높은 피해의식과 공장주들의 횡포에 맞서 일부교인들이 난동을 부리자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교인들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를 말해주어야 했다.
목회자는 교인들을 심리적으로 안정시키고, 이익만을 취하려는 공장주들에게 경고를 해야 했다. 우리는 목회자로부터 경고를 받는 공장주의 상당수가 기독교인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목회자는 그들 앞에서 한쪽에는 심리적 안정과 위로를 주어야 하고, 다른 쪽에는 엄한 경고를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처럼 서로 대조되는 역할을 현대의 목회자들이 아직도 이어나가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목회자들은 군사정권 아래서의 가난한 자와 억압을 당하는 자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여 주었다. 신학적인 견해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해방신학이다 민중신학이다 하는 것도 목회자가 교회 및 사회관계에서 어떤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현재 이러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이웃사랑에 대한 리더십은 세상 끝날까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3. 문화적 목회
미래목회에 있어서 리더십의 속성은 크게 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 변화는 총과 칼, 고난의 형태로 오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달라지는 기술사회의 문화적 변혁과 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살 수 없는 소리없는 혁명으로 온다. 이른바 정보화사회가 종교적 속성을 크게 변화시킬 것으로 보이며 그 변화의 속도가 가속화되고 있다. 21세기는 20세기와는 너무나 다른 사회가 될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예견이다.
이렇듯 예견되는 변화 속에서 목회자가 어떤 목회를 해야 하는가는 물어보나 마나다. 무엇보다 목회자는 미래의 변화를 바로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미래사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깊은 생각이 미래목회의 방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토플러(A. Toffler)는 미래사회는 과거와 같이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 하는 이데올로기성을 탈피하여 지식이 사회를 움직이는 기축이 되는 지식사회가 될 것으로 예견하고 있다. 과거 우리나라의 목회자들은 이데올로기 문제에 있어서 우리나라가 자본주의 국가이고 경험적으로도 공산주의는 안된다는 식으로 자본주의 편에 서왔다. 이 이데올로기 문제 때문에 장로교의 경우 통합과 합동으로 분리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소련과 동구의 와해로 자본주의의 승리감은 커지고 있다. 그러나 알고보면 순수한 자본주의(pure capitalism) 국가는 없다. 사회주의성이 가미된 여러 형태의 혼합 경제 체제(mixed economy system)를 이루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이러한 혼합성은 미래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많은 학자들은 미래 사회는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본이 문제가 아니라 지식과 정보가 문제라는 것이다. 지식과 정보의 빠른 교환과 이용은 기술의 변화를 더 빠르게 할 것이며 따라서 사회도 더 빠른 사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빠른 문화(fast culture)가 느린 문화(slow culture)를 정복하게 될 것이며, 결국 느린 문화를 가진 사회는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목회자는 지식과 정보가 사회의 기축이 되는 사회에서 교회와 교인들이 어떻게 빠른 문화에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설명해 주고 그들을 이끌어 나갈 심리적, 기술적, 전문적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목회자는 교회가 복음을 바로 유지하고 교인들이 어떻게 복음적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한 대안을 확실히 제시해 주어야 한다.
Ⅱ. 한국의 목회지도자 유형별
분석과 그 장단점
목회지도자를 유형별로 분석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여러 학자들이 이미 분류해 놓은 유형을 다시 검토하는 방법도 있고, 나름대로 유형화하여 분석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사회심리학적 분석방법을 택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사회심리학적 유형분석이 다른 일반적인 유형분석 방법보다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고, 심층적인 분석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1. 정신분석적 유형분석
정신분석학적으로 볼 때 목회지도자의 유형은 목회자가 개인과 사회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갈등적 지도유형이요, 다른 하나는 조화적 지도유형이다. 갈등적 지도유형은 정통 프로이드학파(Orthodox Freudian)에 관련된 이론인 반면 조화적 지도유형은 신프로이드학파(Neo-Freudian)의 견해가 담겨 있다.
갈등적 지도유형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대립관계로 본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본능을 발산하려고 함에 비해 사회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제도적으로 그 발산을 억제한다. 교회는 그 발산을 억제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래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갈등관계가 설정될 수밖에 없고, 개인은 본능발산을 위해 투쟁적이지 않을 수 없다.
