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리더십자료

왜 목회 지도력의 변화가 요청되는가

늘찬양 2006. 11. 15. 10:22
왜 목회 지도력의 변화가 요청되는가
유영기  - 
 
1. 시작하면서
21세기를 예측하고 대비하려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1960년대로부터 미래학자들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21세기는 그들 자신들도 예측을 불허하는 불확실성의 시대가 될 것을 전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그들의 노력이나 지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너무나도 급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2000년대에 대하여 비관적이면서 낙관적인 기대를 가지고 2000년대를 맞이할 채비를 하고 있다.
비록 우리는 미래학자는 아닐지라도 2000년대를 맞이할 한국교회의 현실을 관심있게 바라본다면 한국교회는 변화되어야 할 부분이 많다는 점에 공감할 줄로 생각된다. 한국교회가 하나님께서 주실 21세기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쁘신 뜻을 온전히 이루는 세기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현실을 면밀히 검토하며 2000년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의미에서 21세기를 내다보며 변화해가는 시대에 걸맞는 차세대 지도자상을 모색해보는 것은 상당히 의미있는 일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우선적으로 목회지도력의 변화가 요청되는 시대적·사회적 배경을 살피려고 한다. 살피는 과정 속에서 미국 미래학자들의 견해를 길게 인용함에 이해를 구한다. 그들의 주장을 성경과 대비하면서 성경에서 말하는 지도력은 곧바로 오늘의 한국교회 내지는 세계교회가 절실히 요구하는 지도력이라는 것을 논증하기 위한 것이다. 보다 긍정적으로 말한다면 한국과 한국교회는 세계와 세계교회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확신에서다. 다음으로는 한국 사회와 교회에 대한 전망에 대하여 간단히 거론한 후에 왜 목회 지도력의 변화가 요청되는가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다루고 끝맺으려 한다.

2. 시대적 배경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격변의 시대이다. 우리는 말과 기차를 거쳐 비행기까지 교통수단으로 이용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맥헤일이 말한 대로 비행기 속도시대를 거쳐 마치 로켓속도와 같이 변화가 빠르게 가속되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과학기술 혁명 특히 교통과 통신의 눈부신 발달로 우리는 세계 어느 곳이나 쉽게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마치 한 마을에서 공동생활하는 것처럼 의식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마샬 맥루언이 만들어낸 ‘지구촌’이라는 용어를 스스럼없이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오늘의 변화는 양적일 뿐 아니라 질적이다. 과학기술 발전이 변화의 주체가 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과학 분야만의 변화가 아니라 사회 전영역에 걸친 총체적인 변화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러한 총체적인 변화가 사회의 기본적인 가치체계나 구조들을 변혁시키므로 미래를 비관적으로 바라보기도 하나 역사의 전환시대라는 발전적 측면에서 보는 미래학자들은 미래를 비관적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사회의 기본적인 가치체계의 구조를 변혁시키는 전환시대와 관련하여 앨빈 토플러는 그의 저서 「제 3의 물결」에서 인류 역사를 전환적 변화의 측면에서 셋으로 구분한다. 그는 농업 단계를 제 1의 물결, 산업단계를 제 2의 물결이라고 하면서 ‘우주시대’ 혹은 ‘정보화 시대’ 또는 ‘전자공학시대’ 등으로 불리우는 오늘의 시대를 제 3의 물결 시대라고 명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제 3의 물결인 오늘의 시대는 에너지 위기, 생태적 위기 등 여러 가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 속에서 제 2의 물결의 특징들을 불가피하게 바꾸게 됨으로 사회 전영역에 커다란 질과 양의 변화를 경험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앨빈 토플러는 제 3의 물결은 인류 역사의 종말을 맞이하기 위한 물결이 아니라 인류 역사의 새로운 시작을 가져다주는 물결이라고 확신한다.
피터 드러커는 그의 저서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서 역사의 변화를 지식의 변화와 관련하여 이루어진 세 가지 혁명을 통하여 설명한다. 지식의 변화는 지식에 대한 의미의 변화를 말한다. 제 1 단계 혁명은 지식을 도구, 제조, 공정과 제품에 적용한 산업혁명이다. 제 2단계 혁명은 지식을 작업에 적용한 생산성 혁명이다. 이 생산성 혁명은 테일러가 1881년에 지식으로 작업을 연구 분석하여 그 결과를 그 작업에 적용하여야 할 것을 주장함으로 태동되었다.
제 3 단계 혁명은 경영혁명으로 기존의 지식이 효과를 내기 위하여, 그 기존의 지식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하여 다른 지식을 공급하는 단계를 말한다. 경영혁명은 생산성을 극대화시키는 최종적인 단계라고 예상하면서 지식의 조직화로 이루어진다고 드러커는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지식들은 그 자체로서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나 그들이 한꺼번에 결합되어 하나의 조직적인 지식으로 융합될 때 생산성이 있게 된다. 달리 말한다면 지식들이 전문화되면 될수록, 그 전문화된 지식들이 조직화되면 될수록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말이다. 그는 전문화된 인원이 하나의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조직화된 것으로 병원이나 오케스트라를 그 좋은 예로 들고 있다.

