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으로 망한 여인 미갈
삼하 6:16-23,2012.07.22. 늘찬양교회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사촌이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으로 논과 밭을 샀으면 당연히 기뻐하고 축하 해줄 일이지 그것이 어찌 배가 아플 일이 되겠습니까? “나는 못해도 사촌이라도 했으니 참으로 장하구먼! 참으로 장해!”하며 축하해도 시원찮은데 말입니다. 이것은 한국인들의 심성 속에 "남이 잘되는 것을 못 보는 성격"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정말 버려야 할 것입니다. 내가 못해도 남이 그것을 잘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함께 사랑하고 섬기고 나누면 기쁨은 배가되고 슬픔은 반으로 절감되어 너무나도 좋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제 2대 다윗 왕이 여호와의 법궤가 다윗 성으로 돌아올 때에 너무나도 기쁘고 좋아서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며 뛰었습니다. 얼마나 신나고 좋았으면 왕이 자신의 체면을 불구하고 그렇게 신나게 춤을 추며 뛰었을까요? 그런데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다윗 왕의 첫째 아내이자, 사울 왕의 딸이었던 미갈이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 지 방탕(放蕩)한 자가 염치(廉恥)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臣僕)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삼하 6:20)하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핀잔을 주었습니다.
부부는 일심동체요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건만 어떻게 이 두 사람의 모습은 적대적인지 정말 알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미갈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죽는 날까지 자식 없는 불행한 여인으로 그녀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입으로 망한 여인 미갈”이라고 붙여보았습니다.
Ⅰ. 다윗 성으로 돌아온 여호와의 법궤
사무엘상 4장에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이라는 나라와 전쟁을 하는데 번번이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궁여지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한 것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가지고 전쟁에 나가면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엘리 제사장의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를 불러서 그 언약궤를 모시게 하였지만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참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언약궤인 하나님의 법궤마저 블레셋 나라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빼앗은 이 언약궤를 7개월 동안 그들의 신인 다곤의 신과 함께 보관을 하였는데 이때 다곤의 신상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등 너무나도 많은 문제가 발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이 모든 재앙이 이스라엘 신의 궤로 인한 것을 깨닫고 이스라엘 땅으로 언약궤를 돌려보내므로 저주와 질병을 없애기로 결정을 합니다. 이렇게 하여 그 유명한 "벳세메스의 소"가 출현하게 됩니다.
그런데 벧세메스로 보내진 소가 무사히 여호수아라는 사람의 밭머리에 멈추어 서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소를 잡고서 번제를 드린 것까지는 좋았으나 궁금하여 언약궤를 들여다보다가 70명이 죽고 말았습니다(삼상 6:19). 이 일로 덜컥 겁이 난 벧세메스 사람들이 기랏여아림이라는 동네로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가라”(21절)고 통보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랏여아림 사람들이 언약궤를 찾아와서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세우고 그로 하여금 관리하게 한 뒤 자그마치 20년 동안이나 보관하고 있었습니다(7:1-2). 그런데 그 연도를 가만히 살펴보면 블레셋과 전투 후 20년과 사울 왕위에 40년을 있었고 그 다음에 다윗이 임금이 되어 모셔오기 까지 10년 정도 그러면 대략 기랏여아림에 언약괘가 있은 지는 대략 70년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 오랜 세월 동안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온 정성을 다하여 언약궤를 보살폈기에 하나님께서는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복을 주셔서 그들이 풍성한 은혜를 받게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 언약궤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사라져 있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윗이 그의 성으로 모셔 오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법궤를 옮겨오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소들이 나곤의 타작의 마당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레에 실은 언약궤가 떨어질 위기를 맞은지라 이 광경을 웃사라는 사람이 목격하고 언약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손으로 잡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이 아닌 일반인이 언약궤를 만지는 것을 기쁘게 보시지 않으므로 웃사가 이 일로 죽음을 맞았습니다(삼하 6:7). 언약궤의 운송을 포기하고 임시방편으로 오벳에돔의 집에 3개월 동안을 더 보관하였습니다. 그런데 3개월 동안 언약궤가 머물러 있던 오벳에돔의 집이 다시 큰 복을 받았습니다(11절).