목회자들은 대부분 성경에 바탕을 두어 인간의 본능발산을 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인간은 계속해서 죄를 저질러 왔으며 지금도 그 속성을 갖고 태어났다고 본다. 원초적 죄성이 그 골격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본능을 발산하려는 것을 제도적 가르침으로 억누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죄를 지적하는 목회자 대부분의 설교는 갈등론에 입각해 있다. 죄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본능발산을 억제한다. 설교를 듣는 성도는 그것의 당위성을 인정하면서도 본능적 충동을 억제할 수 없어 다시금 범죄하고 스스로 자기의 약함을 인정하며 계속 갈등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는 바울의 고백은 성도의 갈등적 면모를 그대로 반영한다. 경고는 반복된다.
정통 프로이디안에 따르면 반복된 경고와 반복되는 범죄의 쳇바퀴적 삶의 과정은 인간의 미래를 낙관하지 못하게 한다. 갈등과 불행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프로이디안의 이러한 생각은 인간의 적나라한 면모를 숨김없이 보여주기는 하지만 인간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고 인간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인간의 연약함을 인식하고 그 연약함을 도우는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는 점이 부족하다. 인간의 갈등적 면모를 보는 목회자는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을 갖도록 해야 한다. 죄의 질책만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죄만 질책하면 성도와 목회자의 관계는 단절될 수밖에 없다.
조화적 지도유형은 개인은 비록 본능발산적 욕구로 가득찬 어쩔 수 없는 인간이기는 하지만 그들로 하여금 보다 생산적인 활동을 하도록 지도함으로써 그들의 생활에서 인간됨을 실천하고 미래를 보다 밝게 설정하도록 한다. 신프로이드학파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본능을 인정하면서 그 해결의 방법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방향에서 찾는다.
조화적 목회지도자는 성도를 보다 생산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본능발산적인 힘을 좋은 것에 사용될 수 있도록 지도한다. 이런 면에서 목회자가 할 일은 많다.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맺도록 하며 복음적 삶의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도록 한다. 조화적 지도자는 갈등적 지도자보다 유연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삶을 바르게 고쳐 나간다는 점에서 매우 바람직한 지도방법에 속한다.
지금까지 한국의 목회자들은 갈등적 입장에서 성도들의 죄를 질책하는 데 시간을 많이 할애하여 왔다. 그러나 앞으로 목회지도는 생산적인 방향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죄를 경고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계속 경고를 하되 본능발산의 힘을 죄를 짓는 데 사용하지 않고 보다 바람직한 쪽으로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다.
미래사회는 이성과 감성이 함께 작용하는 사회이다. 기술의 발달은 이성의 결과이지만 사회관계는 다분히 감성이 지배한다. 따라서 목회자는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그리고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서 그들의 감성을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스스로 조절할 수 있도록 목회지도를 해야 한다.
2. 행동주의적 유형분석
행동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목회의 지도행위는 크게 기계적 지도행위와 반기계적 지도행위로 나뉜다. 기계적 지도행위는 행동주의의 기본적 사고를 반영한 것이며 반기계적 사고는 신행동주의(Neo-Behaviorism)의 사고를 반영한 것이다.
행동주의적 목회는 교인이란 목회자의 목회방침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다. 목회자가 어떤 목표를 세우고 밀고 나가느냐에 따라 성도들의 행동패턴이 달라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성도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에 관계없이 자기의 목회방침을 밀고 나간다.
당회원들은 이 방침수행에 있어 또하나의 추진세력이다. 한국의 성도들은 목회자들에 대해 대부분 복종적 태도를 유지한다. 뒤로 돌아서 욕할 망정 겉으로는 순종한다. 순종하지 않으면 유형으로든 무형으로든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과거 목회자들, 특히 부흥성회를 인도했던 목회자들은 교인들에게 이런 두려움을 의도적으로 심어 주었다. 목회자의 말을 안듣고 반항하더니 어떻게 죽고, 크게 손해보게 되었더라는 것은 그 보기이다.
이러한 방법은 지금도 종종 사용되고 있다. 목회자의 신앙과 인격에서 나온 두려움이라면 존경받을 만하지만 이런 강압적 두려움은 사실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행동주의자들은 처벌과 보상의 방법으로 목적을 이루어 나간다. 당근과 채찍의 방법을 사용한다. 잘하면 칭찬과 보상을 하고, 잘못하면 과감히 벌을 준다. 잘못된 목회자의 경우 축복권과 저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호언하면서 성도들에게 두려움을 주는데 이것은 바로 목회의 지도성이 행동주의에 입각해 있음을 보여준다.
