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에서 욥의 아내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하고 욥을 떠났다고 말하면 그것은 성경을 깊이 있게 읽지 못하는 것이다. 욥과 그의 아내중 고난을 더 가슴 깊숙히 겪는 자가 누구였을까? 오늘날 가정에서 아내가 경험하는 것을 유추해 본다면 욥의 아내의 행동을 조심스럽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욥의 아내는 오늘날 진리를추구하는 신앙의 여정에서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 준다.
첫 번째 재앙 앞에서 욥의 아내는 아무 반응을 표현하지 않는다. 아직 견딜만한 재앙이었을까? 두 번째 재앙에 대한 욥의 반응은 그 형식면에서 강도가 약해지지만 무엇보다 다른 것은 아내가 욥 앞에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첫 번째 소유물과 자녀를 잃을 때는 반응하지 않던 아내가 두 번째 재앙 앞에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소유물의 상실에도 꿈쩍하지 않던 욥이 자신의 몸에 악창이 지난 후에 취하던 반응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함 (브투마테카)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 2:9).
하나님을 욕하지 않으려는 욥의 노력은 그의 순전함을 지키려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순전이라는 단어는 욥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어인데, 설화자(1:1)와 하나님(1:8; 2:3)이 언급하고 있다. 욥이 첫 번째 고난에 승리하는 것은 순전함을 지키는 것이었으며 (2:3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순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두 번째 고난에 승리한 것도 욥이 순전함을 지키려고 한 것과 관련된다고 아내가 말한다.
우리는 욥의 아내의 반응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라고 했는데 원래 원어는 축복하다는 단어를 역설적으로 사용하여 저주한다는 단어를 가지고 축복한다는 단어로 사용하였다. 칠십인역에서는 욥의 아내의 말을 연장하여 말하고 있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욥의 아내는 말하였다. 구원의 소망을 바라는 당신은 조금 더 기다리라고 하는데 정녕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보십시오. 내가 수고하여 낳은 아이들은 이 땅에서 기억도 없이 사라졌어요. 당신은 바깥에서 밤을 지새며 악창으로 고생하고, 나는 이곳 저곳, 집집마다 일거리를 찾아 돌아다닙니다. 하루 종일 일하면서도 언제나 해가 떨어져서 이러한 수고로부터 벗어나 쉬려나 기다립니다. 당신도 하나님께 무슨 말이나 한번 하고 죽으십시오.” (칠십인역)
우리는 칠십인역의 문맥에서 욥의 아내를 이해하려고 시도해 보아야 한다. 과연 아내의 말은 불신자의 말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버린 자의 말인가? 칠십인역을 읽으면 아내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욥의 시대는 전형적인 신명기 신학이 주류인 시대였다. 의인이 복을 받고 악인이 벌을 받는 인과응보를 믿고 의인이 되기 위하여 살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갑작스럽게 닥친 재앙은 이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오랫동안 이 법칙대로 백성을 통치하던 하나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하나님은 죽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더 이상 능력이 없는 것일까? 이 충격스러운 사건을 직면하여 결론을 내자면 법칙을 어긴 하나님을 저주하던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욥 자신도 이 당황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지 몰라서 당황하였다. 아마도 욥은 무의식가운데 아내처럼 말하고 죽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여자들은 남편들보다 직관적이다. 사건을 접하면 남자들은 논리를 찾지만 여자들은 결론을 직관적으로 찾는다. 사건의 실마리를 찾지도 못하는 남자들보다 여자들은 더 현명하게 직관적으로 결론을 찾는다. 욥에게 닥친 고난은 지금까지 그들이 따르던 원칙에 따르면 하나님의 신정론에 대한 충격이다. 욥의 아내는 순수하게 그에게 닥친 경험에 입각하여 결론을 내린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를 저주하고 죽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설적인 결론일뿐 아내의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자들은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말하고 있다. 아내의 말은 정말 욥이 여호와를 저주하고 죽을 수 밖에 없다고 판단 내려야 하는 막다른 골목에 선 욥의 아내의 고백이다.
욥기 19:17에 가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내 아내도 내 숨결을 싫어하며 내 허리의 자식들도 나를 가련하게 여기는구나." (욥 19:17).
이 본문은 빌닷에 대한 욥의 대답인데, 욥이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 구체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만약 욥의 아내가 욥을 떠났다면 이 본문에서 사랑하는 아내도 욥을 떠났다고 표현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욥은 아내가 떠났다고 가슴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숨결을 싫어해서 가슴 아프다는 것은 곧 아내가 잠자리에 곁에 있었다는 표시였다. 아내는 욥을 떠나지 않고 곁에 있었다. 아내의 말은 사실을 말하지 않고, 감정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어째서 자신들에게 그러한 재앙을 내리실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 그러한 탄식을 자아낸 것이다.
욥은 아내의 탄식을 듣는 순간부터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자신의 경험에 정직해 질 때 아내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험은 급진적으로 자신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욥은 그것이 결론이 아님을 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대면했을 때 우리의 반응이다. 숨겨진 하나님을 만났을 때 우리의 당황함의 표현이다. 아내의 말은 곧 이 사건에 직면한 욥의 무의식 속에 남은 욥이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욥은 1차 재앙과 2차 재앙을 맞이하면서 숨겨진 하나님 앞에 갈등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가 신앙적인 갈등을 시작하면서도 아내의 경험이야말로 자신의 한계이며 경험이 요구하는 그 결론을 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경험은 욥의 고난을 해석하는 중요한 틀이지만 전통과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욥은 깨닫게 된다.
욥의 아내는 불신앙의 여인이 아니라 욥으로 하여금 고난에 대하여 성급하게 결론내리면 그 끝은 저주하고 죽는 것임을 무의식에 각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의 경험에 정직하면서도 경험을 뛰어넘는 해답을 찾기에 몸부림치도록 욥을 돕는 뛰어난 도구가 되는 것이다.
