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리더십자료

어떤 지도력이 차세대에 적합할 것인가

늘찬양 2006. 11. 15. 10:18

어떤 지도력이 차세대에 적합할 것인가
 
이용원  - 
 
 
어느 시대의 어떤 사회나 지도자의 지도력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한국교회를 생각할 때에도 먼저 그 지도자상과 지도력을 상정해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한다. 단지 가설을 만들 수 있을 뿐 아무도 정설을 만들지는 못한다. 이런 전제를 하고라도 나름대로 내일의 한국교회를 생각하면서 거기에 적합한 지도자상과 지도력을 그려보려고 한다.

지난날 한국교회는 교회 역사상 유례없는 부흥과 발전을 자랑해왔다. 앞으로 오는 시대에는 우리 교회가 그냥 살아남는 정도가 아니라 계속 성장하고 발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만방에 크게 드러내야 한다는 당위론을 이 글의 출발점으로 삼아도 큰 잘못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단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세계는 너무 급속한 변화를 겪고 있어서 우리가 거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는 참으로 어려운 과제이다.
의사가 환자를 대할 때는 먼저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그 진단 결과에 따라 바른 처방을 하여 그 병을 치료한다. 잘못된 진단은 잘못된 처방과 치료를 하게 하고, 결국 환자의 병세는 악화되어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다. 또 진단은 정확해도 엉터리 처방이나 치료로 일을 그르치기도 한다.
교회 지도자의 지도력도 효과적으로 발휘되려면 교회나 세상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예측, 그리고 바른 처방은 필수적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거기에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해주심을 믿고 의지할 때 지도력은 가장 효과적으로 나타난다.

Ⅰ. 지도력의 본질과 유형에 대한 이해
효과적인 지도력은 다양한 상황에 부합되는 지도력의 형태와 그 지도자의 지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성숙도(follower maturity)에 따라 결정된다. 상황과 지도자와 다르는 사람들, 이 삼자가 적절하게 조화될 때 지도력은 효과적으로 발휘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상황과 따르는 사람들까지 다룰 만한 여유가 없으므로, 지도자와 그의 지도력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기독교 지도자(Christian leader)는 누구인가? 풀러신학교의 클린톤 교수(Dr.J.Robert Clinton)는 “기독교 지도자란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책임(God-given capability and responsibility)을 가지고 특정한 그룹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치어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도록 하려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기독교 지도자라고 해서 모두 같은 지도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지도력을 발휘하는 유형에 따라 지도자는 몇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매니저형(ma-nager)의 지도자이다. 이런 지도자는 행정가적 지도자로서 그 조직의 복리증진에 관심을 가지고, 재산관리, 재정관리, 사무실과 거기에 따른 직원관리, 그리고 교회의 제반 인사관리에 능하다.
둘째는 우두머리형(boss)의 지도자이다. 이런 지도자는 조직을 계급체계로 이해하고 권위있는 지배자로서 그 위에 군림한다. 그는 언제나 자기의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다방면으로 권위를 지키려고 한다.
셋째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일하게 하는 지도자형(enabler)이다.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어서 전체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게끔 하는 지도자를 말한다. 이런 지도자는 위기나 난관을 극복하는 힘이나 추진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기는 하지만 가장 민주적인 지도자의 유형이라 할 수 있다.
넷째는 카리스마적 지도자(charismatic inspirer)이다. 위기적 상황이 심각하면 할수록 이런 형의 지도력이 그 진가를 발휘한다. 흔히 이런 형의 지도자는 시대적 상황을 묵시적(apocalyptic)인 사건으로 이해하고, 인간 문화는 본질적으로 타락한 것이요 교회는 계약공동체임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어떤 유형의 지도력이 다음 세대에 가장 적합하다고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지도력의 효율성은 지도자의 유형에만 달린 것이 아니고 그가 처한 상황(환경요인)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성숙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한 지도자를 “그는 이런 형의 지도자이다”라고 쉽게 단정하기도 힘든다.
가장 바람직한 답을 찾는다면, 때와 장소 곧 처한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할 줄 아는 지도자, 다시 말해서 위의 네 가지 유형의 지도력을 시의적절하게 골고루 발휘한다면 그것이 우리가 찾는 답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또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 지도자라는 개념을 목회자들을 염두에 두고 쓰고 있다면 다른 각도에서 이를 검토할 수도 있다.

한국교회의 경우 대체로 초기부터 6·25전란 복구시기, 곧 1950년대 말까지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일생을 헌신적으로 봉사한 소명감이 투철한 목회자들이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다. 목회자로서의 첫째 표준이 그런 것이었다고 하겠다.
둘째 형은 전문가로서의 목회자이다. 1960년대 이후로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추구해온 목회자 또는 교회 지도자상이 여기에 속한다. 그들을 양성하는 신학교육도 영적인 과제보다는 학문적인 과제(an academic rather than spiritual challenge)를 주는데 집중되었다.
또 교회도 영적 지도자보다는 신학과 교역에 전문적 지식과 자질을 갖춘 목회자를 요구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전문가로서의 목사(a professional minister)가 되기 위해서는 계속 교육이 필요했고,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학위(M.Div., D.Min.)도 필요했다.