행동주의적 리더십은 대부분 권위주의적 목회를 하는 목회자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목회는 교인들을 자기 마음대로 길들일 수 있는 동물 쯤으로 생각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목회자들이 때로 교인은 길들이기 나름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태도를 그대로 반영한다.
이러한 목회유형이 비인격적인 유형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목회자의 그런 지도방침은 교인들을 결국 하나의 기계부품으로 만든다. 철저하게 따르고 무조건 순종한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할 정도가 되면 ‘그 성도 참으로 신앙이 좋다’는 말을 듣는다. 이러한 목회는 교인들로부터 순종을 얻어내기는 쉬워도 교인을 뼈도 없는 사람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반기계적 지도행위는 기계적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에 대한 일종의 반대표명이다. 사람이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목회자의 방침이라 할지라도 생각하는 교인이라면 그 방침 가운데 잘못된 것을 지적할 수 있어야 하고, 목회자도 잘못된 것을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교인이 명령을 기계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말씀에 비추어 잘잘못을 가리게 하는 지도유형이다.
이러한 지도유형을 펼칠 수 있는 목회자는 우리 주변에 그리 많지 않다. 보다 열린 마음과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열었다 해도 막상 교인들로부터 그러한 지적을 받으면 겉으로는 ‘말씀 잘하셨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괘씸하게 생각하고 ‘어디 보자’하는 것이 목회자들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신학교에서는 목사를 반대하는 성도가 있으면 그를 선생으로 알고 배우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신행동주의적 목회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실상 그 교훈을 따르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하였다.
대부분 그러한 교인들은 괘씸죄에 걸려 목회자들로부터 유형이든 무형이든 여러 형태로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심방을 안한다든지, 그에 대해 무관심하다든지, 직분을 주지 않는다든지, 그를 위해 기도를 하지 않는다든지 그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한국 목회자들은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이 많다.
3. 인지적 유형분석
인지학파적 관점(cognitivism)에서 볼 때 목회자의 리더십은 게쉬탈트적 리더십(ges-taltic leadership)과 반게쉬탈트적 리더십으로 나뉘어진다.
게쉬탈트적 리더십은 전체의 조화와 균형, 상승적 발전을 강조하는 리더십으로서 총체주의적 리더십(holistic leadership) 또는 시너지적 리더십(synergic leadership)이라 불리운다. 반게쉬탈트적 리더십은 분화적이고 개체주의적인 리더십을 가리킨다. 인지학파에서 강조되는 리더십은 게쉬탈트적 리더십이다. 반게쉬탈트적 리더십을 할 경우 서로의 연결이 어렵고 전체적 균형보다 개체의 이익이 앞서게 된다.
게쉬탈트적 리더십은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라는 총체주의의 정신을 바탕으로 부분들의 전체적인 연결과 연합을 통해 상승적으로 교회가 이루고자 하는 바를 성취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교회는 여러 사람들로 있을 뿐 아니라 여러 기관들이 있다. 이들이 모두 부분들이다. 목회자는 이 부분들을 유기적으로 엮어 교회가 목적하는 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데 모든 것을 결집시켜야 하는 리더십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목회를 하다보면 각 교인은 교인대로 욕심이 있고, 각 기관은 기관 나름의 욕심이 있다. 각 부분은 기본적으로 이같은 이기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어서 이것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 목회자가 어떤 개인이나 어느 부서의 이기주의에 편승하여 의사결정을 하게 되면 교회 전체로서의 화합과 균형을 이뤄나갈 수 없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전체가 조화와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목회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게쉬탈트적 목회를 하기 어렵다. 큰 교회는 각 부분들이 서로 잘 융합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고, 작은 교회는 목사든 장로든 어떤 한두 인물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어 그들의 말이 바로 법이 되다보니 문제가 된다.