위의 두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한 이유는 앨빈 토플러는 인류에게 새로운 변혁을 가져다주는 새시대의 출현을 현상학적으로 고찰하였다면, 피터 드러커는 그와 같은 새시대를 출현시키는 내면적 배경(힘)이 무엇이었는가를 밝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시대에 대한 두 학자들의 견해는 서로 평행선을 긋고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토플러가 그의 저서 「권력의 이동」에서 인류 역사의 마지막 대변혁은 지식의 변화에 의하여 좌우된다고 주장함을 볼 때, 두 사람은 지식의 변화가 대변혁 주체라는 주장에서 랑데부하게 됨을 본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견해로써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우리를 경악케 하는 충격적인 사건들, 여러 부분에서 스스로 자멸하려는 광기의 기운들이 전세계를 삼킬 것만 같은 오늘의 세계상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1989년에 헝가리, 폴란드와 루마니아 공산정권의 붕괴와 백림장벽이 무너지고 ’91년에는 소비에트공화국 자체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였다. 세계는 이로 인하여 평화와 번영의 시대가 도달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물론 잠시 동안 우리에게 경각심을 주었던 걸프전도 탈냉전의 대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그러나 다니엘 벨도 인정하듯이 탈냉전 이후 세계의 혼란상을 우리는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다. 공산주의 붕괴 이후 같은 지역 안에서 분리 내지는 독립을 원함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구 소련은 15개 공화국으로 분리되었을 뿐 아니라 어떤 공화국은 그 자체 안에서 또 다른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민족분쟁이 종교분쟁까지 가미되어 혼란에 혼란을 거듭 야기하고 있음을 본다. 구 유고슬라비아의 경우 이러한 분쟁이 국제분쟁으로 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아프리카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처절한 전쟁들은 그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통합이 일어나고 있음을 본다. 유럽을 중심한 유럽공동체(EC)와 북미주를 중심한 북미주자유무역협정(NAFTA)이 지역통합의 예들이다.이러한 기구들이 그 안에 속한 나라들 사이에서 자유무역을 지향하기 위하여 세워진 기구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경제 전문가들은 이 기구들이 그 기구 밖에 있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무역장벽을 쌓아올리는 무기로 사용될 전망을 예견한다.
현재 추진중에 있는 아시아·태평양경제공동체 (APEC)가 결성될 경우 역시 위의 두 기구와 비슷한 경제적인 특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한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앞으로의 세계는 유럽과 북미 그리고 아시아 3대 지역 경제권이 형성되어 대립과 갈등을 빚으면서 경제 전쟁시대로 돌입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한다.

한국이 맞고 있는 시대적 상황은 어떠한가? 우리는 만약에 유엔이 핵문제와 관련하여 제재조치를 취할 때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북한의 으름장을 신문의 톱기사로 읽는 시대에 살고 있다. 비록 그들이 그럴지라도 우리는 언제 남북이 통일될 것인가 대해서보다 어떤 방식으로 통일하여야 할 것인가에 관심이 더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통일의 그날이 언제일지는 몰라도 통일을 대비하며 그날을 기다리는 시대에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미래학자들이 한국의 내일에 대하여 매우 낙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특히 나이스비트와 에버딘은 그들의 공저 「메가트렌츠 2000」에서 태평양 연안의 부상을 20세기 말의 지구촌 10가지 대추세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이들이 부상시키고 있는 나라 중의 하나가 한국이다. 한국을 부각시키는 중요한 이유로 교육받은 고급 인력자원을 들고 있다. 피터 드러커는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라는 그의 저서의 ‘한국독자들에게’라는 장에서 한국이 이룩한 기적은 고된 일을 마다 하지 않은 근로자, 기업가 정신 그리고 고도의 지식에 의한 경영의 승리라고 하면서 교육을 통한 한국인의 지식의 조직화가 기적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강조하였다.
3. 사회적 배경
미래학자들 가운데는 현실과 미래를 전환시대의 발전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는 미래를 낙관한다 할지라도 사회적인 관점에서 미래를 바라보면서는 비관적인 견해를 갖는 자들이 많다. 이런 비관적인 견해는 인류가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만을 예견하며 미래를 맞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만이 아니다. 미래학자들도 그동안 인류에게 행복보다는 고통을 안겨주면서 세계를 지배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데올로기의 종언’만은 확실하다고 믿는다. 따라서’89∼’91년 사이의 공산주의의 붕괴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평화와 번영의 새시대를 맞는 줄로 알고 환영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가 실제에 있어 억압과 가난의 대명사처럼 여겨져왔던 공산주의를 대결하는 측면에서는 몰라도 이 세계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아님을 자유민주주의 신봉국들의 사회상이 증명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갑자기 세력균형을 잃은 오늘의 세계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가 그 제동력을 잃고 파멸의 절벽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것처럼 헤쳐나올 수 없는 혼란의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해보인다.