첫 번째 재앙 앞에서 욥의 아내는 아무 반응을 표현하지 않는다. 아직 견딜만한 재앙이었을까? 두 번째 재앙에 대한 욥의 반응은 그 형식면에서 강도가 약해지지만 무엇보다 다른 것은 아내가 욥 앞에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첫 번째 소유물과 자녀를 잃을 때는 반응하지 않던 아내가 두 번째 재앙 앞에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소유물의 상실에도 꿈쩍하지 않던 욥이 자신의 몸에 악창이 지난 후에 취하던 반응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함 (브투마테카)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 2:9).
하나님을 욕하지 않으려는 욥의 노력은 그의 순전함을 지키려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순전이라는 단어는 욥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어인데, 설화자(1:1)와 하나님(1:8; 2:3)이 언급하고 있다. 욥이 첫 번째 고난에 승리하는 것은 순전함을 지키는 것이었으며 (2:3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순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두 번째 고난에 승리한 것도 욥이 순전함을 지키려고 한 것과 관련된다고 아내가 말한다.
우리는 욥의 아내의 반응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라고 했는데 원래 원어는 축복하다는 단어를 역설적으로 사용하여 저주한다는 단어를 가지고 축복한다는 단어로 사용하였다. 칠십인역에서는 욥의 아내의 말을 연장하여 말하고 있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욥의 아내는 말하였다. 구원의 소망을 바라는 당신은 조금 더 기다리라고 하는데 정녕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보십시오. 내가 수고하여 낳은 아이들은 이 땅에서 기억도 없이 사라졌어요. 당신은 바깥에서 밤을 지새며 악창으로 고생하고, 나는 이곳 저곳, 집집마다 일거리를 찾아 돌아다닙니다. 하루 종일 일하면서도 언제나 해가 떨어져서 이러한 수고로부터 벗어나 쉬려나 기다립니다. 당신도 하나님께 무슨 말이나 한번 하고 죽으십시오.” (칠십인역)
우리는 칠십인역의 문맥에서 욥의 아내를 이해하려고 시도해 보아야 한다. 과연 아내의 말은 불신자의 말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버린 자의 말인가? 칠십인역을 읽으면 아내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욥의 시대는 전형적인 신명기 신학이 주류인 시대였다. 의인이 복을 받고 악인이 벌을 받는 인과응보를 믿고 의인이 되기 위하여 살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갑작스럽게 닥친 재앙은 이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오랫동안 이 법칙대로 백성을 통치하던 하나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하나님은 죽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더 이상 능력이 없는 것일까? 이 충격스러운 사건을 직면하여 결론을 내자면 법칙을 어긴 하나님을 저주하던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욥 자신도 이 당황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지 몰라서 당황하였다. 아마도 욥은 무의식가운데 아내처럼 말하고 죽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여자들은 남편들보다 직관적이다. 사건을 접하면 남자들은 논리를 찾지만 여자들은 결론을 직관적으로 찾는다. 사건의 실마리를 찾지도 못하는 남자들보다 여자들은 더 현명하게 직관적으로 결론을 찾는다. 욥에게 닥친 고난은 지금까지 그들이 따르던 원칙에 따르면 하나님의 신정론에 대한 충격이다. 욥의 아내는 순수하게 그에게 닥친 경험에 입각하여 결론을 내린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를 저주하고 죽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설적인 결론일뿐 아내의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자들은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말하고 있다. 아내의 말은 정말 욥이 여호와를 저주하고 죽을 수 밖에 없다고 판단 내려야 하는 막다른 골목에 선 욥의 아내의 고백이다.
욥기 19:17에 가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내 아내도 내 숨결을 싫어하며 내 허리의 자식들도 나를 가련하게 여기는구나." (욥 19:17).
이 본문은 빌닷에 대한 욥의 대답인데, 욥이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 구체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만약 욥의 아내가 욥을 떠났다면 이 본문에서 사랑하는 아내도 욥을 떠났다고 표현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욥은 아내가 떠났다고 가슴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숨결을 싫어해서 가슴 아프다는 것은 곧 아내가 잠자리에 곁에 있었다는 표시였다. 아내는 욥을 떠나지 않고 곁에 있었다. 아내의 말은 사실을 말하지 않고, 감정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어째서 자신들에게 그러한 재앙을 내리실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 그러한 탄식을 자아낸 것이다.
욥은 아내의 탄식을 듣는 순간부터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자신의 경험에 정직해 질 때 아내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험은 급진적으로 자신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욥은 그것이 결론이 아님을 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대면했을 때 우리의 반응이다. 숨겨진 하나님을 만났을 때 우리의 당황함의 표현이다. 아내의 말은 곧 이 사건에 직면한 욥의 무의식 속에 남은 욥이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욥은 1차 재앙과 2차 재앙을 맞이하면서 숨겨진 하나님 앞에 갈등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가 신앙적인 갈등을 시작하면서도 아내의 경험이야말로 자신의 한계이며 경험이 요구하는 그 결론을 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경험은 욥의 고난을 해석하는 중요한 틀이지만 전통과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욥은 깨닫게 된다.
욥의 아내는 불신앙의 여인이 아니라 욥으로 하여금 고난에 대하여 성급하게 결론내리면 그 끝은 저주하고 죽는 것임을 무의식에 각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의 경험에 정직하면서도 경험을 뛰어넘는 해답을 찾기에 몸부림치도록 욥을 돕는 뛰어난 도구가 되는 것이다.
출처 : 오네시모사람들
글쓴이 : 설레임 원글보기
메모 : 욥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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