큰 교회 목회자가 게쉬탈트적 목회를 잘 하려면 부분들을 잘 엮어나가는 관리기술이 필요하다. 울타리를 가급적 넓게 치고 많은 교인들이 그 울타리 안에 들어오도록 한다. 그러면 비록 경계가 넓기는 하지만 전체로서 융화를 이룰 수 있다. 작은 교회의 경우 권력이 한두 사람에게 집중되는 현상을 막고 보다 힘을 분산시켜 각 부분이 건강하게 일하도록 만들어줌으로써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룰 수 있다.
전체적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 어느 한쪽의 손해나 양보를 강요하는 방법보다는 서로 만족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른바 양승리더십(win-win leadership)이다.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그래서 모두가 사는 방법이다. 이에 반해 승패리더십(win-lose leadership)이나 양패리더십(lose-lose lea-dership)은 다르다.
승패리더십은 어느 한쪽의 승리는 다른 한쪽의 패배를 의미한다. 나는 살지만 너는 죽는 식의 리더십이 바로 이것이다. 보기를 들어 목회자는 살지만 교인은 죽는 리더십이라면 승패리더십이다. 이러한 리더십은 바람직하지 않다. 목사만 살고 교인은 죽는다면 그것은 목회가 아니라 착취이다.
양패는 너죽고 나죽기 식의 목회이다. 교인들과 목회자가 서로 반목하여 미워하는 것이다. 미국 동부의 어느 교포교회에서 일어난 사고지만 목사가 그를 반대하는 그룹의 모임에 나아가 그들에게 총을 쏘아대 생명을 앗아간 사건은 너죽고 나죽기 식의 목회이다. 목회는 양승(兩勝)이어야지 양패나 승패는 안된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목회자들의 실제 목회현장을 분석해보면 양승보다는 승패가 많고, 심지어 양패의 모습도 자주 보인다. 국내외적으로 많은 교회의 교인들이 목회자와 사이가 좋지 못한 현실은 한국교회의 목회가 게쉬탈트적 목회와는 너무나 거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 문제에 대해 교인뿐 아니라 목회자의 깊은 자성이 필요하다.
그런데 때로 목회자는 게쉬탈트적 목회보다 반게쉬탈트적 목회를 하는 교역자도 있다. 교인 상호간의 교류를 금하며, 집단적 모임을 목회에 반대하는 모임으로 간주하며, 가급적 성도와 성도를 분리시킨다. 이러한 것은 목회자 스스로 지도력에 자신이 없거나 교인들을 의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자기만 보라고 말하며 다른 사람을 보면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유형은 잠시 성공할 수 있을런지 몰라도 오래가지 못한다. 이러한 형태의 리더십이 오래가면 갈수록 교회에 생명력을 잃게 만들어 양들은 목자가 떠나든지 아니면 자기들이 떠나든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반게쉬탈트적 목회는 목회자나 교인 모두에게 좋지 않다.
4. 상징적 상호교섭적 유형분석
상징적 상호교섭주의(symbolic interactio-nism)는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를 중시한다. 상징적 상호교섭주의에 따르면 목회자의 리더십 유형은 크게 인기중심의 목회와 탈인기중심의 목회로 구분된다.
인기중심의 목회는 사람을 의식하는 목회인 반면 탈인기중심의 목회는 사람을 전연 의식하지 않는 목회를 말한다. 이 유형분석은 우리가 흔히 사람중심의 목회를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중심의 목회를 해야 하는가를 말할 때 적용되기도 한다.
인기중심적 목회는 목회자도 사람이므로 사람을 많이 인식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목회자는 대부분 사람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신경을 쓰지 않는 목회자는 별로 없다. 목회자가 공중의 자리에 나갈 때 의식적으로 복장을 간추린다든지 말씨에 신경을 쓴다든지 자주 미소를 지어 보인다든지 하는 모든 형태가 인기 중심과 연관된다.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목회자들의 모습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설교때 교인들에게 은혜를 꽉 끼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의도적으로 설교를 구상하고, 그래서 설교 후에 교인들의 입에서 ‘목사님, 오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라는 소리를 듣기 원하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스스로 기뻐 ‘그렇지, 이제야 교인들이 나를 알아주는군’이라고 자만한다면 그것은 은혜중심이 아니라 사실상 인기중심적 목회이다.