오늘의 문제는 과학의 발달로 인한 핵무기 확산의 위험을 위시해서 환경오염으로 인한 생태계의 위기와 물질 위주의 사회로 변화되어가면서 가치관이 붕괴되어가는 데 있다. 이와 더불어 도덕적·윤리적 타락의 결과로 초래된 범죄와 약물남용으로 인한 위기는 과학의 힘으로는 구제불능의 한계선상에 이르렀다고 인식된다.
다니엘 벨은 그의 저서 「2000년대의 신세계질서」에서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테크놀로지를 사용할 수 있지만,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테크놀로지를 사용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 이유는 테크놀로지는 원래 목적을 잘 설정했을 때만 대단히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수단(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니엘 벨은 사회문제는 그 원인도 복합적이요 목적도 문화적 가치에 따라 다양하기 때문에 테크놀로지로서는 대답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4.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오늘
오늘날 한국 역시 과학의 발전을 기초로 하여 사회·경제·문화 등 각 분야에 놀라운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본다. 이러한 발전과 더불어 우리 사회에서 오늘의 발전된 한국사회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단어들이 있다. 문자세대와 그에 대칭되는 영상세대라는 단어들이다. 이것을 달리 표현한 것이 전쟁과 가난을 통과한 구세대에 대칭되는 신세대라는 단어이다. 우리 사회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문자세대인 구세대보다 신세대인 영상세대가 많아질 것은 자명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과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인하여 우리 사회가 전보다 풍요로운 사회로 변모되어가므로 전자가 후자에게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전자가 후자의 영향을 받아 오늘의 한국사회는 영상세대로서 신세대화되어가고 있다. 달리 말한다면 문자세대에 속한 구세대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신세대화된 자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신세대인 영상세대의 특징은 무엇인가? 영상세대는 태어남과 동시에 TV나 비디오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고 자라다가 컴퓨터를 만지면서 성장한 세대를 말한다. 이 세대의 특징에 대하여 정근원은 “영상세대의 출현과 인식론의 혁명”이라는 그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들은 이성적이라기보다는 감성적이며, 옳고 그름보다는 좋고 싫음에 의하여 판단하며, 심사숙고하여 논리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감각적으로 판단한다. 미래의 득실을 기준한다기보다는 당장의 좋고 나쁨을 기준하고, 남들처럼 살고 싶다기보다는 남과 다르게 살고 싶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다. 자기를 절제하기보다는 자기를 표현하기 좋아하며, 억제된 감정보다는 해방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문화에 대한 수동적 향유보다는 문화의 생산과 소비에 참여하기를 원하며, 소유가치보다는 사용가치를 중요시한다.