그래서 다윗이 이번에는 제사장을 보내어 성스럽게 언약궤를 메게 하여 재차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모셔 들여오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무사히 다윗 성으로 언약궤가 들어오니 이때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얼마나 감격스러웠까요? 아무리 존귀하고 위엄 있는 임금이라 할지라도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전쟁에서 단련된 군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언약 괘가 다윗 성으로 들어오는데 어찌 아니 행복하겠습니까?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함의 상징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던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을 상징하는 "언약궤" 이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법궤“, 또는 ”하나님의 궤" "증거궤"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언약궤는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로"(17절) 안전하게 인도되어, 영화롭게 안치되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쳤던 장막은 아닙니다. 그것은 기브온에 있기 때문입니다(대하 1:13). 게다가 그것은 천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낡아졌기 때문에 이동하여 다니기에는 부적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궤를 맞이하기 위해서 새로운 장막을 마련했습니다. 다윗은 궤를 자기의 사저나 궁궐로 가져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필경 다윗이 지나치게 그것을 독점하는 것이 되고 또 백성들이 그 앞에서 기도하기 위해 나아올 때 출입이 부자유해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당분간 모세의 회막을 본떠서 만든 장막 속에 넣어 두기로 결정하였습니다(17절).
언약궤가 다윗 성에 안착되자마자 다윗은 번제(燔祭)와 화목제(和睦祭)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아무 실수와 이상도 없이 언약궤를 맞이하게 된데 대한 하나님께 감사의 표시오,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주셨던 은혜와 축복을 계속하여 이 백성들에게도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비는 간구의 뜻이 담겨 있는 제사이었습니다(17절). 우리도 기쁨이 있을 때는 언제나 찬미와 기도의 제사를 수행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와 화목제를 마치고서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참여한 모든 백성에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주었습니다. 이에 백성들은 더욱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언약궤가 돌아온 영광의 축제, 기쁨의 축제를 드리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Ⅱ. 다윗을 비난하며 조롱하는 미갈
다윗은 백성들을 축복하고 선물을 주어 돌려보낸 후 "자기의 가족을 축복하러 집으로 돌아갔습니다."(20절). 즉 집안 식구들과 같이, 이 국가적 축복을 맞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두 가지 영적 교훈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사역자들에 관한 이야기로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 큰 행사를 치르고 난 후에는 이를 위하여 수고한 가족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함께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휴식의 시간을 목회자들이 꼭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저는 가족이니까 다 이해하겠지 하고 슬쩍 넘어갔는데 이런 것이 자녀와 아내 그리고 부모님들을 슬프게 할 수 있는 시험거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고 교인들에게 하듯 가족들과 아내 그리고 부모님들에게도 격려와 위로의 시간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축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아버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가장 큰 도전을 받은 것이 자녀들과 아내에게 자주 허깅을 하고 기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고 축복의 기도를 해주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목사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그 집 식구들을 위로하며 축복할 특별한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손을 맞잡고 기도하며 축복하며 자주 허깅을 나누는 가정이 어찌 행복함이 없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도 남편(아내)과 자녀들에게 손을 잡고 자주 축복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듯 다윗은 아내와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집 앞에 다다랐을 그때 느닷없이 아내 미갈이 뛰어나와서
하는 말이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 지 방탕(放蕩)한 자가 염치(廉恥)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臣僕)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삼하 6:20)하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독설(毒舌)을 퍼부었습니다. 미갈은 다윗이 언약궤와 사람들 앞에서 망나니처럼 춤을 춘 것이 왕으로서의 품위를 손상시켰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같은 행동은 자신의 체면과 존귀함에도 심한 손상을 미친 것으로 여기고 남편을 흉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갈 혼자만의 생각이고 미갈의 교만한 마음 때문에 생긴 일이지 결코 다윗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 증거가 16절에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춤을 추며 길거리에 있는 것을 미갈이 보았을 때, “심중(心中)에 저를 업신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신앙심이 지나쳐서 미친 게로군."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미갈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에 남편 다윗 왕과 함께 나가서 언약궤를 맞이하며 남편의 옷차림과 행동을 주의해보며 코치해 주었더라면 이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미갈은 함께 나가지 않고 궁궐 안에서 창밖으로 그 광경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마치 감시자의 눈으로 또는 그 일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등 구경자의 모습으로 쳐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행사를 할 때 매사의 일이 목사와 사모 더 나아가 가족과 성도가 다 공감하며 뜻을 같이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진행 하다보면 의견이 엇갈리고 맘에 맞지 않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경자의 눈으로 감시자의 눈으로 그 일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부부와 성도가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함께 행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 때에는 미안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행복한 가정, 행복한 교회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갈은 처음부터 다윗의 행동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녀가 언약궤를 중시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버지 사울 왕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대상 13:3)
사무엘상 18장 5절 이하에 보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千千)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萬萬)이로다."고 이스라엘 여인들이 노래를 할 때에 사울은 분노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보다 더 인기가 있는 다윗에 대하여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다윗을 붙잡아 두기 위하여 자신의 딸 미갈과 결혼을 시킵니다. 왜냐하면 다윗을 자신 곁에 두고서 감시도 할 겸, 죽일 기회를 엿보기 위하여 사위라는 이름으로 곁에 둡니다. 그 뒤 21절에 보면 사울이 "스스로에게 이르되 내 딸을 주어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 블레셋이 그를 치게 하리라" 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참으로 악한 사울 왕의 모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미갈은 이렇듯 아버지의 사악한 피를 이어받아서 그런지 다윗의 모든 면이 좋지 않게만 보였습니다. 더욱이 자신은 왕의 딸로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라난 반면 남편 다윗은 천한 목동 출신이라고 무시하며 멸시하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처럼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무시하며 서로를 신뢰하고 존경치 못하는 냉담한 부부와 신앙인 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뜨거운 신앙 체험이 없을 때, 십자가의 사랑의 흔적이 없을 때, 그 신앙과 가정은 이성적이고 차갑습니다. 다윗과 같은 순수하고 뜨거운 신앙의 열정이 없을 때 상대방을 무시하며 감격과 기쁨이 없는 냉랭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찬바람 부는 겨울 들판과 같아서, 아무런 신앙의 열매, 감사의 열매가 열리지 않는 법입니다.