교역자가 말씀보다 심리학의 여러 경우들을 들어 설교를 함으로써 ‘그 목사, 참 유식하고 현대적이야, 사람들의 마음을 팍 꿰뚫어’라는 말을 듣고자 하는 것, ‘유명한 사람 아무 아무개가 말하기를’ 하며 교인들에게 자기의 유식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도 이 유형에 속한다.
심하게 말해서 목사가 목회에 하등 소용이 닿지 않는 박사 학위를 가지려는 것도 인기를 높이려는 속셈이 담겨 있다. 외부에서 동역자나 설교자를 초청할 때 언제나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초청하여 관심이 그들에게 쏠리지 못하도록 한다. 이러한 목회는 하나님 앞에서 목회를 한다기보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인기를 모으고 이를 높게 유지하려는 것이므로 문제가 된다.
탈인기중심적 목회는 교인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든지 상관하지 않고, 교인들이 자기의 설교를 싫어하든 안하든 상관하지 않고 말씀만 바로 먹이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면 된다는 목회자들에게서 흔히 나타난다.
이러한 목회자는 현대 목회자들이 자기의 인기를 높이려는 전술을 사용하는 목회를 하므로 한마디로 썩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는 어디까지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목회자들의 정신은 바르다. 그러나 자칫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고, 소외될 우려가 있다.
상징적 상호교섭주의자들은 목회자들이 아무리 남과 달리 자기식으로 어떤 목회를 한다해도 사람과 떨어질 수 없으므로 결국 사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목회 자체가 양들과의 관계에서 출발하므로 이 점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목회자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반대로 사람들의 관계를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목회도 문제가 된다. 인기중심의 목회자는 자신을 반성할 필요가 있으며 탈인기중심의 목회자 또한 자기폐쇄적 모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나님과 인간 모두의 관계가 복음적이어야 목회를 바르게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인간주의 심리학적 유형분석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인간주의(humani-sm)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보다 인간을 중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주된 이유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볼 때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이 강하게 자리를 차지하면서 인간의 이성이 높이 평가되었고, 이성이 신장된 결과 과학이 발달되었으며, 그 과학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몰아내었다는 결론을 얻어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인간주의는 과학에 매우 도전적이다. 과학이 산업화를 일으켜 사람을 편하게 살게 하는 데는 기여했는지 몰라도 인간다움을 상실시켰다고 보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 인간주의를 중시하게 된 것도 이 흐름과 연관되어 있다.
인간주의 심리학 측면에서 목회를 유형화할 때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인간적 리더십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철저히 기계처럼, 종처럼 이용하는 비인간적 리더십이다.
인간적 리더십은 목회자가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중시하고 그 사람이 사회생활에서나 교회생활에서 중요한 존재로 인정을 받고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목회를 하는 것을 말한다.
목회자가 교인이 가진 여러 가지 잠재능력, 곧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허용한 달란트를 충분히 살리도록 하고, 그것이 교회, 가정, 직장 모두에서 적극적으로 나타나도록 할 때 그 목회는 바로 인간적 목회가 된다. 물론 달란트의 활용은 하나님나라의 확장과 연관되어야 한다. 이런 목회는 존재가치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비인간적 목회는 담임목회자가 다른 부교역자나 교인들을 자기의 충직한 하수인 정도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보다 담임목사를 위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목회의 방향이 교인들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 자신에게 향해 있다.
이런 목회유형은 권위주의적이고 독재적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이따금 목회자들이 ‘교인들이 유식해지면 못써’라는 말을 한다. 유식해지면 고분고분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교인들의 성경지식이 높아가는 것까지 경계한다. 교인들이 성경지식을 알면 알수록 목회자에 반항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말씀을 철저히 교육하기보다 가급적 겸손, 충성, 온유가 강조된 교회교육을 강도높게 실시한다. 목회자가 교인들의 달란트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달란트가 목사중심으로 활용되기를 원한다. 물론 그것은 목회방침이라는 것으로 미화되지만 교인들은 사실상 중요한 존재로 간주되지 않는다.