이렇게 변화하는 한국사회에 대처해야 하는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한국사회가 신세대화되면 될수록, 과학의 발달로 풍요로워지면 풍요로워질수록 그런 시대상의 영향을 받고 사는 세대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또한 영상세대와 같은 사고나 가치관을 갖고 있으면서 신앙생활한다면 자신과 교회를 무기력하게 만들 뿐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을 것은 자명하다.
위와 같은 사실은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 증명해주고 있다. 우리는 체감적으로는 물론 통계적으로 한국교회가 점점 감소화, 무기력화 내지는 세속화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한국교회 성장 속도가 둔화되어가고 있는 사실을 통계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통계상으로 볼 때 기독교인 숫자가 ’90년에 1142만명으로 집계되었던 것이 ’91년은 1209만명으로 67만명(5.8%)이 증가했고, ’92년에는 1257만명으로 48만명(4.0%)이 증가되었음을 보여준다(기독교 대연감, 교문사).
어떤 교단은 ’92년 한 해에 10만명 이상이 감소되었음을 통계가 보여주었다. 통계는 믿을 것이 못된다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다. 아니 교인 숫자의 증감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교인의 질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교인들의 예배 참석률이 저하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배에 참석하지 않으면서 진정한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거나 그런 교인들을 질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고 장담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를 무력하게 만들고 감소화시키는 원인은 무엇인가? 이미 다른 분들이 그 원인들에 대해서는 여러 지면을 통하여 밝혔으므로 여기에서는 설문을 통한 두 가지 자료만 제시하겠다. 「월간 목회」 ’93년 7월호에서 서울 시내 담임목사 2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 중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한국사회의 문제점은 황금만능, 불신풍조 순이요, 한국교회가 극복해야 할 당면과제는 목회자의 자질과 물량주의 순이요, 한국교회가 시급히 고쳐야 할 문제점은 신앙과 생활의 차이와 목회자의 자질 순이다. 한편 「목회와 신학」 ’91년 5월호의 십대 청소년의 신앙과 갈등구조 조사에서 424명 중의 2.4퍼센트가 목회자는 사기꾼, 거짓말쟁이라고 대답한 통계자료를 제시한다. 이와 더불어 ‘교회, 가정과 학교 모두 돈에 노예가 된 것 같다’와 ‘우리 교회는 목사님의 독재와 돈만 요구하는 교회여서 싫다’라고 말하는 십대 청소년의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목회자가 피리를 불어도 교인들과 이 세대가 춤추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목회자가 피리를 불면서도 자신은 춤을 추지도 않으며 춤출 줄도 모르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더 큰 문제라고 생각된다. 애곡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가슴을 치기는 바라나 목회자 자신은 가슴을 치지도, 칠 줄도 모르는 것이 한국교회의 오늘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5. 목회지도력 변화가
요청되는 성경적 이유
위와 같은 한국사회와 교회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종종 한국교회가 이대로는 안된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달리 말한다면 변화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한국교회가 변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교회지도자가 변하여야 한다. 다른 지도자로 바꾸기만 하면 되는가? 아무리 지도자를 바꾸어도 지도력이 변하지 않으면 교회는 변하지 않는다. 목회지도력의 변화가 요청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리 우리가 변하여야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좋다고 하시면 그대로 있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괜찮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이게 아닌데 하시면 변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종종 세상이 변하기 때문에 변하여야 한다고 한다. 변하여야 한다는 말에는 동감한다. 그러나 먼저 분명히하여야 할 것은 변하여야 할 이유가 세상이 변하기 때문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경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한다. 이 세상은 변하더라도 너희들은 변하지 말라고 한다. 세상이 변하는데 변하지 않아도 살 길이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우리를 지키실 자신이 있으시단 말인가? 분명히 하나님은 과거에는 그러하셨다. 과거에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서 그리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떠하실까?
미래학자들처럼 21세기는 너무 급변하여 변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는 세기요, 불확실성의 시대가 될 것이니 시대에 따라 변하라고 하실까? 결론은 하나님께서는 21세기에도 써먹을 노하우를 성경을 통하여 주셨기 때문에 동일하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성경이 가르쳐준 대로만 하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그 노하우대로 하느냐 안하느냐의 결단뿐이다.