Ⅲ. 미갈을 설득하는 다윗
미갈이 이렇게 남편인 다윗 왕을 무시하며 냉대한 반면 다윗 왕은 미갈을 사랑했습니다. 사무엘하 3장 13절에서 다윗은 미갈을 데려오기까지는 어떤 약속이나 왕관도 수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이 귀한 날에 사랑하는 가족과 아내를 찾아 자신의 집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들어오는 다윗의 뜨거운 사랑의 열정을 미갈은 알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아내의 느닷없는 독설과 비난을 받으며 처음 무척 당황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내 곧 정신을 차리고 침착하게 아내 미갈을 설득하였을 것입니다. “내가 뛰놀며 춤춘 것은 여자를 유혹하거나 신복들에게 마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여호와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한 것이로다."(21절)며 강하게 어필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는가? 를 잊었는가, 내가 미천한 목동이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귀히 여겨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기름을 부으시고 능력으로 함께 하사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장인 사울 왕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되게 하시고 통일 이스라엘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 아니하셨는가? ……”
이어서 다윗은 22절에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서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신앙심의 발로가 당신 아버지의 뜰에서는 천박한 일 이였을지 모르나, 나는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그리하여 그 같은 발로는 훌륭한 일임을 알리려 하노라. 또 비록 이 일이 천하다면(22절), 나는 더욱 천해지기를 원하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숱한 역경과 고난 가운데서도 함께 하신 하나님의 도움과 보호의 손길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다윗의 신앙은 체험적 신앙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신앙은 뜨거웠고 살아있는 신앙이었습니다. 역동적인 신앙이었기에, 언약궤 앞에서 그저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어린애처럼, 언약궤 앞에서 신나게 뛰놀며 춤추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감사의 춤이요, 신앙적 기쁨의 춤이며, 감격의 춤이었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뛰논 신앙 고백의 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가 그 부모 앞에서 뛰논다는 것은 당연하며 또 으레 그래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 앞에서 다윗은 더 이상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부모의 사랑과 그 은혜에 감격한 어린아이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다윗의 순수하고 뜨거운 신앙을 귀하게 여기고, 미갈의
말과는 달리 다윗을 끝까지 붙드사 그를 높이시고 영화롭게 해주셨습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신앙모습은 어떠합니까? 구원의 감격과 은혜의 체험을 누리고 사는 뜨겁고 순수한 다윗 같은 신앙인입니까? 아니면 그저 교회 공동체의 대사(大事)를 남의 일인 양 무관심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무감각한 미갈과 같은 신앙인의 모습입니까? 기억하십시오! 미갈처럼 냉담하고 차가운 신앙 속에서는 성령의 열매가 자라지 않습니다. 가정의 화목 또한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신앙과 인격의 토대 위에서는 불평불만의 잡초와 다툼과 분쟁의 잡초만 자라날 뿐입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뜨겁고 순수한 신앙 속에서는 각종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립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날이 새롭게 역사 합니다. 감사와 기쁨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왜 감사와 기쁨의 감격이 없습니까? 왜 불평 불만과 시기와 다툼의 문제만 늘어납니까? 먼저 뜨거운 회개의 눈물과 함께 지금까지 나를 지켜주시고 보살펴주시며 인도해주신 사랑의 하나님을 표상 해보십시오. 더 나아가 부부가 하나 되어 보십시오! 그리고 자녀와 하나 되어 보십시오! 그러면 온 가족이 주님 안에서 기쁨과 감격으로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춤추며 뛰놀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삶이 기쁘고 즐거울 뿐만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삶 흥미로운 삶으로 전개되어 나타날 것입니다. 이 귀한 은혜와 축복의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의 가정과 교회 속에 충만한 능력으로 열매 맺어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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