이러한 목회스타일은 하나님의 나라보다 자기왕국을 건설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요즈음 이른바 ‘교회주의’가 비판을 받는 것은 이렇듯 잘못된 비인간적 목회 때문이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주의 심리학에서 볼 때 목회가 인간적 목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인간적이고, 너무나 인간적인’ 목회였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억눌림을 당한 자 모두를 귀중한 생명으로 보셨으며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선언하셨다. 이러한 선언은 현대를 사는 목회자들도 이러한 목회를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목회자들이 교인들을, 신학자들이 신학생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키우는 것은 인간적 목회이다. 인간주의를 하나님주의와 반대되는 것만으로 생각하여 이를 무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마리땡(J. Maritain)은 인간중심적 인간주의(anthropocentric humanism)와 하나님 중심의 인간주의(theocentric humani-sm)를 구분하고 하나님중심의 인간주의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도 우리를 중히 보신 때문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도 이웃의 생명을 그만큼 중시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이처럼 인간존재를 귀하게 보는 데서 출발한다.
Ⅲ. 바람직한 미래의 목회유형
지금까지 목회유형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해왔고, 현재 어떤 유형들이 있는가를 분석적으로 살펴보았다. 목회유형에 관한 연구에서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미래를 대비한 한국의 목회지도자상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미래의 목회유형에 관한 하나의 대안적 제시가 될 것이다. 그 보기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목표지향적 목회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 을 쓴 스티븐 코비(S. Covey)는 7가지 습관 가운데 하나로 ‘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하라’는 제안을 하고 있다. 그는 강연장에 나와 “모두 눈을 감고 자기가 북쪽이라고 생각하는 곳을 향해 손을 높이 들어 가리키시오”라고 말한다. 모두 자기가 생각하는 북쪽 방향을 향해 손끝을 편다. 그는 청중들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하고 모두 어느 쪽을 가리키고 있는지 보게 한다. 서로 각각이어서 통일되지 않음을 확인한다. 코비는 나침반을 가지고 있어 정확히 어디가 북쪽인가를 말해준다.
목회도 마찬가지이다. 목표와 방향이 뚜렷해야 한다. 목회의 마지막 목표는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목회의 방향이자 초점이다. 교회, 성경, 전도, 설교, 기도, 봉사 모두 다 중요하고 좋은 것이지만 그 모두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하도록 하는 도구와 방법에 불과하다.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섬긴다 해도 그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섬김은 소용이 없다. 성경을 아무리 알고 꿰뚫고 있다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행동을 일삼는다면 그 성경지식은 아무 쓸모가 없다. 목회자가 아무리 설교를 잘하고 사람들로부터 명설교자라고 칭찬을 받는다 해도 그 행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으면 그 인기높은 설교도 하나님 앞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
목회자들은 이 점을 알고 있고, 이 점의 중요성을 자주 말하지만 엄격히 말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목회보다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가 인정받고, 어떻게 하든 자기를 알아주는 것을 우선하는 목회를 대부분 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목표와 방향을 분명히 해야 한다. 목회자부터 방향이 잘못되어 있으면 그 교회의 방향도 잘못 갈 수밖에 없다.
미래의 목회가 얼마나 성공적일 수 있는가는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목표가 얼마만큼 하나님을 향해 있는가에 달려 있다. 나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바꾸거나 합리화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자 하며 그 뜻을 준행함에 있어서 비록 자신에게 많은 어려움과 불이익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감내하며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2. 변혁적 목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 가운데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셨다는 점이다.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주요한 가르침이다. 이 거듭남은 외면적인 변화가 아니라 내면적인 변화이다. 우리의 내면이 완전히 변화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목회는 거듭남의 목회를 하신 것이다. 역사가 번즈(M. Burns)는 이러한 리더십을 가리켜 ‘변혁적 리더십(transformative leadership)’이라 부른다. 이것은 진정한 목회는 변혁지향적 목회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변혁적 리더십은 거래적 리더십(transact-ional leadership)과 반대된다. 거래적 리더십은 교환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과 다른 사람이 가진 어떤 것을 맞바꾸는 것이다. 거래가 이루어지려면 서로 상대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매력을 느껴야 한다. 자본가의 자본과 노동자의 노동이 서로 거래되는 것은 대표적인 보기에 속한다. 교환을 통해 서로 도움을 주고받지만 그것은 상거래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거래에 대한 매력이 없으면 남처럼 돌아설 수 있는 것이 바로 거래적 리더십이다.
그러나 변혁적 리더십은 마음의 변화를 기본으로 한다. 목회자의 리더십은 자신의 어떤 것을 성도의 어떤 것과 거래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완전히 교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정신의 철저한 교체작업을 하는 것이 바로 변혁적 리더십이다. 그 작업이 있어야만 성도들이 어떤 경우에서라도 복음적 삶을 살려고 노력하게 된다.