정말 하나님께서 21세기의 변화를 아시고 계셨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 우선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여지리라”는 다니엘서의 예언이 오늘날 성취되어지고 있다는 점을 제시할 수 있다(단 12:4). 또한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인 마태복음 24장의 종말에 대한 예언들이 성취되어가고 있음을 제시할 수 있다. 한가지 예를 든다면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는 말씀이 그 좋은 예이다.
바울 역시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오는데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딤후 3:5)라고 말세의 사회상을 예언하였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오늘의 신세대와 한국교회도 이 말씀에 해당된다고 할 때 반대할 자 없을 줄 안다.
하나님께서 21세기를 아시고 우리에게 주신 노하우는 무엇인가? 앨빈 토플러는 21세기를 격변의 세대로 예견하면서 이 세상에서 일어난 격변의 전환을 물결에 비하여 말하였다. 이 격변의 물결을 헤치고 나갈 수 있도록 토플러가 제시한 비결은, 그 물결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물결들이 서로 관련되어 있으므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잘 찾지 못하면 그 속에서 헤엄치다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됨직한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대변혁을 새 술에 비유하면서 새 부대에 담으면 된다고 하셨다. 그는 대변혁의 주체자로서 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향하신 뜻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고 하신다(렘 29:11).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도적이 오는 것은 멸망시키려고 오나 자신이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요 10:10).
여기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대변혁들의 주체가 사탄이 아니라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또한 사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으로 주신 것을 가지고 우리를 골탕먹이고 멸망시키려 하고 있음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사탄은 우리에게 향하신 가장 선하신 뜻을 파괴하기 위하여 우리를 속여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처럼 하기도 하며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것을 모방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모방하는 사탄에게 속아 사탄이 주체이며 사탄의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사탄의 하는 일을 보면서 비관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이 그렇게 하실 것까지 다 아시는 분이다. 그러기에 성경이 요구하는 지도자는 이 세상을 비관적이면서도 낙관적으로 보는 눈을 가진 자이다. 왜 하나님은 과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이 세상을 지구촌화하셨다고 생각하는가? 핵무기를 만들어서 적당한 때가 오면 이 지구촌을 싹쓸이하시려고 그렇게 하셨을까?
과학의 발전을 통하여 세상을 지구촌화하심은 이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하심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는 말씀을 하실 그 때에 만일 오늘의 신세대가 그곳에서 들었다면 ‘웃기네’ 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그런 반문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죽을 각오만 있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는 갈 수 없어서 못가는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니라 원치 않기 때문에 안가는 세상에 살고 있다.
동구권은 괜히 무너졌다고 생각되는가? 필자가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후배가 와서 무엇하러 왔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몇년 후에 모스크바에 가서 모스크바 제일장로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준비하러 왔다고 했다. 필자는 믿음은 좋지만 믿음을 그런 데 써먹는 것이 아니라고 충고했다. 그는 지금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있다. 앞으로 나를 만나 어떤 눈초리로 바라볼 것인가를 생각하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곤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21세기를 파멸의 시기가 아닌 축복의 세기로 바꾸어 놓기 위하여 주신 ‘노하우’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목회지도력의 변화가 요청된다. 성경이 말하는 21세기를 위한 지도력이 무엇인가에 대하여서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로 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한가지 예를 들어 말한다면 한국교회가 21세기를 헤쳐나갈 방법 중의 하나는 협력 사역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자가 없을 줄 안다. 그러나 이 협력 사역이 개교회적으로나, 교단적으로나 혹은 범교단적으로 잘 이루어진다고 누가 감히 말하겠는가? 위에 언급한 경제 사회학자 피터 드러커는 지식의 혁명을 말하는 중에 제 3의 혁명은 지식의 조직화를 통한 경영의 합리화를 통하여 이루어졌고 앞으로도 이루어져 나갈 것을 말한다.
그는 말하기를 지식은 그 자체로서 아무것도 만들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 지식이 행동화될 때 힘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고도의 전문적인 지식은 전문화가 되면 될수록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조직화가 되면 될수록 가속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계급은 존재하는 것이지만 조직은 지식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때 지식들 사이에는 높다거나 낮다거나 하는 서열이 없다. 지식의 서열은 공통의 과업에 공헌하는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 물론 조직에는 리더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리더는 군림하는 리더가 아니라 방향을 제시하기 위하여 존재할 뿐이다. 개인의 기여의 몫은 그 과업 속에 삼켜지고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개별적인 결과는 확인할 수 없다. 위와 같이 하지 않는 조직은 암적인 존재나 다름이 없다. 존재가치 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런 조직은 죽은 거나 다름이 없다.
그런데 위와 같이 조직으로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노하우를 어디서 들은 것같지 않는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말씀, 섬기라는 말씀, 낮아지라는 말씀, 말만 하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이신 분을 어디에서 만난 기억이 없는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예수님에게서 들은 복음을 전하러 갔단 말을 못들었는가?
세상 어디에서 예수님 전에 제자들을 불러 교육시켜 두 사람씩 짝지어 내 보내신 분이 있는가? 위대한 선각자가 불쌍한 죄많은 자들을 위하여 예수님처럼 죽어주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오늘날 전문인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회의한 사실이 기억 나는가? 예수님은 2000년 전에 2000년 후 21세기의 지도자들의 지도력을 위하여 말만 하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본을 보이신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노하우 가지고도 오늘의 신세대는 구제불능의 대상일까? 교도소 선교하는 분이 한 말이다. 교도소에 가서 ‘예수님이 여러분을 위하여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을 감아 버린다고 한다. 그러나 ‘여러분 얼마나 배고프십니까?’ 하면 감았던 눈도 뜬다고 한다.
소년원에서 전도하는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처음에 소년원생들은 전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키려는 것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리려는 짓같이 보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한 사람도 변화시키지 못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변화받은 원생들의 눈물어린 편지를 읽어주는 것을 들었다.
노하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다 안다. 이미 위에서 언급된 통계가 보여주는 대로 황금만능주의화되어진 교회 지도자들 중의 얼마가 “내 영혼아 편히 쉬라”고 하는 부자에게 “어리석은 부자야 오늘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도 저 부자처럼 되어 보았으면 하고 동경의 눈으로 쳐다볼 지도자는 없을까?
목회 지도력의 변화가 요청되는 이유를 한가지만 더 생각해보면, 교회 밖에 있는 자를 안으로 끌어들이는 지도력과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을 지도하는 지도력이 혼동되어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때로는 교회 밖에 있는 자들을 교회 안에 있는 자로 착각하고 지도하려고 하고 있다. 반면에 교회 안에 들어온 자를 교회 밖에 있는 자처럼 착각하고 지도하려 덤비는 경우도 있다.