Ⅱ. 성서가 보여주는 지도력
우리는 성경말씀을 불변의 진리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성서가 요구하는 지도자상이나 지도력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까지도 불변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기독교 지도자와 지도력으로 존중되어오던 것이기도 하다.
성서는 능력보다는 성품과 삶의 모습에서 지도자상을 찾고 있다. 바울은 목회서신에서 스물세 가지의 감독 자질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가르치기를 잘하며”라는 한 가지만 능력을 요구하고 나머지는 모두 감독의 성품과 생활에 관한 요구를 하고 있다. 따라서 성서가 요구하는 지도력은 능력이 아니라 성품과 생활로부터 나온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지도력의 모형으로 삼아야 한다”는 명제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에게서도 한 가지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도자되심은 그가 하신 일(what to do)이나 그 일을 행하신 과정(how to do)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역의 출발점으로서의 인격(person himself)에 그 근거가 있다.

따라서 성서가 요청하는 새로운 지도력은 지도자의 인격 자체에서 나오는 것, 곧 첫째 요청과 같은 류의 답이 나오게 된다. 그렇다고 지도자의 지도력은 타고 나야 한다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지도자로서의 잠재적 그릇(potential ability)은 타고 나는 것이지만 그 지도력이 효과적으로 발휘되기위해서는 그 그릇이 닦아져야(trained)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성서에 나오는 지도자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리우고 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온전히 헌신적인 신앙이면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삶 자체가 그의 신앙고백과 생활이 유리되지 않고, 사도 바울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지도자(modeling leader)인 것이다.
넷째로 성서는 “교회를 세우는(bulding up the body of Christ)”(엡 4:12) 지도자를 요구하고 있다. 교회 지도자들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지도자(servant leader)가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도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0~12)고 하시면서 이것을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요구하고 계신다. 자기 희생을 전제로 하는 지도력이요, 잃음으로써 얻게 된다는 역설 위에 세워지는 지도력이다.
또 성서는 여러 곳에서 지도자를 목자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친히 자기를‘선한 목자’라 부르셨고,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치는 목자들로 지칭되어온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성서는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들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치는 목자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목자는 양들을 먹이고 돌보며 보호해야 할 기본적인 의무가 있으므로 그런 책임이 지도자들에게 맡겨지고, 그 일을 위해서 지도력이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다.
Ⅲ.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력
우리 시대, 특히 앞으로 한국교회가 맞게 될 시대는 분명히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는 시대일 것이다. 이데올로기 대립의 시대는 점차 종말을 고하고, 어떤 형태로든 한반도에도 통일이라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예상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정치·경제·사회 모든 면에서 국제간의 거리는 훨씬 좁아지면서 전통적 가치체계는 점차 무너지고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은 점점 더 세계화, 서구화의 길로 달릴 것이라고 해도 크게 빗나간 예견은 아닐 것이다.
가정 문제, 빈부격차 문제, 계층간의 갈등 문제 등등의 사회문제도 점점 더 복잡해지리라는 것도 거의 분명하다. 이런 급변하는 미래 시대에 주님의 교회를 책임지고 이끌어야 할 지도자는 먼저 깨어있어야 할 것이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졸고 있다면 대형 사고는 이미 예견 되는 것처럼 급변하는 시대 상황속에서 주님의 양떼들을 이끌어야 하는 지도자의 지도력은 우선 깨어있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아직 미래에 대한 정확한 지도도 없고, 길은 갑작스런 커브 길과 오르막 길이 산재해 있다. 이때 졸고 있는 운전자는 필연 사고를 내겠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주변의 변화를 감상하며 여행을 즐기는 운전자도 있다.
차세대의 기독교 지도자는 바로 후자의 위치에 서서 주어진 과업을 신나는 일로 받아들여 수행해야 한다. 비록 그 길이 험하고 힘들어도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힘입어 책임있게 그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둘째로 이 변화의 시대를 책임져야 할 지도력은 꿈(vision)을 제시하는데 드러나야 한다. 잠언 29장 18절을 흠정역은 “꿈이 없는 곳에서는 백성들이 멸망한다”(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고 옮기고 있다. 이것을 신국제역(NIV)은 “계시가 없는 곳에서는 백성들이 굴레를 벗어버린다”(Where there is no revelation, the people cast off restraint)고 옮겼고, 가진 개역 성경은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옮겼다.
하여간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네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들의 순례 여행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는 정말 어렵다는 뜻이다. 목자의 사명 가운데 양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사명은 결코 둘째로 둘 수 없는 사명이다. 목자는 양들에게 방향과 목표를 제시하고 그리로 향해 함께 가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꿈은 결코 인간의 망상이나 계획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vision)인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제시하였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꿈이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을 간절히 추구하고 있는 그의 종들에게 자기의 꿈(God’s vision)을 늘 보여주셨다. 그 꿈은 하나님의 종들이 가진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주어진 환경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토대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바람직한 미래상(a clear mental image)이다. 이 꿈은 선교와 혼돈되어서는 안된다. 선교는 모든 교회가 경쟁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과업인 반면, 여기서 말하는 꿈은 사역의 방향성을 말한다. 그것은 경쟁적으로 추구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급한 바와같이 인간적인 계산이나 계획으로 세운 목표가 아니라 누구나 따를 만한 건전하고 아름다운 꿈인 것이다. 선교적 과업을 제시하면 거기에는 찬반 양론이 나올 수 있으나 이런 꿈이 방향으로 제시될 때는 교인들이 기꺼이 따르게 된다. 그리고 그런 꿈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교인들이 그 지도자를 따를 만한 이유가 없어지고, 지도자는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셋째로 변화의 시대에 지도력은 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물론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우리가 지켜야 할 절대적이고 근본적인 요소들이 있다. 우리가 가진 복음이나 신앙고백,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 등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그대로 지켜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인간적인 전통이나 유산, 문화적인 산물 등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융통성있게 변화를 주면서 대처해나가야 한다.