목회자가 재물이나 권력이 있는 새신자에 대해 더 관심을 보이고, 그런 류의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두는 식의 목회를 한다면 그 목회는 거래적 목회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나 차등이 없이 대하고, 한 작은 영혼의 아픔까지라도 자기의 아픔으로 알며, 많은 영혼들에게 내면의 변화를 일으켜 주님 안으로 돌아오게 하는 목회를 한다면 그것은 변혁적 리더십이다.
거래적 목회는 잠시 성공하는 듯 보이지만 종국적인 성공이 아니다. 변혁적 목회야말로 최후에 웃을 수 있는 목회이다. 이 리더십은 어느 때나 필요한 것이나 앞으로 더욱 요구되는 리더십이다. 변혁적 리더십을 하려면 교인보다 목회자들이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 목회자가 먼저 낮아지고 변화하면 성도들은 더 크게 그리고 더 많이 변화하게 된다.
3. 기동성 목회
미래사회는 변화가 빠른 사회이다. 지금까지의 한국목회자의 목회는 한국이 가진 특유한 느린 문화의 속성에 따라 느린 목회가 하등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은 빨리 변해도 복음은 변하지 않는 것이니 그리 서두를 것이 없다고 보았다. 서두를 것이 없는 정서는 유교나 불교문화적 영향도 적지 않다. 그래서 목회자의 사고나 행동도 빠른 것보다 느린 것이 선호되었다.
그러나 느린 문화는 옛 문화가 되어 버렸다. 사회나 문화의 변화에 가속도가 붙어 그 변화의 속도가 날로 빨라지고, 그 범위도 세계화되었다. 이런 변화는 이른바 C&C(com-puter and communication) 산업의 급격한 발전으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어떤 이는 아무리 세상이 빠르게 변한다 해도 목회자까지 그래야 되냐고 말할 것이다. 이런 생각은 마치 경부선철도가 놓여지자 유생들이 빨리 달리는 것을 타고 다니는 것은 양반 나라의 체통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데모를 벌인 것과 다름이 없다.
목회자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통신기술은 무섭게 발전하고 있다. 이 기술의 변화는 인간의 사고 및 생활을 빠르게 할 뿐 아니라 종교생활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통신기술의 놀라운 변화는 정보의 교환을 빠르게 하고, 그 양 또한 엄청나다. 이에 목회자는 빨리 그 정보를 바로 파악하고 활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정보는 단순한 생활정보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과 그 변화까지 담고 있어 목회자는 그에 대한 복음적 대안을 신속히 마련해주지 않으면 안된다. 앞으로의 목회는 강단에서의 설교보다 케이블 TV나 컴퓨터 통신망에 의한 설교 및 상담활동이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출퇴근을 회사로 하지 않고 업무를 집이나 자기의 편한 곳에서 보듯 앞으로 교회가 건물을 가진다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때가 올 것이다. 물론 컴퓨터나 여러 통신망을 이용한 예배에 이의를 제기할 분도 많겠지만 그만큼 세상은 빨리 변하고 있다. 목회활동도 그만큼 빨라지고, 정보화되고, 전문화될 것이다.
4. 시너지적 목회
한국의 목회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너지적 목회이다. 시너지란 서로 힘을 합하여 더 높은 성과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시너지의 가장 고차원적인 형태는 인간만이 가진 천부적인 재능을 활용하여 서로 이해하고 어려운 문제일수록 서로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앞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시너지를 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시너지적 목회는 생산적 협조를 통한 목회로서 앞서 언급한 총체적 리더십, 게쉬탈트적 목회와 깊게 연관된다. 협조에 관한 한 한국의 목회자들은 상당한 비판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목회는 개교회중심으로 인해 그 초점이 담임목사에 집중되어 왔다.