밖에 있는 자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찾아가든지 초청하든지 간에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한다. 마치 배고픈 자에게는 먹을 것을 들고 가고 벗은 자에게는 입을 것을 가지고 가야 하듯이 말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여주어야 한다. 마치 바울이 율법이 없는 자에게는 율법이 없는자처럼 행동한 것같이 말이다(고전9:19~22).
그러나 일단 교회 안에 들어온 뒤에는 그들로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자들로 바꾸는 훈련을 시켜야 한다(행 20 :17
~35). 계속 필요만 채워준다든지 아예 필요를 외면하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서 사회학자 드러커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회 속의 기독교라는 것이 미국의 개신교회를 유럽의 개신교회와는 달리 주변으로 밀려나지 않게 한 주요한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행동은 기독교의 사명은 아니다. 그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드디어 진보적 개신교단은 기독교를 이용하여 사회개혁을 추구하고 사회적 입법을 촉진하였다. 교회가 사회적 기관이 된 것이다. 그들은 정치적이 되었으며 그리고 그들은 급속히 결속력과 매력과 신자들을 잃게 되었다”(자본주의 이후의 사회, 94~95쪽).

목회 지도력의 변화가 요청되는 것은 시대가 변하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목회 지도력은 시대의 변화를 초월하여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통용되는 지도력이기 때문이다. 2000년 전에 제시되고 본으로 보여주었던 지도력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 어쩌면 2000년 후인 오늘날에 꼭 적절한 지도력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변하여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노하우대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적 변동기에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교회가 그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므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 세상과 다를 바 없이 세상을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변화되게 하기 위해서 지도력이 변해야 한다.
어떻게 변하여야 하는가? 그것은 필자에게 주어진 임무가 아니다. 본 특집을 다루는 다른 필자들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필자는 다만 한두 마디를 더 부연해두고 싶다.
첫째로 지도력이 신속히 변화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변화는 우리에게 감지되는 것보다 그 속도가 빠르고 어느 단계가 지나면 그 속도에 가속이 붙기 때문이다. 일단 가속이 붙은 후에는 마치 밀려오는 파도 물결처럼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우리가 감지하고 막으려는 순간은 이미 가속이 붙은 이후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차세대 목회자는 남북한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위한 비전을 가진 자여야 한다. 왜냐하면 세계 선교역사를 볼 때 하나님께서 선교 주체로 사용하는 개인이나 단체나 국가를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고난을 통과한 후 물질을 주어 선교하기 때문이다. 한국을 마지막 때에 쓰시기 위하여 고난의 풀무불을 통과케 하시고 물질적 풍요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주체사상으로 무장되어 훈련된 북한의 청년들에게 예수사상이 들어가면 어디든지 갈 수 있음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셋째로 차세대의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21 세기의 주인이심을 믿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절대 순종하겠다는 헌신된 자라야 한다. 절대적으로 순종하겠다는 결단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21세기를 대비하여 차세대를 키우는 지도력이 요청된다. 하나님께서 20세기 후반기를 위하여 19세기 말의 지도자를 장수케 하여 사용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21세기를 위해서 20세기 지도자를 장수시켜 사용하지 않으실 것은 자명하다. 이 사실을 명심하고 갑절의 영감이 있는 차세대의 지도자들을 기르고자 하는 마음과 기를 수 있는 지도력을 갖춘 지도자가 시급히 요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