Ⅳ. 사역의 장이 요구하는 지도력
지도자의 지도력은 따르는 사람들이 없으면 무의미하다. 지도자의 지도력이 드러나는 것은 그가 일하는 장(場)에서 그의 영향권에 속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차세대 지도자들이 지도력을 발휘해야 하는 장은 어디이며, 그 영향권에 속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종래의 교회 지도자들의 관심과 사역은 내향적 특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교회 안에 머물고 만다는 뜻이다. 신학교육부터 이론신학과 설교학, 예배학, 목회학 등 거의 모든 교육 내용이 교회 안에서의 사역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는 문자 그대로 교회 지도자(a leader in the churched cul-ture)에 머물고 만다.
그러나 차세대 지도력은 그 미치는 범위가 넓어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뜻을 땅 위에 이루시고 그 나라를 세우시는 일에 우리가 그 종들로서 쓰임받아야 한다면,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분부하신 선교 사명이 차세대에도 그대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이것은 당연한 결론일 것이다.

따라서 차세대의 지도력은 선교적 지도자(missionary leader)에게서 나오는 폭넓은 지도력이어야 한다. 우리 안의 양들만 돌보고 인도하는 목자의 틀에서 벗어나 우리 밖의 양들, 길 잃은 양들까지 책임지는 지도자의 지도력이 요청된다.
그런 지도자는 선교지향적(mission-mind-ed leader)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두 가지 눈을 가지고 있다. 교회 안을 살피고 돌보고 인도하는 눈과, 교회 밖의 세상을 살피고 돌볼 자를 돌보고 인도할 자를 바른 길로 인도(지도)하는 또 하나의 눈을 가지는 것이다. 관심이나 사역의 폭이 교회 안에 머물지 않고 지역사회나 민족, 국가에까지 넓어지는 것이다.
어느 교회에 목회자로 부임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지역의 선교사와 어느 교회의 목회자라는 이중 과업을 지고 부임하여 그런 의식을 가지고 봉사하는 지도자인 것이다. 그때 그의 지도력의 영향권도 훨씬 넓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처럼 사역의 장이 넓어진 지도자는 마땅히 배우는 지도자(leader as student)여야 할 것이다. 급변하는 세계와 거기에 기독교 지도력이 제대로 대처하려면 끝없이 배우는 자가 아니면 안된다. 당면하는 문화적 상황을 이해하고, 그 세상 안에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며 따르는 자들에게 기독교적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개척하여 보여주는 지도자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그 상황에 효과적인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겸손하게 배우는 지도자상을 말한다.

Ⅴ. 맺는 말
차세대의 지도력이라고 해서 미래를 과거와 단절된 것으로 전제해서는 안될 것이다. 미래는 과거를 토대로 약간의 수정과 보완을 거쳐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의 지도자는 변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과 변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을 명확히 구분하는데 진력해야 한다. 그래서 고수할 것은 고수하면서 시대의 변화에 적절히 대처하는 지도력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변하는 것처럼 보여도 교회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사명을 감당하는 공동체여야 한다.
기독교 지도자는 그 일을 앞서서 인도(지도)하는 자여야 한다. 미래의 교회도 여전히 예배 공동체로서의 본질적인 모습과 선교 공동체로서의 기능적인 모습을 잃지 아니할 것이다. 따라서 차세대 지도자는 전통적인 중요한 목회적 과업들, 지도자들로서의 과업들을 훌륭히 감당하면서 당면하는 새로운 환경 요인들을 충분히 고려하여 적절히 대처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차세대에 적합한 지도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여 차세대에 적합한 지도자상은 성서가 요구하는 성품과 삶을 갖추고, 급변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아갈 방향을 분명히 제시하며, 교회 안과 밖을 모두 사역의 장으로 삼는 지도자인 것이다.

이용원 / 연세대와 장신대 신대원을 거쳐 풀러신학교(선교학 박사)에서 공부했다. 영남신학교 학장을 역임했으며 지금은 실천신학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