초대교회는 여러 사도들이 힘을 합해 목회활동을 했다. 그러던 것이 지역적으로 나뉘고 교파별로 나뉘면서 개체주의 성향을 띠고, 특히 산업화과정에서 개교회성이 뚜렷이 드러나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개교회주의는 어찌보면 산업사회, 특히 편협되고 왜곡된 자본주의 산물이기도 하다. 한국의 목회자들은 개교회주의에 깊이 젖은 탓인지 이웃교회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기보다 경계하고 적대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강단에서 이웃사랑을 강조한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시너지 목회란, 사랑은 말에 있지 않고 실천에 있음을 보여주는 목회이다. 그 실천을 위해 교인과 교인들을 묶고, 기관과 기관을 묶고, 교회와 교회를 묶어 하나의 그리스도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제 한국의 교역자들도 팀중심의 목회를 해야 한다.
시너지 목회를 하려면 목회자도 그 실천의 한 단위가 되어야 한다. 자기를 중심으로 하기보다 그리스도중심으로 하고, 그 모든 관계를 그물망으로 연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물조직(networking organization within Christ)이 되어야 한다. 그 그물이 얼마나 잘 엮어져 있고, 힘이 있느냐에 따라 사람을 낚는 어부들의 역할이 달라지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앞으로의 목회는 이름내기 목회나 생색내기 목회가 아니라 그야말로 목회자를 비롯하여 모든 교인들이 팀웍을 이루어 생산성을 높이는 목회를 해야 한다. 생산성은 기업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시너지적 목회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목회자 스스로 주인공이 되려 해서는 안된다. 자기 자신이 먼저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져야 할 씨앗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5. 임마누엘 목회
목회자가 아무리 행정력이 뛰어나고 설교를 잘한다 해도 하나님의 신이 그와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 목회는 바른 목회가 아니다. 목회자는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목회, 곧 임마누엘 목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리더십을 강조하였다. 하나님께서도 모세와 함께 하시듯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목회자의 목회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다.
임마누엘 목회가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과 그분의 도우심 없이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국의 여러 목회자들도 임마누엘 목회를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현장을 보면 하나님의 자리에 목회자 자신이 들어서 있음을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기 위에 상전이 없는 듯이 행동한다.
목회자는 항상 하늘의 상전이 계심을 인정하고 자기를 낮추는 목회를 해야 한다. 그 낮춤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목회자가 스스로 높아지기를 바라는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Ⅳ. 마무리
우리는 지금까지 역사적 목회유형 속에서, 현재의 목회유형 속에서, 그리고 미래의 목회유형 속에서 어떤 유형들이 존재하는가를 살펴보았다. 그 모든 유형들은 과거에만 있었고 지금은 없으며, 현재는 없으나 미래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과 장소에 따라, 목회자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어떤 특정 유형이 강조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역사가 다르고 시간과 공간이 달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목회자란 하나님 앞에 선 자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도 하나님 앞에서 예외일 수 없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목회지도를 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해야 한다. 자기를 기쁘게 하고,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위한 목회를 반성해야 한다.
목회는 목회자 자신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며 하나님나라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여러 잘못된 목회유형들의 공통된 특징은 목회를 통해 자기의 나라, 인간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데 있다. 그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 결과가 그렇게 나타나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그게 아니라’고 어떻게 변명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목회자가 할 일은 더 이상 자기의 왕국세우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를 우리 안에 세워 그 나라만이 왕성하게 하는 일이다.
미래의 목회자는 변화에 능동적이어야 하며 보다 열린 목회를 할 필요가 있다. 목회자의 목회태도가 교인들에게 얼마만큼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자기 방식만을 고집하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유해할 수 있음도 인식해야 한다. 목사처럼 교인들에게 변화를 강조하는 사람도 없다. 그러면서도 목사처럼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도 없다. 남이 변화되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자기는 변하려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기계적인 목회, 비인간적인 목회, 인기위주의 목회, 거래적 목회, 양패적 목회를 했다면 하나님과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목회, 게쉬탈트적 목회, 변혁적 목회, 기동성있는 목회, 양승적 목회, 임마누엘 목회로 방향을 전환하지 않으면 안된다. 목회방향을 이런 방향으로 바꾸어 나갈 때 목회자 스스로 열린 목회, 기쁨에 찬 목회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나라가 더욱 확장될 것이다.
양창삼/서울대에서 정치학과 경영학을 공부하고 서일리노이 주립대(MBA), 펜실베니아 주립대학원을 거쳐 연세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총신대를 졸업(M.Div.,Th.M.)한 목사이다. 지금은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이며 한국사회이론학회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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